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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진 - UP & DOWN
“기말고사 일주일 뒤니까 다들 알아서 잘하고, 또 우리 반 성적 그따위로 나오면 전체 강제 야자니까 그렇게 알아.”
“아아!”
“그러니까 알아서들 노력하라고, 조례 끝.”
“차렷, 경례.”
“안녕히 가세요.”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기말 고사가 일주일 뒤로 앞당겨졌다. 말이 그냥 기말 고사지 실질적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2학년 인생에 마지막 시험이라는 말과도 같았다. 이 시험이 끝나면 우린 그 어마어마한 수험생의 루트를 밟게 된다. 딱 한 마디로 정의내리자면, 이 시험이 우리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숙제’와도 같은 셈이었다.
“아싸, 일찍 끝난다.”
떫은 숨이 터져 나왔다. 놈에게 시험이란 단어는 그저 일찍 끝나는 날인 듯, 걱정 따위 없어 보이는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습한 실소가 터졌다. 변백현이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놈이 교실에서 공부를 하는 장면을 눈에 담은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말을 트기 전, 주로 내가 알고 있던 변백현에 대한 이미지는‘친구들과 정신없이 떠드는 남자 애, 여자를 밥 먹듯이 사귀는 애, 태평하게 퍼질러 자는 애’그래, 딱 저 세 가지로 놈의 이미지는 종결이었으니. 그렇게 따지면 바닥을 기고도 남을 변백현의 성적은 실질적으로 중간은 걸치는 성적이라는 게 또 거슬린다면 심히 거슬린다는 거다.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결과에 이상한 의심까지 들기 시작했다. 물론,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해도 간신히 중간인 내 성적에 회의감을 느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지만.
“목도리 가지고 왔어.”
“……아, 고마워.”
“○○○.”
“응?”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
거추장스럽게 걸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저 음성이 더 도드라지게 들린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주변 음성들은 모두 차단되고 오직 변백현의 목소리만 유난히도 울리는. 무언가 일시 정지된 지금. 순간이었지만 내 머릿속이 핑 돌아버릴 정도로 온갖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올 만큼 재밌었던 순간부터, 미칠 정도로 당혹스러운 순간까지. 계속해서 입술을 가만두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이야기를 앞두고 있는 듯한 놈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상한 두려움이 났다. 다급하게 시선을 돌리고 다른 곳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상황을 무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목도리…….”
“…….”
“내가…….”
“……응?”
“김치 국물 묻혔어.”
“뭐?”
“아, 진짜 미안해 응? 아니 어제 집에 가니까 형이 밥 먹고 있는 거야! 그래서 목도리 빼는 것도 잊고 먹고 있다가 뭐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이거 하얀색 목……! 아, 진짜 변백현!”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 아아! 야, 잠깐만! 등, 등! 등 아파! 등!”
“하필이면 김치……! 아, 진짜!”
“아, 그만 때려! 미안하다고 했잖아! 아프다고 시발!”
“아프라고 때리는 거지 그럼 뭐 하러 때려? 조금 묻혔으면 내가 몰라! 이렇게 묻혀놓고 미안하다는 말이 나와? 어?”
“아, 진짜!”
“…….”
“미안하다고, 시발!”
유난히 예쁜 하얀색 목도리 사이에 부황 자국이라도 뜬 것처럼 동그랗게 김치 국물이 묻었다고 생각해봐라. 어느 누가 나처럼 등짝 스매싱을 안 날리게 생겼나. 사정없이 손을 들어 놈의 등을 향해 매질하기를 여러 번이었다.
“…….”
“……아.”
반복적으로 움직이던 손이 멈춘 건 순식간이었다. 그런 내 한 맺힌 매질을 고통에 가득 찬 얼굴로 받고 있던 변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두 팔목을 우악스럽게 잡아 챈 거였다.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꼼짝없이 양쪽 손목이 잡힌 내가 허공에 멈춰버린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아프다고, 그만 때려 좀.”
“아, 진짜 이거 안 놔?”
“안 때린다고 하면 놔줄게.”
“너 또 맞고 싶……!”
“그럼 이러고 수업하던가요.”
“…….”
