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경과 조화될 수 없는 심리학
그리스도인에게는 심리학이 과학의 옷을 입은 것보다 더 위험한 이유가 있습니다. 심리학은 성경과 조화될 수 없는 학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심리학을 경계하고 주의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심리학이 성경과 조화되지 않는 것이 왜 문제일까요? 다른 학문에는 그런 요구나 기대를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성경과 조화되는 국어나 영어, 성경과 조화되지 않는 화학이나 물리, 이런 말은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모든 학문은 그것이 올바르다면 성경과 조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세속 학문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성경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큰 위험 요인이 아닙니다.
아무도 국어책에 단군신화가 실렸다고 염려하지 않고, 그것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리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성경적이기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과 조화되는지 살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경계해야 하는 학문이 있습니다. [생물]과 [지구과학]입니다. 왜일까요? 가짜 과학인 진화론이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조화될 수 없는 요소가 들어있기에, 그리스도인은 이 두 과목을 가르치고 배울 때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심리학은 성경과 조화되지 않고 성경으로 입증할 수 없기에 위험한 학문입니다. 그 까닭은 많은 기독교 심리학자들이 심리학과 성경이 조화된다고, 조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후로 심리학과 성경 사이에는 영원히 건널 수 없을 것 같던 넓고 깊은 강이 흘렀습니다. 심리학이 무신론이라는 기초와 인본주의라는 바탕 위에 세워진 비성경적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 융, 아들러, 로저스, 스키너 등 심리학의 토대를 구축한 학자 중에 성경에 그 기초를 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힘이 생겨난 심리학을 성경과 조화시켜 복음 사업의 도구로 사용하자는 학자들이 생겼습니다. 이들을 ‘절충주의자’ 또는 ‘통합주의자’라고 하는데, 앞에서 언급한 게리 콜린즈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심리학은 세상이 입혀준 ‘과학적’이라는 옷에 기독교인들이 입혀준 ‘성경적’이라는 옷까지 입게 되었습니다. 두 배의 힘을 확보했고 그만큼 신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리학은 성경과 조화되지도 않고 조화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심리학과 성경의 절충 혹은 통합을 외쳐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하나가 될 수 없듯이, 심리학과 성경은 조화될 수 없습니다. 무신론과 인본주의에서 시작된 심리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원천(源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심리학과 성경이 조화된다고 믿습니다. 절충주의 심리학자들이 가르치고 상담할 때 성경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으로 배우는 심리학], [성경적 심리학의 체계], [성경 속의 심리학]과 같은 제목의 책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성경 왜곡입니다.
더하거나, 빼거나, 구부리거나,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하지 않고서는 성경을 심리학 이론에 집어넣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이 성경을 왜곡하는 경우는 셀 수도 없지만,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말씀입니다. 심리학 최고의 목표가 자존감을 높이고 자아 성취를 이루는 것인데,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그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에 너 자신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고 해석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자기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니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 본성에 이보다 더 달콤한 속삭임이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해석은 명백한 성경 왜곡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걱정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듯 이웃도 사랑하라 하신 말씀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입고, 위험하면 피하는 것으로 자기를 보호하듯 이웃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심리학이 자기 사랑의 근거로 왜곡한 것입니다. 이렇게 왜곡된 말씀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을까요? 인간은 자기 사랑이 넘쳐서 문제이지 모자라서 불행한 존재가 아닙니다.
본능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마 16:24) 해야 하고 “자기를 낮추는”(마 23:12) 자가 되어야 하며 “자기 목숨까지 미워”(눅 14:26)해야 합니다. 누구나 자기 사랑의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자기 사랑으로 자존감을 높이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런 왜곡은 성경을 부정하는 것보다 심각하고 위험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왜곡하는 심리학을 그리스도인이 신뢰해도 되겠습니까? 하나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정신의학과 교수이자 기독교 심리학자인 민 모 교수가 2021년 4월 1일 [크리스천투데이]에 기고한 “성경과 정신분석 이론”이라는 기사의 일부입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 성적 본능과 공격성과 쾌락, 투사, 대치, 억압, 등등 인간 마음의 정신역동 이론이 여기저기에 암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공통적인 예는 수없이 많다.” 이렇게 주장한 민 교수는 성경과 정신분석의 공통점의 증거를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무의식’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굳이 마음으로 부인하고 거부하는 것’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은 ‘의식적 자아’는 원하지만, 나도 모르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신도 미처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이 네 원수니라’는 말씀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어릴 때의 가족과의 경험이 이후 어른이 되었을 때 갈등과 노이로제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은 정신분석적으로도 옳다. 본능적 욕망을 자아가 통제하지 못하면 계속 갈등하게 되고 우울증이 오거나 스트레스로 당뇨병이나 고협압이 생길 수 있으며, 그 결과 자살이든 병사로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씀은 정신분석적으로는 내면의 감추어진 마음, 억압된 욕망, 잊혀진 과거 등을 알게 되면 노이로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기사를 읽으면 프로이트가 성경에 근거해서 심리학의 개념을 고안하고 발전시킨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나아가 정신분석이 성경에 기초한 성경적 치료법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어떤 사람입니까?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영적 세계를 철저히 부정한 사람입니다. 종교란 특허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유치한 것이며 인류의 집단 신경증이라고 혐오한 인물입니다.
이런 프로이트의 이론과 개념을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시킨 결과가 이 기사입니다. 이것이 심리학과 성경을 절충 내지 통합시키려는 시도의 실체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로 이 주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4-18)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