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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화에 좌에서부터 성 샤스탕 야고보, 鄭. 성 모방 베드로. 羅, 성 앵베르 라우젠 시오, 範 신부이시다. 이 중에서 조선에 최초로 입국한 신부는 모방(Maubant) 羅. 신부이다. 입국하면서 조선말을 배우고 찾는 교우에겐 필담(筆談)으로 대화를 하거나 고해성사(告解聖事)를 주었다. 부활절 이후에는 경기, 충청도에 소재한 교우촌 열 일곱 마을을 방문하여 약 이백십삼 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육백 여명에게 고해성사를 하였다. 당시 신자 수는 육천육백 사십여 명이었다. 당시 교우촌들은 박해를 피하여 숨어 깊은 산골이 대부분이었는데 그곳에서 화전을 일궜으며 옹기그릇을 구워 팔아가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또한 옹기그릇을 팔가위하여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녀야 하였는데 이는 교우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은 수단이기도 하였다. 특히 겨울철이 다가오면 제대로 된 동절기 옷이 없어 고생하는 교우들 모습을 보며 모방신부는 가슴 아파하였다. 바쁘고 고달픈 사목을 이어가던 모방신부를 더욱더 가슴 아프게 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유 방제 신부와 관련된 일이었다.
모방신부 보다 2년 전 조선에 들어온 유 방제 신부는 조선말이나 글을 배우지도 않고 사목을 위하여 한양을 떠나지도 않고 한양에만 있었다. 헌금으로 거두어들인 돈도 자신만을 위하여 치부하였고 품행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안 좋은 소문이 교우들 사이에서 돌았다. 모방 신부께서 이를 지적하고 몇 번 충고를 하며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오히려 반발하였다. 이에 조선교구 임시 관리자의 직함으로 성무 집행 금지령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유 방제 신부는 모방 신부의 집을 불태우고 물건도 빼앗겠다고 하며 금지령을 불사르는 행위를 교우들 앞에서 하였다. 그러자 그를 편드는 교우들이 없어 1836년 12월 고향인 산시 성(山西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 들어오면서 외방전교회 기본방침에 의거 토착민중에서의 성직자 양성을 위한 소년을 찾기 시작하였다. 한양도착 후 십여 일부터 최 양업 도마를 만나고 이어서 3월 7일에는 최 방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를 7월 11일에는 김 대건 안드레아를 만났다. 그 후 한양 주교동에 있던 주교관으로 불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행을 쌓도록 한 후 파리외방전교회 극동아시아 경리부 안에 있던 마카오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 당시 12월 9일 한양을 떠나는 유 방제 신부 계획이 있어 몇 명의 교우들이 동행하여 세 소년도 함께 떠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만주에 도착한 15세의 세 소년은 현지 안내인 따라 만주, 몽고, 중국대륙을 걸어서 포르투갈 령이었던 마카오에 1837년 6월 6일 도착한다. 사실 마카오에는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 경리부가 있었으며 이곳을 파리외방전교회가 위임을 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세 소년을 배웅하고 유 방제 신부도 국경까지 배웅한 조선교우들은 중국대륙과 만주벌판을 방황하던 샤스탕 정 신부를 1836년 12월 28일 봉황성에서 만나게 된다. 조선교우들은 샤스탕 신부를 만나면서 가난한 짐꾼 모양으로 변장하고 걸을 수 있냐고 묻자 걱정 마시오 나는 그렇게 부자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고 전해 온다. 샤스탕 신부는 방갓에 상주 옷으로 변복한 후 12월 31일 오밤중에 압록강 얼음을 타고 건너 의주 성문(義州 城門)을 우회하여 국경을 넘은 후 1837년 1월 15일 한양에 무사하게 도착하게 된다. 샤스탕 신부는 모방신부와 같은 34세였다. 샤스탕 신부가 도착하자 여유가 생긴 모방신부는 양근에 있는 정 하상의 친척인 교우 집에 머물며 한 달간 머물며 조선말을 익혔다. 샤스탕 신부는 한양에 남아 조선말을 배우며 고해성사 등 성무를 익혔다. 양근으로 모방신부를 찾아 가 부활절을 함께 지낸 후 전교를 위해 각도를 찾아 나섰다. 거추장스러운 상복을 차려입고 험준한 산을 넘으며 찾아간 교우촌은 대부분 바람이 들고 연기가 가득 차 오르는 토방이었다. 흙방에서 잠을 청하고 감자, 옥수수, 김치만으로 끼니를 채우고 밤새고해를 들어야 하였다.
