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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 활성화 방안
박원호 목사 (전 장로회신학대학교)
1. 주일 학교의 축복
한국 교회는 기독교가 전래되기 시작한 시점과 거의 그 시기를 같이해서 교회 학교를 가지게 된 것은 큰 축복이요 감사이다. 1789년경 사회 개혁의 동기에서 시작된 영국의 주일학교 운동(Sunday school movement)은 교회로 영입되면서 교회 교육의 중심적 기관이 되었고 특히 미국으로 건너와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훈련하고 양성하는 터전으로서, 신앙적 삶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기관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케 하도록 준비시키는 도구로서의 주일 학교는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다함이 없다. 이제 교회 학교 없는 교회, 교회 학교 없는 교육은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선교 시초부터 주일학교를 가지게 됨으로써 교육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시작과 성장, 그리고 확장에 있어서 크게 도움을 입게 된다.
무엇보다 주일학교를 통한 교회교회 교육은 지난 100년 간의 교회의 성장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감당했음을 우선적으로 지적해야 할 것이다. 흔히들 교회 성장과 교회 교육은 별개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교회의 성장은 주일 학교의 성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주일 학교의 성장은 곧 교회의 성장과 직결된다. 유년 주일학교를 통해서 신앙을 시작하게 되는 수가 어떤 경우보다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하며 교회 개척의 경우에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주일학교는 선봉장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아이들을 모아서 성서와 찬송을 가르치고 그들을 돌봄으로서 비로소 교회가 시작되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지난 100여년 동안의 경이적 성장은 만일 주일학교를 통한 전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가능치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나아가서 주일학교는 처음으로 신앙을 갖게 되는 관문의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신앙의 성장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주일학교를 통해서 성서를 배우고 이를 통해서 성도의 교제를 갖게 되며 나아가 사회 참여에 임하게 된다. 성서는 신앙의 중심으로서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비전을 갖게 했고 주일 학교를 통한 교제는 그리스 도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형제 자매 된 사실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통로가 되었으며 세상 가운데서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능력을 공급받았던 것이다. 특히 우리는 주일학교의 사회적 공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초창기에 주일학교는 신교육의 대명사로서 앞선 교육이었으며 일반인들의 신 교육열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많은 사회 지도자들이 주일학교 교육의 영향을 받았으며 현재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음악가, 사회 봉사자, 의사들이 그 증인들이다.
동시에 주일학교는 평신도 지도자 훈련에 필수적인 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이 교사의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지도자로서의 훈련을 받게 된다. 교회 사역의 일부분을 감당하고 양육하는 책임을 지게 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이 성장하는 축복도 받는다. 주일 학교의 성공 요인 가운데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헌신적인 교사들의 노력이다. 비록 교육적으로는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이들은 자부심과 헌신으로 교회 교육에 참여하였으며 많은 교사들이 교회 학교의 사명을 평생의 사명으로 감당했다.
참으로 이러한 전통을 가진 주일학교를 가진 것은 그 자체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지금까지 주일학교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날까지 교회 학교는 한국 교회의 시작과 그 성장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한다. 이제 오늘날 주일학교는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자.
현재의 교회 학교를 평가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신앙과 목회라는 차원에서 바라보려고 한다. 신앙의 차원이라 함은 교회의 전체적 교육적 활동을 성서에 기초한 신앙(faith)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본다는 뜻이다. 교회 교육은 신앙에 기초하고 있고 신앙의 균형 있고 지속적인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사역이다. 교회 교육은 먼저 신앙의 본질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며 그에 적합한 교육적 구조와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하더라도 신앙의 본질과 맞지 않을 때에 우리의 노력은 헛수고가 될 수 있다. 다음으로 목회적 차원이라 함은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교육은 오늘날 자주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학교식(schooling)의 교육 구조로서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학교식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삶이나 인격과 분리된 지식 중심의 교육이다. 신앙적으로 말한다면 교리(doctrine)나 종교(religion) 중심의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은 교리나 종교를 포함하지만 이에 국한되지는 않으며 국한되어서도 안 된다. 신앙은 전체 삶과 인격의 근본 터전이요 방향성이다. 따라서 신앙은 목회 교육적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이 바람직한 결과를 가질 수 있다. 이에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 교육이 얼마나 이러한 두 가지 요건에 충실하냐를 살펴볼 것이다. 동시에 이 글에서는 교회 학교를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한정하지 않을 것이다. 본래 주일 학교는 전 교인을 상대로 하는 교육 기관이다. 따라서 오늘날처럼 일부에게 한정되는 교회 교육의 의미는 잘못이다.
