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청송심씨 역사적 배경
그럼, 심덕부. 원부는 누구일까? 먼저 두 분의 후손들이 어떻게 본촌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흔적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다. 우리문화누리단원들이 두 분들의 정확한 높은 뜻을 알아야 광산구에 있는 동호동 지역에 보다 깊이 있게 알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말 심덕부.원부 형제 조선조.不仕 두 길로 청송심씨가 남동·본촌마을에 입향한 것은 조선 중종 재위기간에 발생한 기묘사화 때 이조정랑을 지낸 심풍공이 지금의 나주 금안동으로 유배를 온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정랑공의 아들 광헌(光憲)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많은 전공을 세워 김해부사의 벼슬을 지낸 후 관직을 사임하고 돌아와 이곳에 정착했다는 것이 후손들의 설명이다. 이후 나주에 숨어살던 많은 후손들은 지난 1728년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자 후환이 두려워 새로운 삶터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중 일파가 본촌에 들어와 오늘날의 청송심씨 집성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광헌 공이 입향한 이래 일부 가구와 후손들이 상당기간 동안 추가 입향 했으며 정치적 격변을 피해 집단 이주해 동족마을을 형성한 사례에 속한다. 고려시대 위위사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하는 청송심씨는 시조의 증손으로 고려말 문하시중 심덕부(沈德符)와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심원부(沈元符) 형제에서 크게 둘로 갈린다고 했다.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이후 문하시중을 지내고 조선개국 후 좌의정을 지낸 노당 심덕부는 대대로 중앙에서 벼슬을 지낸 반면 작은집인 악은(岳隱) 심원부의 자손들은 고려 멸망 후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들어간 선조의 선훈불사(先訓不仕)대대손손이 고향에 살면서 경직(京職) 벼슬을 멀리 하였다. 유훈을 끝까지 지켜내며 고향에 살았다. 이 같은 연유로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사는 심원부의 후손들은 큰집인 심덕부의 집안을 가리켜 ‘서울집’으로 부르고 있다. 심덕부는 슬하에 인봉(仁鳳)을 비롯, 의구(義龜), 계년(繼年), 징(澄), 온(溫), 종(淙), 정 등 모두 7형제를 두었다. 이들 7형제는 차례대로 인봉은 도총제공파(都總制公派), 의구는 판사공파(判事公派), 계년은 지성주사공파(知成州事公派), 징은 인수부윤공파(仁壽府尹公派), 온은 안효공파(安孝公派), 종은 청원군파(靑原君派), 정은 동지총공파(同知總公派)로 각각 분파되었다고 한다. 청송심씨는 이들 7형제에 이르면서부터 대대로 자손이 번창 했고, 특히 심징과 심온의 자손들이 가장 가문을 빛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심징의 아들 석준(石雋)은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증직 받았고 손자인 선(璿)은 경기감사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했다. 선은 안인(安仁)·안의(安義)·안례(安禮)·안지(安智)·안신(安信) 등 5남을 두었는데 넷째아들인 안지는 해주목사를 지냈다. 8세손 안지는 6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다섯째인 풍이 이조정랑의 자리에 올랐다. 앞서 언급했듯 풍의 아들 삼암공 광헌이 임진왜란 때 세운 무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撫願從功臣)으로 김해부사를 역임한 뒤 본촌마을에 이주 정착한 후 화룡(化龍)-예걸-정수(廷壽)-대춘(大春)-득수(得洙)-계하(啓下)로 이어지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2015년 8월 31일 작성자 천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