고된 성무가 이어지자 모방 신부는 7월 중순 지방 전교도중 열병에 걸려 생과 사를 넘나들었다. 이에 놀란 샤스탕 신부는 한양으로 모시고와 종부성사까지 주었지만 기적적으로 소생한 모방신부는 1837년 한 해에 1237명에게 세례를 준다. 그 당시 신자수는 6,995명이 되었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전교에 매진하고 있을 때 중국 사천성에서 전교 중이던 파리 외방전교회소속 앵베르(Imbert, 範世亨) 신부를 조선교구의 2대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에 1837년 5월 14일 사천성 교구장 퐁타나(Fontana)나 주교의 집전으로 성성식을 갖고 조선으로 길을 떠나게 된다. 중국대륙을 횡단한 범주교는 12월 16일 동지사 따라 봉황성 변문에 온 조선교우 다섯 명을 만난다. 12월 17일 상복으로 변복한 앵베르 신부는 의주성 수문을 숨어 넘어 13일 뒤 1838년 1월 1일 한양에 도착하게 된다. 조선교회 창설 후 54년 만이었으며 조선교구 설정 7년 만에 비로소 교구의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한양에 도착한 범주교는 첫날부터 모방 신부와 손을 잡고 전교에 공을 들인다. 당시 남쪽지방을 순회하던 샤스탕 신부는 5월에 한양으로 와 주교를 만나게 된다. 범주교는 3개월간 조선말을 배우고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그들에게 성체성사의 영광까지 주게 되었다. 지방을 순회하던 모방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한양으로 올라와 주교를 도와 천여 명의 한양 신자를 돌보고 11월까지 세 신부는 1,994명의 남녀에게 세례를 주게 된다. 1839년 초에는 전국 교우수가 9천여 명이었으며 그중에는 이름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교우 수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을 본 주교는 토착인 성직자 양성에 대하여 적격자를 몰색하기 시작하면서 동남아시아 월남에서 베리트(Beryte) 주교가 사용한 방법을 따르기로 하여 단기간 내에 신부를 양성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과 1838년에 4 명의 장년 신학생을 발굴한다. 정 하상 바오로, 이 승훈의 친손 이 재용 도마, 마카오에서 유학 중이던 최 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큰형과 , 이 문우 요안이었다. 범 주교는 이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사천성 하멜 신부가 지은 한문번역 신학을 가르쳤다. 이 문우와 정 하상은 신품을 받을 수 있는 유력자였으나 모질고 모진 기해박해(己亥迫害) 영향으로 수포로 돌아간다.
기해교난. 1839.
신해교난을 이어서 일어난 두 번째 대박해이며 조선 24대 왕 헌종 5년에 일어났다. 교난의 원인은 신유교난처럼 천주교를 사학이라 규정한 배척이었지만 실은 세도를 잡고 있던 안동 김 씨를 축출하려고 일으킨 벽파 풍양조 씨가 일으킨 교난이었다. 김 조순은 1802년 그의 딸을 순조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순원왕후(純元王后)를 만들어 세도를 잡는다. 38년 동안 세도를 그 일족들이 좌우하는데 그는 천주교를 동정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정 약용을 18년간 유배생활을 1818년에 풀어 준 사람이었다. 그러한 김조순이 1832년 4월에 사망하자 세 도권은 아들 김 유근(金遺根 1785-1840)에게 넘어간다. 국왕이자 김 조순의 사위였던 순조도 1834 11월에 돌아가고 그의 아들 효명세자 아들인 8세의 어린 세자가 헌종(憲宗)으로 왕위에 오른다. 어린 헌종이 등극하자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 베풀게 된다. 순원왕후도 전추교 박해를 원하지 않았고 그의 오빠 김 유근도 1836년경 병을 얻어 말도 못 하다가 당상 역관 지위를 갖은 유 진길의 권유로 1839년 5월에 세례를 받는다. 조선교구 설정 후 3명의 프랑스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전교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 이러한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대한 정책을 트집 잡은 천주교 배척자 조 만영(趙萬永. 1776-1846) 일파는 기해교난을 일으켜 세도를 잡게 된다. 조 만영은 1819년 10월 그의 딸을 효명세자의 부인으로 간택함으로써 1827년 1월에 왕궁을 지키는 어영대장이 된다. 그때부터 세력을 넓혀가며 안동 김 씨 세력과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헌종 즉위 석 달 뒤 1835년 1월에 조 만영 아우 조 인영(趙寅永. (1782-1850)을 이조판서에 앉힌다. 이듬해 9월에 자리를 옮겨 의금부판서(義禁府判書)에 있던 조 인영을 시켜 4명의 천주교 신자를 잡아들이면서 안동 김 씨를 괴롭 히기 시작한다. 