2. 현재의 주일학교
현재의 교회 학교가 얼마나 과거의 전통을 얼마나 충실히 이어가고 있느냐? 앞으로의 시대에 얼마나 충실히 잘 대처해 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쉽게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다. 먼저 근년에 들어와서 나타나는 주일학교 숫자의 감소 현상이 두드러진다. 최근의 기독 공보(1995년 5월)에 따르면 어린이의 숫자는 91년(313,795명) 이래로 지속적으로 감소해서 현재는 80년의 숫자(269,161명)로 후퇴했다고 한다. 이는 1995 한해 동안 교단 전체 교인의 성장이 370여명이라는 통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숫자의 감소보다 더욱 염려해야 하는 것은 교회 학교의 활력이다. 숫자의 감소는 이미 예측이 되었으며 가족 계획의 결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됨에 따라서 숫자는 감소하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현재의 교회 학교의 교육이 오늘날의 시대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얼마나 교육이 신앙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 충실히 뒷받침하느냐? 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다음 몇 가지 점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주일학교가 처해 있는 오늘날의 사회적 상황에서 출발하도록 하자. 오늘날의 사회적 상황은 여러 가지 면에서 현재의 교회 교육으로서는 감당키 힘든 여건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 같이 고정되고 비교적 변화가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와 범위로 바뀌어지는 가운데 살고 있다. 개인은 더 이상 독자적인 개체가 아니라 사회 변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 개인이다. 특히 매스 미디어를 통한 사회 변화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삶의 형태와 질을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교회 교육은 열심히 교회 안에서 가르치면 사회 안에서 저절로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식의, 즉, 교회와 사회의 분리 모델에 따랐다. 그러기에 내용의 구성에 있어서도 대부분은 성서, 교회, 교리 중심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델이 급변하는 사회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3. 현대화의 정신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 리처드 아스머(Richard Osmer)는 그의 책, 배우는 정신 (A Teachable Spirit)에서 현대화의 특징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한 뒤 이러한 특징들은 대부분이 기독교 신앙과 역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먼저 현대 사회의 첫 번째 특징은 기술적, 또는 도구적 이성주의(technical, instrumental rationality)의 사회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중시하고 이성적인 분석과 판단이 중요하며 유용성 내지는 효과라는 것이 큰 목적이다. 이러한 시대 정신으로 물든 현대인에게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갖는 많은 부분이 부정되거나 거부된다. 예를 들어 초월성이란 것은 현대인의 도구적 이성주의의 틀에서는 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불합리하기까지 하다.
두 번째로 급격한 사회 변화이다( rapid social change). 사회가 급변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고정되고 확립된 모든 것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일어난다. 기존의 가치나 종교조차도 끊임없이 점검,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전통으로서의 종교의 의미는 점점 상실된다.
세 번째로 구조적, 문화적인 다원화 주의( structural pluralism)를 들고 있다. 사회의 분업화로 인해 사회의 구조나 삶의 영역이 분업화되고 서로 독립되면서 지금까지 가졌던 유기체적인 관계가 부서지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개인화의 중시와 함께 종교는 더 이상 삶의 전 영역에 해당되는 게 아니라 삶의 일부분에만 해당된다.
