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義兵將 권사민(權士敏. 1557-1634) 선생의 [매헌실기(梅軒實紀)] 木板本 4卷 2冊 완질본으로 권두에 歲在己巳(1869)...朴濟광, 권말에 歲黃蛇(己巳;1869)...九代孫秉運泣血謹識의 跋이 있다. <크기> 20.5×29.5cm
ⓐ 권사민(權士敏, 1557∼1634)字(자)는 粹彦(수언), 호는 梅軒(매헌), 임진왜란 때 義兵將(의병장)으로 커다란 공을 세웠다. 후에 左承旨(좌승지)에 추증되었고 孝誠(효성)이 지극하여 旌閭(정려)가 세워졌다.
ⓑ 두동리 충효각(杜洞里忠孝閣)[정문]매헌 권사민(權士敏)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정조 8년(1784) 총효 정려각을 둥굴에 세웠다. 권사민의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팔공산에서 적을 격파하고, 곽재우 장군과 합세하여 화왕산성을 지켰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언양(彦陽)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정조 5년(1781)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 [매헌실기(梅軒實紀)]이 책은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인 권사민의 실기이다. 권사민은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영천을 지나 대구(大邱) 공산까지 이르러 많은 적을 척살(刺殺)하여 공을 많이 세웠다. 궁극히 탐구하여 일찍이 칠읍(七邑)의 훈도로서 징소(徵召)되었으며 제용감 직장에서 사옹원주부에 옮겨졌다. 선생이 곽재우(郭再祐)에게 말하되 "외로운 이 성(城)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의리상 적(賊)에게 욕(辱)을 당할 수는 없으니 섶을 많이 쌓았다가 불여의(不如意)하면 불을 질러 성(城)과 함께 타서 죽어야 한다"하므로 곽장군(郭將軍)이 그 충의에 감탄했다. 모친의 부음을 받고 여러 사람들과 통곡하며 작별하는 말이 "사친(事親)에 종양(終養)을 못하였고 나라를 위해 죽지 못하니 한스럽다. 공(公)들은 적(賊)이 퇴거(退去)하기 전까지 잘 방어하기를 부탁한다"하며 여묘(廬墓)살이 삼년을 하였다. 복(服)을 마침에 언양군수(彦陽郡守)에 제수 되었으니 부임치 않았다. 1782(정조 6)년에 어사(御使)의 계(啓)로 인해 좌승지에 증직과 정효(旌孝)의 명이 내렸다. 뒤에 옥연사(玉淵社)에 제향되었다. 출처: 한옥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