당시 세도가였던 김 유근이 병석에 눕자 조 만영은 임금과 친근하게 지내며 국왕교서를 담당하는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에 오른다. 그 당시 대신 우의정 이 지연(李止淵)과 손을 잡고 역관과 잡인들이 북경에서 물건을 사 오는 일을 금지시키고 12월 1일 교회에서 사용할 물건을 만들고 있던 교인 권 득인(權得仁) 베드로를 체포하여 박해의 단초를 만들어 낸다. 동안 박해의 경험으로 보아 설날( 전후하여 발생시켰는데 이런 이유는 설날이 되면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이라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단번에 잡아들이는 속셈이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기해년(1839) 2월 20일에는 잡아들인 교인들을 엄벌하려는 의도에서 조 만영 조카 조 병현(趙秉鉉)을 형조판서(刑曹判書) 자리에 올려놓고 각지에서 천주교 교인들을 잡아들인다. 3월 초순에 궁녀 박 희순(朴喜順)을 포함하여 수십 명을 체포하고 6월에는 정 하상(丁夏祥), 유 진길(劉進吉)이 잡히고 이어서 7월에는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 모방신부가 붙잡히게 된다. 이때 정권에서는 오가작통법(오가작통五家作統法)을 펴서 교인들을 남김없이 잡어들였다. 경향 각지에 있던 옥은 천주교 신자로 넘쳐났다. 교인들은 심문이 끝나는 대로 처형되기 시작하였다. 4월 12일에는 권 득인, 이 광헌, 남 명혁, 궁녀 박 희순 등 9명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이슬이 된다. 그리고 전라도 교인 김 대권, 이 태권, 이 일언, 신 대보, 정 태봉, 경상도 교인 김 사건, 박 사의, 이 재행도 죽이고 6월 10일에는 서소문 밖에서 이 광열 등 8명을, 7월 26일에는 박 후재, 등 6명을, 8월 14일에는 한강 새남터 형장에서 앵베르 주교, 모방신부, 샤스탕 신부를 처형하고 8월 15일 추석날에는 유 진길, 정 하상을 19일에는 조 신철, 남 이관, 9명을, 8월 27일에는 용산 당고개에서 박 종원 등 7명을 11월 24일에는 최 창흡, 정 정혜 등 7명을 12월 28일에도 당고개에서 홍 영주, 이 문우 등 3명을 처형한다
이렇게 박해가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조 만영은 세도권력을 틀어 쥐고 10월 18일 아우 조 인영이 지은 척사윤음(斥邪綸音)을 한양을 포함하여 8도에 반포토록 한다. 조 인영은 10월 21일 우의정으로서 좌의정 겸하며 독상 이 지연을 내쫓고 풍양조 씨 세상을 만들어 버린다. 박해는 이후 1841년까지 지속되었다. 세도가였던 김 유근이 1840년 12월 17일 사망하여 형식적으로 임금을 대신하여 정사를 보던 누이 순원왕후도 헌종에게 돌려준다. 풍양 조 씨의 세도는 1849년까지 십 년 동안 이어진다. 기해박해로 잡힌 교우 수는 118명이며 그중 69명이 참수되었고 1명은 옥사 48명은 석방된다. 그러나 개인감정을 포함하여 지방관리의 독단으로 처형된 교우들도 많아 달레(Dellet) 신부가 기록한 한국천주교회사(韓國天主敎會史)에는 기해박해로 순교한 교인 수를 2백여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순교한 앵베르 주교는 전교회장 현 석문(玄錫文) 가를로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 순교자의 행적을 만들라고 당부하였다. 현 석문은 부인과 딸의 순교를 알면서도 거지행세를 하며 이후 3년 동안 숨어 기해일기(己亥日記) 지었다. 기해일기 총론에 옥사한 교우가 60여 명, 치명(致命)한 교우는 54명이라 적어 모드 110명이 순교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본론에는 78명의 행적만 적어 놓았다.
교황청은 기해일기 목격자 담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1846년 박해 중에 끝까지 신앙을 지킨 순교자 79명을 뽑아 1925년 7월 5일 복자위에 올리는 시복식(諡福式) 베드로 성당에서 갖는다. 이들 중에 기해년 박해에 순교한 70명이 포함되었으며 가장 으뜸 순교자는 정 하상이었다. 정 하상은 교난에서 체포될 것을 짐작하고 미리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이 당시 유일한 재상이었던 우의정 이 재연에게 올린다. 정 하상은 글에서 천주교는 조금도 그릇된 교(敎) 아님을 변호하고 있다. 그리고 주자학의 허례허식을 지적하였다. 이 책은 1887년 홍콩에서 발간되어 중국전교에 사용된 명서가 된다. 상재전서 전문은 아래와 같다.
1. 머리말
엎드려 아뢰옵건대 맹자(孟子)가 양자(楊子)와 묵자(墨子)를 사설(邪說)이라 하여 배척한 것은 그 사상이 유교학계를 해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요, 한유(韓愈)가 석가(釋迦)와 노자(老子)를 쳐서 물리친 것은 그 사상이 일반을 미혹(迷惑)하여 혼란케 할까 해서였습니다.
옛 군자(君子)가 법을 세워 금령(禁令)을 펼 때 반드시 그 뜻과 이치가 어떠하고 해됨이 있는가를 알아보았습니다.
무릇 의리(義理)에 맞는 것이라면 비록 나무꾼의 말이라도 성인이 반드시 받아들여 내버리면 안 되는 말로 되어 있거늘, 우리나라의 천주성교(天主聖敎)를 금(禁)하시는 것은 그 뜻이 어디 있습니까.