끝으로 개인주의( individualism)이다. 위의 세 가지 특징들은 당연히 현대인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개인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종교도 개인의 일이다. "내가 원하는 종교를 택하겠다","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주도하는 것이지 남이 간섭할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들이다. 이로 인해 교회라는 공동체의 영향은 점점 약화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기독교는 두 가지의 모습으로 대처한다. 그 하나는 이러한 현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교회의 주된 관심은 현대화의 흐름에 따른 개개인의 신앙 성숙이다. 개인의 경건, 개인의 신앙 발달, 개인의 사회적 책임 등. 심지어 해방신학이 부르짖는 구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구원이란 모든 종류의 사회적 억압에서 개인을 해방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현대화의 모든 현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과거 자신의 정체를 공고히 하고 전통적인 모습을 더욱 강화하는 모습이다. 이로써 많은 교회들이 숫자적으로 성장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경우 대개의 경우 권위주의적 모습이 등장하고 집단주의가 형성된다. 이로 인해 개인적인 자유나 비판력, 나아가 인권이 무시되며 현대적 상황을 무시함으로 인한 신앙과 생활의 분리를 가져온다. 개방성이 말살되며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형태의 기독교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로 보건대 현대라는 시대에서 기독교의 정신을 이어 나가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구적 이성주의로 기독교의 초월성이 도전 받고 사회의 급변으로 인해 영구적이고 지속적인 진리가 도외시되며 다원주의로 인해 기독교의 독자적인 정체가 위협받는다. 나아가 개인주의는 전통적 기독교의 공동체성을 부인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러한 모습들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들이 기독교의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대처하느냐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아스머(R. Osmer)가 지적 한대로 교회는 개혁 교회가 가졌던 바른 교육적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무작정 수용도, 무작정 거부도 아닌 제 3의 적절한 대처가 있어야 한다.
4. 개혁자들의 교육 전통
칼빈, 루터에 의해 시작된 개혁 교회의 전통은 무엇보다 교회 교육의 강조에 있다. 칼빈의 경우, 성도의 특성을 한마디로 배우려는 정신 a teachable spirit라고 정의하면서 철저히 교회의 교육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에서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거부함과 동시에 결코 집단주의적 내지는 권위주의적인 교육도 말하지 않는다. 또 가르침에 관한 한 당시 카톨릭 교회가 가졌던 것과 같은 어느 한 기관의 절대적이고도 무오적 권위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의 권위는 성서를 중심으로 다양한 기구와 조직에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주일학교의 신학적 터전
사회적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주일학교의 신학적 터전을 점검하도록 한다. 신학의 주일학교의 모든 교육적 노력의 터전이나 지침이다.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갖느냐에 따라 교육의 목표, 방법, 내용, 교사의 역할, 환경, 평가 등이 달라진다. 우리는 항상 시대에 따라서 적절한 신학적 터전을 갖도록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하며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개혁 정신을 가져야 한다. "주일학교 신학"은 오랫동안 교인들의 주된 신학적 터전이 되었으며 그 특징으로서는 문자 중심의 성서 공부, 회개를 중심으로 한 교육, 사회와의 단절.... 등을 말한다. 이러한 식의 신학이 물론 전혀 소용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새로운 시대를 감당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씀과 삶" 공과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공과이다. 오늘에 이르면서 많은 수정과 보완이 있은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인 신학의 틀에 있어서는 크게 변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신학적 터전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6. 주일학교의 교육적 터전
교육은, 교회 교육이든 일반 교육이든, 그 본질에 있어서 의도성, 체계성, 지속성, 가치성, 그리고 전인성을 가진다. 교육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 가치, 태도, 감정, 기술 등, 전체적인 면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하도록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돕는 사역이다. 신앙의 성장을 위한 교회 교육 역시도 신앙이 지속적이고도 전인적인 성장할 수 있도록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섬기는 사역이다. 따라서 신앙의 성장을 위한 교육은 필히 시간적 연속성을 갖고 있어야 하며 나아가서 전체 프로그램이 각 부서에서나 전체 교회에서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오늘의 교회 학교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전인성을 기초로 한 체계성 또한 형성되지 않고 있다. 그 주된 이유로 비전문가에 의한 교육과 아울러 그들의 빈번한 이동을 꼽을 수 있다.
