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쌍계사 그리고 하동벚꽃길
1. 일자: 2023.3. 24 (금)
2. 장소: 화엄사, 쌍계사, 하동벚꽃길
3. 행로와 시간
[화엄사: 화엄사(10:38~54) ~ 연기암(11:22) ~ (도로) ~ 청계암(11:35) ~ 미타암(11:55) ~ 내원암(12:02) ~ 금정암(12:08) ~ 지장암(12:21) ~ 화엄사(12:30) / 7.4km]
[쌍계사: 쌍계사(13:30~14:20) ~ (점심) ~ (벚꽃길) ~ 카페꽃피는산골(16:05~17:00) ~ 화개장터/화개면사무소(17:15) / 8.8km]
오늘 트레킹은 봄꽃 여행과 사찰 탐방의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화엄사는 매화, 쌍계사는 벚꽃으로 대표된다. 봄날 흐드러진 꽃길을 걸으며 산사를 탐방하고 싶은 오랜 바램이 있었는데, 드디어 기회를 얻었다. 산악회 카페에 올라온 지도를 보니, 봄꽃 이외에 산사 주변 길도 무척 좋아 보인다. 이름하여 봄꽃 구경과 산사 탐방 그리고 낭만 트레킹을 함께 즐기는 1석 삼조의 여행이 기대된다.
첫 여정은 화엄사이다. 제1탐방로로 연기암으로 갔다가 제2탐방로를 따라 청계암, 미타암, 내원암, 금정암, 지장암을 거쳐 화엄사로 돌아오는 이른바 화엄계곡치유탐방로 5.9km를 걷는다. 연기암 가는 길은 지리산을 오를 때 여러 번 가 본 곳으로 대나무 숲과 계곡 따라 호젓한 오솔길이 기억에 남는다. 암자를 순례하는 제2탐방로는 처음 걷는 길로 그 기대가 남다르다. 지난 통도사 암자순례에서 절 집 탐방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경험인지 알기에 흥분이 인다.
쌍계사 ~ 불일폭포 길은 여러 번 지리산 남부능선을 걸으면서도 기회가 닿지 않았던 곳인데 오늘 첫 인연을 맺게 된다. 게다가 쌍계사에서 화계장터로 이어지는 십리벚꽃길은 워낙 유명한 벚꽃 명소인데, 이 좋은 계절에 찾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화려한 꽃에 묻히겠지만 화엄사와 쌍계사 산사 본연의 아름다움도 확인하는 여행이 되어야 하는데, 내 급한 마음이 여유를 줄까 모르겠다.
늘 답은 길과 현장에 있다. 오래 기억될 인연을 만들어야겠다.
꽃 개화 시기에 맞추어 일정을 조정했는데 웬 일인지 취소자가 많아 버스가 36인승 1대로 줄었다. 버스 안 아득함이 덜하겠지만, 어쩌랴.
걷는 길을 다 더해보니 17km 정도로 꽤 길다. 오고 가는 찻길도 머니, 이래 저래 긴 하루가 되겠다.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 화엄사와 암자 탐방 >
버스가 화엄사를 향해 간다. 예보는 없었는데 비가 내린다. 망설이다 우산을 샀다. 이리 사서 쓰지 않는 우산이 많지만 참고 갈 비가 아닐 것 같다. 불이문,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긴 계단을 올라서자 마당이 나타난다. 정면에 있는 대웅전보다 좌측 각황전에 먼저 시선이 간다. 화엄사의 중심 법당은 각황전이다. 너른 마당이 화엄사의 중심을 잡아준다. 조밀하여 자칫 번잡해 보일 수 있는 가람에 빔으로 여유를 주는 공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석탑과 석등, 각황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비 오는 봄날 고요한 산사의 정취가 그대로 묻어난다.
계단을 올라 각황전 앞뜰에 선다. 비를 머금은 홍매화가 은은한 색감을 뽐낸다. 비에 떨어진 붉은 꽃잎들이 땅에 뒹군다. 매화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각황전 옆으로 나한전, 원통전, 영전, 대웅전이 나란히 서 있다. 각황전 앞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그윽하다. 비만 아니었어도 인파로 붐빌 곳이 우산을 쓴 이들 몇 만이 보인다. 그 뒤로 희뿌연 꽃을 품은 지리산 자락이 모습을 드러낸다. 운치 있다는 말이 썩 잘 어울린다.
대웅전 앞을 지난다. 시계를 본다. 15분이 훗닥 지나갔다. 마음이 급해진다. 연기암을 거쳐 암자들을 다 탐방하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우측으로 난 호젓한 길을 따라 걷는다. 대나무 숲이 길게 이어진다. 명품 숲이다. 어느 순간부터 걸음은 빨라지고 주위엔 아무도 없다. 홀린 듯이 더 속보를 걷는다. 계곡 물소리가 시원하고 진달래가 분홍꽃으로 유혹해도 걷기에만 전념하다. 그렇게 연기암까지 2km 거리를 30분 만에 걸었다. 도로와 찻집이 나타나자 여유를 되찾았고, 너무 서둔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스쳤다.
