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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교회 「europe vision trip」 - “God send me!” 8.
8.국내비전트립 첫날 서울 속의 보물을 찾아 - 모의고사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친구들과 함께 국내 비전트립을 준비했다. 일년 뒤 떠날 유럽비전트립을 위한 모의고사라고 봐도 될 것이다. 친구들 합숙 정도도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예진이 겸이 웅래 인성이 원섭이 호세가 모였다. 많은 친구들이 함께 하면 좋지만 중학교를 졸업하는 친구들과 비전트립을 가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박명수 권사님이 따라 나서셨다. 운전은 맡아서 하실 테니 오로지 친구들에게만 집중하라고 하신다. 덕분에 나는 친구들과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출발 전에 우리는 국내 비전트립에 가서 만나게 될 인물들에 대해서 미리 공부하기로 했다. 상동 교회 전덕기 목사님, 정동교회 손정도 목사님, 현순 목사님, 스크랜턴 선교사와 스크랜턴 대부인 제임스 홀, 로제타 홀, 그리고 샤우드 홀 가족 이야기, 백정을 치료해준 사무엘 선교사와 에비슨 선교사 이야기, 스코필드 선교사 이야기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름 인터넷을 뒤져 자신들이 맡은 인물을 정리해 왔다.
서울 양화진과 정동제일교회 그리고 배제학당 박물관, 광화문과 북악 스카이웨이를 방문하는 코스를 잡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이런 곳들을 방문한다면 무엇이 남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친구들이 알아본 맛집, 친구들이 가보고 싶다는 떡볶이 집에 갔다. 백종원이 추천한다는 그곳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특이한 점은 한국 젊은이들과 함께 온 외국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유롭게 이야기하면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떡볶이를 먹으면서도 이야기 꽃이었다. 떡볶이가 매운지 연신 콜라를 마시면서도 즐거워보였다. 수많은 독일인들 사이에서 학센을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떡볶이는 그렇게 맛있지 않았다. 설탕 전도사 백종원이 추천한 가게답게 엄청 단 것을 빼고 말이다.
양화진에 왔다. 양화진은 그야말로 성지다. 이곳은 한 때 연고가 없던 이들 특히 아이의 시신을 갖다 버리던 곳이었다. 1890년 7월 조선에 선교를 온 헤론 선교사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선교사들과 관리들은 신경전이 벌어졌다. 선교사들은 선교부 안에 무덤을 쓰려했다. 서양식 장례 풍습은 자신이 집례하던 교회 묘지에 안장을 했으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한양은 임금님이 계신 곳으로 사대문 안에서는 묘를 쓸 수 없었다. 이토록 신경전을 벌이던 와중에 타협점을 찾은 것이 한강 나루터 아이들 시체를 버리던 이곳 양화진을 정부가 제공하고 선교부에서 묘를 쓰는 것이었다. 그 뒤로 이곳은 선교사들의 무덤이 되었다.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부끄러워진다. 그들 대부분 갓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20대 젊음을 안고 영혼 구원의 열정을 안고 조선 땅에 와서 불꽃처럼 살다 간 이들이다. 때로는 2년도 되지 않는 삶을 살다가 간 선교사들도 있다. 카나다 출신 루비 케서린 같은 여자 선교사는 조선 땅에 온지 1년 6개월 만에 풍토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집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엄마 말씀을 들을 걸 그랬어요. 이곳은 너무 힘들고 또 어려운 곳이에요. 지금쯤 우리 집 뒤에 꽃들이 한참이겠죠. 또 온 마을이 우리 꽃씨로 꽃이 만발했겠죠? 어머니 나도 이곳 조선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수천 수만으로 다시 피겠어요. 내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이곳 조선을 위해 희생하겠어요.”