오늘날 교회 학교는 대부분의 경우 신학교 학생들이 맡고 있다. 그들은 파트 타임 사역 자이며 대부분 한정적인 사역 자이다. 이들은 신학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준비하는 단계이므로 교회 교육의 책임을 맡기에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이들이 교회 교육의 책임적 위치에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잦은 변동은 교육의 지속성을 어렵게 하고 있고 이들의 비전문성은 교육이 자꾸 일반 교육에 비해 열등한 교육이 되게 하고 있다. 다시 지적하겠지만 주일학교 운동이 교회로 영입된 이후 교회 교육은 평신도의 주된 사역이 되었다. 이는 엄청난 공헌이지만 동시에 이로 인해 교육의 질이 저하되는 심각한 부작용도 일어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 오래 전부터 교육사(D. C. E)제도를 두어서 교육의 질이 저하되거나 단절되는 것을 막고 아울러 지속적으로 교육이 행해지도록 하고 있다. 이들은 안수 받지 않은 교육 전문가로서 담임 목사의 목회에 따라 교육을 구상하면 개 교회에 적합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나아가서 교사들을 훈련하는 일을 담당한다.
7. 교회 교육과 신앙
다음으로 교회 교육의 신앙적인 차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교회 교육은 근본적으로 신앙의 성장을 목표로 한다. 교회 교육은 신앙의 본질에 터전을 두어야 하며 신앙이 균형 있게 그리고 일평생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도록 뒷받침하는 섬김의 사역이다. 신앙이란 단순한 교리나 성서 지식과는 구분되는 폭넓은 개념으로서 이는 우리 삶의 근본적인 방향성이다. 여기에는 사고의 방식, 자아관, 가치관, 세계관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써 존재의 근본적인 터전이다. 따라서 교회 교육은 이러한 신앙 이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신앙은 다양한 영역으로 형성되어 있음으로 해서 균형 있는 성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의 성장을 위한 교회 교육은 항상 그 교육적 노력이 신앙의 지적인 부분, 감정적인 부분, 의지적인 부분, 나아가서 내적 인격의 부분, 사회적인 부분, 초월적인 부분 등이 골고루 균형 있게 자라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가식적 신앙, 기복적 신앙, 열광적 신앙, 비도덕적 신앙, 이기적 신앙 등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은 바로 신앙의 성장이 전체적인 균형을 잃어버린 채 편향된 성장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 웨스터 호프(John Westerhoff III), 맥브라이드(McBride) 등의 신앙 성장 과정에 대한 연구는 우리의 교육이 좀 더 지속적이기를 요청한다. 신앙은 일평생을 통해서 성장하며 그 성장은 질적으로 여러 차례의 변화를 겪는다. 영아 기의 신앙에서 유치 부의 신앙으로, 초등학교 학생의 신앙으로, 청소년기의 신앙으로, 그리고 성인의 경우에도 성인 초기, 중기, 후기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성장이 일어난다. 따라서 교회 교육은 각 단계에 적절한 교육적 프로그램을 가져야 한다. 특히 오늘날 교회 교육이 어린이나 청소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성인들의 경우에도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신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파울러에 따르면 성인 시기에도 신앙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그 성장은 세 번의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따라서 유치 부와 유년 부의 교육을 단계에 따라 달리하듯 성인의 교육도 단계를 구분해서 다르게 할 필요가 있다. 이제 교회 학교는 전체 교인들을 상대로 하는 교육적 구조를 가짐으로써 한 생명이 교회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주님 앞에서는 그 날까지 지속적인 교육이 행해져야 한다.
