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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곽길,곽응기 금난수 이안도 오운 권춘란 권호문 우성전 정철
곽길(郭趌)1520년 (중종 15)거주지 창녕(昌寧)
[생원]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57위(87/100)
본관 현풍(玄風) 자는 자정(子靜)
아버지는곽지견(郭之堅), 동생은강릉부사 죽재(竹齋)곽간(郭趕)
곽응기(郭應禨)1524년 (중종 19) 거주지 현풍(玄風)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위(34/100)
[문과]선조(宣祖)5년(1572)임신(壬申)춘당대시(春塘臺試)병과(丙科)9위(11/15)
본관 현풍(玄風) 자는 언경(彦慶)
아버지는 곽침(郭琛)
왕대년 명종(明宗) 16
시험일 1561년08월19일
합격자발표일 1561년
시험종류 식년시(式年試)
방목정보 방목명:가정40년신유8월19일사마방목(嘉靖四十年辛酉八月十九日司馬榜目)
표제명:嘉靖四十年辛酉八月十九日司馬榜目
권수제:嘉靖四十年辛酉八月十九日司馬榜目
시험장소1 한성부(漢城府)
1소시험관 1소은문(一所恩門)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정응두(丁應斗)나주(羅州)
1소은문(一所恩門)공조참판(工曹參判)심수경(沈守慶)풍산(豊山)
1소은문(一所恩門)봉상시정(奉常寺正)홍춘년(洪春年)남양(南陽)
1소은문(一所恩門)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송하(宋賀)진천(鎭川)
1소은문(一所恩門)병조좌랑(兵曹佐郞)박률(朴栗)밀양(密陽)
1소은문(一所恩門)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김내옹(金乃雍)경주(慶州)
시험장소2 장악원(掌樂院)
2소시험관 2소은문(二所恩門)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임열(任說)풍천(豊川)
2소은문(二所恩門)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오상(吳祥)해주(海州)
2소은문(二所恩門)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유순선(柳順善)진주(晉州)
2소은문(二所恩門)종부시정(宗簿寺正)노경린(盧慶麟)곡산(谷山)
2소은문(二所恩門)예조정랑(禮曹正郞)이거(李蘧)신평(新平)
2소은문(二所恩門)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김전개(金田漑)광산(光山)
생원장원 장원급제:조정기(趙廷機)
합격인원:100명
진사장원 장원급제:홍성민(洪聖民)
합격인원:100명
시험실시이유 식년시이다.
사마시 동방록
장순(張峋) 1532년(중종27)~1571년(선조4)거주지 인동(仁同)
[생원]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4위(9/100)
본관은인동(仁同).자는경앙(景仰),호는학거(鶴渠).
장금용(張金用)계로서통찬(通贊)장맹저(張孟儲)의후손이다.할아버지는인동장씨진평파파조장신손(張信孫),아버지는장사랑장항(張沆),어머니는이조참판박추(朴鰌)의딸로울산박씨(蔚山朴氏)이다.
조부 장신손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용암(龍巖) 박운(朴雲), 구암(久菴) 김취문(金就文),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에게서 수학하였다.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여 『태극설(太極說)』, 『황극요의(皇極要義)』, 『계몽석의(啓蒙釋疑)』, 『지성무식설(至誠無息說)』, 『심성휘편(心性彙編)』 등을 지었다. 또 1566년 학림정사를 지어 일가와 인근 초학자들을 위한 강학 장소로 이용했는데, 1567년(명종 22) 어린 장현광(張顯光)이 와서 수학하였다. 장순의 학문은 훗날 장현광의 상수학(象數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평생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실천하며 학문을 정진하였다. 먼저 사서삼경(四書三經),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대전(朱子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연구하여 이른바 ‘이일분수(理一分殊, 만물의 형상은 다르지만 모두 동일한 이치)’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또 장재(張載)의 『정몽(正蒙)』, 『서명(西銘)』, 소강절(邵康節)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그 중 특히 장재의 호 횡거(橫渠)의 거(渠)를 자신의 호로 쓸 정도로 존경하였다.