어쩌면 한국 교회가 그리고 한국사회가 이만큼 온 것은 그들의 피땀 그리고 눈물이 흘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언더우드는 마지막 유언에서
“나는 웨스트민스턴 사원에 묻히기보다 이곳 조선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
이렇게 밝혔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일찍 남편을 여윈다. 아들 스크랜턴은 뉴욕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다. 그는 클래브랜드에 개원을 한다. 그 당시 의사는 대저택과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 미국 사회 상위 3%에 해당하는 부유층이다. 그러나 스크랜턴 대부인은 몇 달간 아들 내외를 설득하여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당시 미전도국이었던 조선 땅으로 선교를 떠난다. 아펜젤러는 조선으로 선교를 떠나라는 음성을 듣고 아프리카에서 조선을 찾을 정도로 조선은 미개한 곳이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알렌이 운영하던 광혜원에서 의료선교를 시작한다. 그러나 클리브랜드를 포기하고 조선으로 온 그는 안정된 정동 생활에 회의가 든다. 그 당시 정동은 궁궐을 비롯한 양반들 그리고 각국의 영사관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원을 남대문 그리고 동대문, 애오개 한자로 아현(兒峴)이라는 곳으로 옮긴다. 애오개는 죽은 아이들을 버리던 애기 무덤에서 따온 것이다. 그가 남대문 안으로 아현으로 동대문으로 시약소와 병원을 옮긴 이유는 분명하다. 예수께서 병든 자들에게 의원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에게 세례를 받고 그에 의해서 목회자가 된 전덕기 목사는 훗날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라돈(스크랜턴의 한국식 이름) 목사님을 닮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은 기와집을 얻어서 여학교를 시작했다. 그녀는 아들 내외를 후견하기 위해서 조선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 또한 자신의 선교를 감당하기 위해서 조선에 온 것이다. 버려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시작했다. 나중에 고종황제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이(李)자는 이씨 조선을 상징한다. 그래서 성스럽게 사용되던 글자이다. 이 글자를 현판으로 내려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스크랜턴 대부인이 운영하던 이화학당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담긴 것이다. 하루는 저녁 나절 산책길에 쓰러저 있는 어미와 어린 여아를 발견한다. 급하게 아들에게 연락하여 어미는 병원으로 딸은 이화로 대리고 갔다. 아들은 어미를 살려 냈고 여자 아이는 이화학당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올 여름 우리 사회를 뜨겁게 했던 그 이화여대는 사실상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로제타 홀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조선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애인인 제임스 홀에게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오라고 했다. 제임스 홀 또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들은 조선에서 결혼한 최초의 서양인이다. 그들이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길 무렵 평양에 가서 선교할 사람이 필요했다. 이들 부부는 감리교 대표로 지원을 했고 김창식(훗날 조선 최초의 목사가 된다. 평양 선교 과정에서 엄청난 매와 투옥 속에서 살아남아 조선의 바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을 동행으로 평양에 간다. 평양은 굉장히 보수적인 곳이다. 서양인이 발을 부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런 평양인들을 위한 아이디어가 바로 서양 아이 구경시켜주기이다. 당시 두 부부에게는 샤우드 홀,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금발 곱슬머리에 하얀 피부, 파란 눈, 이처럼 귀여운 서양 아이를 본 적이 없는 평양인들은 로제타가 샤우드를 앉고 마루에 앉아 있는 시간이 되면 줄을 서서 구경을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은 그들 집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다. 이를 시기하던 평양 관리들과 양반들은 여아납치사건이라는 소동을 피웠다. 있지도 않던 여아납치 사건 주범을 선교사들로 몬 것이다. 평양 주민들은 선교사택으로 몰려와 행패를 부렸으며 함께 동행했던 김창식을 감옥에 가두었다. 김창식은 훗날 너무 많은 매를 맞아 의식을 잃었다. 죽은 줄 알고 포졸들이 가마니를 덮어 버린 것을 제임스 홀이 엎어다 치료하여 다시 살려 냈다. 그래서 그를 조선의 바울이라고 부른다. 이 무렵 청일전쟁이 평양 인근에서 일어났다.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제임스 홀 부부는 자신들 몸을 돌보지 않고 환자들을 치료했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에 제임스 홀은 쓰러졌다. 그리고 일어나지 못했다. 자신들을 위해 그토록 노력하던 제임스 홀의 모습이 평양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다. 또한 난리 통해 십자기를 높이 단 선교사택만은 무사했다. 청군도 일본군도 외교전이 두려워 그곳만은 피한 것이다. 자연히 안전지대가 된 이곳에서 많은 평양 주님들이 생명과 재산을 구할 수 있었다. 평양의 기류가 많이 바뀌었다. 선교사들에 대한 적대감도 많이 사라졌다. 이 때 제임스 홀이 죽은 것이다. 풍토병과 과로가 원인이었다.