8. 교회교육과 목회
신앙을 기초로 하며 또 중심으로 하는 교회 교육은 필연적으로 목회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교육은 목회의 핵심적인 부분이며 원칙적으로는 목회자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앞에서 잠깐 지적한 대로 주일학교가 도입된 이후 교육은 목회로부터 점차 분리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대부분의 경우 주일 학교는 형식상으로만 담임 교역자와 관계되어 있고 실질적으로는 목회와 교육이라는 이원 체제라는 기현상을 낳고 있으며 이 두 체제간의 갈등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처음 주일 학교가 교회에 도입될 때 가졌던 두 가지 염려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담임 목사의 교육 책임의 회피요 다른 하나는 부모의 책임 회피이다. 오늘날도 주일학교 교장을 반드시 담임 목사로 지정하는 것은 바로 이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목사는 자신을 교육자로서 생각하지 않으며 특히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많은 목사들은 자신을 교사로 말하기를 주저하거나 회피한다. 예수가 위대한 교사가 아니라면 나도 교사가 아니라는 식이며 대신 제사장, 왕 선지자와 같은 메시야직과 연관시키는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아울러 우리는 한국 교회의 무속적 영향으로 인하여 목회자의 교육적 사명을 도외시하는 경향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가르치는 장로의 사명이다라는 칼빈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아울러 교회 교육을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웨스트 호프의 지적과도 같이 학교식(schooling)의 방식이 아니라 목회적인 방식 또는 신앙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교회 교육의 중심은 신앙(faith)이다. 이는 학교식의 패러다임으로는 제한이 있으며 목회적인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목회적을 접근한다는 말은 교회 교육이 예배, 선교, 친교, 봉사의 차원들과 유기적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신앙을 위한 교회 교육은 예배를 중시한다. 예배는 교육의 도구가 아니다. 그러나 가장 교육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신앙적 사건이다. 따라서 영아부라고 할 지라도 예배는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교육은 친교와 같은 모이는 교회만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를 위한 교육적 노력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처음 주일학교가 시작되었을 때에 중심적인 세 가지 강조 점을 다시 기억하도록 하자. 먼저 주일학교는 그 시초부터 다른 형태의 교육 기관으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주일학교는 교회, 가정, 예배와 설교와의 관련에서만이 효과적으로 여겨졌다. 다음으로 주일 학교는 전체 교회와 나라를 영향 끼치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주일학교는 복음과 삶을 연결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교회 학교의 활성화는 일부분이 노력이 아니라 목회와의 전체적 연관 관계에서 다루어져야 함을 알 수 있다. 이제 앞으로의 교회 학교 활성화를 위해 몇 가지 방안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교육과 목회의 결합이 요청된다.
이제는 목회와 교육의 분리가 아닌 유기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교육은 목회적 관점에서, 목회는 교육적 관점에서 행해져야 한다. 교육에 있어서 신앙의 균형 있는 성장을 위해서 목회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각 신앙의 단계는, 그것이 성인이든 영아들이든, 독자적인 목회적 관점에서 교육되어야 한다. 각 단계는 고유한 신앙 성장을 목표로 예배, 친교, 봉사, 섬김의 사역이 균형 있게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성인의 교육은 지금까지의 틀을 벗어나서 신앙의 단계로 세분되어야 하며 다양한 집단을 위한 작은 신앙 공동체가 많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평신도들의 지도력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교사로서의 목회자의 사명은 핵심적이다. 목회자는 자신을 교사로 인정해야 하고 이에 적절한 교육적 배경과 훈련을 가져야 함은 당연하다. 목회자는 신학교에서의 교육을 통해서 회중과 신학교, 그리고 총회를 연결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만일 목회자의 참여와 책임이 없으면 교육은 제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올바른 교육이 행해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목회자는 명목상의 교회 학교 교장이 아니라 실질적인 교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2) 전문가가 도입되어야 한다.