나름 힘을 준다고 준 게 놈에게는 간지럽게도 느껴지나 보다.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날 놀릴 건수를 잡은 꼴이 그렇게나 야속할 수가 없었다. 손을 빼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강하게 제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그대로 꼭두각시 인형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육두문자가 날아갈 것 같아 몇 번이고 길게 숨을 토해냈다. 참자, 참아야 하느리라.
“나 따라하면 놔줄게.”
“아, 안 때린다고 했잖아!”
“내 말 따라하면 진짜 놔줄게.”
“…….”
“나, ○○○은.”
“…….”
“아, 따라하라고. 나, ○○○은.”
“……너 나 또 놀릴 건수 잡으려고 그러지.”
“나는.”
“……하, 나는.”
“변백현이.”
“……한다 해, 변백현이.”
“목도리에 김치 국물을 묻힌 실수를.”
“아, 이게 진짜!”
“안 따라해? 아, 나랑 마주보고 있는 게 존나 좋으신가 봐요.”
“……진짜 얄미워 미치겠네.”
“그래서 안 따라한다고?”
“아아, 실수를.”
“용서해주겠습니다.”
“용서해주겠습니다.”
“이 팔을 풀고 어떠한 해코지도 안 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그래, 그럼 다음 순서.”
“너 자꾸 뭔가 하나씩 추가된다?”
“자, 다음 차례.”
“내 말 진짜 개무시하네?”
“알겠어, 딱 하나만.”
“뭔데, 얼른 말해. 나 지금 팔 아파서 죽을 것 같거든?”
“…….”
“뭔데.”
“……어.”
“응?”
“……만약 도경수랑 이어지면.”
“…….”
“그래서 우리가 이야기할 거리도 없어지면.”
“…….”
“아, 그러니까 도경수랑 이어지면 너 나 쌩깔 거냐고.”
“…….”
“……아니, 그니까.”
“내가 너랑 쌩을 왜 까?”
“…….”
“우리 지금까지 경수 이야기 했어? 아니잖아, 근데 그런 생각을 왜해.”
“…….”
“바보야, 그럴 시간에 공부를 해 공부.”
허공에 떠있던 팔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건 내 두 팔목을 잡고 있던 두 손이 제가 주고 있던 힘을 풀었기 때문이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문자들로 조합되어있는 수학 문제집이 복잡한 내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놈의 말이 영 머릿속에서 지워질 생각을 안했다. 오로지 같은 장면이 반복될 뿐이었다. 착잡한 내 표정을 들킬까 최대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뻣뻣한 머리카락이 반복적으로 볼을 쿡쿡 찔러대는 것 아니겠냐. 굳은 내 표정과 마음을 풀어주기 위한 일종의 노력 같았다. 놈이 내 양 팔을 잡고 장난스럽게 눈을 마주했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진득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놈과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점점 작은 실 한 가닥 같은 의심의 끈이 하나둘씩 매듭을 지어가 큰 실뭉치로 변해버릴 것 같았으니까.
“다음, ○○○.”
“네!”
자잘한 결석과 수도 없이 많은 질병으로 조퇴를 밥 먹듯이 했던 서윤이를 미친 듯이 원망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수행평가는 시작되었는데, 난 내 짝꿍 서윤이와 제대로 된 연습을 한 번도 못해봤다는 게 그 이유였다. 쭈뼛쭈뼛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날카로운 선생님의 포스에 눌려 잘근잘근 조각난 숨을 간신히 들이키기를 여러 번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두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묵직한 배구공을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힘껏 공을 위로 던져 올렸다. 아, 제발. 제발 재시험만은 아니기를. 재시험만은 피하기를. 같은 생각만 죽어라 하면서.
“○○○, 연습하고 다시 시험 봐.”
