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에 생명을 걸어라
예레미야 7장 1-15절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다른 신앙생활은
도미노 현상처럼 무너지고 맙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어떻습니까?
진실로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어떻습니까?
지금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떻습니까?
진실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무너진 후에
아무리 다른 것을 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헛된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2천년 교회 역사를 볼 때
그 땅에 예배가 무너지면
하나님은 그 땅을 떠나셨습니다.
지금 유럽의 교회들은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특히 영국 교회는
심각할 정도로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너진 가장 큰 원인은
예배의 타락입니다.
성령의 임재가 없고 말씀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예배는 거짓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거짓으로 드려진 예배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유다가 그러한 거짓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7장부터 10장까지는
예레미야가 성전에서 설교한 모습입니다.
이 설교에서 예레미야는
남유다의 위선적이고 거짓된 예배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남유다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이 받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지적은
위선적이고 거짓된 예배를 그만 멈추고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이 땅에 교회들은
다시 한 번 예배에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생명을 바치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는
그 어떤 타협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노아방주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입니다.
우리 모두 예배에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는 자들이 예배에 생명을 거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연설 소리나 들으려는 것이 아니고
잘 꾸며낸 거짓말을 들으려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타락의 시작은
어떤 의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아니하면
성령님이 임재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님 말씀이 제대로 전해질 때 역사하십니다.
남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비극이 무엇이었습니까?
말씀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벗어나 전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였습니까?
첫째로 종교 지도자들에게 선포합니다.(3-7절)
종교 지도자들 너희들 먼저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삶이
먼저 바르게 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임재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거짓된 삶이었습니다.
4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고
거짓말로 미혹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지도 아니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거짓말을 했습니다.
남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은
가나안 땅의 이방 종교들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의식 자체가
곧 복을 주고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백성들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들 눈에는 화려하고 큰 성전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에는
하나님은 계시지 아니했습니다.
악이 가득 찬 성전에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이 거할 수 있겠습니까?
종교 지도자들이 어떤 악을 범하고 있습니까?
5장 25-29절에서도 언급한 그들의 죄악을
다시 또 언급합니다.
첫째는 공의를 행하지 아니했고,
둘째는 가난한 자들을 압제했고.
셋째는 무죄한 자들을 피를 흘렸고,
넷째는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다시 말하면 악한 짓들을 하지 아니하면
이 땅에 거하게 할 것이지만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시대나 지도자들의 타락은
곧 사회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국가의 존폐가 주어집니다.
특히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은
국가나 사회가 사탄의 세력에 무너지게 하고 맙니다.
오늘날 이 시대 안타까운 것은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는 것이
마지막 때에 성경의 예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가 진실로 예수의 종이라면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불의를 버리고, 거짓을 버리고
온전히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큰 성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도 없는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속이는 자가 있다면
진실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전하는
예수의 종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백성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8-11절)
9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종교 지도자들처럼
백성들 또한 악을 범하고 살았습니다.
도적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 맹세하고, 바알을 섬기고,
또 다른 신들도 섬기며 살았습니다.
이런 죄악을 범하고도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 하는 소리가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지 않습니까?
11절을 다같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집이 강도의 소굴인 줄 아느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이런 모습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악한 짓을 범하고서도
전혀 양심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뻔뻔하게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가고 있다면
너무 심한 말입니까?
분명한 것은
예레미야 시대보다
몇 천배 악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보다
몇 천배, 몇 만배 악한 시대 아닙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채찍을 들고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라고 외치신 그 음성을
오늘날 이 시대 교회들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라도 남유다 백성들처럼
“나는 구원받은 자” 라고 안심하고
안위한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것은
분명한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내 영혼을 돌아보고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으며 살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구원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빌2:12)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롬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모두 다 현재 진행형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날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2-15절에 보면
거짓된 예배의 결과로 찾아오는
비극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비극은 이스라엘의 분명한 역사적 사건
두 가지를 들면서 말씀하였습니다.
그 첫째는 실로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12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 내에 있는 실로(Shiloh) 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길갈에 잠시 두었던 성막을 이곳으로 옮겨
실로를 예배의 처소로 삼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곳을 가리켜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악행에 빠져
가식적인 예베를 드리자
하나님께서는 실로를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시대 실로는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둔 의미
깊은 처소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가식적인 예배가 드려지고
악행이 계속된다면
성전을 떠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 자체는 절대로
안전과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교훈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폐허가 된 실로는
그러한 교훈의 생생한 실례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신
예루살렘 성전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14절을 보세요.
“실로에 행함 같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실로를 떠나셨듯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없는 성전은
교회는 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은 아닙니다.
절대로 건물이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 아닙니다.
예수의 피가 흐르지 않고
예수의 영이 임재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건물이
우리를 보호해주고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건물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으로
착각하고 믿고 있는 자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13절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성전에서
“새벽부터 아무리 떠들어도 듣지 아니하겠고,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겠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다시 보시길 바랍니다.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떠나신 것을 모르고
그래도 성전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떠나면
인간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몇 일 못가서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썩고 맙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 할지라도
아무리 위대한 자라 할지라도
죽은지 3일이 지나면
추악한 몰골이 되고 마는 것이
우리의 육체입니다.
하나님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거대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전일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추악하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썩고 마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우매하고 무지한 자들이 되지 않않아야 합니다.
15절에는 거짓된 예배를 드린 남유다 백성들이
에브라임 자손처럼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에브라임 자손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에브라임 지파가 가장 강력했고
또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켜
에브라임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유다 백성들이
에브라임 자손같이 되리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에브라임 자손 즉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 군대에 의해 멸망 당한 후
포로가 되어 앗수르로 끌려갔습니다.
다시 말해 에브라임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남유다가
에브라임 자손과 같이 된다는 것은
그들처럼 이방 군대에 멸망당하고
가나안 땅에서 추방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예언대로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B.C 586년 멸망 당하고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추방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건물이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임재한 곳이
성전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는 곳은
사람이던지 건물이던지
언제인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