비록 주일학교는 처음부터 평신도 중심의 기관으로 출발했지만 이는 결코 평신도만의 기관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평신도는 목회자와 유기적 관계에서 교육의 사명을 감당했다. 이제는 더욱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총회는 교육사를 한시 바삐 정착시켜야 한다. 교육사는 적어도 대학원 졸업 수준의 사역 자이어야 하며 안수는 허락하지 않음이 바람직하다. 이들은 신학과 교육에 대한 훈련을 받음으로서 전문적인 사역 자로 일해야 한다. 이들은 전임 목회자로서 담임 목사의 목회 방침에 적합한 교육을 계획하고 시행해야 할 것이며 교사를 훈련하고 교육을 위한 행정적, 재정적인 계획들을 세워 나가야 한다. 이들을 위해 미국의 PSCE(Presbyterian School of Christian Education)와 같은 교육 기관이 총회 적인 차원에서 반드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신학교에서의 목회자 지망생을 위한 기독교 교육에 대한 교육도 동반되어야 한다. 현대는 전문가의 시대이며 이는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이제 교회 교육은 성서와 교회 역사의 본래 전통에 따라 철저히 헌신된 전문가에 의해서 주도되어져야 한다. 교회 교육은 전통적으로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구약의 경우 족장들, 선지자들, 그리고 전문 랍비들의 사역이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대표적인 교사였다. 초대 교회는 위대한 교사들에 의해 이단들의 위협에 대처했고 교회의 정체를 확립했으며 이 전통은 종교 개혁가 칼빈으로 이어져 그는 교사의 직분을 목사와 함께 항존직으로 말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교회의 주일학교는 가장 비전문가에 의해서 행해지는 학교 같지 않은 학교가 되고 말았다.
3) "주일 학교 신학"이 혁신되어야 한다
주일 학교는 이제 용기 있게 신학의 갱신을 시도해야 한다. 성서 비평학, 성서 고고학, 문화 인류학적인 증거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주일학교는 거의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에 대해서 편견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본래적 의도를 잘 이해해서 신앙 교육에 충실히 반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성서 비평학은 그 방법적 면에 있어서 비판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우리는 성서에 대해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그러한 연구로 인한 엄청난 사실의 발굴도 결코 도외시할 수 없다. 다만 본래적 의도를 잘 이해하고 이를 적절히 활용한다면 소중한 자원이 됨에 틀림없다.
데이빗 트레이시(David Tracy)는 신학과 일반 학문과의 관계를 다섯 가지 형태로 지적하면서 앞으로의 시대는 자신의 수정주의적 입장(Revisionist Model)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앞으로 신학은 일반 학문에 대해서 전통적인 고압적 자세도, 또는 자유주의 신학적인 수용적 자세도 아니라 상호 대화와 비평의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의 내용에 있어서도 성서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전통만이 아니라 사회 과학의 발견들도 참여되어야 함을 뜻한다. 성서는 앞으로의 교육에 있어서 여전히 중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서 중심이라는 말은 단순히 성서의 내용을 많이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 교육은 성서를 중심으로 한 교회의 전통이 오늘날의 삶의 상황과의 활발한 대화적이고 비평적 관계를 통해서 살아 있는 전통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4) 새로운 공과가 시급하다.
새로운 시대를 대비해서 새로운 신학적 틀에 기초한 공과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제는 성서의 가르침과 함께 시대와 상황, 배우는 사람의 욕구 등을 교육적으로 고려한 교재가 생산되어야 한다. 성서의 사용은 문자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서 시대의 상황과 변증법적으로 만나야 하며 단순히 지식을 갖는데서 벗어나서 실존적으로 응답하는 방식의 진행이 요구된다. 내용에 있어서는 신앙의 여러 차원들이 골고루 배려되어야 한다. 신학적인 차원, 성서 내용, 도덕적 차원, 사회적 차원, 공동체적 차원, 초월적인 차원, 자기 정체의 차원 등의 내용들이 다루어져야 한다. 내용이 불균형은 비정상적인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균형 있는 내용이 가르쳐지도록 해야 한다. 특히 앞으로는 핵, 환경, 해방, 통일 등과 같은 새로운 사회의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5) 멀티 미디어의 활용
가르치는 방법은 교회의 교육에 있어서 가장 뒤떨어진 분야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강의나 설교와 같은 교사 중심의 일방적인 방식에 의존해 왔다.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으나 가르치는 방법 자체에 대한 무지가 그 근본 이유이다. 하지만 가르치는 방법은 내용과 더불어 중요한 교육의 일부를 이루고 있고 아울러 방법이란 단순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우리는 방법의 선택과 사용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은 교육의 결과에 관한 한 방법이 전통적인 내용에 앞선다. 교회는 다양하고 적절한 방법을 위해서 환경을 조직해야 하며 교사들 역시도 방법에 대한 이해와 훈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멀티미디어에 대한 준비는 필수적이다. 교회는 다양한 멀티 미디어를 준비할 수 있어야 하며 교사들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6) 교사 훈련
교회 학교 교사는 교육의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교회는 장기적으로 교사 수급 계획을 가져야 한다. 교사들은 기독교 전통에 대한 이해, 자신의 신앙적 고백, 그리고 교육에 대한 이론과 실제에 대한 훈련이 있어야 한다. 나이에 관한 한 현재 많은 교회들이 대학생 위주의 교사를 선호하고 있으나 이들의 경우 시간 내기가 비교적 용이하고 활동성이 강한 반면 아직 자신의 신앙이 정립되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불안정적이다. 따라서 안정적인 성인들이 교사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이들이 청년들과 함께 일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일 것이다. 교회는 교사들이 신앙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교사들에게는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사역이 목회의 중심적 사역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부름 받았다는 사명감을 갖게 해야 한다.