오늘은 겨울이 분명한데 왜 쓸데없는 식은땀은 이렇게나 많이 흐를까. 비통하고 참혹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체육시간에 온갖 기가 다 빨려 녹초와 다름없는 몸으로 의자에 엉덩이부터 붙였다. 귀찮으니까 체육복은 나중에 갈아입자는 심산이었다. 그런 여자아이들과는 다르게 무려 50분이나 축구를 하고 와도 전혀 지치지 않는 기세인 남자아이들도 나란히 줄을 맞춰 교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 작은 염색체 하나가 이렇게 다른 상대적 반응을 이끌 수 있을까. 교실에 발을 들이고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내내‘야, 나 오늘 골 넣은 거 봤냐, 이 새끼 오늘 존나 멋졌다, 걔네 반 존나 못 하더라. 우리 개잘한다.’와 같은 허세에 찌들어있는 말들로 우리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는 놈들이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격한 운동을 해서 그런지, 꽤나 추운 날씨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에 젖은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연속적으로 내 코끝을 기분 나쁘게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야, 변백현 물 줘?”
“아, 필요 없어. 아까 먹었어.”
역시나 땀에 쩔어있는 상태로 제 실력을 자랑해대는 변백현도 마찬가지였다. 이 땀 냄새를 맡고 같은 자리에서 50분 동안이나 수업을 들으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인데. 겨울이라 창문을 열 수도 없는데. 그러니까 뭐? 그냥 냄새에 취해서 죽기 직전까지 있으라는 말. 망연자실한 표정과 함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시름시름 앓으며 책상 위로 고개를 파묻으려 하는데, 내 옆자리까지 다가온 변백현이 갑자기 민예를 부르는 음성에 의아해져 고개를 돌리니…….
“야, 김민예 나랑 자리 바꾸자.”
“응? 나 왜?”
“너 ○○○이랑 친하지? 그럼 바꿔, 내가 네 자리로 갈게.”
“……뭐야, 변백현 자리 왜 바꿔?”
“너 편하게 자라고.”
“응?”
“아까 보니까 체육한테 배구 못한다고 존나 까이더만 우리 밥통.”
“너 그거 언제 봤어?”
“잘 자.”
변백현은 남자치고 손이 꽤나 예쁜 편이였다. 남자한테 예쁘다는 표현은 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여자보다 보기 좋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격렬한 운동을 하고 온 건지 한 겨울에도 팔이 다 보이는 반팔을 입고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리는 행동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 느낌이 예전만큼 거칠지가 않았다. 그늘진 마음에 더 짙은 안개가 얼룩졌다. 고맙다는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이상하게 그랬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내 옆자리로 온 민예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끝까지 변백현을 쳐다볼 수 없었다.
“야, 변백현 지금 너 땀 냄새 날까봐 저러는 거지.”
“…….”
“쟤 너 좋아하나? 아니면 원래 여자들한테 저래?”
“……나 피곤해서 좀 잘 거니까 선생님이 부르면 나 좀 깨워줘.”
“응? 그래, 잘 자.”
옅고도 가는 숨을 토해냈다. 변백현이 날 볼 수 없는 위치로 고개부터 돌리고 봤다. 간간이 들려오는 남자아이들에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꽤 거친 욕설 사이로 파고드는 변백현의 음성도 꽂혀왔다. 그 목소리가 정확히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내 심장 언저리를 연신 찔러댔다. 딱 울지 않을 정도로만 그랬다. 이상하리만큼 그 부분이 자꾸만 시리고 아려왔다. 그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본 기분이었다.
성격이 좋은 건지, 아님 뇌가 멍청한지 그게 궁금했다. 놈은 나와 있었던 일을 한 시간 안에 모두 포맷하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대놓고 어색한 티를 내는데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 리가 없었다.
“○○○ 너 오늘도 야자 하냐?”
“시험 일주일 남았잖아……집에서는 공부 안 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야자도 미리미리 하고, 공부도 미리미리 하란 말이야.”
“변백현 넌 뭐 평소에 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난 평소에도 안 하잖아.”
자랑이다 이 새끼야. 그렇게나 당하고도 늘 같은 수법으로 놀림감이 되고 마는 나였다. 오늘도 변백현의 거대한 망치에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변백현 너…….”
“응?”
“그러니까 너…….”
“나 뭐요.”
“너 그렇게 공부 안 하면 인생 망해, 알아?”
“나 망하라고 악담하는 거야?”
“뭐가? 충고야, 충고.”
“○○○씨가 제 인생 책임지실 거예요?”
