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모든 학술을 공부하되 쓰는 데에 들어가서는 끊임이 있으나, 마음 작용하는 공부를 하여 놓으면 일분 일각도 끊임이 없이 활용되나니, 그러므로 마음 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나니라."”
<대종경 제11요훈품(要訓品) 1장>
필자는 1984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불교에 출가한 후, 몇 번의 회심의 경험을 겪었다. 그 중의 하나는 대학생 때였다. 원불교에서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큰 은혜를 사은이라고 한다. 어느 날, 내가 부처가 된다면 누구의 은혜일까 하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것은 내 안에 불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 말고, 내가 부처가 되도록 길을 열어준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사실 원불교에 출가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부모님은 막노동으로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도 내가 왜 이런 집안에 태어나 고생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상처가 컸다. 더불어 어린 마음은 이내 철학적인 성격이 되어갔다. 두 번째는 멋진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 가난 때문에 창작을 전문으로 하는 대학을 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갈망은 컸다. 그래서 결국 다니던 학생회가 속한 원불교 교당의 교무님의 꾐(?)에 넘어갔다. 원불교에 출가하면 대학도 다닐 수 있고, 글도 마음껏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설득에 넘어간 것이다.
출가한 후, 보다 근본적인 의문에 부딪힌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이 부처라고 하는 처처불상(處處佛像)이라는 가르침에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치고, 내가 부처를 이루었을 때, 그 공덕은 누구에게 가는가 하는 문제가 파생된 것이다. 문득 내가 출가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솔직히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출가할 환경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 나의 출가와 성불의 인연은 부모님이 아니겠는가. 나를 부처로 만든 사람은 결국 부모님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부처가 아니면 부처를 만들 수 없다. 부모님이야말로 나를 부처로 만들 부처님이다!
나의 어린 날들의 고통은 이로써 치유가 되었다. 내가 몸부림치며 빠져나오고 싶어했던 그 가난에 대한 아픔은 내 마음 안에서 말끔히 사라지고, 이제는 그것이 오히려 나의 삶을 지탱하는 튼튼한 기반이 된 것이다. 그 가난은 나의 마음의 상처가 아니라 하나의 영광의 징표로 180도 역전된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로드맵에 따라 공부했다. 그리고 원불교 교무가 되었다. 마침내 글을 마음껏 쓰는 연구자가 되었다. 이제 나이 50이 되어 되돌아보니 나의 삶은 이미 소태산(원불교의 교조, 본명은 박중빈)의 삶 속에 원형으로 존재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의문 속에서 어린 날을 보낸 것은 바로 나의 유년의 시절과도 같았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의문을 끝까지 밀고나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나의 영혼의 이정표마저 제시해준 것이다.
물론 그의 행적과 법문을 모은『대종경』에 나와 같은 아픔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행간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그의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은『원불교교사』 혹은 여러 전기나 소설 등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그의 사자후에 해당한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해소한 후,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심에 의해 사회와 세계를 새롭게 재구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흔히 말하듯 깨달음과 자비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정신을 그대로 이 시대에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한국의 근대는 집단 전체가 불행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수운과 증산, 그리고 소태산이 출현해 근본적인 삶의 의미를 묻고, 그 처방을 내린 것이다. 비록 좁은 반도의 땅이지만 예수나 석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반도의 민중들이 처한 고뇌의 삶을 함께 겪고 그 앞길에 인류와 더불어 평화와 행복의 길을 만들어가자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컨텍스트(context, 삶의 현실)를 통한 텍스트(text, 삶의 본질)를 제시하고 밝혀준 이들이야말로 연민의 정 가득한 우리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그 전범(典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소태산의『대종경』은 수운과 증산을 이어 평범한 삶 속에서 길어 올린 빛나는 보석 같은 깨달음의 언어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보고에 다름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소태산은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돈이나 지식이나 권리가 많으면 그것이 도리어 죄악을 짓게 하는 근본이 되나니, 마음이 바른 뒤에야 돈과 지식과 권리가 다 영원한 복으로 화하나니라.”( 제11「요훈품」4장)라고 한다. 이 어록을 현대 한국사회에 대입해보면 그 의미는 자명하다.
돈, 지식, 권리는 그 자체가 죄악이 아니다. 그것을 쓰는 우리의 마음에 의해 행복을 주기도 하고, 불행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것은 행복의 필요조건이지 충복조건은 아니다. 충족조건은 마음인 것이다. 한국사회는 이러한 조건이 역전되어 있다. 물질자본주의에 의해 돈, 지식, 권리가 충족조건이 된 것이다. 본과 말, 앞과 뒤, 뿌리와 잎이 뒤바뀐 것이다. 사회를 윤택하게 해야 할 혈관과도 같은 이러한 요소를 마음이 소유하고 만 결과인 것이다. 그것은 유한한 것이다. 거기에 집착하다가 결국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소태산은 이러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천상락’은 누리라고 한다. 천상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소태산은 마음공부를 누누이 강조한다. 이『대종경』은 바로 마음공부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전도된 우리의 현실을 시급히 직시하기 위해서라도 일독을 권한다.
첫댓글 ()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법문,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