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스케치
"봉오동전투"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청산리전투"는 중고시절에 들어서 알고 있지만 봉오동전투는 전혀 몰랐다. 아마 90년대 후반이나 20년대 초반에 봉오동전투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2000년 대에 들어와서 한반도 평화문제를 숙고하며 조선과 한국과 중국 조선족이 함께 연구하며 대화할 수 있는 역사적인 공동유산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부터 비로소 삼자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조선 최후의 역사인 독립운동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시간 후로 간도에서 망국 백성들이 벌인 독립전쟁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 팍팍 들어왔고 가슴에서 뜨겁게 소용돌이 쳤다.
봉오동을 답사할 계획을 여러 차례 세웠지만 뜻대로 방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삼툰자와 안산은 지나다니면서도 그곳이 봉오동전투의 전전투지역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서 무심하게 지나쳤다.
며칠 전에 작심하고 봉오동에 찾아갔지만 장대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수남촌 마을 입구에서 멍하니 서서 전투가 있었던 상촌 쪽을 바라보다 돌아왔다. 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심사가 불편하여 연길로 돌아오자마자 여러 책들을 뒤져서 봉오동에 대한 정리를 다시 해보았다.
정리를 하면서 봉오동일대를 독립군 기지로 공동 사용한 최진동, 홍범도, 안무를 비롯하여 봉오동전투에 참여한 독립군들, 군인들의 식사를 지으신 분들, 봉오동 황무지를 개간한 마을 사람들, 군영을 운영할 수 있도록 후원금을 내준 조선과 간도의 조선인들 그리고 봉오동전투 사적을 발굴해서 정리해 주신 여러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렸다.
1. 봉오동 위치와 지명
1)위치
도문의 동북쪽 가까이에 위한 전략적인 요충지로 서쪽은 도문, 연길, 동쪽은 훈춘과 러시아, 남쪽은 함경북도 온성, 경원등과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2)지명
세칭 북봉오동을 의미하며 가야하 상류 강반에 위치한 수남촌에서 동북향으로 들어가는 20리 계곡에 대한 통칭이다.
2. 봉오동 마을 구성
하촌, 중촌, 상촌으로 구성되었으며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당시 11개 마을에 조선족 200여 가호가 살았다.
1) 하촌마을
봉오동계곡의 첫 마을로 최진동(최명록, 최희)의 장원이 소재하였고 이름도 그대로 하촌으로 불리었다.
2) 중촌마을
하촌마을에서 3,4리 정도 올라가는 곳에 위치하였고 개천을 사이에 두고 마촌과 태촌이 있었고, 5,6리를 가면 박촌과 조촌 그리고 이어서 강촌과 호박골이 있다. 공립제3소학교가 위치하였다.
3) 상촌마을
호박골에서 5,6리를 들어가는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동골, 북골, 남골이 합친 곳이라 하여 삼개골 또는 삼개마을로 불리웠다. 봉오동사림소학교가 소재하였으며 북동마을에 32호, 남동마을에 28호가 있었다.
호박골과 상촌 사이에 동남향으로 뻗은 골짜기와 교차되는 지점이 봉오동전투 지점이다.
3. 봉오동 조선족마을 시작과 군무도독부 설립
1)시작
1908년에 최진동이 조선의 온성, 명천, 경원 등지에서 인력을 모집하여 봉오동 황무지 개간을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2)확장
1910년 초에 최진동이 봉오동 전체와 석현, 대감자, 곡수, 도문, 남양 등지의 땅을 매입하였다. 봉오동 안에 자위대를 편성하여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였다.
3) 군무도독부 설립
1919년 3.13 용정 반일만세 시위 이후 봉오동은 그 일대의 반일군중집회에 앞장을 섰다.
봉오동의 지도자인 최진동은 1919년 3월 26일, 왕청현 배초구에서 5천여명의 조선족 항일집회 지휘하였고, 4월 19일, 봉오동일대의 항일만세 시위 지휘,4월 29일, 대감자일대 항일만세 시위를 지휘하면서 무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반일무장투쟁을 구상하며 상촌과 중촌 중간 지점에 군무도독부를 설립하고 병영과 연병장을 건설하였다. 도독부 군인은 그의 자위단, 박영의 계원들과 소작농과 연변에서 모집한 장정들로 구성하였으며 설립당시 도독부는 1대대, 4개 중대, 8개 소대로 편성되었고 200 여명의 군인이 종사를 하였다.
1920년 당시 일제군경 조사에 의하면 군무도독부의 병력이 약 600 여명이고 무기는 군총이 약 400정, 권총이 약 50정, 수류탄 약 120개와 기관총이 2문을 보유하였고 참모장에 박영, 대대장에 리춘승, 중대장에 리동촌, 소대장에 최문인이였다.
4. 봉오동전투 지점
호박골 (중촌 끝 마을)과 상촌 사이에 인가 없는 길이 5,6리 계속되는데 그 중간 지점에 동남향으로 벋은 골짜기와 교차되는 지점이 봉오동전투가 일어났던 북봉오동 골짜기다. 호박골 어구에서 상촌으로 올라가는 길과 그 길을 둘러싸고 있는 고지 시루봉과 서산, 남산고지에 “대한북로독군부”로 통합된 군인들이 매복해 있다가 야스가와가 이끄는 월강추격대를 섬멸한 봉오동전투의 격전지다.
5. 봉오동이 전투의 요충지가 된 이유
1919년 3.13 항일만세 시위 후에 북간도의 독립군 단체들은 봉오동을 중심으로 하여 양 팔을 벌린 듯이 그 외각지대에 주둔하면서 하나의 통일된 군사 근거지를 이루었다. 이 군사 근거지는 적이 침입해오면 여러 독립군 부대가 대규모 연합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지리적 연건을 갖추었고 어느 한 부대가 습격을 받으면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서로 지원할 수 있었으며 대병력이 쳐들어올 경우에는 봉오동과 인근의 밀림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진동장군의 도독부가 봉오동 중심에 있었으므로 북간도의 독립군들이 연합하여 일본과 싸울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장소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봉오동전투의 대 서막이 열렸다.
2018.6.27.수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