“야, 내가 왜?”
“그런 거 아니면 신경 꺼, 멍청아. 지 인생도 아니면서.”
욱하는 성격이 문제였다. 나름 심기를 건드려본 건데 그게 먹히지 않으니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야, 너 이번 시험 나보다 잘 보면 내가 소원 들어줄…….”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지?”
“응?”
“진짜지 소원?”
이건 어디까지나 내 욱하는 성질 때문이다. 어떻게 막 뱉어도 이런 말이 나올까. 그놈의 거지같은 자존심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밑도 끝도 없이 성적 내기를 하자는 내 말에 당혹스러운 건 변백현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가방을 고쳐 매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모습이 이 민망할 상황을 그렇게나 더 잘 표현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훅 치고 올라오는 후끈함에 어떤 표정으로 놈을 마주해야할지가 문제였다. 다급하게 석식을 먹으러 간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아, 어디 가는데.”
“석, 석식 먹으러 간다니까?”
“다시 말해봐.”
“아, 배고파서 그냥 말이 헛 나온 거야. 그거 취소야 취…….”
“소원 진짜지?”
“실수로 나온 거라니까?”
“아싸, 소원.”
“야, 실수라니까 실수?”
“아, 공부 하러 가야겠다.”
“…….”
“나 학교에서 공부 못 하는데……도서관 갈래?”
“갈래? 설마 갈래의 갈래가 나랑 가자는 거야?”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야, 변백현 집 안 가냐?”
변백현을 찾으러 온 친구 등에 날개라도 보였다면 그건 내 착각일까.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등장에 꽤나 당황한 듯, 짙은 호흡을 내뱉는 놈을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가히 액션 영화 안에 나오는 섹시한 여자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았다.
“친구가 찾는데?”
잘 놓인 하얀색 종이를 누군가가 사정없이 구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보기 좋게 구겨진 얼굴에 짜릿한 승리감도 들었다.
“아, 변백현 개새끼야! 빨리 오라고!”
“간다고 시발!”
“잘 가, 변백현!”
“…….”
“…….”
“말이나 못 하면.”
누군가에게는 방해꾼, 그러나 누군가에는 천사 역할을 톡톡히 한 친구를 죽일 듯이 흘기며 교실 밖으로 나가버리는 변백현의 등 뒤로 영혼 없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성격을 고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무조건 욱하고 보는 성격. 계획에 없던 에너지를 소비했더니, 목 부근이 뻐근하게 저려왔다. 아, 오늘 야자는 포기하고 집에나 가야겠다. 이럴 때만 빠른 포기였다. 공부를 하기 싫은 구차한 변명은 날이 갈수록 발전해갔다. 챙겨뒀던 가방을 들고 공허한 적막에 싸여있는 교실 밖을 나섰다. 싸한 공기가 훅하고 얼굴 위로 밀려 들어왔다. 쓸데없이 에너지를 쏟아서 그렇다. 티를 내고 싶지 않았지만 놈을 대하는 게 예전 같지가 않았다. 나를 쳐다볼 때도, 그냥 말을 걸때도, 심지어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에도 이상한 생각은 떠날 기미가 없었다. 보건실 앞에서 들었던 그 말 때문이었다. 신경 쓰지 않고 싶어도 자꾸 그런 쪽으로 생각이 드는 걸 어떻게 하냐. 애연한 가슴부근은 꽉 막힌 채로 굳어가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땀 냄새가 날까봐 자리를 바꿔주던 그 배려가 아무 의미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연애코치가 끝나면 자신과의 연도 끊을 거냐며 묻던 그 말도 진심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그걸 놓치고 싶지 않았다. 느긋하게 팔을 들어 머리칼을 쓸어 내렸다. 우선 나머지는 집에 가서 떨쳐낼 생각이었다.
“엄마!”
복도 끝에 위치해 있는 계단으로 가기위해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데 전혀 상상도 못한 곳에서 도경수가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니겠냐. 놀란 가슴은 진정할 틈도 없이 눈앞에 있는 앞사람을 스캔하기에 바빴다. 왜 교실도 아닌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건가 이 말이었다.
“……아, 미안. 놀랐어?”
