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탕~탕~" 총성이 울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른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격으로 그 자리에서 절명한다.
차지철 경호실장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숨을 거둔다. 총격 당시 상황은 이렇다.
저녁 7시 38분경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대통령의 양 옆에 있던 신재순이 심수봉의 기타반주로 혼성 듀오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를 부르고 있었고,
대통령은 간간히 흥얼거리며 신재순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김재규가 권총을 하의 주머니에
넣고 들어온 것이다.신재순이 중간에 한 번 틀려서 다시 부르던 중, 1절 후렴을 막 시작하려는 차에 7시 40분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PPK를 꺼내어 노래를 끊으며 차지철을 향해 이 말을 외치며 제1발을 발사했다.
"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
김재규의 제1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고, 갑자기 저격당해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김 부장, 왜 이래!" 라고 외쳤다. 박정희가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야, 너도 죽어봐!" 라고
받아치며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에 제2발을 발사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허파에 관통상을 입었다.
참고로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이상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제3발을 쏘려 했으나 발터 PPK가 격발 불량을
일으켜 발사되지 않자 밖으로 뛰어나갔고, 차지철은 화장실로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 차지철이 입은 부상은 생명에 지장이
없었고, 현장에는 대통령 경호원들도 있던 현장이었던 만큼 만일 차지철이 도망치지 않고 김재규를 저지했다면 사건은 실패로
끝나고 현대사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뒤바뀌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를 찾아오는 빈도가 높았고,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상대하는 여자로는 영화배우와 탤런트, 연극배우, 모델 등 연예계 종사가 가장 많았고
그 숫자가 200명을 넘었다.”-김재규의 법정진술
이 동네 이름은 궁정동(宮井洞)이다.우물을 끼고 있는 궁이 자리한 동네 궁정동이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궁정동, 삼청동, 청운동 등에 걸쳐 안가가 총 12개 동이 있었다고 한다.
넓이는 1만 1천 평에 달한 것으로 전한다.안가는 대통령이 안전하게 숨어 술 먹는 공간이다.
피로 억룩진 그 비극의 현장은 '무궁화동산'으로 변한다.
김영삼 정권이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1993년 궁정동 안가를 철거하고 조성했다.
김영삼 정권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朴寬用) 전 국회의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돈이나 받고 나쁜 일 하는 장소인
안가가 뭐가 필요한가. 없애버려라’고 했고, 참모들도 다 찬성했다.”
동산 입구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쓴 ‘무궁화동산’이라는 글자를 새긴 표지석이 서 있다. 그 속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이 공원은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께서 취임하신 후 청와대는 국민과 함께 더불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신
뜻을 받들어 안가(안전가옥)를 헐어내고 조성한 곳입니다. 새로운 국민시대의 개막과 함께 열린 이 공원이 청와대를 찾는
여러분의 쉼터로, 그리고 어려웠던 민주화의 길을 되돌아보는 역사의 배움터로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1993년 9월 1일 서울특별시장"
궁정동은 인왕산과 백악의 정기를 타고 경치가 수려한 곳으로 많은 명당자리가 있어서 조선조의 문인과 또 명사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궁정동의 바로 주산은 뒷산 백악(白岳)이다.백악은 풍수 지리에서 나무에 해당되는 목성(木星)이다.
학조대사가 어느날 찾아와 김번에게 집터를 잡아주었다. 바로 백악 밑이었다. 풍수지리적으로 대단한 명당이었다.
북악의 모양이 목성이므로 그 기운을 받아 융숭하려면 집을 이허중(離虛中) -곧 태극기의 왼쪽 아래에 그려진 괘처럼 지어
목(木)으로 하여금 화(火)를 생하게 하고 그 화로 금성의 금(金)을 녹여 큰 그릇을 만든다는 역의 이치를 맞추어 그 집터를
잡아준 것이라 한다.나무는 불을 생하고 불은 금을 다루어 큰 그릇을 만든다는 풍수지리의 이치를 이용한 것이다.
무속헌 옛 터는 주한로마교황청대사관까지다.로마교황청대사관은 백악을 주산으로 한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학조대사가 조카 김번의 집 무속헌 터로 잡아 줄 때 목생화(木生火)의 상생원리를 이용하기 위해 화(火) 모양의
무속헌 풍수설계도를 마련하였다고 했다. 장영훈은 그의 책 <서울풍수>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금(沙金 김씨)이 무속헌(용광로)에서 목생화라는 불길에 제련을 시작하자 인걸지령(人傑地靈)은 김상용 김상헌
김수항 등을 배출했고 갈수록 탄력이 붙어 숙칭 장동 김씨 발복지로 알려진다.큰 그릇 발복세는 임진왜란 이후 폐허로
비워있던 경복궁 지기마저 독식하게 되었다.그러자 뭉ㅊ피 금들의 기세는 북촌 윗대는 물론 창덕궁 용상마저 아랫대로
보았던 안동 김씨 권문세도로 치달았다.이는 목(木)자 득국인 이(李)씨 왕조를,안동 김(金)씨라는 금(金)이
독식해버린 금극목(金克木)현장도 된다."
"무속헌 바로 곁에 붙어있는 궁정동 55번지는, 학조의 금과목(金克木) 지맥이 같이 작용하는 같은 물줄기 언안에
해당된다.1979년 10월 26일에 김(金) 재규라는 금(金)이 박(朴)정희라는 목(木)을 저격했던 금극목(金克木) 시해
현장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