위에선 그 뜻과 이치(理致)가 어떠한지 물어보지도 않고 몹시 원통스러운 말로 사교(邪敎)로 몰아 큰 법을 세워놓고 신유년(辛酉年)을 전후 많은 인명을 없애면서도 한 사람도 그 기원과 전통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 이 도(道)를 배우면 유교에 해(害)를 끼치겠습니까?
일반 백성을 혼란케 하겠습니까?
이 도인즉 천자(天子)로부터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사용하고 늘 실행해야 할 도이오니, 해가된다던가 혼란이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감히 그 도리가 그릇되지 아니함을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2. 천주님이 계시는 세 가지 증거
대개 하늘과 땅에는 본래부터 다스리는 분이 계시는데, 여기 세 가지의 증거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만물(萬物)이요, 둘째는 양지(良知)요, 셋째는 성경(聖經)입니다.
왜 만물을 증거로 말했을까요?
가옥(家屋)으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가옥에는 기둥과 주춧돌, 대들보와 서까래가 있으며, 대문, 지게문 그리고 담장과 벽이 있는데, 간격과 길이가 한 치도 틀리지 않고, 둥글고 모난 것은 각기 틀에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기둥과 주춧돌, 대들보와 서까래 그리고 대문, 지게문이며 담장과 벽이 혼연히 서로 합쳐 우뚝 저절로 생겨났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분명 미친 사람의 말이라 할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천지는 큰 가옥인 셈이지요.
그러니 날짐승, 길짐승이며 동물, 식물들의 기기묘묘한 형상들이 어떻게 저절로 생성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정말 저절로 생성된 것이라면, 해와 달과 별들은 어떻게 그 궤도를 벗어나지 않겠으며,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은 어떻게 그 차례를 어기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흥망(興亡)과 성쇠(盛衰)를 다스리는 자 누구이며, 화복(禍福)을 내리는 자 누구일까요?
하늘이 이루신 것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기에,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대충 짐작해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유복자(遺腹子)가 자기 아버지를 못 보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람들은 한편의 뛰어난 글과 한 폭의 훌륭한 그림을 보면 흠모와 찬탄을 아끼지 않으며, 반드시 누구의 솜씨인가 묻고서 결코 소홀하게 보아 넘기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빽빽하고 무성한 저 많고 많은 우주 만물들 또한 뛰어난 글이요 훌륭한 그림이거늘,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한번 그 작자를 물어보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세간의 사물치고 질(質), 모(貌), 작(作), 위(爲) 이 네 가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는데, 질이란 재료요, 모란 형상이요, 작이란 만듦이요, 위란 쓰임입니다.
가까이는 내 몸에서 살펴보고 나아가 사물을 통해 살펴보면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거늘, 이처럼 넓고 큰 세상천지가 어찌 지으신 분이 없겠습니까?
이래서 만물을 통해 다스리는 분이 계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왜 양지를 증거로 말했을까요?
만약 백주대낮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번개와 천둥이 치면,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두려워 눈을 크게 뜨고 오금을 저리며 몸둘 바를 몰라 하지요.
이로서 상벌과 선악을 주관하시는 분이 사람의 마음과 머리 속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민간에 살고 있는 사내며 아낙들도 아주 화급하고 위급한 처지나 비통하고 억울한 때를 당하면 반드시 “하늘이시여!” 하고 부르며 하소연하니, 이는 그 본래의 마음과 타고난 본성을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고,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이지요.
다만 어떻게 섬기며 두려워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만은 같을 뿐입니다.
이래서 양지를 통해 천주께서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성경을 증거로 말했을까요?
고대 중국의 요임금, 순임금, 우왕, 탕왕, 무왕, 문왕, 주공, 공자 같은 성인들의 이야기도 경전과 역사서를 통해 전해오는데, 만약 이런 것이 아니었다면 요임금, 순임금, 우왕, 탕왕, 문왕, 무왕, 주공, 공자가 어떤 심법(心法)을 전수했고, 어떤 법도를 세웠는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심법이며 법도를 대쪽과 비단에 써놓고 책에 적어 놓았기에, 읽고 본받으며 금석처럼 단단히 믿는 것이지요.
우리 천주교에도 역시 경전이 전래되어 오고 있습니다.
천지개벽(天地開闢) 이후로 역사의 기록이 끊어지지 않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으며, 지금도 집집마다 외우고 합니다.
소가 땀을 흘릴만큼 실어다가 집에 채우더라도 해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중국의 경전과 역사서에서 전혀 보지 못했다고 해서 의심하지만, 중국의 경전과 역사서에서도 말한 바가 있지 않습니까?
