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 시와사상 신인문학상 당선작] 김사리
헐거운 햇빛의 내력 외 4편 / 김사리
조여진 볼트와 너트처럼
이와 이가 맞물려 터질 것 같은 한 때
불꽃 튀는 햇빛만이 모두였던 그때
내겐 구름이라곤 하나도 없었지
이젠 내 속이 비어서
건물과 건물 사이 먹빛하늘도 들어와 앉네
닳아 없어진 것은 영영 사라진 게 아니야
흔적을 더듬어 가면
상처가 흘린 붉은 얼룩이 눈부셔
말 없는 돌의 이마위로 다시 반짝이네
더딘 걸음걸이와 늘어난 소매 사이
바람이 수시로 드나들자
허공은 하늘의 틈새
손바닥은 지도의 틈새
네 맘속의 난 고독한 햇빛의 틈새가 되고 말지
틈새 속으로 따뜻한 바람 고이네
헐거워지는 것도 햇빛의 한 표지라고
물 한 모금 입 안에 머금고
오래오래 참으면 금 그은 햇빛의 경계에
키 높이만큼 자란 잡초가 보여
깎아지른 계단을 오를 때 문득 떠오르는
햇빛이란 두 글자로 된 묘비명
비바람과 눈보라를 뚫고나와
실눈 뜨고 보는 안개 낀 세상
가라앉는, 멀어진, 그러나
헐렁한 햇빛
낡은 깃발처럼 펄럭이네
민달팽이
저것은 집이 없는 자의 슬픔, 또는 집을 버린 자의 자유
시각은 수시로 변한다
집이 짐이 되는 순간, 등은 무거워지고,
깃들 곳이 없는 순간, 등은 허무해진다
두 개의 선택에서
민달팽이는 자유를 택한 것
맨발의 사내, 여전히 몸을 부릴 곳은 저 바닥이다
그 많은 생각을 다 깔고 누운 동안
노숙의 냉기가 뼛속으로 달라붙는 동안,
하루가 빠르게 돌고
지구의 어깨가 기울어졌다
세상의 속도는 그를 비껴가고
여전히 느릿느릿, 그의 보폭은 바뀌지 않았다
먼 하늘로 달아난 한때의 별들
물컹, 그것을 밟았을 때 알아챘다
밟히는 순간 놀라 튀어나온 푸른 내장들
별들의 푸른 내장이 실핏줄처럼 비치는 것은
남은 목숨이 딸랑거리는 것처럼 쓸쓸한 일,
도시의 그늘이 깊어지는 밤
달팽이의 생각이 발등을 타고 오른다
신발을 잃어버린
오래전 기억이 달팽이의 몸속에서 출렁거린다
길고 긴 밤이 느릿느릿 끈적거린다
어떤 마감
달이 어둠 쪽으로 턱을 괴고 있다
어둠은 불 켜진 건물, 달리는 차를 품고
불 꺼진 건물, 멈춘 차는 잠든 사람을 품는다
달이 어둠에게
어둠이 건물에게
건물이 사람에게 호렴*을 친다
오독오독 살아 좀처럼
숨죽지 않을 것만 같은 모난 것들
마침내 바닥에 귀를 대고 눕는다
길 위로 세상 모든 길들이 눕는다
달도 바닥에 눕는다
군고구마처럼 밤이 따끈따끈 데워질 때
두꺼운 프라이팬 위에서
달이 노랗게 익어간다
왕방울 눈을 뜨고 가로등도 잠이 든다
시간이 책갈피 한 장 가까스로 넘기고 있다
* 알이 굵고 거친 천일염.
