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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부모형제
배정규, 김연수 (2003). 잡초인생. 저서의 3장
“자기 스스로를 보살피는 가족이 환자에게 좋은 가족이다.
(Agnes B. Hatfield, 미국의 당사자 어머니, 심리학 박사)
가족의 입장
1. 가족의 고통
정신질환은 예상치 못한 가운데 가정으로 찾아든다. 가족들은 충격을 받고 당황하게 된다. 이때부터 가족들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낯선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손명자 교수님과 함께 10년 남짓 매주 토요일 3시간씩 가족교육을 하며 가족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교육을 시작할 때는 당사자의 치료와 재활에 도움이 되도록 하려는 목적이었으나, 가족들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게 되자 생각이 바뀌었다. 당사자를 위한 가족교육보다 일차적으로 가족을 위한 가족교육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가족은 고통 받고 있다.”
미국정신질환자가족협회(NAMI)의 회장을 역임했고, 가족교육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하트필드(Agnes B. Hatfield)는 그녀의 책에서 가족들이 경험하는 심리적 고통을 4가지로 기술했다.
1) 상실감/슬픔/안타까움
자녀를 처음 입원시키고 돌아설 때, 부모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심하게 낙담하고 슬퍼한다. 정신병이라는 의사의 말에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절망적이지는 않다. 병원과 의사를 믿기 때문이다.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쩔쩔 맸는데 ‘병이라서 그랬구나.’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약 잘 먹고 의사 말 잘 듣고 한 동안 치료하면 병이 나을 거라 생각한다. 다행히 몇 달 만에 또는 1~2년 만에 이전의 생활로 복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아들의 발병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우리는 수년간 슬픔 속에서 지냈다. 혈기왕성하고, 건장하고, 매력적이고, 똑똑하고, 재치 있던 청년이 친구 하나 없이, 사소한 일로도 힘들어하고, 사람을 피하고, 겁에 질리고, 견디기 힘든 환청에 시달리며 젊은 시절을 허비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하트필드의 책에서 인용)
안타깝다. 가족들은 발병 이전의 당사자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은 당사자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족들은 커다란 슬픔과 상실감을 경험한다. 이 감정은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년 이상 지속된다. 그 이유는 가족들이 당사자와 함께 생활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그때보다 못한 현재의 모습을 지켜보는데 따른 슬픔과 상실감은 어쩌면 평생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호전과 악화가 반복되는 병의 특성 또한 슬픔과 상실감을 오래도록 지속하게 한다. 증상이 호전되면 가족들은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증상이 악화되면 희망은 절망으로 바뀐다. 그때마다 가족들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녀나 배우자가 정신질환에 걸렸을 때, 상실감과 슬픔, 그리고 안타까움으로 고통 받는 기간을 거치지 않고 그냥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기간 동안 가족들에게는 전문가와 주변사람들의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며, 그 속에서 가족들이 자신의 상실감, 슬픔, 안타까움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위로와 격려는 햇살과 같다. 그것은 힘든 감정을 녹여준다. 그 속에서 가족들은 힘든 기간을 보다 수월하게 보다 짧게 넘길 수 있다.
2) 불안감과 걱정
우리는 누구나 안정된 생활을 원한다. 하루하루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불행히도 많은 가족들이 불안감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들은 ‘오늘은 상태가 어떤가?’ 하고 당사자의 눈치를 보며, 혹 증상이 재발하거나, 엉뚱한 일을 벌일까봐 걱정한다. 매일의 생활이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망상, 환각, 횡설수설하는 말, 이상한 행동과 같은 당사자의 증상은 가족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가족들은 당사자가 왜 그런 증상을 보이는지, 그런 증상을 보일 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된다. 당사자의 폭언이나 폭력도 심각한 문제다. 전체 가족들 중 1/3 정도가 폭행당한 경험이 있으며, 당사자가 또다시 난폭한 행동을 보일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당사자의 빈번한 재발도 가족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나라에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위기개입이나 응급의료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당사자가 갑자기 발병할 경우 가족들은 도움을 청할 곳이 없다. 병원에 연락해도 당사자를 데려오라고 할 뿐 앰뷸런스를 보내주지 않는다. 119 응급구조차도 정신질환자를 후송해주지 않는다. 법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가족들은 입원시킬 병원을 알아보고, 당사자를 데려갈 사람을 구하고, 후송할 차를 구하기 위해 쩔쩔맨다.
당사자가 입원한 이후에도 가족들은 당사자의 병에 관해 시원한 설명을 듣지 못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아무 것도 교육받은 것도 없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퇴원통보를 받게 되면 그 순간부터 가족들은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집에 데려다 놓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퇴원한 당사자를 돌보느라 매이게 되고, 매일 당사자의 눈치를 보게 된다. 대체로 당사자의 어머니는 당사자를 돌보느라 외출도 마음대로 못하게 된다.
당사자의 병이 만성화되면 부모에게는 또 다른 걱정이 생긴다. ‘내가 죽고 나면 저 애를 어떻게 하나? 누가 저 애를 돌볼 것인가?’ 하는 걱정이다. 설혹 유산을 물려줄 수 있다 하더라도, 당사자를 위한 장래의 계획을 세우기가 매우 어렵다.
이 모든 일들이 가족들로 하여금 불안과 걱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한다. 가족들이 정신질환에 관한 최신정보를 배우고, 대처요령을 습득하면 이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다. 가족들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은 전문가, 정부, 지방자치단체, 가족협회 등에서 지원책을 모색해야 한다. 예로써 응급의료체계, 직업재활, 부모가 사망한 뒤의 대비책 등이 사회공동의 책임 하에 마련되어야 한다.
3) 자존심과 체면의 손상
입원기간 동안 가족들은 흔히 당사자가 시골 친척집에 다니러 갔다고 둘러댄다. 집에 손님이 왔을 때, 당사자를 방에서 못나오게 하거나, 아니면 미리 다른 곳에 보내버린다. 가족들이 외출할 때 당사자 몰래 나머지 가족들끼리만 다녀오기도 한다.
이러한 일들은 당사자가 남들 앞에서 가족들을 난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로써 손님이 왔는데 인사는 않고 손님 얼굴만 빤히 쳐다본다. 사람들 많은데서 갑자기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실실 웃는다. 이럴 때 가족들은 당황스럽고 부끄럽다. 자신의 가족이 남들 앞에서 창피한 행동을 하거나 못난 모습을 보일 때, 손가락질을 받을 때, 비웃음을 살 때 자존심이 구겨지고 체면이 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족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
이 문제는 당사자의 형제나 배우자에 비해, 당사자의 부모에게 더욱 심각하다. 우리는 누구나 자녀가 잘 되기를 바란다. 자신은 비록 고생하더라도 자녀만은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자녀를 위해 온갖 헌신을 다한다. 자녀가 잘 된다는 것은 부모 자신의 삶이 성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계모임이나 친구, 동료들 사이에서 자식 자랑은 가장 큰 자랑거리다. 이 점에서 당사자의 부모들은 냉가슴을 앓는다. 당사자의 못난 행동이나 부적절한 행동은 부모로 하여금 창피함을 느끼게 하며, ‘나는 좋은 부모, 훌륭한 부모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것은 곧 자신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라는 느낌을 준다. 부모가 스스로를 ‘못난 부모, 실패한 부모, 나쁜 부모’라고 느끼지 않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4) 분노/절망/울화
가족들은 열 일 제쳐두고 병을 낫게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외래진료에 따라다닌다. 여기저기 배우러 다니고 물으러 다닌다. 몸에 좋다는 건 다 해 먹인다. 뭐든지 애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 아픈 애가 최우선이다. 모든 생활이 아픈 애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수년간 온갖 노력을 다 해도 여전히 별다른 변화가 없을 때, 가족들은 점차 지치기 시작한다.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자신과 주변사람과 세상에 대해 화가 난다. ‘내가 애한테 좀 더 잘해주었더라면.’ ‘남편이 애를 그렇게 심하게 다루지만 않았어도.’ ‘학교에서 선생이 그렇게만 하지 않았어도.’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난다. 당사자에 대해서도 화가 난다. 비록 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엉뚱한 행동과 짜증나게 하는 행동을 참을 수 없다. 당사자가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게으른 것처럼 느껴진다. 좀 더 노력하면 나아질 것 같은데 아무 노력도 안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분통이 터진다.