《주역(周易)》에서는 “하늘께 드린다”고 했고, 《시경(詩經)》에서는 “하늘을 열심으로 섬긴다.”고 했으며, 《상서》에서는 “하늘께 제사드린다”고 했고, 또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어 볼 곳이 없다”고 했으며, 이른바 하늘을 공경한다, 하늘을 두려워한다, 하늘에 순종한다, 하늘을 받든다는 말들이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글에 뒤섞여 실려 있으니, 서양(西洋)의 역사가 전래해 오지 않는 것이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설령 서양의 역사가 저 먼 옛날에 전래되어 왔더라도 요임금 시절의 홍수와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인해 아주 없어져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중국 삼국시대 손권(孫權)의 오나라에서는 적오년간(赤烏年間)에 철십자가를 전해 받았고, 당나라 정관(貞觀) 9년에는 경교(景敎)가 크게 성행하여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초야(草野)의 백성들까지 모두 받들어 섬겨, 크게 제사를 드리고 경교 비석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위징(魏徵)이나 방현령(房玄齡) 같은 어진 사람들도 독실히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또 명나라 만력년간(萬歷年間)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많은 저술을 남겨 오늘날까지도 중국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천주께서 묵묵히 동방(東邦)을 도우시어 신기하게도 우리나라가 다행히 똑같은 복을 누리게 된 것이 이제 50여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다스리는 분이 계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아주 작은 것도 모두 천주님의 성총
위의 세 가지 증거를 통해 이미 다스리는 분이 계심을 분명히 알 수 있으니, 천주께서 천지만물을 만드시어 그의 복을 두루 내리고 그의 덕을 드러내고자 하심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을 만들어 내 위를 덮어주고, 땅을 만들어 내 발을 받쳐주며,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빛으로 나를 비춰주며, 초목과 날짐승, 길짐승이며 금, 은, 동, 철을 나에게 쓰라고 주셨으니, 우리가 모태로부터 나와 성장하기까지 하고많은 은혜를 받은 것이 이처럼 끝이 없거늘, 사람 된 본분이 응당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늘을 이고 땅을 밟아 그것을 갈아 먹고 살 뿐이면서, 낳아주신 큰 은혜를 저버림이 이처럼 막심합니다.
비유해 보건대, 아비가 집을 짓고 살림을 장만하여 그 아들에게 쓰라고 주었는데, 아들은 그 집에 머무르고 그 살림을 사용하면서 거만하게 스스로 대단한 듯 여기고, 부모 섬기는 것과 은혜에 보답할 줄을 모른다면, 효자이겠습니까? 불효자이겠습니까?
사람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은 아주 작은 것도 모두 천주의 힘입니다.
낳아서 길러주고 도와 보살피시고, 보호하여 이끌어 주시며, 죽은 뒤에 상을 받는 것은 더 따지지 않더라도, 살아서 지금 받은 은혜도 이미 지극하여 비길 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기까지 받들어 섬기기를 어떻게 해야만 그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받들어 섬기는 것이란 전혀 터무니없이 행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며, 이상한 것을 찾아 괴상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난 잘못을 고치고 새롭게 되어 천주님의 계명(誡命)을 따르는 것일 뿐이지요.
4. 천주학의 근본 도리인 십계명
계명이란 천주께서 계시로서 가르쳐 주신 열 가지 계명입니다.
첫째는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萬有) 위에 흠숭(欽崇)하고,
둘째는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거짓 맹서를 하지 말고,
셋째는 첨례날을 지키고,
넷째는 부모를 효도하여 공경하고,
다섯째는 살인하지 말고,
여섯째는 사음(邪淫)을 행치 말고,
일곱째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여덟째는 거짓 증언을 말고,
아홉째는 남의 아내를 원치 말고,
열번째는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 열 가지 계명을 종합하면 두 가지로 돌아가니, 즉 천주를 만유 위에 사랑하고 남을 자기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위 세 가지 계명은 천주를 흠숭하여 섬기는 절차요, 아래 일곱 가지는 자기를 닦고 성찰하는 공부입니다.
안씨(顔氏)의 사물(四勿)이나, 대기(戴記)의 구사(九思)가 이에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충성과 용서와 효도와 우애와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이 안에 들어 있어 터럭만치도 부족된 데가 없습니다. 이 도를 한 집안에서 실행하면 집안이 정돈될 것이요, 한 나라에서 실천하면 나라가 다스려질 것이요, 온 천하가 실행하면 온 천하가 태평할 것입니다.
열 가지 계명 가운데 한 가지라도 범할 수 없으며, 몸으로 범하기뿐만 아니라 더욱 마음으로 범함을 금합니다. 무릇 사람의 잘못은 그 마음속에서 일어나서 그 행동을 그르칩니다.
5. 인간의 나약한 실존을 극복하는 방법
대개 사람들의 과실이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나 일을 해치는 것인데, 세상의 법은 그 일은 다스릴 수 있지만 마음은 다스리지 못하고, 천주님의 계명만이 그 일을 다스릴 뿐 아니라 또한 그 마음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위태롭고, 도리란 희미해서 잠깐 사이에 죄를 짓게 되고, 사사로운 욕심과 그릇된 감정이 곳곳에서 유혹을 합니다.