손가락
무언가를 적고 싶어
나뭇가지 끝의 이파리처럼
몸의 끝에 매달렸지만 세상과 가장 먼저 닿기도 하지
악기의 울대를 자극해
내 귀를 열게 한 적도 있어
이래서 되겠니, 그때 나는
낡은 피아노의 목소리를 믿지 않았어
목소리를 버린 피아노는 내 손가락을 거부했지
부지런한 천성이 결국 버림받는 신세로 전락하고야만 현실,
흑백의 건반 사이로 믿었던 시간이 사라졌어
바락바락 악을 쓰고 거품을 물던 일상이
생손가락을 잘라먹고야 말았지
껍데기만 남아 껍데기로만 증명하는 삶이란
구멍 난 고무장갑과도 같은 것,
낡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순간
손가락이 말라버렸어
<이미>라는 순간은 지나가고 <아직은> 숨이 멎지 않은 인생
손가락 껍데기만 남아 생손가락이었던 젊은 시절을
간절히 불러들이고 있을 뿐
텅 빈 손가락이 바람을 불러 모으지만
피아노는 끝내 열 개의 손가락을 모두 삼켜버린 뒤였어
나는 기다렸지
이파리처럼 손가락이 돋아나기를,
가야할 곳을 가리키면서, 사라진 목소리를 그리워하며
새벽공사
희뿌연 햇살 한 트럭 싣고
새벽이 공사현장으로 진입한다
저 많은 적재량은 늘 하루만에 소모된다
전망 좋은 숲 어귀
굴참나무는 제 그늘을 풀어
터 닦기 공사가 한창이다
역세권에서 든
졸참나무는 굴참나무인 척
그늘을 비벼 담장을 쌓는다
휘파람새는 청잣빛 목소리 돌돌 말아
초인종을 매단다
담쟁이넝쿨은 암벽을 기어오르며
그 많은 방을 하나하나 도배중이다
지붕을 이고 새가 방안으로 날아들자
새벽은 햇살을 찍어 담장을 칠한다
굴뚝이 몽글몽글 쏘아올린 연기로
울타리를 치고 있다
집 모퉁이 여기저기 둘러보며
막바지 공사 중인 굴뚝새 한 쌍
입주를 준비 하는 사이
내 둥지에도 어느새 동이 텄다
오늘을 완성하기 위해
어제는 미완성이었다
김사리(본명 김현미)1968년 경남 밀양 출생 / 경성대 유아교육과 졸업 / 시산맥 영남시동인 / 2014년 <시와사상> 여름호 신인문학상 수상
-------------------------------------------
월경성 기흉 외 4편 김호준
겨울
매달이 고역이다
기침으로 나온 세상에서
핏덩이들은 한 장 휴지에 지워진다
한숨을 주워 거품으로 욱여넣는다
봄
비 내리는 여관방에서
나에게 귀 기울인다
죽음을 기다리는 숨은
가벼운 잡음이다
여름
구멍을 매단 브래지어를 자주 입는다
기울어져 간다 허공으로
무람없는 안부를 내던지고
한쪽으로만 가슴을 불린다
가을
나무에 미어지는 그늘을 따다 보면 썰겅거리는 소리에 취한다
목젖에 걸린 이름 없는 주검들을 꺼낸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 지하로까지 내려가 흙을 빨고 있었다
기도에는 보호막이 없어서 나는 처녀가 아니다
* 월경성 기흉 : 자궁에서 떨어져 나간 조직이 폐 안에 정착하여 생리 때마다 흉통, 호흡곤란, 객혈을 일으키는 병. 환자는 폐로 월경을 한다.
달의 기운
할아버지의 고개에는 달이 매달려 있어요 텅 빈 도화지를 넘기며 세월을 흘리는 동안에도 달은 차오르거나 사그라지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온 식도와 기도는 분화구가 생긴 다음에야 멀어졌어요 후두암이 모든 말을 적출하여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기도 위로는 은색 비늘이 자라났어요
분화구에 낚싯대를 드리워요 미늘에는 후각망울이 걸렸을까요 옴팡진 골짜기를 떠나지 않는 물고기에게서 달의 냄새가 나질 않아요 눈에서 눈이 옮겨가요
기울어질수록 기울어지는 달은 아가미처럼 여린 조직, 들썩임을 봉합하던 달빛은 아직도 낚싯대를 잡아당기고 있어요 와락
삶은 반쪽으로
장이 열리면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곳에 들러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구해오곤 하였다 눈을 뜨면 산란기를 맞은 빗줄기들이 해변에 나가 옷을 벗는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흉터 안에 그것을 숨겨놓았다 어린 고래는 한쪽 고환을 잃었다 바다색은 유독 진했다 왼쪽에서 이는 파도가, 거세다 축 늘어진 지느러미는 이따금씩 똬리를 틀었고 등에는 짜디짠 멍이 허물어지지 않은 채 퍼런빛으로 여물어간다 혈전이 풀리지 않아 산호가 되어가는, 수술대에 오른 유선형의 몸통은 가벼운 흔적으로 남을 다리를 구겨 넣은 지 오래, 갓 자란 해초 사이로 허연 거품 일며 푸푸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사춘기 소년이다 주섬주섬 손이 줍는 쓰레기들에 나는 실망하지만 칼을 찾는다 포기하지 않고 기나긴 관을 이어온 어린 짐승의 숨소리는 지난 한 자리들을 옮겨 다니며 칼의 시간을 벌어 주었을 뿐인데 더 이상 들리지가 않는다 나는 가차 없이 선을 그어 기울어진 순간을 들어낼 것이다 먼 바다로 흘러가 돌아오지 마라 다시는
