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다윗과 골리앗, 그 말의 전쟁
볼수록 기이한 전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묵상하면 할수록 의미가 깊은 싸움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말의 전쟁이다. 살다보면 건강 문제, 경제 문제, 자식 문제, 신앙 문제, 죽음 문제, 결혼 문제, 직장 문제, 관계의 문제 등, 피하고 싶으나 때로는 피할 수 없는 골리앗과 같은 거대한 문제가 목을 조여 온다. 숨이 가쁘다. 마음이 위축된다. 살맛이 싹 달아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인생의 골리앗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른 척 피해가지 않는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인생 전쟁터에서 수많은 골리앗과 맞닥뜨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패할 수 없는 승리의 비결을 위대한 웅변으로 가르쳐준다. 이제 상상력의 나래를 펴고 3,000여 년 전, 그 놀라운 말의 전쟁터로 날아가 보자.
<골리앗이 말하다>
블레셋의 군대는 에베스담밈에, 이스라엘 군대는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대치하며 항오를 벌이고 있었다. 고대의 전투는 양편의 군대에서 힘센 장수가 나와 싸움을 벌여 상대방의 기를 꺾는 절차가 있었다. 블레셋 편에서 장수가 나섰는데 이름이 골리앗이었다. 그는 3m에 육박하는 장대한 키에 놋 투구를 썼다.
빈틈없이 육중한 갑옷을 받쳐 입고 다리에는 놋 경갑을 차고 있었다.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방패를 든 자가 앞서 걷고 있었다. 장렬한 태양빛 아래 장대한 골리앗의 거대한 몸집은 이스라엘 군대에게는 감히 대항할 수 없는 두려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스라엘에서는 나서는 장수가 없었다. 기가 눌려 침묵만 흘렀다. 그런데 골리앗의 무기가 남달랐다. 그의 치명적인 무기는 창과 칼과 우람한 신장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었다. 골리앗은 창을 휘두르며 쳐들어오지 않았다. 입을 열어 말을 했다. 하느님을 모욕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희롱하는 말을 했다.
골리앗은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2사무 17,16) 말을 했다. 이스라엘 군대는 골리앗의 말을 경청했다. 인간은 두려움을 주는 대상에 마음을 내어주면 그 대상의 말에 집중한다. 그는 두려움의 종이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는다. 이스라엘 군대는 어떻게 되었는가?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2사무 17,11).
이스라엘 군대는 골리앗의 말을 듣고 놀라도 크게 놀랐다. 이 싸움은 해보나 마나 한 싸움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골리앗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조석으로 경청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중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항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기도했다는 기록도 없다. 골리앗의 말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비참한 하느님의 백성의 모습이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삶의 현장에서 대결하지 않는 자들은 인생의 위기에서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말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윗이 말하다>
소년 다윗은 전쟁에 나간 형들에게 음식을 갖다주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전쟁터에 왔다. 마침 골리앗이 나타났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골리앗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도망하였더라”(2사무 17,24). 이제는 골리앗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조석으로, 사십일 간이나 골리앗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골리앗의 모습만 보아도 도망했다.
악의 말은 두려움을 만들고 두려움은 도망자를 만든다. 사탄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쓰고 있는 전략이다. 골리앗은 소리를 높여 하느님을 모욕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다윗이 골리앗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다윗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느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2사무 17,26). 전쟁터에서 처음으로 ‘하느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악의 세력은 거대한 몸집으로 눈을 사로잡고 악한 말, 용기를 꺾는 말, 절망적인 말, 부정적인 말로 귀를 포로 삼는다. 결국 거대한 두려움이 마음을 차지하고 주인이 된다. 그리고 사람을 두려움의 종으로 만들어 버린다. 다윗은 골리앗의 말을 들었으나 마음에 인정하지 않았다. 강력히 저항했다.
다윗의 말이 그토록 달랐던 것은 그가 하느님께 말을 일상생활에서 열심히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골리앗과 같은 사람의 말은 조석으로 우리에게 낙담케 하는 말, 절망케 하는 말을 쏟아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 악한 말에 대항해야 한다.
싸우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악한 말을 경청하여 두려움에 굴복하면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선악의 치열한 싸움은 말의 싸움이다. 다윗의 말은 사울 왕의 귀에 들어갔다. 왕을 만난 다윗은 말했다. “왕이여 그를 인하여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2사무 17,32). 왕이 다윗에게 용기를 주어야 하는데 다윗이 왕을 위로하고 있다. 말을 빼앗긴 지도자의 모습이다.
사울 왕이 말했다. “네가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2사무 17,33). 왕의 말은 맞는 말인가? 그가 배운 말과 경험의 세계에서는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틀린 말이었다.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칠 때에 곰과 사자를 쳐 죽인 경험을 왕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사무엘상 17:37). 왜 다윗의 말이 사울 왕과 다른 사람들의 말과 그토록 달랐는지 알게 된다. 그는 하느님과 교제하고 기도하며 양을 치는 일상의 전쟁터에서 경험적으로 하느님께 말을 배운 것이다. 그는 차원 다른 하느님께 차원 다른 말을 배워 차원 다른 경험을 한 것이다. 다윗이 달랐던 이유다.
<다윗과 골리앗이 말하다>
다윗은 골리앗을 대항하여 나섰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가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귀를 활짝 열어 둘의 말을 경청했다. 눈과 귀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모든 군대의 눈의 창을 씻고 귀의 문을 크게 여셨을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말이 많은 전투는 없다.
다윗을 본 골리앗은 분노하여 투구를 벗고 소리쳤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 내게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2사무 17,43-44). 한마디도 쓸모 있는 말이 없다. 얼마나 생명 없고 불결한 말인가?
다윗은 돌을 물매에 매겨 돌리며 골리앗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말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여 …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느님이 계신 줄 알게 하리라”(2사무 17,45-46).
한 단어도 버릴 것이 없다. 물매를 떠난 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다. 다윗이 물매로 거대한 몸집의 골리앗을 맞추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애초에 골리앗은 다윗을 이길 확률이 없었다. 장거리 미사일인 물매를 창과 단창으로 어떻게 이기겠는가? 두려움으로 말을 빼앗기지 않은 다윗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생의 모든 골리앗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들에게 이길 확률이 없다. 그날 쓰러진 골리앗은 한 명이 아니었다. 블레셋 군인들의 마음에서 골리앗이 쓰러졌다. 이스라엘 군대의 마음에서 골리앗이 쓰러졌다. 그리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의 기록을 읽을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서 인생 골리앗들이 그때 쓰러진 것이다.
여기서 골리앗의 이마를 맞힌 돌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1코린 10,4). 하느님의 말씀으로, 반석 되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생의 골리앗을 물리치자. 결코 패할 수 없는 싸움임을 명심하자. 믿음으로 돌린 물매를 떠난 하느님의 말씀으로 쓰러지는 인생 골리앗을 믿음의 눈으로 밝히 보자.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