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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문갑연 회원이 <창원문학> 2012년 23집에 단편소설 "풍경화"를 발표하였다.
(2회분 올립니다.)
단편소설
풍경화
문갑연
(제2회)
물론 현규도 기회가 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학생일 때 자신감을 잃어 버렸던 것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공부할 시간이 적으면 그만큼 성적은 비례한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현규는 중학교에 다닐 때는 반장에다가 학교 급사로 일하면서 잡비를 벌었다. 물론 급사도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었다. 그 학교에서 전교 1등으로 들어온 현규에게 특별 선물로 주는 아르바이트 자리였다. 수석이라 입학금과 1년 동안의 학비면제에 아르바이트까지, 다소 공부에는 지장이 있었다지만 만족한 1년을 보냈다. 그런데 공부만 해도 벅찬 등교시간에 아르바이트까지 해야 하니 거기다가 수업시작 전과 후에는 물론이고 가끔씩은 수업시간에도 빠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생긴다. 방과 후에도 교무실 청소에 선생님들의 심부름으로 공부할 시간을 써버리니 점수는 점점 내리막길로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2학년에 올라와서 한 번도 학비를 내지 못한데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채독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다. 아무리 가족이 많은들 어머니가 없는 현규로서는 제대로 간호를 받지 못하자 병마와 싸울 기력마저 잃었다. 결국 그해 여름 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8월 중순이 되어서야 학교에 다시 출석을 했다. 하지만 수업시간마다 꼭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선생님의 말이 너무 생소해서 앉아 있기조차 어색하고 민망했다. 거기다가 등교를 하는 날이면 언제나 서무실에 불려가 공납금 독촉을 받는다. 현규로서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차츰 학교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결석하는 날이 잦아졌다. 하지만 학교고 가정이고 누구 하나 현규에게 관심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를 그만두는 건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그런데 1년 후배인 같은 마을에 사는 희용이 중학교를 졸업을 하고 진학을 못하면서, 현규와 친구가 되었다. 현규와 희용의 집이 다 가난했지만 다른 게 하나 있었다. 현규는 어머니가 없었고 희용은 어머니가 있었다. 현규는 외톨이라는 열등감과 동시에 언제나 가슴 한구석이 채워지지 않은 채 비어 있는 반면, 희용은 비록 가난해도 자신감은 물론이고 가슴이 꽉 차 있었다.
이장이 갑자기 마이크를 현규 입으로 갔다가 대면서 저가 오늘의 이 감격을 어떤 말로 미화시킨다고 한들 본인보다 나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선배님께서 직접 한 말씀 해 주셔야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현규는 갑작스런 주문에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희용의 훌륭함을 더 확실히 말해야 될 것 같아서 마이크를 거절하지 못했다. 낮이면 들로 산으로, 식전에는 개똥을 주워 거름에 넣는다. 밤이면 희용의 집에서 함께 자면서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을 한탄하다가도 체념하기를 수없이, 그러다가 하나님을 알고부터 조금씩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게 아니라 우리가 이런 현실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꿈도 야무지게 둘은 약속을 한다. 그때 철없이 한 약속이 결국 이뤄지다니, 현규는 고향에서 농사에 종사하고 희용은 친구가 농사를 과학적으로 지을 수 있도록 기술을 보급하겠다고.
"여러분들이 저와 희용 친구를 그렇게까지 인정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희용 친구야말로 우리 마을의 보배이자 우리나라 농업계에서는 없어서는 아니 될 국보급인 존재란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다들 잘 아시겠지만, 친구를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명문대서 모시고 가려 했으나 그럴 때마다 번번이 거절했다는 사실을, 그는 명예도 부도 버리고 오로지 저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 고향의 농촌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연구하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가 추구해 온 것은 연구실 학문이 아니라 농촌학자로서의 현장 즉 흙학문을 실행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 경남의 기후 풍토에 맞는 농작물 육성은 물론이고 유력 작물이면 종자개량을 해서라도 이 지역에서 재배가 가능하도록 해 왔습니다. 희용친구는 전공에 대한 애정과 노력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정작 더 높게 평가받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성이라는 점입니다."
현규가 결핵으로 의병 제대를 했을 때만 해도 누구도 그의 옆에 오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희용은 달랐다. 현규가 군에 있을 때 희용이 명문대인 H대학교 신입생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했노라며 편지가 왔었다. 대부분 인기과에서 수석을 하기 마련인데, 희용이 농대에서 수석을 했다는 건 역사상 없는 매우 값진 것이었다. 숙식은 입주 가정교사로 해결이 되었다는 것도 썼다. 하지만 성적을 유지하자니 늘 시간에 쫓긴다던 희용, 어쩌면 현규를 보기 위해 모자라는 시간을 쪼개가며 일부러 구실을 만들어 오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모님께 인사를 한 후부터는 현규한테 시간을 다 쏟아놓고 간다. 특히 가족들도 전염될까봐서 겨우 식사를 차려다 주는 것, 하긴 식사래야 겨우 꽁보리밥에 보리 뜨물에 끓인 된장, 김치라도 있으면 진수성찬이다. 우거지나 시래기죽을 들여놓고 가는 일 외는 현규 방에 오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 대신이라는 누나들까지 그랬다. 그런데 희용은 결핵은 잘 먹어야 한다면서 안 그래도 없는 돈에 뭐라도 사들고 온다. 거기다가 모처럼 온 아들을 위해 집에 키우는 닭을 잡아 삶아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현규에게 가져온다. 한번은 희용이 왔을 때 현규가 각혈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친구 곁을 떠나지 않고 현규의 손을 잡고 밤새 눈물로 기도했다.