성리설에 관한 글과 시문 등이 7권이나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후손들이 문인들이 지은 언행록, 연보 등을 정리하여 1972년 『학거선생실기(鶴渠先生實紀)』를 간행하였다.
안경로(安景老)1527년 (중종 22)~1592년 (선조 25)거주지 안동(安東)
[생원]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12위(17/100)
본관 순흥(順興) 자는 성백(成伯)
아버지는 천문습독관(天文習讀官) 안순(安珣)
홍성민(洪聖民)1536년(중종 31)~1594년(선조 27)
[생원]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21위(26/100)
본관은남양(南陽).자는시가(時可),호는졸옹(拙翁).
홍윤덕(洪潤德)의증손으로,할아버지는홍계정(洪係貞)이고,아버지는관찰사홍춘경(洪春卿)이며,어머니는고성군(固城君)군수이맹우(李孟友)의딸이다.
156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교리 등을 지냈다. 1567년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한 뒤 대사간을 거쳤다.
1575년(선조 8) 호조참판에 이르러 사은사로 명나라에 건너가 종계변무(宗系辨誣)에 대하여 힘써, 명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 뒤 부제학·예조판서·대사헌·경상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선조23) 8월에 종계변무의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아울러 토역(討逆)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익성군(益城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판중추부사가 되었다가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鄭澈)이 실각하자, 그 일당으로 몰려 북변인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특사로 풀려나 복관되어 대제학을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졸옹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송유경(宋惟敬)1536년 (중종 31)~1592년 (선조 25)거주지 성주(星州)
[생원]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8위(38/100)
본관 야로(冶爐) 자는 중직(仲直)호는 성암(省庵)
조부는 야계송희규 (宋希奎), 아버지는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 송현(宋鉉)
저서로는 擊蒙要語가 전함.
권경룡(權景龍)1537년 (중종 32)거주지 함창(咸昌)
[생원]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2위(42/100)
본관 안동(安東) 자는 시백(施伯)
아버지는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권소(權紹)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
조광익(曺光益) 1537년(중종 32)~1580년(선조 13)거주지 창원(昌原)
[생원]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29위(59/100)
본관은창녕(昌寧).자는가회(可晦),호는취원당(聚遠堂)또는죽와(竹窩).
아버지는조윤신(曺允愼)이며,어머니는이조판서를지낸장말손(張末孫)의손녀이다.
이황(李滉)의문인이며,성리학을깊이연구하였다.
156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569년(선조 2) 형조좌랑에 이어 감찰을 지내고 1576년 중시(重試)에 장원급제, 의금부도사에 이르렀다.
1578년 강동(江東)으로 좌천된 아우 조호익(曺好益)을 만나려고 평안도도사의 직책을 얻어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는 그 우애를 가상히 여겨 정문을 내려 표창하고, 『삼강행실록』에 수록하게 하였다.
오봉서원(五峰書院)과 청효사(淸孝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취원문집(聚遠文集)』이 있다.
금난수(琴蘭秀)1530년(중종 25)~1604년(선조 37)거주지 예안(禮安)
[생원]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46위(76/100)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 또는 고산주인(孤山主人).
아버지는첨지중추부사금헌(琴憲)이며,어머니는영양남씨(英陽南氏)로교수남식(南軾)의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
1577년(선조 10) 제릉(齊陵)의 참봉을 비롯하여 집경전(集慶殿)과 경릉(敬陵)의 참봉을 지내고, 1585년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가 되었다.
그 뒤 직장(直長)·장례원사평을 지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에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많은 선비들이 호응해서 참가하고 지방민들은 군량미를 헌납했다.
그 해 성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599년 고향인 봉화의 현감에 임명되어 1년 만에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예안(禮安)의 동계정사(東溪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성재집(惺齋集)』이 있다.
서천일(徐千一) 1532년 (중종 27) 거주지榮州 沙川.
