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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19
ㅡ 잊혀진 왕국들 4ㅡ
(삼한의 성립과 발전)
삼한(마한 변한 진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3세기 후반 진나라 진수의 '삼국지위지동이전'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에는 삼한과 함께 북으로는 고구려가 서북지역에는 낙랑군 대방군 등 중국의 군현이 있었고 동북지역에는 동예와 옥저가 있었다고 한다.
'진수 삼국지'에는 조조 유비 손권등 위촉오 세나라의 치열한 경합이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가 사마염 '진'에의해 통일되고 나서 수 십년도 안 되어 당시사람 '진수'가 쓴 역사서이기에 거의 역사적 사실과 부합된다. 그런 사서에 위나라 역사를 쓰면서 위나라 동쪽에 있는 오랑캐 (동이) 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했다. 우리 역사서에선 찾아볼 수 없는 '삼한'에 관한 이야기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는 마한 54개국, 진한 12국, 변한 12국 모두 합하여 78개의 국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한반도 고대국가 삼한은 마한, 변한, 진한을 말한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 3세기경까지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정치경제집단 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삼한을 '고대국가'가 아닌 부족연맹체 들이 모여있는 '부족국가'로 불러 왔다.
이는 신석기문화 단계 사회집단을 말하는 부족과 발달된 사회단계 조직적인 정치체제를 말하는 국가라는 용어가 서로 맞지 않는다는 의견과 지적들이 있어서 최근에는 삼한의 각 국들이 다수의 읍락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근거로 '읍락국가'로 말하는 견해도 있다.
또한 토성이나 목책으로 둘러싸인 도시국가와 같은 개념을 염두에 두고서 '성읍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전라도 지방에서는 이 지역에서 발흥한 '마한'을 고대국가로서 자격을 모두 충분히 갖추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정통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걸 부정하기에 급급하다.
어떤 분이 내 글에 아래와 같은 댓글로 이런 상황에 분통을 터트렸다.
<작금에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임나일본부설등과 같이 이웃나라들은 주변국의 역사까지 포괄하여 자신의 역사를 확장하려 애쓰는데 왜 우리는 오히려 우리역사를 축소하려는 편협한 역사관에 빠져 있는지 안타깝다. 물론 역사왜곡은 불가하지만, 엄연한 역사를 부정하는것 또한 이해불가이며 몰지각한 행위이다.>
물론 정통역사학자들 입장에서는 충분한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도 '고대국가'라기 보다는 부족연맹체 수준으로 기록하긴 했다.
이는 중국의 시각에서 보는 견해일 뿐이다. 최근에 들어 '마한'은 삼한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고대국가였다는 자료나 유물이 발견되어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중국 역사사료에도 그 근거가 있다.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았고,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ㅡ 《후한서》 〈동이전〉ㅡ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변한·진한 24국) 가운데 12국은 진왕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임금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임금이 되지는 못하였다.]
ㅡ《삼국지》 권30 〈위서〉ㅡ
여기에서 나오는 '진'국에 대해서는 논란이 아주 많다.
이 논란중 《후한서》를 근거로 하여 진국을 한반도 남부 지역의 토착 정치집단군 전체에 대한 명칭으로서 ‘신지(臣智)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집합 명사로 이해하기도 하며 이와 달리 《삼국지》의 자료를 취하면서 진국을 중남부 일부 지역에 성립되어 있었던 특정 집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즉, '진국'이란 요동(遼東)의 세력이 점점 남하하여 지금의 경상도(진한)에 최종 정착지를 얻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한반도 중부 지역에 세운 정치집단이라는 것이다.
또, 위만(衛滿)에게 쫓겨나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일대에 자리잡은 고조선 준왕(準王)의 치소가 진국이며, 이 준왕계의 진국이 경상도 지역으로 이동해 진한의 일부를 구성했다는 해석들이 있다.
하지만 자세한 기록들이 거의 없어 관련한 통일된 학설도 없으므로, 교과서에서는 고조선과의 중계무역만 다루고 그 외는 다루지 않는다.
