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춘향뎐>은 명창 조상현과 명고 김명환의 소리와 북, 그 어울림에 대한 오마주라 해도 그리 무리는 아니지 싶습니다.
<뿌리깊은나무>에서 뵌 적이 있는 김명환 선생의 북을 <춘향뎐> 속에서 다시 뵙게 되니 한없이 반갑고 기쁜 마음이 일어, 한국 국악사에 뿌리깊은나무로 남으신 김명환 선생에 대한 몇몇 이야기들을 여기저기서 주섬주섬 찾아 전해 올립니다.
* 목과 북에서 나오는 두 소리의 어울림(출처: http://blog.daum.net/vorgott/17449924)
왼쪽은 조상현 명창, 오른쪽은 김명환 명고다. 이곳은 김명환의 석관동 자택일 것이다. 안채 마당일까? 소나무와 괴석이 어울려 있어 제법 그윽한 기운이 느껴진다.
조상현은 보성소리를 이은 소리꾼인데 스승 정응민 외에도 김명환이 소리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김명환은 명창으로 행세하지는 않았지만 소리속이 깊어 소리꾼을 가르치기도 했다. 두 스승에 대한 그의 존경심('정신적 지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은 퍽 두텁다.
그런데도 소리판에서는 창자(소리꾼)는 창자, 고수는 고수다.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조상현은 너름새를 할 양으로 부채끝을 '감히' 스승에게 겨눈다. 그런데 더 인상적인 것은 이런 너름새에도 불구하고 김명환은 그 자세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표정 또한 진지하다는 것이다(이 사진보다 더 크고 또렷한 모습을 보려면 한국브리테니커 회사에서 간행한 <판소리다섯마당> 22쪽을 볼 것). 평소 북채로 '패면서' 가르쳤다던 그 김명환은 이제 고수로서 소리꾼의 너름새를 받아 주면서 제자의 판소리 전체에 감응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사진은 실제 공연이라기 보다는 브리테니커 <판소리 다섯마당>을 출반하기 위해 '포즈'를 취한 것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실제 공연이었다면 응당 그 두 예인은 평소에 그러하듯이 이 장면처럼 연출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래서 이 장면에 현실성과 '영혼'을 그같이 부여한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며, 오히려 그렇게 이 사진을 해석해야만 그 깊은 속까지 들여다 본 셈이 될 것이다.
조상현의 브리테니커 판 <춘향가>를 들어보면 고수로서 김명환이 얼마나 소리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자부심이 남달랐던 그는 자신보다 나이도 들고 '잘 나가는' 명창이라도 소리가 마땅치 않으면 추임새는 커녕 북가락마저 인색했다. 그러나 26세의 연치 차이가 있는 그들의 이 <춘향가> 음원에서는, 김명환의 주옥같으면서도 '신들린' 추임새와 패기 있는 북가락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김명환의 북이라야 조상현은 빛났다. 조상현의 소리와 다른 북이 만나면 소리는 좋을 수 있지만 조화를 이룬 밀도있는 소리판은 기대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했던 <춘향가>를 들어보면, 김명환은 명창 조상현의 소리에 힘을 불어넣어 주며, 동감하며, 탄복한다. 이런 북 가락과 추임새만이 조상현을 가장 조상현답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뒤집어 볼 수도 있다. 조상현의 소리라야 김명환은 빛난다. 그가 아무리 호랑이 고수라도 자신을 고수로 예우해서 북채를 맡긴 소리꾼의 성의를 봐서 잘 해주려고 해도, 소리가 시원치않으면 북 장단과 추임새가 잘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북은 소리의 격을 따라 가는 것이다. 위 사진은 이런 그들만의 소리판 한 장면을 담은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해진다. 그 어울림이 있는 마당 소나무 위로 어디선가 송학 한 마리가 조용히 날아들 것 같지 않은가?
* 조선북의 '소릿길'을 열었던 사람 (출처: 출처: www.okgwa.net)
둥둥둥…….
북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본 적이 있는가? 저홀로 울다가 마음을 두드리고 어느 순간 자지러지며 핏줄 속으로 흘러 들어와 온 몸을 전율하게 만드는 저 묵직한 연타음에 말이다.
그 북소리에 있어 이 나라 첫째로 치는 국고 김명환.
그의 고향인 곡성의 옥과를 찾아가는 동안 고사 하나가 떠오른다.
조조 앞에 명고수 미형이 불려나왔을 때 천하명고 미형은 북채를 쥐기 전
의관부터 훌훌 벗어 던져 버리더라는 이야기.
놀란 조조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지만 미형은 오히려 조조를 향해
"예의 자유도 모르는 무식한 자"라고 일갈하고는 그 자리를 떠버린다.
예의 자유.
조선 명고 김명환이야말로 일체의 권위와 인습과 타성을 벗어던져 버리고 유천희해하며 예의 자유경에서 노닐다 간 사람 아니던가. 칼칼하고 표표한 성품으로 칠십 평생 곁눈질 한번 안주고 북채 하나에만 오로지하여 장엄하고 기백 큰 조선북의 '소릿길'을 열었던 사람이었다. 그 조선의 미형 김명환의 소리를 키운 섬진강변은 지금 봄기운으로 난리가 났다.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매화와 강변 여기저기서 축포처럼 터지는 산수유꽃, 그리고 핏빛으로 흐드러진 자운영, 그 꽃무더기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지리산 얼음 녹아 차고시린 강물과 그 물속으로 미끄러지는 은어떼. 폴짝, 연두빛 풀밭 여기저기서 튀어오르는 개구리. 귓가로 날아오고 가는 꾀꼬리며 멧새소리들…. 다섯 빛, 다섯 색으로 퍼진다는 김명환 북의 원음은 바로 이 섬진강변에서 생겨났을 터. 봄햇살은 길과 강에 질펀한데 이 '봄의 소란' 속을 걸어 옥과면 무창리에 이른다. 무창은 김명환이 『내 북소리를 산으로 막고 물길로 풀어냈다』고 했던 바로 그 곳.