내일은 일어설 수 있을까
술에 취한 병실 침대가 벽시계를 흔들어 깨우는 사이 뻐꾸기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밤새 오줌을 지리던 새우는 채 펴지지 않은 등으로 종이 달력을 걷어 올리고 있다 화장을 하지 않은 간호사가 건조하게 문을 연다 정확히 두 갈래의 표정으로 정수리를 튼 가르마 바닥에서 바닥으로 물은 흐르니까 이상하다 떨어지라는 말을 들은 것은 분명한 사실 종이컵을 내밀던 여자가 침을 뱉는다 의자차가 다가와 침대를 바다로 몰아내는 일이 빈번하니 어떠한 것도 주고받지 않는 시대임에는 틀림없다 이름이 같은 사내가 하얀색 가운을 입고 있어 의자차를 밀어준다 따뜻한 바닥을 지닌 복도에는 자갈이 박혀 있고 그림은 벽에 엉겨 붙는다 오줌통을 집어 들면 알약을 두 알씩이나 떨어뜨려 주는 햇살이 신문을 밟고 들어온다 바보상자에서 쓸려나오는 음식에는 소리가 나지 않고 소리는 식판을 거쳐야 들리지 않는다 먼지들이 피아노 건반을 친다 명찰名札보다 잔인한 사슬이 망상이다 오늘의 소식도 나를 다루지는 않았다 점심을 먹을 자격이 없어 다도茶道의 예는 소중하다 옆 사람에게 흰 옷을 빌려야 다음날에도 일어설 수 있다 다리에는 자라지 않는 뼈들이 기생하고 있다
들의 장례식에는 눈이
나는 남자들과의 부딪침이 두렵다 거울을 깨고 나온 명암은 허공에서 휘어진다 성긴 모공들 사이로 고개를 드는 연기煙氣는 예후가 투명한 난치, 기도의 문을 두드리는 바이러스
14년 전
영어 공부를 하다 늘어진 테이프는 아버지들의 명상을 꿰매는 일에 쓰였다 우는 상처들 속에서 나는 반란의 기수, 황제는 봉합의 대상 눈이 오는 날 나는 테이프를 새것으로 바꾸기 위해 집을 나서곤 했다
10년 전
운동장에 서면 나의 살갗에는 모래알이 돋아났다 공처럼 뒹굴다 바닥이 드러나는 접점에서 아이들의 발길질은 싱겁게 녹아내렸다 운동장을 하얗게 덧칠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눈이 내렸다
18년 전
세 들어 살던 옆집 남자가 죽었다 어린 아들에게 하얀 젖통을 물리던 외숙모는 문을 닫지 않고 살았다 세모눈에 대한 복수는 구멍으로부터 멀어지는 연정戀情
5년 전
전반에는 골을 많이 넣었고 후반에는 수비만 하다가 졌다 축구 경기를 중계하던 연병장에서 사선死線들은 자리를 옮겼다 하악골만 앙상하게 남긴 채 살아남은 이들이 탈영했다
7년 전
운전을 하면서 난잡하게 김을 불어넣으니 면허증은 심장에서 튀어나왔다 뒷좌석에 남자들을 태웠다 면허 없는 아가리로 자동차를 쏟아낼 줄만 아는
영정 사진의 얼굴은 자주 바뀐다
상복을 입는 매일이 장례식이다
▲ 김호준 | 1988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졸업. 현재는 대전 충남대에서 의학 공부 중. honor0530@naver.com
------------------------------------------------------
[제20회 시와사상 신인상 당선작]
천장, 굴비가 산다 외 4편 / 심규환
굴비 한 마리 천장에 매달려 있다
삭은 육신으로 밧줄에 묶여
끼니 때마다 찬 없이 흰밥만 나왔다
아버지는 말이 없다
자꾸만 굴비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밥만 씹어 삼켰다
이가 다 빠지도록
저놈의 굴비 저놈을 없애버려야 해
허공에 대를 놓아 굴비를 낚으려 할 때
굴비가 나를 바라보았다 물기 없는 눈으로
눈조차 떨어져버린 눈구멍으로
벌어진 아가리 속에서 끝없이 없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날 밤, 긴 악몽을 꾸었다 굴비의 눈구멍 속, 깊은 바다에서
온몸을 뜯어 먹히는 꿈, 시퍼렇게 뜬 물고기들의 눈
다른 곳을 향해도 끝내 내게로 와 박히는 시선
그 후로 배웠다 찬 없이 밥을 먹는 법
목구멍이 짜 맨밥을 삼켜야 하는 이유
허공에 맴돌던 어머니의 시선
헤엄치는 물고기를 좇던 시선의 궤적
그리고 밥숟갈처럼 놓아버린 초점이 가닿은 곳
매달려 있다
어려서 죽은 형
염장된 조기들이 눈물을 뜯어먹고 살고 있다
창 밖에는 소금이 눈처럼
베니크라게1)
탄생, 유체, 아성체, 성체, 폴립, 유체, 아성체, 성체, 폴립∞
내게도 기억이란 것이 있다면 딱 이틀 치 뿐이에요. 오늘 아침에 태어나서 내일 밤에 죽고 그 다음 날 다시 사실 죽는 건 아녜요. 번데기 속에서 깊은 잠을 자는 거죠. 자고 일어나면 다시 태어날 거예요. 내겐 수명이라는 것이 없어요.
동굴 속은 우주 같아요.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움직여요. 행성의 소멸에 관여하는 거죠. 발광 생물들은 좋은 영양분이니까요.