다들 로제타 홀이 다시는 평양에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3년 뒤에 돌아올 것을 약속했고 정확히 3년 만에 돌아왔다. 그녀가 3년 동안 미국에 간 이유는 평양에 처음 왔을 때 앞을 보지 못하던 최초의 신앙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여자 아이를 위해서 점자를 공부하고 만들기 위해서며 평양에 병원을 만들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남편의 선교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팔았다. 그리고 그 수익금과 후원금을 가지고 다시 평양에 돌아왔다. 평양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양의 젊은 아낙이 자기 남편이 죽은 곳에 다시 돌아와 병원을 열었으니 말이다. 그 병원 이름을 홀을 기념하는 기홀병원이라고 지었다. 지금의 김일성대학병원의 효시다. 이렇게 보면 평양이 나중에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며 100만인 구령운동, 길선주 목사님이나 주기철 목사님이 계시던 밭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아들 샤우드 홀도 미국으로 보낸다. 이유는 의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아들 또한 의사가 되어서 다시 조선에 들어온다. 그는 당시 조선이 가장 많이 앓고 있던 결핵을 고치기 위해서 X-ray라는 기계를 가지고 들어 왔다. 그가 결핵퇴치 운동을 위해 만든 것이 그 유명한 크리스마스실이다.
백정들이 모여 살던 마을 한 아이가 선교사를 찾아 왔다. 자기 아버지를 살려달라는 것이다. 사무엘 선교사는 당시 고종 황제 어의였던 에비슨 선교사를 불렀다. 임금님 옥체를 살피던 어의가 백정 마을에 나타난 것이다. 당시로써는 까무러칠 일이다. 에비슨 진료로 다시 건강해진 박선출은 어떻게든 은혜를 갚고 싶었다. 그래서 사무엘 선교사가 시무하던 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나 양반들만 다니던 그 교회에서 백정의 출현은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양반들은 자신들과 목회할 것인지 백정과 목회할 것인지 사무엘을 압박했다. 그러나 99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귀하게 여기시던 예수 가르침을 사무엘은 버릴 수가 없었다. 양반들은 모두 교회를 따로 개척을 했다. 박선출은 몸둘바를 몰랐다. 그래서 스스로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빈 자리를 자신과 같은 백정, 기생, 숯쟁이, 점쟁이 등으로 채웠다. 하루아침에 상민들 교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 선교사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양반들은 다시 회개를 하고 두 교회는 합쳐졌다. 그 교회가 바로 종로에 있는 숭동장로교회이다. 이 교회 최초 장로 선출, 백정출신 박선출이 양반들을 꺾고 장로가 된다. 교회에서만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사무엘 선교사는 선물로 갓을 보낸다. 언감생신 백정이 어떻게 그 갓을 쓴단 말인가? 이미 단발령도 내려지고 신분제도 또한 철패된 마당이지만 그래도 아직 봉건풍습이 사라지지 않은 시대다. 그러나 박선출은 당당하게 그 갓을 쓴다. 얼마나 기뻤을까? 평생을 백정으로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 이런 시간을 꿈만 같지 않겠는가? 만민공동회의라는 것을 독립협회 주관으로 진행하였다. 주로 현 시국에 대한 성토대회였다. 이 때 갓을 쓰고 박선출이 올라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이 기립박수를 칠만한 연설을 한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삼복 더위에 모여서 시국성토를 할 수 있는 것은 저 천막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천막은 가운데와 각각 끝에 기둥들이 중심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조선 시국도 다르지 않습니다. 임금은 임금의 자리에서 신하는 신하의 자리에서 백성은 백성의 자리에서 중심을 잡아야 이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관파천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날 박선출은 굉장한 박수를 받았다고 나온다. 백정 출신으로써 이런 연설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사람으로, 한 형제로 믿어주고 바라봐준 사무엘 선교사와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더 놀라운 것은 죽을 병에 걸린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던 그 아들은 훗날, 연희전문학교을 졸업하고 조선인 최초 의사가 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교회와 신앙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훌륭한 선교사 옆에는 항상 믿음의 동역자가 있었다. 모세 옆의 아론처럼 그리고 여호수아처럼 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스크랜턴 옆에는 그가 거둔 믿음의 아들 전덕기 목사가 있었다. 