교만으로 유혹하고, 분노로 유혹하고, 탐욕으로 유혹하고, 요사스러움으로 유혹하고, 질투로 유혹하고, 인색함으로 유혹하고, 게으름으로 유혹하기도 하여, 죽어 없어지고 말 곳으로 사람을 빠뜨립니다.
정말 이런 유혹들을 시시각각으로 경계하여 물리치지 않는다면, 죄악의 구렁텅이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유혹과 싸우되, 싸울 적마다 잠시도 느슨해서는 안 됩니다.
싸움에서 이기면 공적을 이룰 것이요 이기지 못하면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지요.
공적과 죄악의 판결은 몸이 죽는 날 내려질 것이니, 천주께서는 지극히 공정하셔서 선행이 없으면 보답해 주지 않으시며, 천주께서는 지극히 의로우신 분이어서 악행이 없으면 벌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몸이 죽은 뒤에 영혼이 따라서 사라진다면, 상이며 벌을 누구에게 내리겠습니까?
이는 또한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6. 영혼은 죽지 않는 것
대개 혼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생혼(生魂)이요, 둘째는 각혼(覺魂)이요, 셋째는 영혼(靈魂)입니다.
생혼이란 초목(草木)에 있는 혼으로서 나서 자라기는 하지만 알고 깨닫지는 못하는 것이요, 각혼이란 짐승들에게 있는 혼으로서 알고 깨달을 수는 있지만 의로운 이치와 옳고 그름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란 사람이 지닌 혼으로서 나게도 하고 자라게도 하고, 알고 깨닫도록 하며,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도리를 따질 수 있게도 해줍니다.
만물 가운데서 오로지 사람이 가장 귀한데, 사람을 귀하에 여기는 것은 그 혼이 영험한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하늘이 부여해 준 성품으로서, 태중에 있을 때 주어진 것이니, 어찌 초목이나 짐승들과 같이 썩어 없어져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미 옛 유학자들도 혼에는 세 가지가 있고, 영혼은 사라지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 혼이 거듭 흩어진다.”고 했으며, 또 “혼(魂)은 하늘로 오르고, 백(魄)은 땅으로 꺼진다.”고 했으니, 혼은 세 가지가 있으며, 영혼은 죽지 않는 것이 명백합니다.
7. 천상복락과 지옥영벌
그러면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면, 필경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착한 사람의 영혼은 올라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의 영혼은 땅으로 들어가 벌을 받습니다.
그 상이란 천당(天堂)의 영원한 복락(福樂)이요, 벌이란 지옥(地獄)의 영원한 고통이지요.
만약 천당을 못 봤고 지옥을 못 보았다고 해서,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지 못한다면, 이는 맹인(盲人)이 하늘을 못 보았다고 해서 하늘에 해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떤 사실이 이치에 합당하면 보지 않더라도 믿을 수 있을 것이요, 이치에 합당하지 않으면 비록 보았다 하더라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실을 믿을 것이냐 믿지 못할 것이냐 하는 것은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이치에 합당하냐 합당치 못하냐에 있을 뿐입니다.
정말 이치에 맞도록만 한다면, 천년 뒤의 동짓달도 앉아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되겠습니까?
대개 나라에는 반드시 상과 벌이 있는 법인데, 공을 세운 자는 승격시켜 벼슬을 주고 상금을 내리며, 죄를 지은 자는 내몰아 감옥에 가두어 형벌을 내리지요.
나라의 임금도 상벌의 권한을 갖고 있거늘 하물며 천지의 대군께서는 어떠하겠습니까?
그 상이란 이 세상의 벼슬이나 상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무궁한 복락이요, 그 벌이란 세상의 감옥이나 형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무진한 고통이랍니다.
하늘로 오를지 땅으로 내려갈지 한 번 정해지면 다시는 옮길 수 없는 것입니다.
슬픕니다.
세상 사람들이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어느 곳에 머물러야 할지를 모르니 어찌 애통하지 않습니까?
이제 영원한 상과 영원한 벌이 있는, 즉 세상사 모두 헛된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사람의 목숨이 길어야 불과 백년인 것을, 이익과 욕심의 구렁에 빠져 얻지 못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고민하고 이미 얻었으면 그것을 잃어버릴까 근심하다가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지냅니다.
이 몸 한 번 죽어버리면 부귀공명은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요, 게다가 일생토록 구해도 다 얻지 못할 부귀공명이란 또 얼마나 헛된 것입니까?
어찌 그리도 앞이 가려져 깨닫기 어려운 것인가요?