“아니, 갑자기…….”
“미안해, 지금 너 찾으러 들어가려 했는데.”
“응?”
그래, 귀를 안 판지가 얼마나 지났더라. 생각보다 꽤 오래 지난 것 같은데. 왜 자꾸 헛소리가 들리지. 예를 들면 경수가 나를 찾으러 교실에 들어오려 했다는 그런 말. 집에 가서 당장 귀부터 세척해야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앞을 바라보니 쨍한 웃음을 보이며 머쓱한 티를 대놓고 내는 경수도 보였다. 아, 꿈이 아닌가 보다. 그러니까 이거, 진짠가 보다. 정말 도경수가 나를 찾으러 직접 교실에 왔나보다. 이게 사실이라면, 왜?
“너 오늘 야자 할 거냐고 물어보려 했지.”
“나? 아, 야자 못…….”
“나 오늘 학교에서 공부 안돼서 도서관 갈 거거든.”
“아…….”
“너 혼자 가다가 저번처럼 또 그런 일 있을까봐 신경 쓰여서 같이 갈까 물어보려고.”
“…….”
“……어, 내가 너랑 집 방향이 같잖아. 그래서 그, 겸사겸사……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같이 갈 친구 생겨서 좋……아, 아니 뭐라는 거야.”
“…….”
내가 짝사랑을 시작한날부터 지금까지 놈이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을 봤나? 아니, 지금이 처음인데. 그동안 놈을 관찰했던 날을 단 하나로 정의하면 낮은 톤의 도경수라던가, 무표정의 도경수라던가, 많이 웃어봤자 입꼬리만 살짝 올리는 도경수라던가, 혹은 간간한 욕뿐이었는데.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뭐지? 미치지 않고서야 내 눈앞에 보이는 도경수는 지금 창피해하는 게 분명한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내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비명을 막기 위해 황급히 제 손을 들어 입가로 가져다 댔다. 입술을 앙다물고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이러다 저도 모르게 흉한 신음이라도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내 속도 모른 채, 연신 눈을 깜빡거리며 저가 해야 할 말을 생각하는 듯한 표정에 벙어리라도 된 사람처럼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서 있는 나였다.
“……아, 뭐라고 해야 하지.”
“…….”
“그러니까…….”
“…….”
“나랑 도서관 같이 가자고.”
“…….”
“그거 말하려고 온 거야.”
늘 남자친구가 있는 친구들의 데이트 이야기를 들으며 제일 부러워하던 것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도서관 데이트였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공부하다 말고 서로 동시에 고개를 돌아보고, 내가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을 때 남자친구가 몰래 다가와 비타민 주스를 놓고 가고, 조금 지칠 땐 같이 도서관 뒤에 있는 공원으로 나가 머리를 식힐 겸, 산책도 하는 그런 거. 현실적이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그런 개같은 판타지.
“자리 구석이 좋아 문 앞이 좋아?”
“어……난 구석진 곳에.”
“그럼 내가 네 옆에 할게.”
능숙하게 자리를 고르는 도경수의 뒤통수를 머쓱하게 쳐다보다 이내 너나 할 것 없이 두 눈이 마주치는 우리였다. 헉하고 숨을 토해낼까 이번에도 양 입술을 말아 넣었다. 사람이 한적한 도서관이라 말하는 소리가 울릴까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는 간지러운 음성에 그대로 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머저리 같은 표정으로 식은땀만 흘리고 있는 모습이 가히 등신과 다를 것 없었다. 연신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가방끈만 만지작거렸다. 손이 갈라지고 부르틀 추위와 함께 있다 살근거리는 실내로 들어오니 자연스럽게 포근한 열기가 훅하고 올라왔다. 그게 정말 내부로 들어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옆 사람에 의해 느끼는 온도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여기 괜찮아?”
“응, 괜찮아!”
꽤나 구석진 자리였다. 거슬리는 소음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잠자기도 쉬운 자리였다. 그런 리스크를 아는지 모르는지 저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치고 책을 꺼내는 경수가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나도 똑같이 외투를 벗고, 등을 돌려 가방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오늘은 기필코 영어를 마스터하겠다는 생각으로 필기구를 내려놓고 옆으로 시선을 돌리는데……나와 같이 필기구를 들고 빤히 내 눈을 응시하는 옆 사람 아니겠냐. 패기 넘치던 심장은 금세 병신처럼 굳어버리고야 만다.