내 글 또한 너무 깊게 들어가면 논문이 되어버리니 이 쯤에서 전문적인 이야기는 끝내고 결론을 말하자면 '마한'은 고대국가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삼한의 형성과정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지만, 삼한 모두 청동기문화 단계 이후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에 성립되어 있었던 토착집단의 점진적 발전의 결과로 삼한이 형성되었다는 의견이 다수이다.
그러나 삼한을 구성하는 각 소국이 성립되는 시기와 지역별로 소국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마한, 진한, 변한>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가 없다.
삼국지 동이전과 후한서 기록에 의하면 진한 또는 삼한 모두가 (진)국으로부터 발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진이 '진한'이 아니라는 것은 위에 예시를 든 사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삼한이 모두 '韓'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이 '韓'은 오늘 날 대한민국(大韓民國)이 되어 우리 한민족 (韓民族)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韓(한)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와 유래에 대해서는 韓(한)씨 성을 가진 고조선 준왕의 한반도 남부로의 이주와 연결시키거나, 간(馯)이라는 종족명에 따라 후한대부터 한이라는 정치집단명이 사용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한'은 크다 높다의 뜻을 가진 알타이어의 '한'(khan, han)이라는 말에 대한 한자식 표기로서, 고조선 지배 씨족의 이름이 되고 이것이 다시 국명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문헌자료에 나오는 진국과 한왕의 존재를 근거로 위씨조선의 멸망을 '한' 형성의 시발점으로 잡는 의견도 있다.
[여기까지 쓰고 다시 한 편으로 쓰려했으나 아래 이야기는 우리 국사교과서에도 많이 나오는 내용으로 모든 한국사 시험에 가장 많이 나오는 부분이다. 그만큼 재미도 없고 골치만 아프다. 그래서 많이 길어지지만 이 삼한시대를 빨리 끝내고 싶어 이번 편에 이어서 연결해 정리한다. 길지만 한 번쯤 읽어 볼 만은 하다. 특히 한국사 시험에 관심있는 분들은 읽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 번 보고 외워둬야 할 것이다.^^ ]
삼한의 경제적인 교역관계를 토대로 삼한 분립 실마리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은 서기전부터이다. 이것이 확대 발전하여 지역별 소국연맹체로서의 마한과 진한이 성립되는 것은 철기가 일반화되는 서기 1세기 이후의 단계이다
삼한 소국은 큰 것은 1만여 가(家)로부터 작은 것은 6백~7백(家)에 불과한 것까지 규모가 다양했고, 평균 2천~3천 가(家) 정도의 인구를 가지는 정치집단이었다.
삼한의 소국들은 중심 읍락인 국읍과 다수의 일반 읍락으로 구성되었다. 국읍은 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하고 정치 경제적으로 주도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대읍락이었다. 삼한 사회 읍락은 단일한 농경촌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지에 연결되는 다수의 취락운으로서 1천 호 미만 인구를 가지고 동일한 시조를 내세우는 의제적 혈연집단으로서 독립된 지배지에 의해 통치되는 개별 정치집단이었다.
국읍 또는 읍락은 서기전 3세기 이래로 초기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나타난 정치집단들이 성장 발전해 온 것이다
초기 읍락 지배자는 세형동검, 세문경, 동모, 동과, 청동방울과 같은 청동제 무기와 의식용구를 껴묻기 하는 '돌덧널무덤', '널무덤'의 주인공들이었다.
읍락의 중심 취락은 하천을 끼거나 구릉지대에 위치함으로써 인근 지역의 조망과 방어에 편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토루, 목책, 환호와 같은 방어시설을 갖춘 경우가 많았다.
민무늬토기와 김해토기를 출토하는 환호취락과 경상도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 유적들은 모두 삼한 사회의 대표적인 취락 유적지이다.
이들은 대개 하천을 끼고 있거나 고도 20~100m 높이의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예로서 경주 월성, 대구 달성, 김해 봉황대유적 및 부원동유적, 서울 풍납동토성, 김해패총, 양산패총, 웅천패총, 고성패총, 마산성산패총 등이 있다.