8. 지극히 거룩하고 공번된 유일무이한 교
아! 세상의 복은 완전하지 못하나 천상의 복은 완전무결하며, 세상의 복은 잠깐 지나는 것이나 천상의 복은 영원한 것이니, 불완전하고 잠깐 지나는 세상의 복을 구하는 것이 완전하고 영원한 천상의 복을 구하는 것과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천당의 영원한 복락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만약 지옥에 떨어지는 후환만 없다면, 잠깐 사는 세상 짧은 영화도 한번 누려 볼 만하겠지만, 지옥의 영원한 벌이 엄연히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세상에 사는 동안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다가 죽은 뒤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그래서 도끼들이 앞에 놓여있고 끓는 솥이 뒤에 있어도 의연하게 뜻을 굽히지 않는 순교자들이 끊임없이 계속 있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를 참된 교(敎)라 할 수 있는 한 증거이니, 한마디로 말해서 지극히 거룩하고 공번되고 지극히 정의롭고 지극히 참되며 지극히 완전하고 오로지 홀로이며 유일무이한 교인 것이지요.
그러면 어째서 지극히 거룩한 교회(敎會)라고 말할까요?
천주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로서 예로부터 여러 성인(聖人)들이 끊임없이 서로 이어 그 올바른 이치를 천명하고 그 법도를 바로 세워 목숨까지 바치며 증거하였으니, 지극히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지극히 공번되다고 하는 것일까요?
귀인, 천인, 현명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남녀노소, 동서남북의 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이니, 지극히 공번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어째서 지극히 정의롭다고 하는 것일까요?
광대명백하고 탕탕평평해서 조금도 잘못된 행동이나 어긋나는 일이 없으니, 지극히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지극히 참되다고 하는 것일까요?
천하에 종교 없는 나라가 없건만, 참되지 못한 것을 가르치는 일이 많습니다.
노자와 장자는 허무함을 가르쳐서 잘못이고, 신선과 부처는 황당함으로 해서 잘못되었으며, 이외에 제자백가들의 술수는 족히 입에 올릴 것도 못됩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도리는 진실되고 거짓이 없어 전혀 어긋나지 않았으니, 지극히 참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지극히 완전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초목(草木)에 비유하건대, 다른 종교들은 혹 갈래는 있으나 가지가 없으며, 혹 잎은 있는데 꽃이 없으며, 혹 꽃은 있으나 열매가 없어 머리와 꼬리가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처음과 끝이 서로 이어지질 않습니다.
오직 천주교는 갈래도 있고 가지도 있고 잎도 있고 꽃도 있고 열매도 있으며, 천지(天地), 귀신(鬼神), 인사(人事)의 전말과 과거, 현재, 미래의 앞뒤가 가득히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지극히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애통하게도 금과 옥을 가리켜 억지로 기와조각이라 하고 맛난 음식을 찌꺼기라고 하니, 이 무슨 말입니까?
9.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비난에 대한 해명
또한 애비도 없고 임금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헐뜯는데, 이것은 천주성교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십계 중 네 번째에 “부모를 효성으로 공경하라” 했으니, 충효(忠孝) 두 글자는 만세대 동안 변하지 않는 도리입니다.
부모의 뜻과 몸을 봉양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이요, 교를 믿는 사람으로서는 더욱 힘써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모께 예의를 다해 섬기고 힘을 다해 봉양하는 것이 임금에 대해선 충성이 되어 목숨을 바치며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것도 감히 피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계명을 어기는 것이니, 과연 애비도 없고 임금도 모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다만 임금이 금지했는데도 백성들이 행하고, 아비가 금지했는데도 자식이 행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까?
이 또한 해명할 것이 있습니다.
지위에는 높고 낮은 것이 있고, 일에는 가볍고 중한 것이 있으니, 한 집안에서 아버지가 가장 중하지만, 아버지보다 높은 사람은 임금입니다.
또 한 나라에서 임금이 가장 중하지만, 임금보다 높은 것은 천지대군입니다.
아버지의 명을 따르면서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죄가 무거울 것이요, 임금의 명을 따르되 천지대군(天地大君)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죄가 비길 바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주를 받들어 섬기자는 것이지, 일부러 임금의 명을 어기고자 한 것이 아닌 부득이한 것이었느니,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애비도 없고 임금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10. '통화통색(通貨通色)'의 비난에 대한 해명
또 재화(財貨)를 유통(流通)하고 색정(色情)을 나눈다고 말하는데, 재화를 유통시키는 것은 자고로 국가에서는 하루라도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있는 물건과 없는 물건을 서로 유통해야 백성들이 서로 도움 받아 살아갈 텐데, 만약 재화를 유통시키는 일이 없다면 온 나라 안에 살아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것이 장차 불미스러운 법인데, 오히려 금지시켜야 할 일이겠습니까?
또 이른바 색정을 나누는 것은 짐승들도 오히려 그러지 않는 법인데, 어떻게 천주성교를 믿는 우리에게 그런 비난을 하는 것입니까?
십계명 중 여섯번째에 “음사한 짓을 하지 말라”고 했고, 아홉번째에 “남의 아내를 바라지 말라”고 하였으니, 여섯번째 계명은 몸으로 범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요. 아홉번째 계명은 마음으로 범하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천주교가 음사한 것을 엄격히 금하기를 이처럼 반복하고 있는데, 도리어 색정을 나눈다는 소문을 들씌우니, 어디에 이처럼 윤리를 더럽히고 법도를 어지럽히는 가르침이 있었습니까?
