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지바르/220628/박찬석
잔지바르는 탄자니아 영토이다. 잔지바르는 탄자니아 동해안에서 배로 1~2시간 거리, 탄자니아 해안에서 20km~50km 떨어진 인도양에 있는 섬들이다. 운구자(Unguja, 1,666㎢)와 펨바(Pemba, 988㎢)는 그 중 큰 섬이다. 제주도(1,826㎢)만 하다. 잔지바르는 탄자니아와 합병되었지만, 독립국처럼 자치를 하고 있다. 인구는 150만 명 정도이고 경제는 본토와 비슷하게 가난하다. 향신료와 관광이 주산업이다.
잔지바르는 산호섬이고 높은 곳은 150m이다. 비치(Beach)가 아름다워 관광지로 유럽인에게 인기가 높다. 열대지방이다. 이슬람 문화권이다. 본토(탄자니아 기독교 63%, 이슬람 34%)와는 달리, 잔지바르는 99%가 무슬림이다. 1964년 여기서도 공산당 바람이 불어 혁명이 일어났고, 이슬람의 술탄을 쫓아내고 공화국이 되었다. 스스로 방어할 국방력이 없어, 이웃 탕가니카와 합병했다. 탕가니카(Tanganika)와 잔지바르(Zanzibar)가 합하여 탄자니아(Tanzania)가 되었다.
잔지바르가 세계사에 등장한 것은 콜럼버스 시절이다. 서인도제도를 발견했을 무렵(1491년), 가마(Vasco da Gama)가 1498년에 인도 항로를 발견했다. 가마는 처음으로 잔지바르에 상륙한 서양인이다. 그때는 항해를 하다가 섬을 보고 지도에 기입했다하면, 자기 나라 땅으로 등기되던 때이다. 원주민도 모르는 사이 잔지바르는 포르투갈령이 되었다. 포르투갈은 잔지바르 왕(sultan)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불응하면 해안을 돌면서 대포를 쏘고, 주민을 짐승처럼 살육하던 시절이다. 잔지바르는 200년 동안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
100년이 지난 후, 1591년에 영국은 잔지바르의 큰 섬 운구자(Unguja)에 군사기지를 만들었다. 동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 인도를 잇는 영국동인도회사 일환이었다. 인도인이 동아프리카에 대거 진출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인도인은 동인도회사의 무역로를 따라 아프리카에 이주했다. 인도양은 동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제국, 인도가 공유하는 바다이다. 잔지바르는 흑인 해안이란 뜻이다.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했다. 장(zang)은 검다(black)는 뜻이고, 바르(bar)은 해안이다. 흑인의 땅(land of the blacks), 잔지(zanji)는 흑인이란 말이다. 정치적으로는 1631년부터 1890년까지 아랍 술탄이 잔지바르를 259년간 지배를 했다. 잔지바르에는 아랍의 문화가 깊게 남아 있다.
잔지바르는 몸바사와 다르에스살렘과 함께 인도양 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인도와 아랍 상인이 주로 활동했다. 후추, 정향, 계피, 상아, 가죽이 거래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이익이 나는 사업은 노예무역이었다. 잔지바르는 동부아프리카 노예무역(East Africa Slave Trade)의 중심 시장이 되었다. 문명이 앞선 아랍과 인도인이 아프리카인을 표적으로 삼았다. 아프리카 동부고원, 탄자니아, 케냐, 말라위 내륙지방이다. S3°와 N5°에 거주하고 있는 부족을 사냥했다. 그들은 건장한 신체를 가졌다. 인도양에 있는 잔지바르 노예 시장으로 데려와, 아랍과 인도로 팔려나갔다.
노예는 전쟁의 산물이다. 전쟁에 이긴 부족은 진 부족을 잡아가서 노예로 삼았다. 병자호란 때 청은 20만 명의 조선인을 잡아갔다. 노예사냥도 부족 간의 전쟁으로 얻어졌다. 노예무역은 대서양보다 인도양을 중심으로 중동과 인도에서 먼저 시작했다. 식민지에서 플랜테이션 농장, 사탕수수와 면화 재배에 노동자의 수요가 커지자, 인도양을 건너 대륙 간 무역이 활발해졌다. 대규모 노예시장이 형성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잔지바르 노예시장에 매년 5만 명의 노예가 거래되었다.
최재천 교수는 개미도 노예를 거느리는 종이 있다고 했다. 내가 알기에는 인간 말고는 같은 종을 노예로 거느린 동물은 없다. 노예의 역사는 인류 역사와 함께 한다. 함무라비 법전(BC1,750)에도 노예 기록이 있다. 그리스나 로마 인구의 반이 노예였다. 아무리 좋은 AI로봇도 노예만 한 로봇은 없다. 사람을 닮은 로봇은 최고의 로봇이다. 노예는 같은 사람이지만, 인권은 없다. 가축과 같다. 사고, 팔고 한다. 노예의 건강 상태를 식별하기 위하여 옷을 벗긴 채로 흥정이 되었다. 노예가 없었던 인류 역사는 없다.
노예제는 가장 잔인하고, 가장 반인륜적인 행위이다. 1807년에 노예제는 영국에서 부터 폐지되기 시작하여 미국과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폐지가 되었다. 영국에서 인도적 차원에서 노예해방을 주장하기는 했다.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계약 노동자를 대거 고용해야 했으므로 노예가 필요 없었다. 노예무역은 도덕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실익이 없는 사업이 되었다. 산업혁명에 늦은 나라일수록 노예제는 더 오래 지속되었다.
형식적으로 노예제는 지구상에 없다, 기업의 이익은 노동에서 나온다. 노예노동 같이 매력적인 생산요소는 없다. 노예노동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다. 선진 국가에서도 중소기업에서 불법 이민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노예노동을 강요한다. 모리타니(Mauritania)는 아직도 노예제가 있는 나라이다. 2012년 총리는 “노예는 없다(no longer exist)”고 했지만, 인권단체 자유보행재단(Walk Free Foundations, 2018년)은 모리타니 인구의 2%가 아직 노예 신분이라고 했다. 아프리카의 모리타니는 아직도 노예제를 암묵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