만약 그때 희용의 우정 깊은 행위가 없었다면 현규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이튿날 희용을 보내고 현규는 생각에 잠겼다가 결심을 하고는 집을 나섰다. 병도 병이지만 집안에 더러운 병을 가진 식구가 있는데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새엄마는 벌써 여러 번 보따리를 싸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날 아침에도 전날 장날에 사와서 남겨놓은 간 고등어를 현규 주라는 아버지에게, 입맛이 없어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내인 자기는 뒷전인 남편 믿고 살 수 없다며, 아예 보따리를 싸자 당황한 아버지가 주저앉히느라 전쟁을 한바탕 치렀다.
현규는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집을 나섰다. 안 그래도 죽음이 문턱에 이미 당도했다고 느끼고 있던 터다. 이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찾아온 절박감은 생전에 지은 죄의 문제 때문이었다. 희용과 잘 가던 산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굳이 목적지까지 가겠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산나물이며 솔잎 등 눈에 들어오는 열매들도 다 입으로 가져갔다. 숨이 차면 나무 그늘에 앉아 용기가 나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계곡을 타고 올라가면서 물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피를 토할 때는 흐르는 물로 씻었다.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목적지에 당도했을 때는 해가 하늘 한가운데 있었다. 계곡의 물이 방처럼 넓은 바위를 포위하듯 양쪽으로 헤어져 바위 아래서 다시 정답게 만났다. 희용과도 다시 만날 날이 있을까. 현규는 물위로 시선을 보내고는 희용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부질없는 소망이라며 도리질을 했다. 희용이 올 다음 방학 때까지 살아 있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현규는 소나무가 천장처럼 덮고 있는 바위 위에 나른한 몸을 힘겹게 눕혔다. 눈을 감자 현실이 아득하게 멀어지면서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에 빠져들었다. 잠시잠깐이면 사라져버리는 하루살이에 불과하기에 곧 잊혀지고 말 인생의 무상함에 연연하지 않고 본향으로 돌아가리라 체념해 보나 역시 죄에 대한 두려움이 현규의 가슴을 옥죄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현규는 그날 현실을 초월한 어떤 힘이 울컥 솟아오르는 걸 체험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 반대편 마을에서 소를 먹이러 온 아이들이 현규를 보고는 해골이라며 도망을 쳤다. 그때서야 현규는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자신의 몰골을 의식하고는 그들의 행위를 인정했다. 옛날엔 죽음이 나와 상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희용과 둘이서 이 바위에 누워 푸념이 지겨우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정답게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거기서 미래를 설계했고, 그래서 꿈을 이루면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었는데……. 현규는 꿈도 펼쳐 보기도 전에 희용과는 아예 비교할 존재마저 상실해 버렸다는 게 너무 억울했다.
그런데 다행히 희용의 우정이 생각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축 처진 몸을 겨우 돌려 무릎을 꿇었다. 마침 하나님의 은혜를 엄청 받았다던 어느 여신도의 말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널 버렸어! 스스로 어머니가 되어 주겠다며, 그러나 뼈만 앙상하게 남은 현규를 보고는 기도해 준다던 계획마저 포기하고 돌아 가버렸던 그녀, 그 후로 현규는 이 기억만 나면 언제나 그래왔듯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전율했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두려움과 서러움에 섞여 항변이 터져 나왔다. 왜? 절 버리십니까! 그래도 전…, 현규는 그때부터 울부짖으며 떼를 썼다.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왜 하필이면 접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통하면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현규는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면서 두 손으로는 바위를 얼마나 방망이질했으면 손이 피투성이로 변했을까.
이렇게 울부짖던 현규에게 비몽사몽간에 나타난 환상은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는 보고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운 전우애를 경험했다. 기합을 직업으로 여기던 중대장한테서 포근한 사랑이 온몸으로 느껴지는가 하면, 또 여러 전우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평화롭고 친밀감이 넘치는 게 아직껏 이토록 사랑스럽고 정겨움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엄하고 보기만 해도 무섭고 겁에 질려 늘 긴장한 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들의 다음 행동을 기다려야 했었는데, 현규에게 이 놀라운 변화에 확신을 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으니, 누가 널 버려? 네가 날 떠나지 않는 한 난 절대로 널 버리지 않는단다. 십자가의 사건이 널 위해서란 걸 몰라?했다. 현규는 깜짝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는 현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는 게 믿어졌다. 동시에 방금 사랑이신 그분을 만났다는 확신마저 들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 여신도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 해도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이 섰다. 현규는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면서 껑충껑충 뛰었다. 결국 현규는 기쁨의 환호를 목이 터져라 질러댔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날 이후로 현규는 병에 얽매이지 않았고, 각혈을 하면서도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감사하여 찬양을 입에 달고 있었다. 결국 희용과 승부를 걸어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아쉬울 게 뭐가 있다고, 우리 같은 촌놈들 잊지 못하는 걸로만 봐도 사람 됨됨이는 충분히 알 것 같네."