사실 나는 수많은 나 중 하나일 뿐이죠. 내가 이틀을 살고 또 내가 태어나요. 또 이틀 뒤에는 내가 태어나고요. 그 이틀 뒤에 또 내가 태어나죠. 그렇게 수많은 이틀 동안 얼마나 많은 내가 태어났을까요? 기억이 기억을 품고, 기억의 기억을 품고 기억인지 기역인지 기윽인지 모를 시간 속에서 단어들은 하나 둘, 머릿속을 떠나더군요.
심해에는 이상한 생물들이 많죠.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시계초침은 항상 왼쪽으로 돌았어요. 자꾸만 나를 죽여버리고 나만 살고 싶었어요.
이틀은 항상 모자라거나 넘쳤어요. 1292번째 나는 왜 그랬을까? 1321번째 나는 어떨까? 사실 1292번째인지 5212번째인지 알게 뭐예요. 잠시 후면 난 잠에 빠질 것이고, 그럼 또 내가 태어날 텐데요. 내 생은 길지요. 그래서 더 짧아요. 오늘을 기억할 날이 올까요?
1)이탈리아 살렌토 반도, 지중해 해저동물에 서식. 크기 1cm 내외의 해파리로 홍해파리라고 불림. 노쇠하여 죽기직전에 번데기 같은 상태(폴립)로 변해 태어난지 얼마 안된 상태의 유체가 되어 다시 성장을 시작한다. 이때 걸리는 시간은 48시간이다.
취한 방
비가 와서, 비처럼
은근슬쩍 숙취가 와서 어둔 방 안에 누워 있는데요.
방이 자꾸 변해요 방이 교수대로 변해요 나는 잘못이 없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빌어도 검은 간수들이 내게 천을 씌워요 수도 없이 나를 죽여요 혀를 쇄골까지 늘어뜨리고 바지에 똥을 몇 번이나 쌌던지! 죽다죽다 정말 죽어버릴 것 같을 때,
방은 창녀촌으로 변해요 나는 바닷가 조개껍질만큼 많은 여자들과 뒹굴어요 나는 모든 여자의 첫 손님이에요 사정을 하고 사정을 하고 또 하다보니 뼈란 뼈가 다 녹아버려요 이제 그만하자 사정사정 했더니 홍등이 꺼지고 캄캄해요 잉크 떨어진 펜촉일까요 간이옷장 지퍼일까요 방문열쇠일까요 무언가 반짝여요 별이에요
방이 우주로 변했어요 풍뎅이 껍질같이 환한 어둠속을 숨도 못 쉬고 떠다녀요 조금도 답답하지 않아요 발을 구르며 광속으로 헤엄쳐요 목성의 대적반에서 화성의 산맥으로, 안드로메다에서 솜브레로 은하로 우주의 끝에서 끝까지 헤엄쳐요 달표면 크레이터, 어머니의 주름살처럼 깊은 행성의 내부, 눈가에서 액화되는 메탄가스와 흉골 속에 감춰둔 소행성들. 우와 우주는 좋구나 박수를 딱! 쳤더니
방이 자궁으로 변해요 여보 우리 아기발길질 하는 것 좀 보세요 어머니 전 스물일곱이에요 여긴 좀 답답하군요 이제 절 좀 낳아주시죠?
얘야 노란 울타리집 아들이 목을 매었다는구나 겨우 스물하나에 그 젊은 것이…. 술 취한 등불이 흔들리는구나. 빗물에 질척질척 걸어가는 그 애의
낡은 운동화가 보이는구나. 운동화만 홀로 걸어가고 있구나
눈사람의 아침
1.
하루가 무료해서 죽었던 것인데, 수챗구멍에서 수 만 마리 파리들이 나와 내 몸에 꼬이더니, 한 점 한 점 살점들을 떼어먹고는 수챗구멍 속으로 사라졌는데, 수만 마리 파리로 수챗구멍 긴긴 터널을 건너 지옥문에 도착했는데, 잉잉 파리의 날갯짓으로 울며 지옥문 앞을 알짱대다가 지옥 문지기가 뿌린 주황색 감귤향 에프킬라를 맞고, 그 여름 서귀포 따가운 햇볕, 현기증 느끼며 바닥에 뒹굴었는데
2.
윗집 누나의 팬티를 훔쳐 코를 박고 자위를 한 죄, 자위를 하고 티슈가 없어 팬티로 닦고 버린 죄, 커피에 침을 뱉은 죄, 침 뱉은 커피를 들고 굽실거린 죄, 점심에 밥 두 공기를 먹은 죄, 밥 두 공기를 먹어 벨트와 셔츠단추를 압박한 죄 … 태어난 죄, 어미 뱃속에서도 십 개월 할부로 태어난 죄, 할부로 태어나 이자도 못 갚은 죄, 죄, 죄, 죄…
3.