[생원]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47위(77/100)
[진사]명종(明宗)16년(1561)신유(辛酉)식년시(式年試)[진사]1등(一等)2위(2/100)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희우(希遇) 호는 응회(應會)
아버지는 부장(部將) 서치(徐治).형제로德一·六一이있음
이안도(李安道)1541년(중종 36)~1584년(선조 17)거주지 예안(禮安)
[생원]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50위(80/100)
본관은진성(眞城).자는봉원(逢原),호는몽재(蒙齋).
이황(李滉)의 장손으로,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이준(李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봉화금씨(奉化琴氏)로 훈도 금재(琴梓)의 딸이다. 조부 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퇴계 문하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다.
1574년(선조 7) 이황의 적손이라 하여 음서(蔭敍)로 목청전참봉(穆淸殿參奉)에 임명되고, 그 뒤 저창부봉사(儲倉副奉事)와 상서원부직장(尙書院副直長)을 거쳐 사온직장(司醞直長)에 올랐다.
아버지의 병으로 귀향하였다가 상을 당한 뒤 다음 해 44세로 죽었다.
예안의 동계서원(東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몽재문집(蒙齋文集)』 2권이 있다.
오운(吳澐) 1540년(중종 35)~1617년(광해군 9)거주지 함안(咸安)
[생원]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62위(92/100)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죽계(竹溪).
의령현감 오석복(吳碩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의현감 오언의(吳彦毅)이고, 아버지는 오수정(吳守貞)이다. 어머니는 순흥 안씨(順興安氏)로, 부호군(副護軍) 안관(安瓘)의 딸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의 학유(學諭)·학정·박사·전적(典籍)·직강(直講)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경원부 아산보(阿山堡)의 추장 번호(藩胡)가 난을 일으키자 북도조전장(北道助戰將)으로 나가 공을 세웠다.
그 뒤 충주목사 겸 편수관(編修官)을 거쳐, 사성(司成)을 지낸 뒤 사재감정(司宰監正)이 되고, 1589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가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수병장(收兵將) 등으로 활약하였다.
그 때 백령(白嶺)에서 모집한 의병이 전후 2만여 명에 이르렀다. 특히 의령 부근의 전투와 현풍 전투에 군공이 뛰어났다. 1593년 상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합천군수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합천 부근의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 제독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였다.
1599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에 승진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8년 다시 기용되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 공조참의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 때 시정득실(時政得失)을 진술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와 함께 분전한 17장(將)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주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죽유문집』이 있고, 편서는 『동사찬요(東史纂要)』가 있다.
정철(鄭澈)1536년(중종 31)~1593년(선조 26)거주지 한성([京])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5위(5/100)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정유침(鄭惟沈)이다.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 : 왕의 후궁에게 내린 종2품의 작호)인 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해 궁중에 출입했다. 이때에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훗날 명종)과 친숙해졌다.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성균관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됐다. 이어 좌랑 · 현감 · 도사를 지내다가 1566년(명종 21) 31세에 정랑 · 직강 · 헌납을 거쳐 지평이 됐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 : 젊은 문관 가운데 뽑아 휴가를 주어 학업만을 닦게 하던 서재)에 선출됐다. 이어 수찬 · 좌랑 · 종사관 · 교리 · 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1570년(선조 3)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했다.
43세 때인 1578년(선조 11) 승정원 동부승지,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선조 13)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 도승지 · 예조참판 · 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해 대사헌이 됐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 · 「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 · 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했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조경붕(曺景鵬)1526년 (중종 21)거주지거창(居昌)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0위(15/100)
본관 창녕(昌寧) 자는 충거(冲擧)
아버지는 조연(曺沿)
관직은 훈도(訓導)
박양좌(朴良佐) 1521년(중종 16) 거주지 합천(陜川)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5위(20/100)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충로(忠老)이고, 호는 복재(復齋)이다.
박가권(朴可權)의 5세손으로, 조부는 박한하(朴漢何), 아버지는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 박식(朴埴)이다.
학행으로 재랑(齋郞)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아들은 진사 박이문((朴而文)과 문과에 급제 이조참판을 지낸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이 있다.