노인회장이 매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H대학교가 국립종합대학교지만, 60여 년 전 설립 당시만 해도 H농과대학이었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H농대로 불렀거든요. 그러니 아무리 지금은 거대 국립종합대학교로 발전했다고는 하나, 학교의 원 뿌리는 역시 농과대학 아닙니까. 그런데서 친구가 농업생명과학대학장을 거쳐 지금은 농대와 같은 단과대학이 12개나 되는 종합대학교의 총장이라면 얼마나 대단한지를 어느 정도 짐작이 가실 겁니다. 학사는 물론이고 석․박사를 포함한 재학생과 교수들까지 합하면 3만 명에 육박한다니, 희용 친구의 인물됨을 과히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총장이란 위치가 비단 실력만으로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기적적으로 결핵 3기에서 회복된 것은 전적으로 희용 친구 덕분입니다. 어머니가 세상에 없는 저에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실천한 사람이 바로 그 친굽니다. 결핵은 전염성이 강한 질병인데도 그 친구는 무의식중에라도 저를 경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그 정도 인격이니까 오늘의 희용도 가능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현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인회원 한 명이 통로로 나오더니, 우리 마을 출신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데 어떻게 춤을 추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몸을 우쭐거리며 통로를 빠르게 왔다 갔다 하자, 회원들 몇 명이 더 뒤를 이었다. 눈치 빠른 기사 아저씨는 벌써 노래를 틀었다.
학교 정문 앞에는 두 줄로 학생들이 나눠 서서 천지마을 노인회원들이 탄 버스를 환영했다. <농대와 천지마을의 자매결연을 축하합니다>라고 쓴 대형 현수막이 학교 정문 위에 걸렸다. 학생들은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정성껏 환영하자고 의논을 한 모양이었다. 현규는 가슴이 벅찼다. 다른 회원들도 같은 심정임을 금방 알았다. 떠들며 춤추던 자유분방한 조금 전의 모습과는 달리 약간은 긴장된 듯 창문 밖의 풍경에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차는 농대 입구까지 들어갔다. 행사장 좌석에는 농업생명과학대학의 1개 학부와 10개 학과에서 참석한 교수 및 학생 대표들이 서서 환영했다. 이장이 천지마을 대표단도 소개했다. 입구에는 H대학교 총장 하희용 교수가 손을 내밀며 반갑게 일일이 손을 잡는다. 진짜 우리 마을 출신 희용이 맞나? 이런 눈초리로 노인회원들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내미는 손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들어오던 현규를 희용이 포옹을 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드디어 행사가 진행되고 총장의 인사말 순서에서는 희용이 처음에는 당연히 현장에 가서 행사를 진행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앞으로 그런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특별히 저의 제2고향이기도 하고 또 유명 관광지가 있는 이곳으로 꼭 한 번 고향 어르신들을 모시고 싶었습니다……. 라는 서두로 시작했다.
자매결연 행사가 끝나고 점심식사를 대접 받고 난 오후 시간은 희용이 버스에 합승하여 자진 가이드로 나섰다. 희용은 관광지뿐 아니고 H시내 구석구석 다니는 곳마다 의미를 부여하는 설명을 쉬지 않았다. 시내를 다 돌아본 일행은 희용의 박식함에 놀라기도 했지만, 어느덧 자신들이 H시민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도시 전체를 훤히 파악해 버렸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희용의 아내가 학생들의 협조로 자신의 집 정원 잔디밭에다가 차린 만찬에 초대받은 회원들은 생전처음 접해보는 풍경에 어리둥절했다.
늦은 시간에 버스에 오른 회원들은 침묵했다. 이장이 결국 입을 열었다. 왜 놀지 않느냐고. 그리고 아직 준비한 술병은 하나도 비우지 못한 채라고 했으나, 더 들어갈 데가 없다면서 이구동성으로 희용의 환대에 감격하여 먹먹하다거나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훌륭한 후배를 여태껏 몰라본 게 죄스러울 따름이라며 너도나도 자책하는 말을 한마디씩 했다. 이장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다 동원하면서 술병을 좀 비워주기를 권했지만 단 한 방울의 술도 마시는 이가 없었다. 잠들지 않으면서….
문갑연
․창원 출생, 《농민문학》 《믿음의 문학》(2001) 단편소설 신인상 수상
․한국기독공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
․한국기독교문협, 한국문협, 한국․경남소설가협회 회원
․소설집 《거울 없이 사는 사람들》 《추도식의 가족들》
․장편소설 《꿈이 묶여 있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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