다른 가족들도 원망스럽다. 집안일에 조금만 더 신경 써준다면. 당사자를 조금만 더 따뜻하게 대해준다면... 다들 너무나 이기적이고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진다. 병원과 의사도 원망스럽다. 도대체 속 시원한 대답도 없고, 그동안 뭘 치료했는지 의심스럽다. 언제까지 치료를 받아야 할지? 계속 치료받는다고 나을 수 있을 것인지? 문득문득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루하루가 버겁기만 하다. 모든 게 바뀌었다. 자신이 무력한 존재라는 느낌이 든다. 하늘도 원망스럽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게 흔들린다.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막다른 골목에 있는 것 같고, 허허벌판에 있는 것 같다.
이에 더해 현실적인 어려움이 닥친다. 대부분의 가족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한다. 당사자의 치료비는 계속 들어가는데 수입은 줄어든다. 흔히 가족들은 직장생활, 사회생활에서 이전만큼 기능하지 못한다. 당사자 뒷바라지 때문에 또는 실의에 빠져서 직장이나 사업을 그만두기도 한다. 많은 가족들이 이런저런 신체질병을 앓게 되며 우울증에 빠진다. 절망의 순간은 오랫동안 지속되며, 끝이 보이지 않는다. 가족들의 삶은 위기에 처한 것이다.
지금까지 가족들의 네 가지 고통을 언급했다. 상당수 가족이 아픈 자녀를 붙들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같이 죽자.”고 말한 경험이 있다. 이렇듯 가족은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 그래서 포기하기도 한다. 평생 정신병원이나 요양원에 넣어두기도 한다. 심지어는 몰래 이사하고 연락처조차 남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그 가족을 비난할 수 없다. 겪어본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가족의 심정을 이해한다. 정신질환이라는 불청객이 가정에 찾아든 순간, 누구도 고통으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전 세계 모든 정신장애인 가족의 공통 경험이다. 겨울이 오면 누구나 추위를 경험하는 것과 같이,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자연현상이다.
2. 형제자매의 입장
정신장애인 남동생을 둔 제자가 있다. 그런데 남동생이 그만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한 동안 힘들어하다가 내 제자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어느 날 저녁식사 중에 말한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마음이 아파요. 좀 더 따뜻하게 대해줄 걸 하는 후회가 들어요. 취직하라고 잔소리하고 들볶았어요.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살아있을 때 서로 다정히 지냈으면 좋았을 걸. 죽고 나서야 후회가 되네요.” 여동생이 정신장애인인 제자도 있다. “안타까워요. 그런데 웃기는 건 제가 동생 걱정하기보다는 나도 혹시 정신병에 걸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곤 했다는 거예요.” 갓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말한다. “누나가 조현증이에요. 누나 행동이 못마땅해서 힘들었어요. 지금은 따로 사니까 괜찮지만, 누나가 엄마한테 함부로 말하고 대들고 하면 짜증났어요. 그래서 가끔씩 싸우기도 하고 그랬어요.”
형제자매는 부모와 입장이 다르다. 당사자가 20세 전후에 흔히 발병하기에 중·고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 10년 정도 아픈 형제자매와 같이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기에 형제자매들은 여러 가지 불편을 겪는다. 이유 없이 시비 걸고 짜증내는 행동을 감당해야 한다.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 못한다. 병원비로 돈이 많이 지출되기 때문에 필요한 물품이나 용돈을 제때 받지 못한다. 공부에 지장을 받기도 한다. 부득이 방을 따로 얻어 살기도 한다. 대개의 형제자매는 병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멀쩡한데 왜 저러나?’ 싶다. 성격결함처럼 느낀다. 그래서 종종 대판 싸운다. 내가 알고 지내던 당사자가 자기보다 10살 어린 남동생에게 뺨을 맞고 그날 밤 목매달아 자살한 일도 있었다. 또 형제간에 서로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난리칠 정도로 험악하게 싸운 경우도 있다.
부모가 아픈 자녀의 문제를 다른 자녀들에게는 비밀로 하다가 수년이 지나서야 부득이 사실을 밝히는 경우도 있다. 형제자매들이 결혼 적령기가 되어 상견례를 하고 결혼식을 할 때 종종 고민스럽다. 사실을 밝혀야 하나? 숨겨야 하나? 결혼식 무렵에는 멀쩡한 데도 아픈 자녀를 병원에 입원시켜두기도 한다.
서로 정이 많은 형제자매도 결혼하고 나면 조금씩 태도가 달라진다. 결혼 전에는 안타까워하고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던 형제자매도 결혼하고, 애를 낳고, 애들이 커가면서 점차 아픈 형제자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아픈 형제자매는 서운하다. 반면에 꾸준히 아픈 형제자매를 돌보거나, 경제적으로 지원해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다. 대다수 가정은 형제자매의 나이가 40대, 50대가 되면 유산상속 문제가 불거진다. 공평하게 유산상속을 하는 집도 있다. 반면에 아픈 형제자매에게는 유산이 한 푼도 돌아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유산상속 문제가 이슈로 등장하면 형제자매들의 태도가 이전과는 달리 냉담해지는 경우도 있다. 조금만 문제 있다 싶으면 즉시 입원시키려하고, “돈 관리할 능력이 없으니, 유산을 주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사자는 서운하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특히 어려서 같이 자랄 때는 정이 있었는데, 차차 변해가는 형제자매의 태도를 보며, 당사자들은 서글픈 느낌을 느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나는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나? 결국 정신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평생을 살다가 죽어야 하는 게 아닐까?’ 걱정한다.
형제자매들 간의 우애는 가정마다 다르다. 차이가 많이 난다. 가족협회 임원은 대개는 당사자의 어머니고 더러 아버지도 계신다. 가끔 배우자도 있고, 또 아주 가끔 형제자매도 있다. 유치원 원장을 하시는 가족협회 임원이 있다. 그 분은 결혼해서 자신의 가정을 꾸렸음에도 아픈 언니를 자기 집에 모시고 살면서 평생 언니를 돌봐왔다. 그 분은 언니 맛있는 거 사주고 여행시켜주면서 삶의 기쁨을 느낀다. 가끔 버스를 대절해서 다른 당사자들을 가득 태우고 언니와 함께 여행을 시켜주기도 한다.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다.