문지기가 지옥문을 열었다 감귤향 에프킬라에 취해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며 윙윙거리는 것이 파리인지 프라이데이 나잇 파리2) 인지 프랑스 파리인지 아프리카 사파리인지 내 눈깔이 사팔이인지 얼어 죽은 성냥팔이인지….
4.
아침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운다. 창밖이 분주하다. 수챗구멍에다 대고 오줌을 눈다. 오늘 죽을 준비를 하는 눈사람, 하얀 유서가 녹아내리는 아침 7시, 다시 자위를 하는 눈사람,
양들의 조리법
탄카오루양은 어떠신지요? 우리가게 주력상품입니다.
그녀가 산부인과에 다녀왔다고 한다 같이 가주지 못했다 당분간은 만나지 못할 것 같다 결혼기념일을 상하이에서 보내기로 했기 때문
양고기 요리인데 육질이 여간 부드럽지가 않아요
며칠째 잠을 설쳤다 입맛이 떨어져 통 먹질 못했다 자꾸만 꿈을 꿨다 깨고 싶은 꿈
훈제 양요리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꿈속에서 양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어둠의 저 멀리서, 혹은 귓전에서 울부짖는 듯한, 그리고 양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침묵이 울음보다 더 무겁게 어깨를 눌렀다 검은 늪으로 점점 빨려 들어갔다 그 속에서 발버둥치다 깨어났다 온몸에 검은 피땀이 흥건했다 아내의 팔이 송장처럼 목을 휘감아 왔다
조리법이 좀 독특한데요
그녀가 죽었다 번개탄을 피웠다 한다 쩝, 맛있었는데.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허연 연기 사이로 검은 달이 떴다 노린내가 났다 졸음이 몰려왔다 꿈 없이 깊은 잠을 잤다
출산 직전의 어미양을 통째로 숯불에 굽습니다
상하이는 나쁘지 않았다 음식도 입에 맞았고 아내도 즐거워했다
어미양이 잘 익으면 배를 가르고 새끼 양을 꺼내먹죠.
악몽을 꾸지 않았다 아내가 헛구역질을 했다
심규환_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대학원 재학
-------------------------------------------------------------
사건 A 외 4편 / 이서연
들것에 묶여 덜커덩 실려 나간다
말이 되지 못한 소문이 흐른다
소문은 죽은 자의 목소리를 달고
스치는 자의 소맷자락에 매달린다
죽은 자의 갈증인지
산 자의 뉴스인지
마주치지 못한 뼈가
문 앞에서 서성인다
까만 옷의 행인들이 건네는
마지막 인사는
뿌연 연기로 사라지고
진공의 시간만 되풀이 된다
사건은 흔한 기록이 되고
오늘도
금간 사내 하나 들것에 실려 나간다
말더듬이의 꿈
잠에서 깨지 못한 꿈 때문에 숨이 막힌다. 뒤통수가 늪에 빠졌다. 들린 다리 위로 낮에 불던 영하의 바람이 스치고, 오래된 각질에서 소름이 돋는다. 물비늘 일으키는 파도의 등 위로 새의 부리가 꽂힌다. 바다가 엎드려 가슴을 저민다. 찢길 듯한 숨비소리. 막막한 수풀에서 귀를 막는다. 돛단배가 풀 너울 넘어 바람의 방향으로 몸을 당겼다. 그 때 간신히 가시투성이 작대기를 잡았는데, 여전히 졸린 목에는 넘기지 못한 몽환이 있다. 까끌거리는 손으로 아픈 곳을 더듬는다. 얼핏 새벽이 서성이는 익숙한 시간. 기억에 잡힌 소리는 자꾸만 길을 잃는다.
서랍
각도기를 놓았던 자리
검은 매직이 뚜껑을 잃은 자국
휴지에 말린 녹슨 커터 칼날
수몰된 집에서 건져낸
수첩의 얼룩이 서랍의 기억에
봉인 되었다
발송되지 못한 편지는
아직도 결말을 기다리고 있다
가늘어진 머리카락
누구의 것인지 모를 손톱을
깊숙이 묻어둔다
기억에 기생하는 진공된 부유물
각도기를 찾는다
커트 칼날에 베었던 손끝의
통증이 재생된다
말이 줄어든 엄숙한 시간
굵어진 머리만큼
살이 찼지만
얼룩진 수첩에서는 여전히
물먹은 유년이
마른 찰흙처럼 웅크리고 있다
황폐한 보물섬이
녹슨 채 삐걱인다
에어 바운스
바람을 불어 넣자 낯선 성이 생긴다
성급한 터널이 길을 낸다
무력한 팬더가 얼굴을 펴고
지친 라바의 몸이 일자로 선다
오르골이 돌아가듯
공주와 왕자처럼
동화 속 주인공과 친구가 된다
주먹질로 분풀이하는 놀이
공중에 부풀려져 뛰고 구르고
색과 색이 날리고 엉킨다
공이 튕겨지듯 천장의 높이를 잊은 동심
중력을 거슬러 눈이 뒤집어진다
목이 꺾인다
빛이 분열하고
머리끝에서 떨어지는 희열
사탕이 녹아내리듯
공기 빠진 달콤한 여운이 모래성처럼 달아난다
무너진 성안에서 판타지는
멈춰버린 음악과 함께
더 이상 아름답고 행복하지 않다
끝이 난 만화의 다음 편을 기다리며
공기 주머니 하나씩 단 아이들이
주머니가 꺼질 때까지
뛰어 내리기를 반복하지만
부푼 거짓이 주는 황홀경
이빨 빠진 비명의 절정
겸손하지 못한 바람의 의식이 시작되고 있다
Trance Soul
그는 무대 위에서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청량한 고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조명이 밝혀지자
수염자국에 맺힌 눈물. 절정.