당시 상동교회 담임이었던 전덕기 목사는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지 해방 된 이후 백범 김구 장로님도 이승만 장로님도 서울에 돌아온 뒤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전덕기 목사님의 묘소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과 호형호제하면서 신민회와 신간회 활동을 주도하였고 이준 열사의 헤이그 특사도 전덕기 목사와 상동교회 작품이다. 당시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에서 흑인들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으며 짐승처럼 일하던 조선 동포들의 실상을 알린 것도 상동이었으며 그 당시 대부분의 민족운동, 독립운동은 상동을 통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은 항상 전덕기 목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비단 민족 운동에만 가담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항상 목사로써 세가지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고 했다. 첫째 나막신 두 번째 쓴 쑥 그리고 의지(시체를 묶는 종이) 항상 연고가 없는 시체들을 거두며 장사지내는 일이 목회며, 그런 정신으로 목회에 임해야 한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였고 또한 남대문 시장 안에서 그렇게 살았다. 남대문 시장 숯쟁이 삼촌 밑에서 부모의 정도 모르고 자란 그가 스크랜턴을 만나고 목회자가 되면서 그의 마음 속에는 민중에 대한 사랑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는 굉장한 부흥사였다. 얼마나 뜨겁게 말씀을 전하였는지 그의 설교를 들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락지를 뺐다고 전해진다.
같은 시기 손정도 목사님이 정동교회에 계셨다. 이분은 길선주 목사님의 부흥회 때 불을 받은 분이다. 그래서 감리교 유명한 부흥사셨다. 교회를 떠나고 교회에 흥미를 잃고 있던 젊은이들이 손정도 목사님 때문에 다시 교회로 모여들었다. 400여명 모이던 정동제일교회가 손정도 목사님 이후에 2,000명까지 모인 것이 그 증거다. 그는 심령 부흥 위에 민족의 독립을 얹었다. 성령의 뜨거움으로 깨어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비단 부흥사만은 아니었다. 3.1운동 이후 그는 돌연 성공이 보장된 정동제일교회 담임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초대 의장을 맡는다. 그뒤 상해를 떠나 만주로 가서 주중에는 독립운동을 주말에는 작은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당시 만주로 쫒겨 간 조선인들의 처지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속에 들어가서 목회를 한 것이다. 손정도 목사님의 따님이 회고하기를 정동제일교회에서의 삶이 가장 행복하고 아늑했다고 하니 그 이후의 그 가족이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모두들 더욱 나은 보수와 성공을 위해 살 것만 손정도 목사님은 그 모든 보장을 뒤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그를 중국으로 만주로 내몬 것일까? 아마 살아계신 성령일 것이다. 성령에 감동 받은 그는 가만히 있으려 해도 가만히 있지 못해 부흥회 때마다 민족이 처한 현실을 피로 토하고 울부짖으며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상해로 또한 만주로 더욱 낮은 곳 추한 곳으로 가게 했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성령의 역사 아니겠는가?
정동제일교회를 둘러본 뒤 강단에 있는 팬파이프 오르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3.1운동 당시 저 팬파이프 오르간 밑에 숨어서 배제학당 학생들이 태극기를 그렸다는 사실을 친구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기독교가 들어온 지 30년이 채 안 되었을 당시 조선 기독인 숫자가 10만이 채 되지 않는 현실에서도 민족 대표 33인 16명이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감옥에 갇혔던 여성 독립운동가 300 여명 중 200명 가까운 이들이 여성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을 그 친구들은 기억을 할까?
기독교가 건강할 때 이 민족의 기상은 함께 건강했으며 교회가 교회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 이 사회 또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반대로 교회가 침체되기 시작할 때부터 교회가 부패하고 병들기 시작할 때부터 이 나라도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것이 이 땅 한반도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요. 또한 멍에가 아닐는지.
모든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북악 스카이웨이에 올랐다. 서울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 멋진 야경처럼 우리 친구들도 자신의 삶을 불태울 수 있기를 기도한다.
서초구에서 목회하는 김태훈 목사님에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은 우리를 위해 아파트 게스트 하우스를 빌려주셨다. 역시 만사형통!! – 모든 일은 형을 통해 역사한다는 목회자들의 유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