대개의 형제자매는 결혼 전에는 아픈 형제자매를 걱정하고 지지해주지만 결혼 후에는 점차 관심이 멀어지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 자식은 그렇지 않겠지.’하고 미련을 못 버리는 부모님들이 많다. 그래서 건강한 자녀에게 유산을 전부 상속해주면서 “네가 잘 돌봐라.”라고 당부하신다. 하지만 그 때 뿐이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상당수 경우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3. 가족의 강점
나는 늘 농담처럼 말한다. “전문가와 가족 간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가장 큰 차이는 전문가는 돈을 받고, 가족은 그 돈을 어떻게든 마련해 준다는 거죠.” 나는 또 말한다. “어떤 전문가라도 한 달만 당사자와 살아보라 하세요. 한 달을 견뎌낼 수 있는 전문가는 거의 없을 거예요.” 당사자에 대한 가족들의 애정과 헌신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이 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는 당사자의 10~20%만이 가족과 함께 생활한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경우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는 당사자의 80~90%가 가족과 함께 생활한다. 미국의 경우 당사자의 의식주 및 치료/재활은 정부의 책임이라는 게 사회통념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그걸 가족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가족들은 당사자에게 의식주와 치료비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사회복귀에 필요한 모든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다. 또한 매일의 생활을 점검해주고, 지지해주고, 격려해준다. 당사자의 삶의 목표를 의논해주고, 목표달성에 필요한 제반정보와 도움을 제공해준다. 취업기회를 마련해주고, 직장유지가 가능하도록 각종 조언과 지원을 해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렇듯 당사자를 돌보는 모든 역할이 가족에게 집중되어 있고, 전문가는 약물처방이나 입원치료 정도의 역할에 머물러 있다. 전문지식을 배우지도 못하고, 조언 받지도 못한 가족이 당사자의 일상생활 뒷바라지,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재활상담, 사례관리와 같은 전문적인 업무까지 온갖 역할을 감당해야 하다 보니, 자연히 모든 게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가족들이 당사자에 대한 애정 하나로 헌신하다 보니 성과는 없고 오히려 역효과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가족들 탓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가족들에게 치료, 재활, 재기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제공해야할 의무가 있다.
4. 가족 자신을 보살피는 생활
대다수 가족들이 당사자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그 외에도 해야 할 일이 많다. 직장생활을 하거나, 집안 살림을 하거나, 당사자 이외의 다른 자녀를 돌봐야 한다. 당사자에게만 신경 쓰느라 이러한 역할을 소홀히 하면 사회생활 또는 가정생활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 모든 게 점점 더 힘들어진다. 한편으로 당사자를 돌보면서, 다른 역할들도 충실히 하기란 매우 어렵다. 보통사람들보다 몇 배의 힘이 필요하다. 많은 가족들이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있다. 따라서 당사자를 잘 돌보기 위해서라도, 또한 다른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라도 가족 자신이 지치지 않게 끊임없이 자신을 보살펴야 한다.
“아들이 병이 나고 회복의 여정을 걸어온 지난 수년간을 돌이켜 보면, 내가 그것을 보다 잘 이겨내도록 해준 것은 아들의 인생과는 별도로 나 자신의 삶을 지속했으며 나의 인생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이다.”(아들이 조현증인 어느 어머니)
1) 자신의 개인생활을 정상적으로 유지한다.
가족들은 자신의 삶을 당사자 중심으로 맞추어서는 안 된다. 즉 당사자를 위해 자신을 지나치게 희생하는 태도는 좋지 못하다. 가족은 자신의 욕구를 돌보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욕구를 돌보고, 자신을 보살핀다는 것은 자신의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직업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 친구들을 만나는 것, 때때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 등이 필요하다.
2)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한다.
가족은 자신의 신체건강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이해 좋은 음식을 섭취하고, 충분한 운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가족은 정신건강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분전환이 되고,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가급적 자주 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당사자를 돌보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적절히 기분전환을 해주지 않으면 조만간 당사자를 돌볼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될 것이다. 어느 어머니는 아침마다 한 시간 요가를 하는데,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3)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가 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노력은 할 수 있지만, 결과를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 정신질환은 재발이 잦고, 장기간의 노력이 필요하며, 종종 당사자가 기능저하를 보이는 질병이다. 때문에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미흡할 수도 있다. 결과가 미흡한 것을 두고 자신을 책망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은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해야 한다.
4)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표현한다.
가족들은 커다란 마음의 고통을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다. 때로는 분노 또는 슬픔 같은 강한 감정에 압도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가 힘들고, 당사자를 보살피기도 버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애써 부인하거나, 표현하지 않고 참기만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가족들이 경험하는 어떤 종류의 감정이든 그것은 고통에 따른 정상적인 감정이다. 따라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 중에 그렇게 느끼지 말아야 할 나쁜 감정이나 잘못된 감정이라는 것은 없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남들 앞에서 슬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 가족들끼리 자주 모임을 갖거나, 개별적으로 만나는 것이 감정을 인식하고 해소하는데 도움이 된다. 연구에 의하면, 친척이나 친구는 당사자로 인한 고통과 관련된 감정해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마음이 맞는 친척이나 친구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기분전환에 도움이 되며, 때로는 실질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5) 가족들 간에 역할을 분담한다.
가족은 힘들다. 그러나 한두 명이 모든 일을 떠맡고, 나머지 가족들은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있다. 역할분담을 하지 않으면, 역할이 집중된 가족은 쉽게 지치게 되고, 다른 가족들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가족들이 서로의 감정을 나누고 서로 도움을 요청하고 역할을 적절히 분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고통은 나누면 가벼워지는 법이다.
이상의 5가지 권고사항은 리버먼(R. P. Liberman)의 책을 김철권·변원탄이 번역 출판한「만성 정신과 환자를 위한 정신재활」에 수록된 내용을 저자들이 수정하여 서술한 것이다.
당사자가 바라는 가족
1. 따뜻하고 변함없는 가족
당사자들 중에는 유난히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 고통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자기 집을 개방해서 언제 누가오든 반겨주고 밥 먹여주고 재워주는 사람이 있다.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아서 내가 선생님이라 존칭하던 분이 있다. 다른 회원들은 선배님 또는 형님이라 불렀다. 양장훈 선생님이시다. 그 분은 사회복귀시설이 없던 시절에 낮 시간에 자기 집으로 회원들을 오게 했다. ‘밥 문나?’ 철학을 갖고 계셔서 본인이 밥하고 설거지하고 다른 회원들 밥 챙겨 먹이는 걸 낙으로 여겼다. 제주도가 고향이라 늘 돈 모아서 저렴한 갈치식당을 하고 싶어 했다. 뒤늦게 알았다. 아픈지 2달 만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제주도 사는 형님이 올라와서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얘기를 몇 사람 거쳐 들었다. 모두들 안타까워했다. 그 분 신세를 진 사람들이 많다. 알았다면 많이들 문상했을 텐데 다들 몰라서 못 갔다. 장례식장이 쓸쓸했단다. 기일이 음력 1월 4일이란다. 내년부터 기일에는 그 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조촐한 추모행사를 갖기로 했다. 오후 3시 파란마음쉼터에서.
당사자들은 따뜻한 사람, 마음이 넓은 사람, 이해심이 많은 사람을 좋아한다. 자기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일반인도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나 일반인은 경우에 따라 돈이나 권력이 많은 사람을 더 좋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일반인도 대개는 따뜻한 마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정신장애인은 더더욱 필요로 한다. 마음에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마음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이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 치료약이 절실하듯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는 사랑이라는 약이 절실하다. 그래서 대다수 정신장애인은 돈이나 권력보다 사랑이 많은 사람,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더 좋아한다.
당사자들은 처음부터 마음을 열지는 않는다. 좀체 사람을 믿지 못한다. 상처받은 경험 때문이다. 흔히 부모로부터 상처받았다. 부모들은 말한다. “내가 뭘 잘못했나요? 나는 한다고 했어요. 다른 형제보다 저한테 더 잘하면 잘했지. 더 못해준 건 없어요.” 당사자들이 부모에게 서운했던 일을 얘기하면 “그게 왜 문제가 되지? 그 정도 일이야 누구나 있는 일이잖아. 다 컸는데 툭툭 털어버리지 못하고 지금도 그 얘기한다는 게 이해가 안 돼.”라고 한다. 그 말도 맞다. 부모가 특별히 잘못하지는 않았다. 그러려고 그랬던 것도 아니다. 책을 쓰면서 사촌동생 인주에게 읽어봐 달라 했다. “쇠그릇, 사기그릇, 유리그릇이 있는데 부모들이 그걸 모르고 다 쇠그릇인지 알고 망치로 두드리는 것 같아요. 그릇 키운다고.” 맞다. 그거다. 단지 부모가 자녀의 특성을 몰랐을 뿐이다.