그 안에 숨은 그녀의 목소리가
터질 듯한 볼륨으로 울대를 민다
운명은 그녀의 편도 그의 편도 아니다
밤이 되면 달팽이집 지운 자리
그녀를 그려내기 위하여
열심히 분칠하지만
그의 영혼에는 그녀의 탈이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박혀 있다
심장이 터질듯 봉오리가 뜨겁고
걸음마다 날선 그림자가 스친다
그를 바라보는 그대들
그녀를 조롱하며
야유의 박수를 보낼 때
그는 그녀의 가면 뒤에서
그림자 안 진실을 쏟아 내려한다
그녀의 몸짓으로
육신이 벗겨지는 연기를 한다
발끝 조이는 하이힐
뒤바뀐 문신으로 박제 된 그
이서연_ 부산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졸업
-----------------------------------------------------------------------
그물 외 4편 / 김정례
도망치고 있다 다섯 번째 문을 빠져나가고 있다 쫓아오고 있는 그는 아직 25시 편의점에 있다 검은 눈 물고기 찾는 구멍 도망치고 있다 수면 위로 튀어 오른다 구름 속에 갇히기를 원하는 그녀 도망치고 있다 곁눈질할 때마다 잽싸게 꿰매는 공구 아직도 그는 25시 편의점에 있다 또 다른 혈규를 찾아 도망치고 있다
만 미터 트랙 그녀는 도망치고 있다. 파풍에 벗겨진 비늘 좁혀오는 그물망 노랑머리 빨강머리는 도망치고 있다 그림자는 밟혀도 위장술로 피한다 잊혀진 영혼이고 싶은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그녀는 도망치고 있다 그는 아직도 25시 편의점에 있다 달리고 달려도 끊임없이 연장되는 트랙 그녀를 따라 덩달아 뛰는 검은 알리바이 그물망을 얽는다 그녀는 아직도 도망치고 있다 꺼지지 않은 25시 편의점 불빛 그물코를 당긴다
쫓고 쫓기는 재주를 빌려도 부처의 손바닥 25시에 그는 담뱃불을 지핀다 도망치며 투명인간이기를 원한다. 미터기를 산다 그물망이 점점 좁혀온다 그녀는 속눈썹을 떨어뜨리고 도망치고 있다 담뱃불을 끄고 25시 편의점 시계를 본다 도망치고 있다.
1111호 법정
다리가 둘이다 셋이다 넷이다 그는 지팡이를 짚었다 다리가 셋이다 넷이다 다섯이다 애견 쫑을 데리고 왔다 다리가 넷이다 다섯이다 여섯이다 그는 1111호 법정으로 들어간다 방청객들이 따라 들어간다 불어난 다리 열이다 서른이다 작달막한 대머리 소장訴狀이 꽉 들어찬 배불뚝이 펭귄재판장이 들어가고 나팔을 짊어진 앵무새대변인 매의 눈이 뒤집어씌울 공소장을 들었다 숫자가 헷갈린다 빌려 간 내 시간을 돌려줘 수그린 얼굴 속에 숨긴 시간들 들춰내야 해 갑1호 참고자료 증인신청합니다
예 아니오로만 답하시오 재판장이 왕입니다 아닙니다 민원인이 왕입니다 어딜 가나 기어든 거짓 알리바이 고양이 눈 절뚝거리는 다리 지팡이에 맞은 다리 둘이다 아니다 아니다 그의 맘에 들지 않은 법정 번호 다리 숫자 모자를 벗어 던진다 지팡이를 휘두른다 내가 처용이길 바라는가 처용의 본심은 달구어진 불덩이 찢어진 눈 치솟은 이마 주름 파도칠 때마다 벌건 나뭇잎 새겨진 얼굴 판화 한 점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그는 아직도 다리를 센다 다리가 둘이다 셋이다 넷이다 다리가 스물이다 숫자가 맞지 않는다 고집불통 문턱을 넘지도 못한 채 지팡이를 찾고 모자를 줍는다 곁눈질을 하며 여전히 다리 숫자를 센다 둘이다 셋이다 넷이다 민원인이 왕이라더니 말라비틀어진 허상 왕관을 씌운다 예수에게 가시관을 씌우듯 재판장이 나간다 공소장이 뒤따라간다 앵무새도 나간다 이제 겨우 숫자 맞는다.