배신(裵紳) 1520년(중종 15)~1573년(선조 6) 거주지 현풍(玄風)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7위(22/100)
본관은성산(星山).자는경여(景餘),호는낙천(洛川).
참봉배사종(裵嗣宗)의아들이며,어머니는밀양박씨로박동선(朴東善)의딸이다.
조식(曺植),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5년 관천(館薦)으로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고,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빙고별좌(氷庫別座)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72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어 학도들을 가르쳤다.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 현풍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노수신(盧守愼)·허엽(許曄) 등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해 겨울에 죽었다. 그의 스승인 조식이 죽었을 때 많은 문도 중에 천거되어 조명(朝命)으로 「남명선생행록(南冥先生行錄)」을 지어 올렸다. 현풍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천문집』 2권이 있다.
남몽귀(南夢龜)1524년 (중종 19)거주지 영천(榮川)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6위(36/100)
본관 영양(英陽) 자는 문상(文祥)
아버지는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 남기(南麒), 동생은 진사 삼송당 남몽오(南夢鰲)
박장춘(朴長春)1523년 (중종 18) 거주지의성(義城)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8위(38/100)
본관 함양(咸陽) 자는 원백(元伯)
아버지는 참봉 박등(朴登)
이녕(李寗)1527년 (중종 22)~1588(선조 21). 거주지예안(禮安)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1위(41/100)
본관 진성(眞城) 자는 노경(魯卿) 호는 만랑(漫浪)
아버지는 정민공 온계 이해(李瀣)
이황(李滉)의 문인.찰방察訪‧지례현감知禮縣監을 역임함.
백사 이항복(李恒福)이 묘갈명을찬함.
권호문(權好文)1532년(중종 27)~1587년(선조 20)거주지 안동(安東)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6위(46/100)
본관은안동(安東).자는장중(章仲),호는송암(松巖).안주교수(安州敎授)권규(權稑)의아들이다.
30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564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이들로부터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만년에 덕망이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56세로 일생을 마쳤으며, 묘지는 안동부 서쪽 마감산(麻甘山)에 있다.
안동의 송암서원(松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그는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았는데, 이황은 그를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하였고, 벗 유성룡도 강호고사(江湖高士)라 하였다. 저서로는 『송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경기체가의 변형형식인 「독락팔곡(獨樂八曲)」과 연시조인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이 『송암집』에 전한다.
최경창(崔慶昌)1539년(중종 32)~1583년(선조 16)전라도영암출생.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21위(51/100)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
최충(崔冲)의18대손이며최자(崔滋)의13대손이다.아버지는최수인(崔守仁)이다.박순(朴淳)의문인이다.
백광훈(白光勳) · 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55년(명종 10) 17세 때에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1568년(선조 1)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됐다. 예조 · 병조좌랑을 거쳐 1575년(선조 8)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년(선조 9) 영광군수로 좌천됐다.
다음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했다. 1582년(선조 16) 4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별히 제수했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었고 대간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고치도록 명했다. 최경창은 상경 도중에 종성객관에서 죽었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 · 송익필(宋翼弼) · 최립(崔岦)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또한 정철(鄭澈) · 서익(徐益) 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했다.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 · 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그의 시는 청절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얻었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 · 송익필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다. 서화에도 뛰어났다.
숙종 때에 청백리에 녹선되고 강진(康津)의 서봉서원(瑞峯書院)에 봉향되었다.
안제(安霽) 1538년 (중종 33)~ 1602년(선조35) 거주지 안동(安東)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30위(60/100)
[생원]명종(明宗)16년(1561)신유(辛酉)식년시(式年試)[생원]3등(三等)11위(41/100)
[문과]선조(宣祖)13년(1580)경진(庚辰)별시(別試)병과(丙科)17위(25/27)
본관 순흥(順興) 자는 여지(汝止) 호는 동고(東皐)
아버지는 문과급제 사섬시첨정 안수(安琇)
관직은 정랑을 역임했다
이희(李憙) 1532년(중종 27)~1592년(선조 25) 거주지 예천(醴泉)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34위(64/100)
본관은연안(延安).자는자수(子脩),호는율리(栗里).