상당수 부모들이 말한다. “얘가 자랄 때는 누구보다 착했어요. 말 잘 듣고 형제간에도 항상 양보하고.” 내 경험도 그렇다. 당사자들은 대체로 착하다. 겉으로는 발톱을 세우고 ‘으르렁’거리는 경우도 있지만 타고난 품성이 착하다. 마음이 따뜻하다. 가정이 화목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부모가 싸우면 다른 형제보다 상처를 많이 받는다. 부모와 잘 지내기를 바란다. 그래서 부모 말 잘 듣고, 부모가 나무라면 심하게 마음 아파한다. 형제간에 친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늘 양보한다. 결과적으로 형제들로부터 치인다. 결국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상처를 더 많이 받는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 당사자들은 상처받고 움츠러든다. 그래서 부모도, 가족도, 주변사람도 쉽게 믿지 못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주변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도 경계한다. 그리고 시험한다. 극과 극을 오가며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려 한다. 부모들이 뒤늦게 뉘우치고 잘해줘도 믿지 못한다. 부모나 주변사람들이 당사자의 친구가 되려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때로는 그 시험이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다.
‘내가 왜 이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에 대한 답이 중요하다. 가족이라도 포기할 수 있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비난하기 어렵다. 가족들도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비를 넘기는 가족도 있다. 그 고비를 넘기는 부부도 있다. 아무 관계가 없는 남인데도 끝끝내 의리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즉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그 고비를 넘길 수 있다. 의리가 있어야 한다. 변함이 없어야 한다. 내 기분에 따라 기복이 심하면 당사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해야 한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당사자들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준다.
2. 의견을 존중해주는 가족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말 한 마디가 당사자에게 상처가 된다. 왜 그런가? 비유해서 생각해보자. 어깨를 심하게 다친 사람이 있다. 어깨 위에 옷을 걸치고 있어서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고 어깨를 툭 치면 상대는 소리 지르며 아프다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정신장애인은 마음에 상처가 있다. 별다른 악의 없이 또는 좋은 의도로 한 말이 상처를 건드릴 수 있다. 당사자들은 화내거나, 속상해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우울해할 수 있다.
따라서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기보다 당사자의 말을 잘 들어봐야 한다. 당사자는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서 힘들었어.” 하고, 부모는 “억울해. 내 딴에는 한다고 했어.”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당사자의 말이 옳다. 받는 사람이 “못 받았다.” 하면 못 받은 거다. 주는 사람이 엉뚱한 걸 준거다. 필요로 하는 걸 못 받았기에 “못 받았다.” 한다. 당사자가 “힘들어.” 하면 힘든 거다. “이게 뭐가 힘들어?” 할 게 아니다.
정신장애인 부모들 중에는 전심전력으로 노력하는 부모들이 많다. 하지만 성과 없이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는 경우가 있다. 왜인가? 출발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판단하고 목표를 정하고, 당사자를 설득해서 억지로 뭔가를 하게 한다. 그러면 한 동안은 성과가 있나 싶지만 어느 날 무너진다. 당사자의 욕구와 의견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사자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한 목표만이 달성 가능하다. 부모가 판단하고 선택한 목표는 대개는 궁극적으로 실패한다. 당사자에게서 그만한 힘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에는 힘이 모자라 주저앉는다.
‘부모는 결정하고 자녀는 따른다.’ 상당수 부모와 정신장애 자녀가 그 패턴으로 살아왔다. 당사자들은 착하다. 부모와 잘 지내고 싶어 한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때로는 그게 발병과정에서 일부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치료라는 미명하에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병이 나으려면 그 패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부모부터 자신의 패턴을 포기해야 한다. 즉 자녀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자녀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녀를 지켜보는 게 중요하다.
부모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부모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고 행복하도록 노력하고, 가정화목을 위해 노력하는 게 바람직하다. 비록 그 자체가 발병원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수 당사자가 가정화목에 대한 욕구좌절 때문에 힘들어하며, 가정화목을 간절히 바란다. 내 생각이 옳다면, 가정화목을 이루는 게 아픈 자녀를 돕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부불화나 가족 간의 불화를 뒷전으로 방치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애를 낫게 하는 게 우선이지. 다른 게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뜻을 강요하면, 결국은 자녀가 부모를 뿌리치려 하게 된다.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지만, 힘들어서 부모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당사자는 어느 날인가 그것을 어렴풋이 자각한다. 그때부터 투쟁이 시작된다. 강요하는 부모와 뿌리치려는 자녀 사이에 엄청나게 심한 싸움이 시작된다. 싸움이 일어나면 부모는 “병이 심해졌다.” 한다. 여기에 전문가가 가세한다. 약을 높이고, 그래도 안 되면 입원시킨다. 그래서 결국 다시 ‘순한 양’으로 만들어 놓는다.
상당수 당사자는 직장도 없고, 돈도 없고, 취업해서 일할 자신도 없고, 친한 친구도 없고, 그러다보니 부모의 요구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부모형제로부터 무시당해서 힘들고, 별일 아닌 일로 혼나고, 어쩌다 덤벼들면 엄청 심하게 혼나고, 결국 재발하고, 이 과정을 몇 번씩 반복한다. 처음에는 부모를 바꿔보려고도 하고, ‘내가 살려면 이 집을 나가야지.’ 생각도 한다. 하지만 갈 곳이 없다. 이 글을 읽고 이종찬이 말한다.
“저도 어머니가 너무 쥐고 있어서 힘들었어요. ‘내가 마마보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 생각에 동의하면 ‘괜찮다.’하고 동의 않으면 ‘이상하다.’하고 입원시켜요.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하면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내가 왜 굳이 하루 3만원 벌기 위해 막노동을 했을까?’ 생각했어요. 내 주관대로 살고 싶었어요. 어머니 원하는 대로 대학가면 취업 못해요. 취업해도 못 버텨내요. 집은 골치 아프고,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스트레스는 많고, 약물부작용 있고, 병은 숨겨야 하고, 약간만 민감해지면 숨어버리게 돼요. 20대에는 그래도 기회가 많아요. 30대 넘어가면 버텨내기가 힘들어요. 취직할 데가 없어요. 그래서 그냥 ‘예’ ‘예~’ 하고 살아야 하죠. 고달픕니다. 전문가가 어머니와 코드가 맞으면 최악이죠. 전문가가 내 편 들어줄 때 고마웠어요.”
3. 억울한 심정을 알아주는 가족
김연수 소장에게 상담 받고 있는 어느 어머니의 글이다.
“아들이 술이 만취되어 ‘엄마께 할 말 있다.’며 얘기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쌓였던 불만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으면서 잘난 척 살았지만 저한테는 엄청 스트레스였다는 것, 부모의 기대에 차지 않는 자신에 대한 자책, 열등감, 자격지심 등이 마음 속 깊이 뿌리박혀 힘들다는 것, 특히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이 극도에 차 있었다. ‘혼자 큰소리치며 일방적인 지시명령뿐이고 자식의 심정을 이해해주려고 생각조차 못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맞벌이하여 경제적으로 좀 여유 있게 지냈겠지만,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못 받았다.’느니 하며 부정적인 원망 일변도의, 주정을 하듯 퍼부어 대는 말들을 밤늦도록 들으며 참담한 심경이 되었다.