1호선의 햄릿
늦은 밤 경로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내
빛바랜 체크개똥모자로 숱 없는 머리를 감추고 있다
그는 구름을 찍어내는 공장
중얼중얼 조각구름을 게워낸다
관자놀이 검은 물사마귀가 그를 읽고 있다
산만한 시선은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
다 차지해야 된다는 욕망이 차린 밥상
심심한 바람에 구르는 빈 깡통들
그가 조금만 움직이면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다
힐끔거리는 사람들
성장을 멈춘 나이테
찬연했던 빛이 닿지 못하는
너무 멀리 떠나온 그는
갈팡질팡 진창 속으로 빨려든다
전철이 멈췄다
내리려는 승객들 뒤에 섰다가
이내 돌아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무표정
그는 내리지 않고 전철은 달리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경로석 구석 자리에 앉아 구시렁거리는 사내
제 몸에 난 질문들을 곱씹는다
나비 재판
너는 정동진에 간다고 했지
리타르단도가 깔리는 역에 너는 서 있고
또 다른 너는 기차에 오르고
새벽녘 불덩이 타올라
너흰 풋사과를 깨물며 별 하나 떨어뜨렸지
잠깐만 아주 잠깐만
이 기차가 멈추면 너에게 갈 거야
넌 언제나 저쪽에서 손을 흔들었지
새큼한 아오리가 일품이라더니
해당화의 열이 각혈처럼 떨어져
넌 미친 듯
날개를 휘저으며
연상의 늪으로 헤엄쳐
몽롱한 꿈속으로 빠져들었지
더 이상은 용서할 수 없어
너는 화분을 깨고 나는 너의 나비목을 졸랐지
나는 열쇠 한 개
너는 무지개 팬티 일곱 장
헤어지는 게 더 어렵다는데
울음 낭자한 재판정 복도
삼 개월 후
두 사람이 정동진에 한 번 더 다녀와서 개정하겠다고
재판장은 말했지
리허설 없는 무대
그녀는 탁월한 연기자였죠
비밀이었던
오디션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동작을 해냈죠
죽음
그 무대장치 속에
조명과 특수효과의 영상기기
들어찬 도구들이 해체되는 무대
저녁나절 건성인 조등만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죠
검은 휘장 뒤에 숨겨진 대기실
배우들의 눈동자도 없이
무대를 가로질러 구르는 동작도
실수 없는 연기가 쉽지만은 않은
황급히 옷을 갈아입은 조연들의 등장도
관객을 불러 모으지도
열광하며 박수치는 기회도 얻지 못한 연기였죠
이사도라 던컨의 목을 조르던 머플러
맨발이 자꾸 클로즈업 되네요
홀로 서야 하는 영원에
한 발짝 내디딘 것은 아니었을까
죽음은 실수하는 법이 없죠
오직
애절한 음악으로 가득 채워진
그녀의 리허설 없는 영면
김정례_2010년 『수필과비평』 등단, 부산지방법원 민사조정위원
신인상 심사평 / 시에 대한 도발적 열정과 언어감각
『시와사상』은 심규환, 이서연, 김정례 세 분을 2014년 하반기 신인상 당선자로 정한다. 많은 응모자 가운데서 이 세 분을 당선자로 정하는데 심사위원들은 별 이의가 없을 정도로 시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경향 또한 『시와사상』이 추구하는 문학이념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김정례의 경우 연령 때문에 신인상 후보로 적합한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연령을 초월한 첨예한 시적 언어감각을 높이 평가하여 당선자로 최종 낙점하였다. 이로써 『시와사상』은 상반기 당선자 2명을 포함하여 도합 5명의 신인을 배출하게 되는데, 『시와사상』 20년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그만큼 2014년은 풍성한 수확을 거둔 한 해로 기록될 것 같다. 상당한 수준에 이른 신인들이 『시와사상』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현상을 우리들은 매우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시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유능한 문학 지망생들이 계속 『시와사상』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에 도전해 줄 것을 기대해 본다.