7) 교육의 환경을 위해 투자하자
환경은 교육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요즈음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교육 시설은 현대적으로 배려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교회의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환경은 다양한 가르침이 가능한 장소이어야 하며 학습자에 적합한 조명, 높이 등도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멀티미디어의 자유로운 사용을 위해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8) 교회 교육의 테두리를(ecology) 넓혀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행해지는 주일 학교 체제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다른 교육 기관과의 연합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 먼저 가정과의 협력이 필요하다. 가정을 위한 교육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가정이 교회 교육에 참여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가정이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으며 교회 교육은 이에 적절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가정은 기독교 교육의 근본 터전이며 가장 중요한 교육 기관이다. 이러한 가정이 충실한 교육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나아가서 현재 부모의 책임이 도외시된 채 이루어지고 있는 주일학교의 교육에서도 가정이 적극적으로 참여될 수 있는 방안들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부쉬넬의 가정 양육으로 시작된 기독교 교육은 다시금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 총회 교육부 이외에 노회는 노회대로 개 교회를 위한 교육적인 뒷받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노회에서는 자료실을 준비하고 개교회의 교사들이 항상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며 전문 인력을 둠으로써 개 교회를 도울 수 있다.
특히 앞으로의 교회 학교는 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함은 필연적이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 살면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사회적인 문제들을 비난하고 피하기보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변화시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맞으면서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굶주림, 핵, 인종 차별, 문화적인 혼합, 경제적 패권주의 등. 특히 학교 교육의 횡포가 여간 심각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도 교회 교육은 예언자적 음성을 발할 수 있어야 한다.
9) 전문 기관이 설립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전문 기관의 필요성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 교단은 거의 교육을 위한 전문 기관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장로회 신학 대학교의 기독교 교육 연구원이 있으나 아직은 전문 기관으로서는 부족하다. 전문 기관이 만들어짐으로써 총회 교육부가 계획하고 추진하고 저하는 여러 사업들을 함께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전문 기관은 현재 교회 교육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교회가 요구하는 점들을 수합하여 다양한 상황에 대해 교육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멀티 미디어를 위한 전문 기관은 시급하다. 한시바삐 전문가를 총회적 차원에서 양육해야 하며 그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맺는말
참으로 주일학교는 우리 모두의 신앙의 터전이었다. 이제 이 주일학교가 어려움에 처해 있음과 함께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회를 맞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나 외적인 성장에 치중함으로써 내부적인 많은 갈급함을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교회는 외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하는 도전을 직면하고 있다. 주일 학교는 이러한 새로운 욕구에 충족할 수 있는 전통과 아울러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전통을 살려서 다시금 교회 교육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활성화시켜야 할 것이며 이로써 교회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교회 학교는 개교회의 문제가 아니며 교단 전체의 관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한국 교회의 미래는 충실한 교육에 달려 있다. 교육 없는 교회는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 현재와 같이 목회로 분리된, 지식 중심의, 비전문가 중심의 체제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목회의 터전과 중심으로서,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전문적인 사역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