“……왜.”
“왜 나 따라해.”
“나 너 안 따라했는데…….
”
“내가 외투 벗으면 너도 벗고, 앉으면 너도 앉고, 필통 꺼내면 너도 필통 꺼내잖아 바보야.”
“그게 왜 따라한 거야.”
“따라한 거야.”
“……야, 억지야.”
“억지야?”
“완전 억지지.”
“공부나 해, 얼른.”
자기가 먼저 말 걸었으면서 공부나 하라는 심보는 뭐야. 억울해 죽겠다는 사람처럼 눈썹을 내리곤 뚫어져라 옆 사람만 죽어라 쳐다봤다. 내게로 시선은 주지 않은 채 연신 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꾹꾹 웃음을 눌러 담는 모습에 기가 막힌 답답한 신음이 터졌다. 괜스레 자존심이 상하는 거다. 난 네 웃음 하나에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한데, 그것도 모르는 넌 여유롭게 장난만 치고 있다는 사실이. 한쪽으로 치우쳤던 고개를 빠르게 원 위치 시켜 책상 위로 고개를 파묻어 버렸다. 눈치 없이 새파란 파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배고픔에 꼬르륵 소리를 들켜버린 듯, 세상모르고 뛰는 심장 소리에 민망함을 숨길 수 없었다. 혹여나 내 찬란한 봄을 경수에게 들켜버릴 것 같았다. 굳이 거울을 안 봐도 보기 좋게 여문 내 얼굴이 느껴졌다. 그걸 경수에게 들키기 싫었다. 그저 내 옆자리에서 들리는 경쾌한 샤프 소리만으로도 지금 내 옆에 놈이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뼈저리게 느껴졌으니까.
“○○○.”
“…….”
“○○○, 많이 졸려?”
“……응?”
“피곤해?”
“아니……따뜻해서 모르고 잠들었나 봐. 지금 몇 시야? 헐, 열한시? 나 몇 시간 잔거야? 아, 미쳤나 봐……아, 어떡해? 아…….”
“늦었어, 집 가야하는 거 아니야?”
“아……진짜 미안해 경수야, 미쳤나 봐 진짜…….”
“괜찮으니까 일단 일어나자.”
나 같은 등신도 없겠지 싶었다. 좋아하는 남자와 도서관에 와서 잠이나 퍼질러 자는 등신 말이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거지같은 현실에 머리카락이라도 쥐어뜯고 후회의 쓴맛을 고통으로라도 이겨내고 싶었다. 나처럼 굴러 오다 못해 날아온 돌을 그대로 뻥 차버린 한심한 년도 없을 거다. 다시금 휴대폰을 들어 열한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을 응시했다. 그러니 느껴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도서관까지 와서 잠만 퍼질러 자버린 등신 같은 내 행동뿐이었다. 수평이었던 어깨 축이 빠지기까지 했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둘씩 제 짐을 챙기는 도경수가 보였다. 애석한 마음은 나아질 리 없었다. 코끝이 시큰해지는 게 참담한 눈물이라도 날 기세였다. 말없이 열람실에서 나와 우리 집까지 향하는 내내 놈은 내게 그 어떠한 말도 걸지 않았다. 혹여나 공부를 하러 가서 잠이나 퍼질러 잔 내 한심함에 말을 잃은 건가 싶기도 했지만, 찌질한 난 역시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원래 죄인은 말이 없는 거랬다. 그러니 이 묘한 상황의 원인을 알 길이 없었다. 우리 집보다 조금 더 가깝게 위치해있는 경수네 집 앞에 다다르자, 점차 이상한 강박관념이 들기 시작했다. 후회하기 전에 말이라도 꺼내야할 것 같았다. 마치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이라도 빙의한 듯, 옆에서 걷고 있던 놈의 팔목을 냅다 잡고부터봤다. 갈라진 목울대 사이로 진득한 침이 넘어갔다.