너무 심하다 싶어 내 변명을 늘어놓으려니 ‘그건 듣기 싫다.’하고 무조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야속하고 억울한 심정이 들기도 했지만, ‘저게 얼마나 사무쳤으면 술기운을 빌어 하소연하듯 그러는가?’싶어 안됐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나 미안하고 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바쁘게 사느라고 자식 옳게 못 키웠다.’는 회한이 일기도 하고, 어리석고 욕심이 많아 잘못 살아온 일들이 후회막심이었다. 이미 쏟아진 물이라는 체념이 들었다. 지난 일들을 되돌릴 수는 없고, 지금부터라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용서를 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정말 생각이 부족했구나 싶다.’ 등의 말을 해주며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제 심정을 터놓고 얘기해줘서 다행이고 고맙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식이 부모에게 얼마나 큰 업이고 기쁨이고 보람이고 사명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자식이 아니면 어느 누가 내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고, 비통하게 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내가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를 반성하게 해줄 수가 있을까?’ 싶다. 자식을 통해서 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게 되고, 조금이라도 더 하심하고, 인생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겸손해질 수 있게 되어, 못난 자식에게 한없이 감사한 마음을 보낸다.”
어머니는 자신이 쓴 글을 읽으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아픈 아들이 아니다. 건강하게 회사 잘 다니는 아들이다. 아들 얘기 들으며 마음이 복잡하셨단다. 마음이 아프고 참담해서 견디기 힘드셨단다. 그래도 마음 잘 추스르고 ‘감사일기’를 쓰셨다.
이렇듯 일반인도 자식으로부터 원망을 듣는다. 자식은 저 편하면 부모에게 고맙다 하고, 저 힘들면 부모를 원망한다. 대개 그렇다. 자식이 원망할 때 ‘저게 요새 많이 힘든가 보군.’ 하면 원망을 잘 받아줄 수 있다. ‘내 딴에는 한다고 했는데.’ 하면 억울한 심정이 든다. 정신장애인 자녀는 더더욱 부모를 원망한다. 그만큼 자기 처지가 힘들고 억울해서 그렇다. 부모가 “미안하다. 잘못했다.” 수긍하지 않고 버티면 소리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패악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속상한 감정을 감당 못해서 그렇다.
이때 부모도 억울하다. ‘잘한다고 했는데 왜 이런 병이 왔는지?’, ‘정신 차릴 때도 됐는데, 왜 정신 못 차리고, 사사건건 부모 원망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저 힘들어 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때로는 억울하고 원망스럽다. 억울함과 원망이 지나치면 울화가 찬다. 별일 아닌 일로 화를 낸다. 아픈 자녀도 울화가 찬다. 수시로 가족 간에 대판 싸움이 일어난다. 그래도 부모는 낫다. 대판 싸우고 나면 몸져누우면 된다. 아픈 자식은 부모보다 더 억울하다. 싸우면 “병이 도졌다.” 한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제 발로 또는 강제로 들어가게 된다.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억울한 일이 있어 직원에게 대들거나 싸우면 독방에 갇힌다. 잘못하면 묶인다. 쿠키의 말을 인용한다. “일주일간 묶여 봤습니까? 일주일간 묶어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직원에게 고분고분해야 되고, 부모에게 고분고분해야 된다. 그게 치료다. ‘순한 양’이 돼야 한다. 그래야 퇴원할 수 있다. 아니면 몇 년간 또는 자칫 평생을 병원에서 지내게 될 수도 있다. 상당수 환자들이 치료가 뭔지를 곧 깨닫는다. 그래서 치료된 척 한다. 화가 나도 숙인다. 고분고분한 척 한다. 하지만 억울함, 분노, 그리고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이 무릎 꿇었다.’는 수치심과 굴욕감은 오랜 세월 마음에 응어리로 남는다. 한 당사자가 문자를 보내왔다.
“왜 여느 또래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하고 부모님 없으면 시설에서 사람대접도 못 받고 살아야 하는지 너무 버겁고 그런 운명이 싫습니다. 딴 애들은 약 안 먹고 시설과 병원과 관련 없이 가정이루고 대인관계 잘하고 취직해서 잘 사는데 불공평합니다. ‘평생 약 먹어라.’는 의사도 너무 싫어요. 증상과 부작용과 아랑곳없이 대범해지라고만 할뿐. 다 때려 치고 포기하고 싶은 맘만 가득합니다. 이런 장애 없었다면 지금보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겠죠. 의사도 간접경험일 뿐 직접 약 먹지 않으니까요. 제가 의사라도 약복용하고 힘들면 입원하라 하고 그런 말 쉽게 하겠어요. 자긴 당사자가 아니니까요.”
당사자는 억울하다. 병이 원망스럽고, 치료진이 원망스럽고, 자신의 그런 마음을 몰라주는 부모가 원망스럽다. 진짜 치료는 ‘순한 양’이 되게 하는 게 아니다. 마음속에 맺힌 한을 풀어주는 게 진짜 치료다. 억울함, 원통함, 분노, 수치심, 굴욕감을 풀어줘야 한다. 그러려면 그 마음을 알아주고 받아줘야 한다. 부모는 자식의 마음에 맺힌 ‘피멍’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당사자를 위한 가족의 역할
1. 병에 대해 공부하기
당사자를 돕는데 있어서 전문가를 뛰어넘는 가족들만의 강점이 있다. 그 강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족은 당사자를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둘째, 가족은 당사자의 재발조짐을 가장 먼저 알아채고, 조기에 신속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셋째, 가족은 당사자의 매일의 생활을 다양하게 도와줄 수 있으며 당사자에게 재활의 기회를 연결해 줄 수 있다.
넷째, 가족은 당사자가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막아주며,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강점이 있기에 만일 가족들이 병에 대해, 그리고 병이 당사자의 삶에 미치는 파국적인 영향에 대해, 당사자들의 내적 경험과 대처노력에 대해, 적절한 지원방법에 대해, 그리고 성공사례들에 대해 지금보다 더 많이 알게 된다면 가족들은 당사자를 보다 잘 돕게 될 것이며, 자신의 당면과제를 보다 잘 해결하게 될 것이다.
불행히도 전문가들은 최근에야 이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따라서 지금까지 가족들은 별다른 지식과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병과 병으로부터 시작된 온갖 낯선 사건들에 대처해야만 했다. 가족들은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상식을 동원하여 갖은 노력을 다한다. 다행히 효과를 보는 경우도 있지만, 투입된 노력에 비해 그 결실이 보잘 것 없는 경우도 있다.
사회생활에서 저절로 터득한 상식적인 대처방식들, 일반적인 대인관계에서 지금까지 사용해 온 익숙한 대처방식들만으로는 정신질환으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문제들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다. 가족들이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불행히도 그 기간 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소진한 나머지 “할 만큼 했다.”, “이 병은 낫지 않는다.”, “노력해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도 한다.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만일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사용해 온 방법들이 적절치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방법을 배워야 한다. 재기에 성공한 당사자들, 자신의 자녀를 일으켜 세운 가족들, 그리고 최신의 학술연구들에 의해 효과적인 방법이 많이 개발되었다.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법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라서 가족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이 병에 관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이 점에서 전문가들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 당사자의 첫 입원 시에 입원 당일부터 가족교육을 시작해야 한다. 모든 정신보건전문가는 병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효과적인 대처방법을 가족에게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지금까지 대다수 가족은 오직 혼자의 힘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대응방법을 익혀왔다. 5년, 10년, 15년, 20년 당사자 뒷바라지를 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대단한 노하우를 터득한 가족들이 꽤 있다. 한편 발병초기부터 적극적으로 공부하여 상당한 노하우를 갖춘 가족도 있다. 어느 날 메일을 받았다.
