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회 1980년 5월8일 오후 1시, 전남대 도서관 앞
80년 5월 光州를 민주화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게했던 민족민주화 성회가 출발
1980년 5월8일 오후 1시, 전남대 도서관 앞에는 오전 수업을 마친 학생들 이 모여들기 시작했다.삽시간에 5천여 학생들이 도서관 앞 광장에 자리잡 고 총학생회 주도로 집회를 시작했다.
80년 5월 光州를 민주화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게했던 민족민주화 성회가 출발한 것이다.
전남대 총학생회는 이날부터 14일까지 1주일간 민족민주화 성회 기간으로 선포하고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와 공동으로 제1시국선언문을 채택해 출 정을 알린다.
이 중대한 시점에서 우리 대학인들이 걸어가야할 길은 조국의 완전한 민 주주의와 평등사회의 도래를 위해 다같이 헌신하여 가슴벅찬 민족정기를 진 작시키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정부 주도의 改憲.휴교령을 거분한다 崔圭夏정부가 정통성이 없음에도 개헌의 정부주도를 주장하는가 하면, 군 부와 결탁해 안보를 명분으로 비상계엄을 유지하고 있다는 통렬한 비난과 함께 채택된 시국선언문은 이제까지 정치투쟁을 억제해왔던 학생들을 열광 케하고 삽시간에 학내는 민주화의 열기로 가득찬다.
이에앞서 의대생 8백여명은 총학생회가 마련한 단과대별 민주화성회일정 에 따라 오전 10시부터 시국토론회를 갖고 반민주세력 척결을 결의했다.
9일 법대생들도 교수들과 함꼐 민주화토론회를 갖고 후문.서방삼거리를 거쳐 의대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12일 농대, 13일 상대, 14일 오전 인사대.공대.자연대.사대로 이어지는 학내성회에는 교수.학생들이 함께 참여해 민주화의지를 불태웠다.
그 사이 학생운동권을 비롯한 전국의 운동세력은 가두투쟁 시기를 놓고 강경.온건파로 나뉘어 심각한 찬반토론을 거듭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10일 崔대통령이 난데없이 中東방문을 위해 자리를 비우자 신군부 쿠데타설이 시 중에 파다하게 번졌다.
마침내 전남대 총학생회는 13일밤 가두진출을 위한 세부계획 수립에 들어 갔다.
민주화 요구를 위한 전면적인 정치투쟁이 시작된 셈이다.
그리고 14일 학내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오후 1시부터 정문과 동문.농대쪽 등에서 수천명 단위로 시내진출을 시도했다.
페퍼포그까지 동원한 경찰의 최루탄 살포에 맞서 투석전을 전개하며 학생들은 신역광장.시민관 앞을 거 쳐 도청으로 향했다.
공대생 3천여명은 자연대.사대.인사대생들과 합세해 정문돌파를 시도, 투 석전 끝에 기동경찰대의 저지망을 뚫었다.
저지망이 뚫리자 경찰은 갑자기 최루탄을 발사, 아직 학교를 빠져나오지 못한 학생들의 해산을 시도했다.
한 학생들은 수업을 마친 학생들까지 가세해 7천-8천여명을 헤아렸다.
또 다시 최루탄이 쏟아졌다.
그러나 학생들은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종합운동 장 옆철조망.개천을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오후 3시, 전남대생과 교수.시민 등 1만여명은 기동경찰의 저지를 뚫고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였다.
학교에서부터 스쿨버스로 도착한 교수단을 가 운데로 하고 서클연합회장 문석환(경영3)의 사회로 마침내 제 1회 전남민족 민주대성회가 시작됐다.
국민의례 때는 도청앞을 막고 있던 기동경찰들도 함께할 만큼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였다.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동신실전.목포대.성인경상전문.목포공전.전남대 학 생회와 목포공전 자율화추진위.조선대민투 등 6개 대학 학생들이 채택한 제 2시국선언문을 낭독한데 이어 전남대 총학 총무부장 梁康燮(현 전남도의원) 이 그리고 교수협의회 정명섭회장(사대)의 시국선언문 낭독에 이르러서는 찌를듯한 열기에 기동경찰들도 아예 대회저지를 포기한 듯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4대구호가 채택됐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신현확.전두환 물러가라
북괴는 오판말라
비가 내렸다. 갈수록 빗줄기가 굵어졌지만 계엄철폐를 외쳐대는 구호와 투사의 노래를 합창하는 학생들의 민주화 열기를 말릴 수 없었다.
대학원생들도 결의문을 채택했다. 2백여명의 대학원생들이 참석, 계엄해 제와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적극 동참하겠다며 결의를 다졌다.
13일 전남매 일신문기자 35명이 발표한 5.13언론자유 실천선언을 환영.지지하는 성명도 낭독됐다.
가야했다. 6시20분께 귀교하는 학생들의 선두에 교수단이 앞장섰다. 계엄 령하인데도 교수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채 제자들을 이끌고 빗방울이 굵 어진 금남로를 가르며 가두행진을 벌였다.
4.19를 경험했던 시민들에게 교수단의 태극기를 앞세운 가두행진은 또다 시 민주투쟁의 시기가 왔다는 것을 웅변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15일에도 도청 앞에선 민주화 성회가 계속됐다.
전남대생들은 전달과는 달리 경찰의 제지없이 이날 오후 도청앞까지 진출 했고, 일부 고교생까지 집회에 참석, 군중은 2만여명에 이르렀다.
시민들의 호응도 점차 뜨거워졌다.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에 박수로 화답했고 인근빌딩 옥상까지 올라가 학생들을 지지.격려했다.
연단으로 올라가 즉흥연설을 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박관현은 이날 민주화를 위한 횃불대행진을 예고한다.
암흑의 시대, 칠흑같은 질곡의 역사를 정말로 우리 민주화의 횃불로 밝히기 위해 모든 전남지역 대학생들의 이름으로 내일 오후 3시 이곳 도청앞에 모여 횃불시위를 거행하겠습니다.
첫댓글 자한당은 어느나라 정당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료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고 건강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