“도경수……오늘 진짜 미안해.”
“뭐가?”
“아, 저……오늘 열람실에서 공부 안 하고 잠…….”
“응?”
“……잠자서.”
“그게 왜 미안해?”
“응? 아니, 너 지금 화나서 나한테 말 안 건거 아니야?”
“나 화난 게 아니라 생각하고 있던 건데.”
“뭐? 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는데……난 너 화난 줄 알았단 말이야.”
“너 화났어?”
지금 느끼는 기분은 딱 그랬다. 도경수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에게 제대로 조련 받는 개가 된 것 같은 기분. 참, 온몸이 쪼그라드는 민망한 기분이었다. 혼자 제대로 오버를 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안도의 호흡이 터져 나오는 건 꽤나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제대로 한방을 먹은 셈이었다. 허허, 어이없는 실소가 터졌다. 혼이 나간 인형이 따로 없었다.
“나 화 안 났는데? 너 화났어?”
“어, 아니야……어.”
“아, 진짜 화났어?”
“응? 아니야, 안 화났어……응.”
“근데 왜 그래, 응?”
“아니, 안 화났다니까…….”
“화 풀어, 응? 진짜 생각하느라 너한테 말 걸어야 한다는 거 까먹었어.”
“…….”
“무슨 말 걸어야하나 했어.”
“…….”
“그니까……내가 여자랑.”
“너 여자랑 도서관 처음 가보는 거야?”
“응?”
“맞네, 도경수 여자랑 도서관 처음 가보네.”
“야, 너 진짜.”
“와, 도경수 18년 동안 여자랑 도서관 처음 가봤나 보네! 아이고, 마음 아파서 어떡해.”
“죽고 싶지 진짜.”
“그러니까 그렇게 오래 생각한 거겠지!”
누군가 그랬다. 내가 한번 마음을 잡고 상대방을 놀리기 시작한다면 딱 죽기 직전만큼만 존나게 패고 싶다고. 많이 유치하지만 조금이나마 내 억울함을 나누기 위한 장난스러운 복수였다.
“와, 경수 진짜 어떡해? 여자랑 도서관 처음 간 거야?”
“○○○.”
“영광이네 영광이야, 완전 영광이야.”
“죽는다, 진짜.”
“아이고오……내가 도경수랑 도서관 처음으로 가본 여자라니 이거 진짜 가문의 영…….”
“…….”
“……광.”
두 눈을 감은 채 연신 떫은 입모양을 비추던 경수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흥이 올라 얄미운 표정까지 골라가며 놀려대니, 내가 지켜야 할선을 넘은 건가 싶었다. 갑작스럽게 내 앞까지 다가온 경수가 제 손을 들고 입을 막아버리는 것 아니겠냐. 당황스러운 마음에 연신 눈만 깜빡여댔다.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은 살려 달라 야단이었다. 믿기 힘든 감촉에 뜨고 있던 눈이 점차 넓이를 더해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한 기침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여자랑 도서관을 처음 가본 게 아니라.”
“…….”
“여자랑 이렇게 오래 있어본 게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라. 또 여자애들이 무슨 말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몰라.”
“…….”
“그래서 오는 내내 너한테 무슨 말을 해야 안 어색할까 생각하다가 타이밍 놓친 거야.”
“……야.”
“너 나랑 친해지고 싶다며.”
“…….”
“그러니까……나도 너랑.”
“…….”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다고.”
굼벵이라도 된 것 같았다. 누가 보면 딱 그 짝이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같은 색깔의 벽지만 계속해서 응시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벽지를 톡톡 건드리니 그제야 직시하게 된 손톱 길이에 한숨부터 차고 올라왔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자 마음만 급해 손톱을 깎을 정신도 없더라. 이미 마음은 손톱깎이를 가지고 와 신명나게 깎았겠지만, 그와 다르게 몸은 여전히 침대 위 정지상태였다. 눌어붙은 벽지와 일심동체가 돼버린 나였다. 느리게 눈을 한번 깜빡이고, 또,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긋지긋할 정도로 같은 순환의 연속이었다. 그 정도로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오로지 지금 그대로. 어떠한 방해 없는 지금 내 상황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