참의이인문(李仁文)의증손으로,할아버지는이광(李垙)이고,아버지는이세수(李歲壽)이며,어머니는장중우(張仲雨)의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 1574년(선조 7)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이조·호조·병조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지방의 현령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군수로 있었다.
난이 일어나자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권춘란(權春蘭)1539년(중종 34)~1617년(광해군 9)거주지 안동(安東)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0위(70/100)
본관은안동(安東).자는언회(彦晦),호는회곡(晦谷).
아버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권석충(權錫忠)이며, 어머니는 함창김씨(咸昌金氏)이다.
구봉령(具鳳齡)·이황(李滉)의문인으로,특히『주역』에전심하였으며,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등과교유하였다.
1573년(선조 6)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학유·학록을 거쳐 예문관검열·사헌부감찰·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김윤명(金允明)의 의병에 가담하였다. 1595년 정월 사헌부장령을 거쳐, 3월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 6월 사간원사간에 임명되었다. 1597년 5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으며, 6월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거쳐, 그 뒤 성균관직강·사간원사간·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임명되었다.
1599년 성균관사성에 임명되었으며, 1601년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 1604년 홍문관수찬, 1606년 다시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영천군수·홍문관부교리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초야에서 글을 읽으며 여생을 보냈다.
스승 구봉령의 유문(遺文)을 교정하여 완고(完稿)로 만들었고, 사림에서 구봉령을 모시기 위하여 주계서원(周溪書院)을 건립하는 데 앞장섰다. 주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진학도(進學圖)』·『공문언행록(孔門言行錄)』·『회곡집(晦谷集)』 등이 있다.
이선강(李善綱) 1534년 (중종 29) 거주지 안동(安東)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56위(86/100)
본관 진성(眞城) 자는 사겸(士兼)
아버지는 생원 이문태(李文台)
우성전(禹性傳) 1542년(중종 37)~1593년(선조 26) 거주지 한성([京])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65위(95/100)
본관은단양(丹陽).자는경선(景善),호는추연(秋淵)·연암(淵庵).
생부는 현령 우언겸(禹彦謙)이고, 양부는 우준겸(禹俊謙)이다. 대사헌 허엽(許曄)의 사위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4년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요승 보우(普雨)의 주살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봉교(奉敎), 수찬(修撰) 등을 거쳐 1576년 수원현감으로 나가서는 명망이 높았다.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장령(掌令)·사옹원정을 거쳐 1583년에 응교(應敎)가 되고, 뒤에 여러번 사인(舍人)을 지냈다.
동서분당 때 동인으로 분류되었다. 그 뒤 이발(李潑)과 틈이 생기자 우성전은 남산에 살아서 남인, 이발은 북악(北岳)에 살아서 북인으로 분당되었다. 남인의 거두로 앞장을 섰으며, 동서분당 때나 남북의 파쟁에 말려 미움도 사고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해 군호(軍號)를 ‘추의군(秋義軍)’이라 하고, 소금과 식량을 조달해 난민을 구제하였다. 또한 강화도에 들어가서 김천일(金千鎰)과 합세해 전공을 세우고, 강화도를 장악해 남북으로 통하게 하였다. 병선을 이끌어 적의 진격로를 차단했으며, 권율(權慄)이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행주에 이르자 의병을 이끌고 지원하였다.
그 공으로 봉상시정에서 대사성으로 서용되었다. 그 뒤 계속 활약하였으며, 용산의 왜적을 쳐서 양곡을 확보해 관군과 의군의 식량을 마련하였다. 그 뒤 퇴각하는 왜군을 경상우도 의령까지 쫓아갔으나, 과로로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에서 사망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계갑록(癸甲錄)』·『역설(易說)』·『이기설(理氣說)』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박한기(朴閑驥)1520년 (중종 15)거주지성주(星州)
[진사]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69위(99/100)
본관 순천(順天) 자는 덕로(德老)
아버지는 참봉 박지(朴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