이러한 유적의 원초적인 형태는 일반 취락지였으나 인구증가와 무력 대립 등으로 비상시에 읍락 주민이 대피하는 피난소로 이용되었으며, 공동 집회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정치경제 중심지로 발전되는 읍락의 경우 토성은 지배자의 전용 거주지 로 외형적인 형태와 규모에도 변화가 있었다.
삼한 소국들은 다수 읍락을 포괄 하는 지연집단으로서 국읍에는 소국의 규모에 따라 신지, 험측, 번외, 사해, 읍차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통솔자를 세우고, 대내외적으로 단일한 정치집단으로 기능하였다.
국읍의 주수는 읍락 간의 교역과 소국 간의 교역활동을 주관하는 경제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구읍은 물자교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소국은 여러 가지 형태의 경제활동이 전개되는 독자적인 경제단위로 기능을 하였다.
국읍의 주수는 읍락 거수가 개별적으로 행사하고 있던 군사력을 전체적으로 통솔하는 군사 책임자였다. 유사시에 장악된 군대통솔권이 일상적인 것으로 확보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지배권력의 발전과정이 전제되어야겠지만 대외적으로 각 소국은 국읍을 주축으로 획일적인 군사활동을 전개하는 개별정치집단으로 기능했다.
국읍 세력이 행사하고 있었던 다른 하나의 기능은 제천의식 주관이다. 국읍에는 '천군'이라는 제사장을 세워 매년 5월과 10월 곡식의 파종과 추수가 끝날 때마다 의식을 행하였다. 이는 청동기시대 이래 토착사회에서 전래되어 오던 원시농경 의례로서 천군은 전통적인 지배권의 일부를 계승하는 토착적인 성격이 강한 지배자였다.
'삼국지동이전'에 각 소국에는 별읍이 있어 이를 '소도'라고 하고 그곳에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고 귀신을 섬겼다는 기록이 있다.
'소도'에 대해서는 동네 어귀에 있는 경계표지 또는 신성지역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철기문화가 성립시키고 있는 새로운 사회질서와 대비되는 재래적인 신앙활동의 중심지로 파악되기도 한다. 또한 제사장인 천군이 농경의례와 축제 등을 거행하던 장소로서, 민무늬토기시대 이래 생활 근거지였던 양산이나 구릉지대에 위치했다는 해석도 있다. 소도는 국읍의 정치기능과 관련해 삼한사회의 문화성격을 반영하는 중요자료이다.
소도로 도망하여 들어간 죄인도 잡아내지 못할 만큼 법률의 힘도 미치지 못하였던 곳인데, 이것 역시 고대 사회의 공통된 풍습이었다
(이 부분은 국사시험에 가상 많이 출제되었음)
그리고 천군은 종교적으로 보면 단군의 원류를 받은 것으로 뒷날 향무(골무당 또는 단골무당)의 근원이기도 하다.
삼한은 토지가 비옥해 벼농사를 짓고 오국을 재배하는 토착농경사회였으며, 양잠을 하여 견포를 만들었다.
벼농사가 일찍부터 행하여졌고, 수리 시설인 저수지도 많이 만들어졌다. <김제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제천의 의림지> 등은 이때의 저수지이다(이 부분도 국사시험 단골 소재)
목축도 행하여졌는데 해안 지대에는 어업을 행하였고,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산출되어 널리 쓰였다고 한다. 물품 매매에 철이 돈처럼 교환의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낙랑과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도 국사시험 단골소재)
가옥은 수혈주거로부터 지상가옥으로 발전하는 과도 단계였으며, 일반적인 가옥형태는 서까래가 있고 지붕 위에 풀이나 가대 볏짚을 이은 초가집의 원초형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의복은 삼베, 모시, 명주 등으로 만들어 입었고, 남자는 베로 만든 도포처럼 된 웃옷을 입고 상투를 틀었으며, 가죽신 또는 짚신을 신었다고 한다
이 시기 지게가 사용되었고, 옥구슬을 옷에 달기도 하였으며, 귀걸이와 목걸이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유물은 지금도 당시의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장례에는 관은 있으나 곽이 없다고 하여 '토광목관묘'가 주된 묘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고학 발굴자료에 의하여 토광목관묘에서 매장 주체부가 확대되면서 목관 바깥에 목곽을 설치한 토광목곽묘로 발전해 갔으며, 봉분 주위에 ㄷ자형, 원형, 반원형 등의 물도랑을 판 '주구토광묘'가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소와 말을 순장하는 풍속이 있었고, 변진에서는 큰 새의 깃털을 장례에 사용하고 죽은 자가 승천하는 것으로 믿었다고 합니다 변진 지역에서는 편두와 문신의 풍속이 있어 남방문화의 영향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삼한은 풍속이 순후하여 변한 진한에서는 길 가던 사람들은 서로 길을 사양하였다고 한다. 혼인과 예절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었으며, 법과 형벌은 일반적으로 엄하였다.