“대흥님이란 분이 따님의 발병 때부터 극복과정을 글로 올리다보니 몇 년에 걸쳐서 40회를 쓰게 되었고, 그 따님이 아버지 사랑이 듬뿍 담긴 정성의 돌봄으로 병을 극복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지 2년여 되었답니다. 그 극복사례는 모든 당사자와 그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답니다. 참고하십시오.”
즉시 검색하여 연재된 40편의 글을 모두 읽었다. 내용이 너무나 상세하고 진솔해서 감탄했다. 인터넷 ‘다음’의 ‘우기모임’ 카페 ‘대흥님 게시판’에 연재되어 있는데, 가족들에게 주는 당부의 글 일부를 짧게 인용한다.
“첫째, 환우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자주 솔직하게 나누어야 한다. 둘째, 환우가 혼자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셋째, 환우에게 배려를 많이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절대로 혼자 있게 하지 말라. 드라마 연속극을 보면서 이야기의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앞으로 전개될 상황도 이야기 나누고 뉴스도 보게 하라. 신문이나 책도 읽게 하라. 희망적인 대화를 나누어라. 잘못해도 질책하거나 책임추궁 식 대화를 하지 말라. 운동은 반드시 시켜라. 기를 살려주라.”
가족협회 임원을 오래 하셨던 어떤 어머니를 만났다. “패밀리링크(http://familylink.or.kr) 들어가 보세요. 가족교육 동영상 10편이 있는데 정말 잘 돼 있어요. 꼭 보세요.”라고 당부하신다. ‘패밀리링크’라는 모임의 인터넷 홈페이지 얘기다. 용인정신병원에서 세계보건기구(WHO)의 후원을 받아, 수년간 정신장애인 가족을 가족교육 강사로 양성했다. 그 가족 분들의 모임이다. 검색해 봤더니 강의내용도 좋고 구성도 잘되어 있어서 감탄했다. ‘5과 가족’에서 ‘참새 이야기’는 특히 재미있었다. 엄마 참새가 새끼 참새들에게 먹이만 물어다주고 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새끼 참새들이 다 크고 나서도 날아다닐 생각을 않고 엄마 참새에게만 의지했다. 엄마 참새는 덩치가 다 큰 새끼들에게 먹이를 물어주느라 너무 힘들어서 결국 죽게 되었다. 엄마 참새가 죽고 난 다음 새끼 참새들은 이제나 저제나 엄마 참새가 먹이 물어다 주기만 기다리다가 결국 굶어 죽었다는 얘기다.
가족들이 혼자 힘으로 모든 걸 감당해나가려 하기보다 가족협회나 인터넷카페에 가입하여 다른 가족들과 교류하고 협력하는 게 바람직하다. 병에 대해 보다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고, 그때그때마다 당면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할 수 있고, 가족 자신의 정서적 고통을 표현하고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신장애인 가족들의 대표기구인 대한정신보건가족협회는 전국 광역시․도 단위로 지부를 두고 있는데, 각 지부는 정기적인 가족모임과 가족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인터넷카페들 중 ‘아름다운 동행’은 가족 분들 위주의 카페고, ‘우기모임’과 ‘파란마음 하얀마음’에도 많은 가족들이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2. 당사자의 말에 귀 기울이기
상당수 가족들이 당사자와의 대화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대화법을 배우고 싶어 한다. 이전에 10년간 가족교육을 할 때 8주 가족교육을 마친 후 참석하신 가족들에게 희망하는 후속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매번 대화법교육이 1순위였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정신장애인 가족에게 적합한 대화법훈련 프로그램이 없기에 ‘부모자녀효율성훈련(PET)’, ‘적극적 부모훈련(APT)’, 또는 ‘비폭력대화’ 등의 일반적인 대화법훈련 프로그램을 추천해주곤 했다. 그러면서 매번 “대화법이나 대화기술보다 마음가짐이 더 중요합니다. 표면적인 말의 내용보다 말 속에 숨어있는 속마음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평온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야 합니다. 또한 말하기가 아니라 경청하기를 잘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아무튼 경청이 가장 중요하다. 좋은 대화의 출발은 경청이다. 그런데 경청을 어렵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간단하다. ‘전체 대화시간 중에 누가 더 말을 많이 했는가?’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된다. 예로써 1시간 동안 서로 반반 정도 발언을 했다면 경청한 게 아니다. 나는 10~20분 정도만 말하고 상대방이 40~50분 정도 말할 수 있게 배려해야 한다. 또 한 가지 기준은 ‘상대의 말을 표면적으로 알아들었는가? 아니면 속마음을 알아챘는가?’ 하는 점이다. 말 속에 숨어있는 속마음을 알아채야 한다. 대화시간과 속마음 알아채기. 이 기준을 둘 다 충족했을 때 비로소 경청했다고 할 수 있다.
가족들 중에는 당사자와의 관계가 틀어져서 힘들어하는 분들이 꽤 있다. 대화법 교육을 원하는 가족들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관계가 좋지 않을 때는 함께 사는 것 자체가 고역이며, 당사자를 돕고자 해도 도울 방법이 없다. 따라서 가족들은 종종 좌절감과 무력감을 경험하게 된다. 당사자와의 관계가 틀어져 있는 가족의 경우 이전에 당사자와의 대화방식이 좋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예로써 경청을 소홀히 하고, 일방적인 지적, 지시, 충고, 설득, 설명, 훈계, 비난, 무시 등을 자주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대화방식을 바꿔야 한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관계개선에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 선택과 결심이 필요하다.
관계개선을 하려면 일단 대화시간을 늘려나가야 한다. 또한 경청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경청, 즉 귀 기울이기를 잘 하게 되면 가족은 당사자의 속마음을 보다 잘 알게 되고, 당사자는 가족의 관심과 애정을 보다 잘 느낄 수 있게 된다. 또한 당사자의 말수가 점차 늘어나게 된다. 그게 중요하다. 당사자의 말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관계가 개선되고 있다는 증거다. 따라서 가족은 맞는 말이든 틀린 말이든 당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해야 한다. 엉뚱한 말이라도 귀를 기울이는 게 좋다. 그 이유는 그 속에 당사자의 속마음이 담겨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엉뚱한 말이나 대수롭지 않은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상대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을 전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당사자는 누군가가 자기 얘기를 잘 들어줄 때 자신의 내면세계를 탐색할 기회를 갖게 된다. 즉 말하는 도중에 자신이 처한 상황, 자신의 상처, 욕구, 강점, 한계점 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고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갖게 된다. 따라서 “음. 그랬어?” “그랬구나.” “네 말도 일리가 있네.” “좀 더 얘기해봐.” 등과 같이 대꾸해주며 관심 있게 들어주는 게 필요하다. 충고, 설득, 장황한 설명 등은 좋지 않다. 그 순간 당사자는 내면탐색을 중단하고 입을 닫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바른 소리’가 나오려 해도 참는 게 좋다. 항상 그렇게 하긴 힘들겠지만 가급적 그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귀 기울이기는 당사자의 부정적 감정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불안, 분노, 우울, 수치심, 억울함 등의 부정적 감정, 특히 마음 속 깊이 뿌리박힌 부정적 감정은 당사자의 치료, 재활, 재기를 방해한다. 당사자 스스로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잘 풀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주변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특히 가족에 대한 원망, 두려움, 서운함 등의 감정으로 당사자가 힘들어한다면 가족이 나서서 그 감정을 풀어줘야 한다.