화엄사를 여러 번 왔어도 연기암은 처음이다. 섬진강이 조망된다는 금빛 탑 앞에 선다. 비 내리는 흐릿한 풍경만 있을 뿐이다. 연기암의 절집들을 사진에 담고 왔던 길을 돌아 내려온다. 남은 거리는 4km, 시간은 70분, 부지런히 걸어야겠다.
너른 도로를 따라 내려온다. 비를 버금은 진달래가 핀 길을 사진에 담는다. 사진 찍는 잠시의 시간이 곧 쉼이다. 청계암, 미타암, 내원암, 금정암 순으로 암자에 들른다. 큰 기대를 안고 시간을 쪼개어 발품을 팔지만 암자의 모습은 그리 감동적이진 않다. 봄 비 내리는 호젓한 암자를 잇는 도로의 개방감과 정취가 더 좋다.
마지막으로 지장암으로 향한다. 비탈을 꽤 오른다. 길가에 부처님오신날을 위해 달아 놓은 등과 대나무 숲의 조화가 근사했다. 우산을 들고 걷는 기분이 좋다.
다시 화엄사 홍매 앞에 선다. 이번에 각황전 뒤쪽에서 매화를 본다. 절 집 지붕의 선이 곱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상승감에 내 몸도 솟는 기분이다. 천왕문, 금강문, 불이문을 지나 입구 계곡에 선다. 길에 핀 벚꽃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담고 차에 오른다. 7.4km의 거리를 100분 만에 걸었다. 무리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쉬이 찾아오지 않으리란 생각이 앞섰고, 잘한 판단이었다.
< 쌍계사 탐방 >
섬진강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을 지나 쌍계사로 향한다. 걸어서 내려갈 화려한 길을 먼저 보았더니 마음이 급해진다. 다행히 비는 그쳤다. 우산과 배낭을 차에 두고 맨 몸으로 차에서 내린다. 매표를 하고 쌍계사 경내로 들어선다. 처음 와 보는 곳이지만 낯설지 않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팔영루 앞 석탑에 선다. 팔각구층 석탑이 높다랗게 서 있다. 팔영루를 지나자 국보인 비각 뒤로 대웅전이 우뚝 서 있다. 부처님 뒤로 그려진 탱화를 한참동안 보았다. 이곳 쌍계사는 요즘 읽고 있는 토지의 무대이기도 하다. 운치가 있는 고찰의 풍모가 곳곳에서 엿보인다. 소설 속 길상이 모습을 그려본다.
대웅전 뒤로 돌아든다. 금강계단이 커다란 위용을 드러낸다. 원형 사리탑과 대웅전 검은 지붕이 어우러져 멋진 프레임을 만든다. 한참을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본다. 쌍계사에는 곳곳에 볼거리가 무척 많다.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대웅전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 나한전을 지나 화엄전으로 향한다. 긴 계단이 나 있다. 비가 또 내린다. 그칠 기세가 아니다. 화엄사에서 산 우산을 차에 두고 온 게 후회막급이다. 비를 피해 화엄전 지붕 밑 작은 처마에 앉는다. 삼성각으로 향하는 긴 계단을 올려다보며, 그새 비가 그치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사진을 정리한다. 쉬이 그칠 비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는 비를 맞고 걷기로 한다.
비닐봉지로 머리만 가리고 쌍계사를 뒤로 하고 내려온다. 불일폭포로 향하는 오름길이 보인다. 쌍계사를 여유 있게 돌아보려고 그 좋다는 폭포도 포기했는데 무척 아쉽다. 걷는 내내 우산을 뒤고 온 후회가 가시질 않는다. 몸을 가볍게 한다는 얕은 꾀를 부리다 낭패를 보게 된 것이다. 판단은 앞을 내다봐야 하는데 늘 허둥지둥이다.
결국 상가지역에 내려와 이번에는 비옷을 장만한다. 그리고 음식점에 들러 칼국수를 주문한다. 맛보다는 비 오는 날에 뜨끈한 국물이 그리워서였다. 먹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 하동 벚꽃길 >
우비 입고, 비에 젖은 패딩을 넣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초라한 모습으로 화개벚꽃십리길을 걷는다. 만개한 벚꽃이 지천이다. 어디다 카메라를 들이대도 멋진 프레임이 만들어진다. 굳이 아웃포커싱이니 수동 모드로 F값, ISO, 셔터스피드를 설정하지 않고 내 감으로 셔터를 눌러도 화려한 사진이 완성된다. 한동안 비를 맞으며 사진찍기 놀이에 심취한다. 근경, 원경, 꽃 뒷배경도 바꿔가며 사진을 찍으며 원 없이 벚꽃 구경을 했다.