삼한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술 마시기를 즐겼다. 특히 변한 진한에는 비파와 같은 현악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가야금의 기원이 된다고 보고 있다.
좀 더 정리해 보자면,
<마한>
삼한 전체의 왕인 목지국의 진왕은 마한의 부족 사회에서 추대되어 마한인이 대대로 이를 인정 계승하였다. 마한은 54개의 고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 모두를 각각의 나라로 불렀으며, 얼마전 까지는 정치적으로 통일된 집단은 아니었다고 보았으나 최근에는 고대국가로서 정치적으로 통일된 국가로 보고 있고 한참 연구가 진행중이다.
54개 중 백제국이 점차 세력을 확대해 4세기 중엽에는 백제 왕국의 영역이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은 기원 후 8년에 온조왕이 다스리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기원 후 9년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1년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현토성과 요동 공격에 마한의 군사를 동원한 기록이 있다. 이는 온조왕 때에 백제가 마한의 부족국가 연맹체를 해체 흡수한 것이 아니라 목지국을 대체할 연맹체내의 중심국가로 부상하였고, 한반도 북쪽에도 마한의 세력이 미쳤음을 추정하게 한다.
삼국유사에는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마한을 세웠고, 후에 고구려 동명성왕이 마한을 병합한 것으로 추정한다.
<진한>
진한은 마한 변한과 함께 남한에 위치한 고대 한민족 부족국가 연맹체였습니다 위치는 현재 경상북도와 울산광역시에 해당한다
12개의 소국을 거느린 진한은 삼한 전체의 왕인 마한의 지배하에 놓인 종속적 관계이기도 하였다. 삼한 전체의 왕인 진왕은 마한의 부족 사회에서 추대되었고, 마한인이 대대로 이를 인정 계승하였다.
진한에서는 대부족 세력은 4~5천 호 소부족 세력은 6~7백 호를 거느렸다. 여러 부족 중에서 지금의 경주 지방에 있던 '사로' 부족이 가장 유력하여 큰 세력을 형성해 갔다. 이 '사로국'이 '신라' 전신이 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마한이 진나라 또는 연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에게 마한의 동쪽 땅을 떼어주었다고 합니다 이는 고조선 영토의 일부가 연나라나 진나라에 복속되었다는 것과 삼한이 고조선의 유민이라는 주장과 부합합니다
진한은 훗날 사로국에서 발전한 신라에 의해 통합된다.
<변한>
변한은 고대 삼한 중의 하나인 부족국가 연맹체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지역과 종족명으로 마한의 동쪽, 진한의 남쪽에 위치하여 12개의 작은 부족 국가로 형성되어 있었다]
인구는 진한 12국과 합쳐서 4~5만 호였으며, 지금의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동부 일수(여수, 순천, 광양)와 경상북도 남부 일부(고령, 성주)에 이르는 범위에 위치했다.
삼국유사에서는 변한을 백제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명칭은 백제 땅에 변산(전라북도 부안)이었던 것으로부터 유래하였다고 한다.
언어, 주택, 풍속, 의복은 진한과 비슷하였으나 제사는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었으며, 농업과 양잠을 주요 산업으로 하였고, 뒤에 가야국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한반도 고대 삼한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많은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다수의 의견을 토대로 알아보았다.
아직 고고학적인 발굴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곳도 있어서 더욱 세부적인 내용들은 앞으로도 점점 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질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 편 부터는 본격적으로 삼국시대 편으로 들어 가겠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