귀 기울이기를 잘 하면 부정적 감정을 풀어줄 수 있다. 당사자가 부모를 원망할 때 나무라기만 하는 경우가 있다. 또는 듣기 싫어서 “그래 알았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하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말로 충분히 표현하도록 허용해줘야 한다. 젖은 수건을 장롱 속에 넣어두면 썩겠지만 햇볕에 널어주면 마른다. 마찬가지로 부정적 감정을 마음에 담아두면 곪지만, 말로 표현하면 조금씩 해소된다. 따라서 당사자가 원망할 때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해봐. 내가 잘 들어볼게.”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충분히 듣고 난 뒤 공감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위로해줘야 한다.
사과하기, 위로하기, 격려하기, 칭찬하기, 기뻐하기 등도 필요하다. 당사자가 화를 내면 사과해야 한다. 마음의 상처 때문에 원망하고 화를 내기 때문이다.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러냐? 언제 철들래?” 하지 말아야 한다. 몸은 성인이 됐지만, 마음은 자라지 못했다. 상처받은 그 시기에 머물러 있다. 상처를 쓰다듬어 주고 풀어주면 당사자는 다시 자란다.
사과하기는 한 번 했다고 되는 게 아니다. 당사자의 마음에 맺힌 게 많을 땐 백 번이라도 거듭 사과해야 한다. 원망을 듣고 있자면 가족들 입장에서는 억울하기도 하고 화가 날 수도 있다.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반복되는 원망을 듣고 견뎌내기는 무척 힘든 일이다. 하지만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치료, 재활, 재기에 도움이 되고 싶다면 원망을 충분히 들어주고 적절히 사과하는 게 필요하다. 원망과 화를 받아주기가 너무 힘들 때는 자수하는 게 방법이다. “미안해. 하지만 나도 많이 힘들어. 나 좀 봐주라.” 이렇듯 봐달라고 말하는 게 좋다.
때로는 ‘위로하기’도 필요하다. 당사자가 슬퍼하면 위로해야 한다. ‘격려하기’도 필요하다. 당사자가 힘들어하면 격려해야 한다. 또한 ‘칭찬하기’도 자주 해줘야 한다. 하지만 명심할 점은 ‘칭찬하기’는 작은 변화, 일시적인 변화만 가져온다는 점이다. ‘기뻐하기’가 더 좋은 방법이다. 기뻐하기는 큰 변화를 이끌어낸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귀 기울이기다. 당사자와 자주 대화하고 귀를 잘 기울이다 보면 당사자의 속마음을 잘 알아챌 수 있게 된다. 적절한 반응을 해주기가 수월해진다. 그때그때 적절한 반응을 해주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안 되더라도 귀 기울이기 자체만으로도 절반의 성과는 거둔다. 귀를 기울이면 그때부터 모든 게 변하기 시작한다. 가족과 당사자 간의 관계가 점차 개선되고 당사자는 삶에 대한 의욕을 갖기 시작한다.
3. 내려놓기 : ‘강요하지 않고 당사자의 선택을 존중하기’
1) 부모의 기대 : 성공/사회적응
많은 부모들이 ‘병을 낫게 해야 된다.’ ‘취업시키고 결혼시키고 남들처럼 번듯하게 살도록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욕심과 기대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부모가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하지만 자녀의 욕구, 심리상태, 기능수준, 그리고 사회적 처지 등을 깊이 헤아려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부모의 생각을 강요할 경우 자녀는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때로 치료, 재활, 그리고 재기를 방해하기도 한다.
‘잘 산다는 것, 행복하다는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다. 정신장애인에게는 현대사회 자체가 불행이다. 현대사회는 너무 빠르다. 너무 복잡하다. 경쟁이 심하다. 차라리 옛날 수렵사회, 농경사회가 나았다. 평생 한 마을에서 늘 보던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만나면 “밥 문나?” 물어 주고, 좋은 일 있으면 함께 기뻐해주고, 슬픈 일 있으면 같이 슬퍼해주고, 실수해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해주고, 못난 모습 보여도 대충 눈감아 주고, 힘들어 하면 “그래 쉬었다 해.” 해주던 시절. 그 시절이 훨씬 나았다. 현대사회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브레이크 고장이 아닌가?’ 싶다. 그걸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질려버리는 사람도 있다. 너무 빠르다. 너무 위험하다. 경쟁적인 현대사회에 적응하기가 버거운 사람도 있다. 또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들에게 남들처럼 살라고 요구하는 건 폐렴과 천식이 심한 사람에게 먼지구덩이 속에서 일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모든 부모는 자녀가 가급적 월급을 많이 받는 직업, 존경받는 직업을 갖기를 원한다. 그게 행복이고 자랑거리라고 생각한다. 상당수 정신장애인 부모도 마찬가지다. 처음 발병하면 빨리 병이 나아서 남들을 따라잡고 남들처럼 좋은 직업을 갖기를 원한다. 투병생활이 10년쯤 되면 부모의 태도는 둘 중 하나가 된다. 정신장애인 자녀에게 실망하여 한심해 하던지, 아니면 꿈이 조금 소박해진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한다. 대기업은 아니라도 중소기업에라도 취업하기를 원하고, 존경받지는 못하더라도 남에게 업신여김 당하지 않을 정도의 직업은 갖기를 원한다. ‘그게 인간구실하며 사는 거다.’고 생각한다. 투병생활 20년쯤 되면 많은 부모들이 비로소 자신의 기대를 내려놓는다. 취업을 하든 말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냥 제 몸 하나 건강하면 되지. 제 마음 하나 편하면 되지.’ 생각하며 자녀를 내버려둘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끝내 이게 안 되는 부모도 있다. 엄청 한심해하고 부끄럽게 생각하며 죽는 날까지 자녀를 구박하며 사는 부모도 있다.
부모의 생각과 기대에 맞는 자식도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못한 자식도 있다. 많은 부모가 자식이 기대에 못 미치면 한심해하고 안타까워한다. ‘그게 자식에게 얼마나 커다란 마음의 상처가 되는지?’ 부모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자녀가 뜻대로 안되면 부모는 달래고, 설득하고, 강요하고, 혼내고, 아무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본다. 그래도 안 되면 부득이 전문가를 찾는다. 하지만 상담을 맡기고도 부모는 자신의 바람과 고집을 포기하지 않는다. 상담자가 자신의 대리인이 되어 주기를 원한다. 겉으로는 상담자의 말을 수긍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그래도 내 애는 내가 더 잘 알아.’라고 생각한다. 상담자에게 이런 저런 주문도 하고 은근슬쩍 코치도 한다. 자기가 돈을 내니 상담자가 자기 뜻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익은 상담자는 부모의 요구에 따른다. 부모가 자신을 칭찬하면 유능한 상담자인 듯 어깨가 으쓱하고, 부모가 자신을 비난하면 자신감을 잃고 움츠러든다. 하지만 진짜 상담자는 다르다. 자녀가 아니라 부모가 바뀔 것을 요구한다. 부모가 바뀌면 자녀는 저절로 바뀐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모는 좀체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픈 건 내가 아니라, 우리 애예요.”, “나는 사회생활도 잘하고 아무 문제없어요. 조금 문제가 있다 해도 그 정도 문제없는 사람이 있나요?”, “선생님이 상담전문가이긴 해도 일반적인 경우고, 우리 애는 제가 선생님보다 더 잘 알아요.”라고 주장한다.
김연수 소장이 하도 답답해서 한 내담자 어머니께 한 말이다. “제가 노력하면 아드님은 어떻게 바꿔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어머님은 도저히 바꿀 자신이 없네요.” 어머니가 웃으시며 대답하신다. “그렇죠. 제가 고집이 좀 세죠?” 하지만 말 뿐이시다. 당신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 그게 애한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신다. 그러니 당신이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못하신다. 어머니는 오늘도 답답해하신다. “상담을 몇 달째 받아도 애가 왜 안 변하죠?” “언제쯤 정상적인 생활을 할까요?”