세 분 시는 삶의 이면에 드리워진 그늘진 현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그것을 시로 담아내는 언어감각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물론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태도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고, 시상 전개의 방법론에 있어서도 각자 독특한 발성으로 시적 분위기를 전연 달리 하고 있지만, 세 분의 타성에 물들지 않은 진취적인 의식은 앞으로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는데 상당한 저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심규환의 시들은 당돌하고 격정적인 감정을 수반한다. 세계에 대한 격렬한 도전의식을 드러내면서도 그런 적의의 이면에 좌절과 절망이 있고, 죽음의 어둔 그림자가 있다. 한 때 랭보가 『지옥의 한철』에서 몰입했던 정신의 편력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의 시에는 지옥같이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한, 성장기에 겪는 통과의례적인 성적, 정신적 통증,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 황당한 죽음에 대한 사변, 악몽에 시달리는 강박 등이 자리한다. 이런 사유를 반어, 역설, 언어유희, 연쇄법, 오버랩 기법의 장면전환 등, 다양한 언어 구사를 통하여 시적 상상력으로 견인해내는 능력은 천부적이다. 어딘가 거칠고 거침없어 보이는 언어들, 과감한 속어의 차용은 적나라한 자의식을 표출하면서 자신을 벼랑으로 모는 자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의 모순화법은 상당한 폭발력으로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시의 곳곳에는 젊음이 겪는 내상들이 송곳처럼 솟아 있어서 격렬한 통증으로 다가온다. 전율하게 한다. 우주를 떠도는 듯한 광활한 시적 상상력과 사물에 대한 지적 인식을 보이면서도 세계에 대한 적의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태도에서 앞으로 전개될 심규환 시인의 시 세계가 도달할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첨예하게 의식을 갈고 닦는 고행을 통하여 더욱 깊고 광활한 시의 세계가 구축되기를 바란다.
이서연의 시는 심규환과는 달리 비교적 객관적 태도로 세계를 보고 있다. 그만큼 냉정하다. 그의 언어는 상당히 드라이하며, 화자의 감정은 행간에 잠복되어 있다. 현대의 삶이 안고 있는 황량한 풍경을 명료하게 각인시키는 점묘적 화법이 돋보인다. 특히 시 「사건A」가 그렇다. 현대의 삶에서 흔히 목격하게 되는 돌연한 죽음과 주검의 주변에서 겉도는 황량한 풍경, 삭막한 분위기를 간결, 압축의 언어로 직조해내고 있다. 현대의 삶이 안고 있는 불협화음의 의식, 뼈가 어긋난 이완의 감정이 감지된다. 이서연의 시는 현대인의 이율배반적 삶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시 「trance soul」에서 그려지고 있는 여장 남자 가수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남자이면서도 여장가수로 무대 위에 서야하는, 그 때만은 철저하게 여자로 보이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러나 아무리 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지만 그것은 정체성을 상실한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이서연의 시적 관심은 현대의 이면에 자리한 이런 자기모순의 부박한 삶에 있고, 그것을 감각적인 언어로 견인해 내고 있다. 동시에 시 「서랍」에서처럼 기억의 통로를 더듬으며 과거의 아픈 상처를 반추하기도 한다. 이때도 시각적 사물들을 통하여 아픔을 감각화하는 특징을 보인다. 앞으로 삶의 외형보다 내면을 더욱 깊이 있게 성찰한다면 좋은 시인으로 거듭 성장하게 될 것이다.
김정례의 시의 특징은 섬세한 감각적 언어로 현대인들의 내면의식을 형상화하는 데 있다. 그의 시들은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의 자의식의 세계를 비교적 선명하게 부각한다. 그런데 우수적 정서가 그 행간에 있다. 그것은 연민의 감정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에서 생성되는 부수적 효과다. 시 「그물」은 ‘25시 편의점’을 공간적 배경으로 쫓고 쫓기는 현대인의 강박의식을 형상화하는데 초점이 있고, 「1111호 법정」 역시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법정을 공간적 배경으로 편집증의 인물 내면을 부각시키고 있다.이 두 편의 시는 실험성이 강한 진술 방식으로 현실과 괴리된 인물의 내면과 현대의 삶의 공간이 얼마나 황폐화된, 비인간화의 세계인가를 보여준다. 「1호선의 햄릿」에서는 지하철의 노인석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춘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죽지 못하여 살고 있는 듯한 노인의 공허한 내면과 부평초같이 현실과 유리되어 허공에 떠 있는 삶의 단상을 그려낸다. 「나비 재판」은 황혼이혼을 소재로 서로 단절된 의식의 간극과 괴리, 연민 등을, 「리허설 없는 무대」는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오는 죽음에 대한 성찰을 시로 형상화하는데, 성찰의 깊이를 이끌어내는 시적 상상력과 참신한 언어감각이 소재의 진부함을 카버하고 있다. 김정례의 시인으로서의 기량을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측면 때문이다.
심규환, 이서연, 김정례 세분을 하반기 신인 당선자로 정하면서 세 분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기대가 만만치 않게 일어났다. 특히 심규환은 젊음과 패기, 도발적인 열정이 시를 압도하고 있었고, 이서연, 김정례는 비교적 안정적이며 참신한 언어감각이 돋보였다. 심규환의 도발적 열정은 미지의 시 세계를 열어 가는데 있어서 상당한 에너지로 분출할 것이다. 이서연은 예리한 촉수와 세계를 꿰뚫어 보는 눈을 앞으로 가질 것이고, 김정례는 젊은이 못지 않는 언어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비교적 균형 잡힌 좋은 시들을 생산해낼 것이다. 이런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안고 세 분의 전도에 즐거운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최휘웅, 김경수, 박강우
심사평 최휘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