11. 도가 성스러우면 참된 것
도리가 참된지 거짓된지, 사리가 굽은지 곧은지 여부는 구석에 던져두고, 얼토당토않은 말로 밀치고 막는 것은 어쩌면 외국의 도(道)라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금이 산지(産地)에 관계없이 순도(純度)만 좋으면 보배가 되듯, 도리 역시 지역에 구애됨 없이 성스러우면 참된 것이지요.
그러니 도를 전하는데 어떻게 이 땅 저 땅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중국은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서로 오고 가고 하여, 불교도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으며, 외국인들이 많이 와서 머물러도 일찍이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 폐단(弊端)이 오래되어, 전국의 절과 사찰들은 아주 사치스럽고, 금불상과 동상을 만드는 데에 재력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저 불교란 서역(西域)의 종교 중에서도 이단(異端)이지요.
천주성교의 문자를 표절해 쓰고 법도(法度)를 모방했으나, 뜻과 이치는 비뚤어져 어긋났고, 윤리와 기강은 뒤집혔으니, 이야말로 붉은색을 흐려놓는 자주색이요, 벼를 망치는 가라지입니다.
화복을 가장하고 백성을 공갈쳐서 이젠 괴상한 폐단이 되었습니다.
무당, 풍수쟁이, 점쟁이, 관상쟁이들이 부인들을 꾀어 돈과 재물을 빼앗아가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면서, 천주교만 유독 포용의 아량을 베풀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집안에 해가 되어서입니까?
나라에 해가 되어서입니까?
그 하는 일과 행동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그가 지키는 도리가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반역이라도 꾀했습니까?
음란한 짓이라도 했습니까?
도둑질을 했습니까?
살인이라도 했단 말입니까?
어찌 그리 법보다도 지나치게 형벌을 내리며 천주를 배반하라는 것입니까?
12. 목숨을 바쳐 주를 증거함은 마땅한 일
천주께서는 만물의 대부모(大父母)요 대주재(大主宰)입니다.
옛날의 성현들도 열심으로 섬기고 제사를 드렸었거늘, 어째서 오늘날 이 사람들만이 이런 능욕을 당한단 말입니까?
굶주리고 메말라 나라가 어려운 때가 되면, 우리 임금께서는 밤낮으로 애쓰고 인정(仁政)을 일으키시어 생명을 아끼는 사랑이 민심에까지 젖어드는데, 아니 저 성교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 임금의 자식이 아니란 말입니까?
애석하게도 저 사람들이 이런 지경에 이르러도 조금도 불쌍치 않단 말입니까?
옥중에서 죽어가고 성문 바깥에서 처형되는 것이 끊이질 않아 피눈물은 도랑을 이루었고, 통곡이 하늘에 울리고 있습니다.
아비는 자식을 부르짖고, 형은 아우를 부르짖으니, 마치 궁핍하여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맑고 좋은 세상에 이 무슨 광경입니까?
목숨을 바쳐 주님의 참 가르침을 증거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이 몸 또한 죽고 말 것이지만, 외람되나마 말씀을 올릴 수 있는 이 때에 한 번 고개를 들어 길게 외쳐보지도 못하고 그냥 묵묵히 죽어버린다면, 산더미 같은 이 생각들을 백세 뒤에까지 밝힐 길이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각별히 불을 밝혀 읽어보시고 도리가 참되고 바른지 거짓되고 나쁜 것인지를 자세히 분별하신 뒤에, 위로는 조정에 아뢰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펼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최선의 방법으로 일변하여 금령을 늦추고 체포령을 거두며 옥에 갇힌 이들을 놓아 주시어, 온 백성들과 함께 편안하고 즐겁게 태평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천 번 만 번 바라고 또 바랍니다.
13. 제사와 위패에 관한 문제
또 아룁니다.
죽은 사람 발 앞에 술과 음식을 바쳐 올리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적에도 영혼을 술과 음식으로 모실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죽은 뒤의 영혼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음식은 육신과 입을 공양(供養)하는 것이요, 도덕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아무리 효성(孝誠)이 지극한 자식이라 할지라도 맛있는 음식으로 주무시는 부모 앞에서 공양을 할 수 없는 법이니, 잠잘 적엔 먹고 마실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잠을 잘 적에도 그러한데, 하물며 아주 잠든 때에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쌀밥, 기장이며 푸짐한 과일들은 헛된 것이 아니면 거짓된 것이니, 자식된 자가 헛되고 거짓된 예절로 돌아가신 부모를 섬길 수 있는 것일까요?
이른바 사대부(士大夫)들의 위패(位牌)도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이미 위패는 부모님의 기맥(氣脈)이나 육신과는 아무 연관도 없으며, 낳아 길러주신 은혜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부모라는 이름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데, 장인이 깎아 만든 것에 물감과 먹으로 칠하여 놓고는 진짜 아버지고 진짜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치에 맞지 않고 양심이 허락치 않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들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천주교에 죄를 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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