켄싱턴리조트가 보이고 그 밑으로 섬진강이 흐른다. 비에 수량이 많아졌는지 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 크다. 찻길을 버리고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인 강변으로 내려와 걷는다. 강 건너에 녹차밭과 벚꽃 숲 그리고 지리산 줄기에 구름이 걸쳐 있는 풍경이 보인다. 이곳은 벚꽃 말고 녹차로도 유명한 곳이다. 녹차가 처음 재배된 곳이기도 하다. 비를 버금은 녹차잎에서 싱그러움이 뿜어져 나온다. 비가 와서, 날이 늦어서, 두고 온 우산 때문에 라는 온갖 푸념이 사라진다. 비로 강변 운치가 살아나고, 물기를 버금은 꽃은 더 화려한 색을 발하고, 인파가 사라져 꽃길을 독식할 수 있고, 무엇보다 비를 맞으며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전화위복 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가 보다.
한 시간 넘게 물릴 정도로 벚꽃만 보며 걸었다. 옆으로 차들이 쌩쌩 지나간다. 물웅덩이를 피하여 요리저리 걸음을 옮긴다. 비가 조금 잦아들고 도로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나도 비옷을 잠시 벗는다. 사진을 부탁한다. 배에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사진에는 뱃살이 사라졌다. 몇 달 운동하고 적게 먹은 결과가 흐뭇하다.
오후 4시가 넘어선다. 마당에 잔디가 깔리고 강 건너 풍경이 근사한 카페에 끌리듯 들어선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창 밖 풍경을 본다. 사진에 지나온 벚꽃 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성급한 마음에 눌러 댄 사진들을 정리한다. 대장도 카페에 들어선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 이 산악회에서는 흔치 않은 차분한 분이다.
5시가 가까워진다. 들머리인 화개면사무소로 향한다. 근방이라 여겼는데 1km 넘게 걸었다. 다리를 건너며 바라본 풍경에는 섬진강과 벚꽃길 그리고 안개 낀 하늘과 지리산, 이 모든 게 한 폭 화면에 들어 있었다. 흔히들 쌍계사 혹은 하동벚꽃십리길 이라 부르는데, 걸어 보니 7km가 넘는다. 벚꽃이십리길이라 부르면 더 좋겠다.
지금껏 경험한 가장 길고 화려한 꽃길을 감동적으로 걸었다. 그간 가졌던 벚꽃 길에 대한 갈증도 말끔히 해소되었다. 버스에 오르며 떠오르는 단어 하나, '명불허전'이었다.
< 에필로그 >
귀경 버스는 17:30에 출발했다. 젖은 몸을 의자에 누인다. 좌석 옆에 놓인 검은 우산을 보니 또 화가 치민다. '줘도 못 먹고, 그놈의 아둔한 판단력 뭐에 써 먹나' 하는 자책이 든다. 마음을 추스리려 눈을 감고 오늘 절에서, 꽃길에서 경험한 일들을 되새겨본다. 자책은 잠시,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주 오래 기억날 많은 일을 오늘 경험했다.
밖이 어두워진다. 사진을 정리하다, 문뜩 사진은 빼기의 미학이라 하는데 왜 나는 더하기에 집착할까 라고 자문해 보았다. 보여 주고픈 기록하고픈 마음이 과하기 때문이라 여기며, 글도 사진도 더 익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린다.
오가는 차 안에서 내내 박경리 선생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새로 읽는 토지가 8권 째로 들어서며 이야기도 등장인물도 가물가물해져 소설 전체를 훑는다는 마음으로 본 것이었는데, 3시간 넘게 깊이 빠져들었다. 차분하고 해박하고 묵직하고 호소력 큰 박경리 선생의 음성에 빠져든다. 이 나라 최고의 지성을 그간 몰라 본 것이 부끄러웠으나, 이 분과 40년 넘게 동시대를 살았다는 자랑스러움에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영상을 보며, 소설 토지 집필의 모티브는 외할머니로부터 어릴 적 들은 '호열자가 창궐하는 시절 벼가 익는 황금 들녘에 추수할 사람이 없다' 는 이야기에서 시작되었고, 토지란 생명의 본질이자 흔히 문서로 인식되는 소유의 시작이라는 중의적 표현이란 걸 새롭게 알게 되었다.
작가의 기본 정서는 '생존하는 것 이상의 진실은 없다'이며, 세상을 대하는 마음의 크기가 남다르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소설 토지를 관통하는 삶의 연민과 한, 그러나 우리의 한은 원망과 복수로 표현되는 일본의 한(우라미)과 달리 과거의 서러움을 극복하려는 미래지향적인 소망이라는 인식에 머릿속이 맑아짐을 느꼈다. 왜 글 잘 쓰는 유시민 작가가 토지 1부를 5번 넘게 읽었고, 김훈 작가가 기자 시절 박경리 선생을 감동과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았는가를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사유의 깊이와 철저한 작가로서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