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윤겸 鄭允謙 [1463~1536]
본관 초계(草溪). 자 익부(益夫). 시호 장양(莊襄).
1492년(성종 23)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에 보직되고,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이 되고,
1519년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임명되어 청계군(淸溪君)에 봉해졌다.
1522년 전라도수군절도사로 부임, 병선을 수리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왕으로부터 은을 하사받았다.
1526년 훈련원 도정(都正)으로 성절사(聖節使)로서 청(淸)나라에 다녀와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 [조선왕조실록]에 정윤겸이 등장한 횟수는 총 54건인데,
성종과 명종代에 잠깐 언급되고, 대부분은 중종대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는 극중의 인물처럼 강직하였고,
책임감이 있었으며, 당시 중종 임금을 비롯한 많은 대신들이
그의 강직하고 충직한 성품을 높이 샀던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올곧게 벼슬살이를 한탓에 정치적 위기는 없었지만,
북쪽 오랑캐로 인해 그의 직속 부하가 죽는 관계로 정치생애중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을 제외하곤 별 탈없이 삶을 살다가 숙환으로 졸합니다.
또한 그는 당시 북쪽의 오랑캐들과 남쪽의 왜구들을 물리치는데,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실록]에 기록된 그의 내용을 대략 간추려 살펴보면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 중종 1년 9, 8일: 정윤겸은 이때에 즉 1506년에 박원종 등이 주도한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연산군을 몰아내고,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의 공신을 책정받고,
'군기시검정'으로 특진하게 됨니다.
* 중종 18년 6월 4일: 대간들이 당시 전라수군절도사의 벼슬을 하고있는 정윤겸의 자급을
한등급 올려주라 상께 진언을 드립니다.
* 중종 23년 9월 26일: 이때에 정윤겸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됨니다.
이때 정윤겸의 벼슬은 병사兵使였는데,
당시 정윤겸의 부하인 만포첨사의 벼슬을 하고있던 심사손沈思遜이란
무장이 북쪽의 오랑캐들에게 급습을 당하여 죽습니다.
여기서 당시의 기록을 잠시 살펴본다면
"사시巳時경에 금둔동(지명)에서 첨사인 심사손과 조방장 희천군수등
일동이 군사를 거느리고 작벌(벌목)을 하는데,
말을탄 야인(오랑캐)들 100여명이 갑자기 급습하여 환도(칼)를
무수히 내리쳐 첨사는 즉사하고, 조방장은 오른쪽 무릅에 화살을 맞았으며...."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일이 당시 조정에서 논란이 참 많았던 모양 임니다.
이 내용의 기록들은 분량 관계상 다 살펴보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중종 26년 7월 26일에 정윤겸을 파직 하라는 글이 보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