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으로 가족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관련해서 가족은 어떻게 이해될까? 하나님은 가족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실까? 가족은 하나님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사실 성경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족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집이라는 표현을 확장해서 가족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같은 집에 머무는 사람들이 가족이다. 어찌되었든, 성경에 국한해서 볼 때, 가족 구성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남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만들어 주셨고, 두 사람을 부부로서 한 몸이 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서 다음세대가 이어질 수 있도록 복을 주셨다. 남녀의 만남과 결합으로 이어지는 결혼을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셨다고 본 것은 그만큼 결혼을 통해 세워지는 가족이 영원한 가치를 갖고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족 해체는 하나님의 복을 스스로 무효화시키는 일이다. 할 수 있는 한 가족을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할 일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가족 안에서 갈등은 물론이고 미움이 있었으며 심지어 형제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다.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폭로한다.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삶의 결과가 어떤지를 보여준다. 범죄 후 부부 관계는 서로를 돕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며 상호 비난하는 관계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원래 가족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하나님은 가족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돕는 모습을 기대하셨다. 성경은 가족 내 이타적인 삶을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이 돕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신약에서 볼 수 있다. 몇 가지 표현에서 그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도의 관계에서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가족 관계에서도 유효하다. 특히 가족 윤리와 관련해서 남자는 아내를 죽기까지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의지하며 살라 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주께서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라 했다. 자녀 생산은 두 사람의 사랑을 전제하는데, 그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는 성경 아가서에 잘 나타나 있다. 남녀의 사랑이 단순히 생산만을 겨냥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랑의 유희와 그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것이다.
성경의 의미에서 가족은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서 하나님의 도움을 만날 수 있게 하는 매개다. 이 일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가족은 그 어느 곳보다 더 힘든 곳으로 전락한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곳보다 가족에서 더 많은 기대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족은 다른 어떤 단체나 기관보다 더욱 감정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는 곳이다. 가족에게서 하나님의 도움을 만나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곳이 가족일 수 있다. 내게 가장 큰 상처를 안겨 주는 사람은 가족 안에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니 하우어워즈의 말대로, 행복한 가정을 전제하지 말아야 하듯이, 가정의 신학적인 의미도 전제하지 말고 또 기대하지 말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결과를 기대하는 의미에서 행복한 가정을 전제하는 것은 쉽게 실망으로 이어지고,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사역을 행하시는 곳으로서 가족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가족을 세우시면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곧 하나님은 가족을 세우시면서 동시에 약속하셨는데, 비록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해도 우리는 내연적인 맥락에서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약속에 따르면, 가족은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돕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일이 이뤄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서로 불평하지 말고 서로의 부족함을 돕는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고 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하지 말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다만 서로의 부족함을 도우려는 노력을 꾸준히 행한다면, 어느 순간에 서로에게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한편, 가족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또 다른 이유는, 가족이 종종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유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버지,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고 했다.(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비유한다) 비록 어머니 신의 존재를 말할 순 없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로 말하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고 있다.(사49:14~15) 뿐만 아니라 인간의 관계에서도 가족은 비유로 사용되었다. 형제자매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가족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는 성경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대상관계이론에 근거한 임상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 부모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은 장성한 후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길 힘들어 한다고 한다. 교회에서 기대할 수 있는 친밀함과 안정감에 대한 기대를 전혀 가질 수 없게 된다. 가족의 해체가 심해지는 만큼, 교회 해체 현상도 심해진다. 왜냐하면 교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동체적 관계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가족 관계가 회복되는 만큼 교회 관계도 회복된다.
그리고 가족의 중요성을 교회적으로 강조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다음세대의 신앙에 있다. 가족 해체는 누구보다도 다음세대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들의 생존과 실존을 뒤흔들고, 신앙에 큰 상처를 남긴다. 다음세대의 부흥을 총회 주요 정책으로 삼을 정도로 현재 대형교회와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주일학교는 심각한 위기 상태다. 가족 해체와 주일학교의 침체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지만, 독일에서 이뤄진 연구에 따르면, 가족 해체가 다음세대의 신앙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세대를 위한 노력은 건강한 가족을 위한 노력과 병행해야 한다. 결혼을 앞둔 청년들을 위한 교육, 젊은 부부들의 모임, 중년 부부들의 모임, 노년 세대들의 모임에서 가족의 문제를 수렴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또 토론할 기회가 교회 안에 마련되어야 한다. 건강한 가족이 다음세대의 부흥을 보장하진 않아도, 최소한 부정적인 영향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가족의 문제를 말하면서 동성 결혼에 따른 가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고 있지만, 미국의 추세에 비춰볼 때, 그리고 전문가들에 따르면, 법적인 통과는 언젠가는 이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실제로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나라에서 동성 결혼으로 부부가 된 사람들이 자녀를 입양하여 가족을 이루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양쪽 부모가 현존하는 가정, 외부모 가정, 입양부모 가정, 조부모 가정, 소년소녀 가장 가정, 싱글 가정 등과 더불어 동성 결혼 가족은 다양한 가족 형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런 전망과 관련해서 기독교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지해야 하겠다.
법적으로 허용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경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법이 일반계시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긴 해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법 제정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법을 기반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법 제정을 선도해야 한다. 선천적으로 동성애를 말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이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심리학적인 혹은 사회문화적인 원인에서 비롯하는 동성애가 더 큰 문제이다. 어려서 부모와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경험을 했을 경우 동성애로 기울 확률이 커진다는 대상관계 이론에 따른 심리학적인 연구가 있다. 그리고 이성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이 결국 동성애를 선택하게 만드는 원인일 수도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본다면, 건강한 가족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은 막중하다. 동성애 문화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성애의 건전함과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건강한 가족 안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건강한 가족 안에서도 다른 요인들(유전자의 이상, 쾌락, 호기심, 이성교제에서 요구되는 인격적인 장애 등) 때문에 동성애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그래도 동성애 문화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은 건강하고 화목한 가족이다. 이를 위해 교회가 구체적으로 실천할 과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