마을 앞으로는 섬진강 상류가 되는 순자강 옥과천이 부드럽게 흐르고 뒤로는 입면쪽으로 설산이 성깔있게 뻗어간 2백여호 가까운 반촌이다. 손주를 데불고 동구에 나 앉아있던 노인 한분에게 청해 어렵사리 김명환 생가터를 찾았지만 그 자리에는 교회가 서있다. 유리창 너머로 아이들 몇이서 성가연습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시골 아이들의 맑고 청아한 노래를 뒤로 하며 마을 뒷산의 묘소로 오르는 동안 나를 안내하던 노인은 사람들이 심심치않게 서울이나 광주 혹은 일본에서까지 찾아와 김명환을 '조사해 가는데', 일산 영감이 정말 그렇게 유명했는가고 묻는다.
북을 차고 앉은 모습에서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팽팽한 살기가 느껴지고 소리꾼을 쏘아보는 눈에서는 퍼렇게 불이 뚝뚝 떨어졌던 김명환. 제자의 북소리가 시원치 않으면 『치라는 북은 안치고 쇳자국만 보듬고 앉아있는 저 썩을 놈을 어째야 쓰까』라고 내지르곤 했던 가파른 성깔. 소리가 영 성에 안차면 『니기미, 소리는 국민학생인데 대학원생보고 북을 치라허네』라며 팩하고 돌아서던 그도 선산 찾아 다니러올 때만은 보통 노인과 다름없었던 듯하다.
사실 소리마당에서는 소리하는 이가 주역이 되고 북은 으레 '소리'에 가리워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지만 김명환의 경우는 예외였다.「일고수 이명창」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게 그의 '북'은 거의 늘 '소리'를 리드하고 압도했다. 흐물흐물 곰삭아 터지다가 가슴 미어지고 숨줄 끊어지도록 모질게 몰고가는 기-경-결-해가 늘 황홀했다. 그러면서도 김명환 북은 기백이 크고 서슬이 퍼랬다. 그는 '잘디잔 북' '뼈대없는 북'에는 단박 『저거 예술 아니여. 저러면 쓰간디』하고 손을 내젓곤 했다. '예술인 것'과 '아닌 것'의 경계에 늘 단호했다.
김명환 북의 기운생동한 맛에 반해 나는 그가 박봉술, 정권진, 조상현, 한애순 같은 명창들과 호흡을 맞추던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감상회」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내 귀에 어렴풋이 그 북소리의 뼈대가 가늠되어올 때 쯤에 그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다.
소년 '명창'은 있어도 소년 '명고'는 없다고 '좋은 북'은 치는 이나 듣는 이 모두에게 언제나 그리도 더디고 애닯게 오는 것이었는지. 무덤곁 풀섶에 앉아 멀리 굽이돌아 흐르는 섬진강을 다시 바라본다. 매화꽃잎이 점점이 떠가는 저 강에는 지금 은어가 빠르게 물살을 타고 있을 터이다. 가늘고 긴 몸체에 청록과 회백색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너무 성마르고 깔끔해 잡히면 팔딱일 새도 없이 제가 먼저 숨길을 놓아버린다는 은어. 언제나 맑은 물에서만 놀며 깨끗한 돌자갈 이끼만 먹고 자라 몸에서 수박냄새 같은 향기가 풍긴대서 향어라 불리기도 한다던가. 문득 오뉴월 염간에도 늘 칼날같이 풀먹인 세모시에 옥색 물들여 날아갈듯 차려입고 나서곤 했다는 북의 가인 김명환이 어쩌면 그가 나서 자란 저 섬진강 은어의 생태를 그대로 닮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 김명환(1913∼1989)은 누구인가? (출처: http://gukak.tistory.com/2)
1913년 전남 곡성의 옥과에서 태어나 1989년 봄 노량진의 한 초라한 연립주택에서 세상을 떠난 우리 음악사의 가장 위대한 '소리북쟁이'.
곡성의 대지주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까지 공부하러 갔지만 혼례 치르던 밤 벌어진 소리판에서 『남도 청년이 소리장단 하나 못 짚느냐』는 핀잔에 그 길로 명창 장판개를 찾아가면서 그의 한평생은 길이 한자 두치 둘레 여덟치의 소리북 안에 갇히게 된다.
송만갑, 임방울, 박녹주 같은 나라 안의 한다하는 명창들이 김명환 북과 함께 무대서기를 소원했을 만치 최고의 고수였지만 정작 자신은 전란과 비운에 쫓기는 험한 세월을 살았다. 서울의대 다니던 큰아들의 납북으로 충격을 받아 한때 아편에도 손을 댔고 이를 끊기 위해 자진해서 광주교도소에 들어가기도 했던 그는 만년에 KBS 국악대상을 받고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감상회」가 시선을 모으면서 비로소 세간에 그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첫댓글 "김명환의 북이라야 조상현은 빛났다." 평생 잊지 못할 이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