2) 발상의 전환 : 또 다른 삶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성공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만이 치료고, 그것만이 재활인가? 그들이 보통사람과는 다른 삶을 살도록 허용해주면 안 되는가? 마르티노는 말한다.
“느림의 철학이 필요해요. 우리 정신장애인은 자신의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 또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
우리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든가 ‘TV특종 놀라운 세상’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첩첩산중 동굴 속에서 몇 년 또는 몇 십 년 은둔생활을 하는 기인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곤 한다. 내 생각에 그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회적 기준에 따라 살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신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살기로 선택하고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정신장애를 앓는 당사자도 자기 나름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삶이든 그것이 고뇌 끝에 선택할 삶이라면 그 삶 또한 나름대로 가치 있는 삶일 수 있지 않을까?
암벽등반을 선택한 당사자가 있다. 부모님은 아직도 내심 취업을 바라시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암벽등반에 재미를 느끼고, 자신의 재능을 암벽등반에 쏟아 붓고 있다. 그 당사자는 영어독해능력이 있어서 암벽등반에 대한 외국서적 또는 잡지를 읽고 번역해서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고 있다. 암벽등반 강사과정을 수강하면서, 장차 유능한 암벽등반 강사가 되고자 하는 꿈도 갖고 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꼭 남들처럼 살아야 하나? 돈을 많이 벌거나 존경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며, 행복하게 사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 돈을 추구하는 삶도 있고,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는 삶도 있고, 즐거움과 재미를 추구하는 삶도 있다.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삶도 있고, 사랑을 추구하는 삶도 있고, 여유를 추구하는 삶도 있다. 어떤 삶이 다른 삶보다 더 낫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각자가 원하는 삶이 다르고, 각자에게 어울리는 삶이 다르지 않을까?
발상을 전환하면 모든 당사자가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 이상 자신을 ‘실패자, 낙오자’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자녀를 구박할 필요도 없고, ‘치료다. 재활이다.’는 미명아래 자녀를 몰아 부치지 않아도 된다. 자녀는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때 비로소 힘이 나온다. 꺼져버린 동력에 불이 다시 들어온다.
3) 경험담 : ‘이제야 내려놓게 되었다.’
물론 상당수 부모의 경우 사회적 성공이라는 기대를 내려놓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잘나가는 부모일수록 내려놓기가 많이 힘들 것 같다. 나도 최근에야 내려놓기가 뭔지 알게 된 것 같다. 가족이 아닌 제삼자인 나도 쉽지 않았다. 가능성이 있다 싶은 당사자에게는 이런저런 제안을 많이 했다. 번역을 해봐라. 컴퓨터학원에 등록해봐라. 대학에 진학하는 건 어때? 박사과정에 입학해보지. 자격증에 도전해보지. 운전면허를 따봐. 아르바이트를 해봐. 아무튼 권유도 많이 하고 격려도 많이 했다.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혹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눈뜨면 할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사회복귀고 재활이라고 생각했다. 늘 재기를 주장하면서도, 사회적 성공 내지는 사회복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때로는 당사자들에게 부담감이나 상처를 주기도 했고 심지어는 무리한 요구를 해서 나를 피하게 만들기도 하고, 재발하고 좌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야 알았다. ‘내가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나는 그냥 옆에 같이 있어주는 게 최선이구나. 만날 때 반가워하고, 이래도 예쁘다하고 저래도 예쁘다하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구나. 돈 있으면 맛있는 거 사주고. 그렇게 해야 하는 거구나.’ 그걸 깨달았다. 당사자 어머니들 중에서도 나와 같은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한 분의 말씀을 인용한다.
“병 뒷바라지한 게 20년인데 이제 조금 알겠어요. 왜 그렇게 안달복달 했는지 모르겠어요. 애를 일으켜 세우겠다고 애를 쓰니 저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나도 이제 살아봐야 20년 남짓인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저 하나 편하고 행복하고, 나 하나 편하고 행복하면 되는데. 그냥 내려놓고 하루하루 사이좋게 즐겁게 살면 되는 건데. 돈이 무슨 소용 있고, 남 보기에 번듯한 게 무슨 소용 있나요?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안 아프고 그냥 하루하루 이렇게 살면 되는 걸.”
부모와 관련된 원고를 검토해 주십사 또 다른 당사자 어머니를 만났다. 며칠 전 어느 정신보건센터에서 부모역할에 대한 특강을 하셨단다. “내가 자녀를 성공시켜서 앞에 선 게 아니고, 15년 동안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그래서 앞에 섰어요.”라고 운을 떼고 강의를 시작하셨단다.
“대부분의 가족들이 돈이 없어요. 나도 한 때는 돈을 많이 벌었죠. 애가 아프면서부터 치료비로 돈이 많이 나가고, 사업투자를 잘못해서 손해를 많이 봤어요. 사는 게 이래저래 힘드니까 내가 병이 오더라고요. 우울증이 심해서 요즈음에도 약을 먹고 있어요. 한 몇 년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나서야 애 심정을 알게 됐어요. 대부분 부모들이 상실감, 육체적 질병, 우울증, 그리고 영적문제로 고통 받아요.”
어머니 자신이 고통받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녀를 이해하게 되셨단다. 내가 물었다. “그래 뭐가 바뀌셨나요?”
“이전에는 ‘이러지 마라. 저러지 마라.’ 했죠. ‘그게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 옛날에는 돈 벌어 와야 치료인지 알았어요. 어떻게든 공부시키고 취업시키려 했죠. 이제는 ‘책상 한 번만 닦아줘도 성공이다.’ 생각해요. 처음에는 교회 안 간다고 두드려 패고, 약속 안 지키면 혼냈죠. 2년간 딸하고 둘이 피터지게 싸웠어요. 몰랐을 때는 내 식대로 하려 했죠. 하도 답답해서 알고지내는 가족협회 임원 분께 전화했어요. ‘엄마가 더 아프네. 엄마가 져주고 내려놔라.’하세요. ‘참 대단하시다.’ 생각했어요.
자녀가 아프면 가정이 어려워져요. 내가 기쁨이 없이 살고 있더라고요. 내가 아파보니까 이해가 되요. 이제는 내려놓게 됐어요. 요즈음에는 뭐라 안 해요. 오히려 딸이 대단하다 싶고, 딸에게 이것저것 물어도 보고, 힘들 땐 ‘엄마 좀 도와줘.’ 해요. 이젠 안 싸워요. 저는 그래도 10여년 여기저기 교육도 들으러 다니고, 가족협회 임원도 맡아 일해보고, 가족교육 강사로 강의도 하러 다니는데, 제가 이렇게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는데 모르는 가족들은 어떻겠어요?”
첫댓글 본 카페의 [자료실 함께 만들어가기] 메뉴에 있는 <촛불저서> 게시판에 들어가시면, 이 책 (잡초인생: 정신장애인의 삶의 여정) 전체를 무료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단 회원가입을 하셔야만 됩니다. 가입신청 즉시 정회원으로 가입됩니다.)
촛불님, 좋은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들을 환자로 대하지 않겠습니다. 아들로 대하겠습니다.
ㅎ 아드님이 엄청 좋아할 듯하네요. 제 글의 요점을 잘 이해해주시고 받아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님과 친구처럼 지낸다 하셨는데 참 좋은 일이죠. 아드님과도 그런 관계로 지내실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촛불님의 강의로 토욜이 오전 열심히 적고 뉘우치며 배우며 공부하고 있어요. 아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되는 시간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부하셨다니 좋으네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