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생원을 지낸 선고 부군(先考府君)의 묘지
돌아가신 아버지의 휘는 진(璡)이고, 자는 영중(瑩仲)이며, 성씨는 김씨(金氏)로 의성인(義城人)이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태자 첨사(太子詹事)에 추증된 휘 용비(龍庇)가 시조이다. 이분이 은청광록대부 상서 좌복야를 지내신 휘 의(宜)를 낳았다. 복야공께서 내영 소윤(內盈少尹)을 지내신 휘 서지(瑞之)를 낳았으며, 소윤공께서 문예부 좌사윤(文睿府左司尹)을 지내신 휘 태권(台權)을 낳았고, 좌사윤께서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내신 휘 거두(居斗)를 낳았다.
그 뒤 2대를 내려오면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를 지내신 휘 한계(漢啓)에 이른다. 이분이 증조로, 문종조(文宗朝), 노산조(魯山朝)에 벼슬하여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가 되어 일찍 현달하였으나, 세조조(世祖朝)에 이르러 벼슬을 그만두고 있다가 졸하였다. 지원공(知院公)께서 성균관 진사를 지내신 휘 만근(萬謹)을 낳았는데, 이분이 할아버지이다. 진사공께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내신 휘 예범(禮範)을 낳았는데, 이분이 아버지이며, 영해 신씨(寧海申氏)로 벽동 군수(碧潼郡守)를 지낸 신명창(申命昌)의 딸이 어머니이다. 지원공 이후부터는 덕을 숨기고 살면서 2대 동안 벼슬하지 않았는데, 집안 대대로 청백(淸白)함을 전해 하호(河滸)에서 명성을 드날려 사람들이 세족(世族)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홍치(弘治) 13년 경신(1500, 연산군 6) 2월 정해에 나의 아버지께서 태어나셨는데, 얼굴 모습이 보통 아이와 달랐다. 이에 진사공께서 각별히 사랑하여 소자(小字)를 문회(文會)라고 지어 주고는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크게 키울 것이기에 이름을 지으면서 그 뜻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다. 성동(成童)이 되어서는 고모할머니의 남편인 권공 간(權公幹)에게 수학하였다.
을유년(1525, 중종 20)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과거 공부를 폐하고 강가로 물러나 살면서 날마다 자제와 후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일을 삼았으며,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여 온 집안 사람들이 부황이 들어도 개의치 않았다. 이와 같이 하기를 수십 년 동안 끊이지 않고 함에 여러 아들들이 모두 장성하였고, 학도들이 많이 흥기하였다.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엄하게 하였고 제사를 받듦에 있어서는 삼가서 하였으며, 형제에게는 우애롭게 대하고 고아나 과부가 된 사람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은 정도(正道)였고, 배척한 것은 이단(異端)이었으며, 근면하고 검소한 것을 집안을 일으키는 기반으로 삼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몸 속에 든 독으로 여기었다. 이에 늙어서도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여 옛사람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임하(臨河)는 옛 고향이고, 청기(靑杞)는 우거하여 살았던 곳이다. 말년에는 인사(人事)를 사절한 채 밭 갈고 낚시질하면서 즐겼으며, 산골짜기 숲 속을 소요하면서 장수를 누렸으므로 사람들이 마치 지선(地仙) 같다고들 하였다. 만력(萬曆) 8년 경진년(1580, 선조 13) 윤 4월 신유에 살던 집에서 졸하니, 향년은 81세였다. 이해 7월 갑신에 임하현 동쪽에 장사 지내었으니, 산은 경출산(景出山)이고 언덕은 태좌 진향(兌坐震向)이다.
아버지께서는 고(故) 좌정승(左政丞) 민제(閔霽)의 5대손으로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휘 세경(世卿)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어머니께서는 부도(婦道)를 아주 잘지켜서 사람들이 현모(賢母)라고 하였다. 아버지보다 34년 먼저 졸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앞뒤에 함께 묘소를 썼다.
아들의 이름은 아무 아무이고, 딸은 아무 아무인데, 여러 아이들이 일찍 어머니를 여읜 데다가 가업마저 탕진되어 골육을 거의 보존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으로 끌어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보살펴 길렀는데, 밖으로는 엄한 아버지로서의 가르침을 다하고 안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역할까지 다하였다. 이에 어린아이는 수화(水火)의 재난을 면하고 장성한 아이는 의방(義方)을 알게 되어 조상들께서 남기신 은혜를 입어 조정의 반열에 줄지어 나아가는 데 이르렀다. 누군들 아버지가 없을까마는 하늘 같은 아버지의 그 은덕은 우리 여러 형제들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끝이 없다.
아버지의 연세가 이미 많아졌는데도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벼슬살이하거나 혹 타향에 흩어져 살아 슬하에서 날마다 모시지 못하였다. 이에 죄가 쌓여서 혹독한 화가 미치게 되었는바, 푸르고 푸른 저 하늘은 언제쯤에나 재앙을 그치려는가. 아아, 애통하도다.
아들 사인(舍人) 성일(誠一)은 피눈물을 쏟으면서 삼가 쓴다.
先考成均生員府君墓誌
先府君諱璡。字瑩仲。姓金氏。義城人。有仕於麗朝。贈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太子詹事諱龍庇公。其始祖也。是生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諱宜。僕射生內盈少尹諱瑞之。少尹生文睿府左司尹諱台權。左尹生工曹典書諱居斗。歷再世至副知承文院事諱漢啓。是曾祖。仕文宗,魯山朝。爲集賢學士。嘗顯矣。世祖朝休官以卒。知院生成均進士諱萬謹。是祖。進士生秉節校尉諱禮範。是考。寧海申氏。碧潼郡守命昌之女。是妣。自知院公
後。隱德不仕者二代。而家傳淸白。颺于河滸。人之稱世族者歸焉。弘治十三年庚申二月丁亥。府君乃生。狀貌異常。進士公奇愛之。錫小字曰文會。曰此兒必大吾門。名其識也。成童。受學于伯姑壻權公幹。乙酉中司馬。旋廢擧子業。退居江上。日以敎子弟訓後生爲事。視籯金如土。雖擧室顑頷。亦不顧也。如是數十年不輟。諸子皆成立。學徒多興起。其治家嚴。奉祭謹。兄弟是友。孤寡是恤。所信者正道。所斥者異端。以勤儉爲家之基。宴安爲身之鴆。年旣耆耋。而惟穡事是務。有古人之遺風焉。臨河。
舊里也。靑杞。寓居也。晩年謝絶人事。放情耕釣。婆娑林壑。壽考維祺。人擬諸地仙。萬曆八年庚辰閏四月辛酉。卒于寓舍。享年八十一。是年七月甲申。葬于臨河縣東。山曰景出。原曰兌震。府君娶故左政丞閔霽五代孫秉節校尉諱世卿之女。婦道甚宜。人稱賢母。先府君三十四年而卒。至是爲先後封焉。男某云云。女某云云。諸孤早失恃。家業蕩柝。骨肉殆不克保存。府君左提右挈。辛勤撫鞠。外盡嚴父之敎。內兼慈母之育。小者免水火。長者知義方。以至承藉餘慶。接武朝列。人誰無父。昊天之德。
在諸孤尤罔極也。春齡已高。而或游宦四方。或散居他鄕。未得日侍膝下。罪戾所積。酷禍斯延。彼蒼者天。曷有窮已。嗚呼痛哉。男舍人誠一。泣血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