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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槪觀)
17장 16절-27절.
◆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인간 편에서 보면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이 돌아감으로 징조가 이뤄진다. 이 징조는 눈에 보이는 징조다. 해가 머리 위로 올라가서 돌면 여름이고, 옆에서 떴다가 옆으로 지면 가을과 겨울이다. 이런 징조에 따라 덥거나 춥게 된다. 그 다음에 눈에 보이는 징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면을 알게 하는 비유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진리가 내 머리 정상에 비춰지면 나는 환한다. 그러나 진리가 내 머리의 정상이 아니라 내 옆으로 지나가면 나는 춥고 나의 그림자는 늘어지는데, 이걸 신앙 면으로 보면 나의 영적인 상태가 밝을 때는 활발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어둡고 신앙생활에 힘이 없다.
그러면 자기 속에 해가 떴다는 게 무슨 뜻이냐? 자기가 진리로 충만하면 밝고 명랑하고 활기차고 이게 있는 거다. 여러분들 속에서 진리가 힘이 되어있다면 자기의 정신세계가 이렇게 되는 거다. 날씨에 따라 사람의 몸이 빨리 반응을 하는 것처럼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반응이 빨라야 한다. 느리거나 눈치가 없으면 자기는 그만큼 은혜를 못 받는 거다. 영적인 면에 민감하면 자기가 하나님과 가깝고 멀고 하는 걸 느끼게 된다.
하나님은 해와 같아서 내가 하나님의 빛을 받으면 나는 밝고, 명랑하고, 기쁘고, 즐겁고, 어두운 게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이 지면 신앙 면에서 풀이 죽고 밝지 못하다. 내가 하나님 앞에 교만하면 ‘그래? 그러면 네가 견뎌봐라’ 하고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시면 마치 해가 머리 정상으로 안 뜨고 옆으로 지나가는 것처럼 나는 고통에 빠지게 된다. 이러면 상황적으로 겨울이 되는 거다.
우리는 이룰구원 면에서 이런 걸 느껴야 하는데 이건 없이 안 믿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처럼 돈이 많고 뭐가 잘 되면 ‘헤헤’ 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의 정신으로 사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금물이다. 이런 차원에서 노는 사람에게는 진리이치가 안 들어간다.
본문.
16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여기 복을 준다고 하는 게 무슨 복이냐? 먹고 마시는 복이 아니다. 15절에 보면 사래의 이름을 사라라고 했는데 ‘사라’란 ‘열국의 어미’라는 뜻이니까 사라가 열국의 어미가 되는 복을 말한다.
열국의 어미가 된다는 게 말하자면 ‘여봐라. 이래라. 저래라’ 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열국 안에는 많은 민족이 사니까 이 많은 민족의 어미가 되면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을 것이라는 말인지?
우리가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남조유다의 왕들을 보면 올바른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느냐? 별의 별 이상한 왕들이 많고, 깡패 같기도 하고, 거짓 같기도 하고, 무당 같기도 한 왕들이 많다. 그러니 골치가 아픈 거다. 이들이 시대적으로는 사라의 몇 백 년 뒤의 후손들이지만 이 후손들을 다 끌어다 사라 앞에 놓는다면 사라가 얼마나 골치가 아플까?
그렇다면 열국의 어미로서 이 후손들에게 뭘 먹이고 가르쳐야 하겠느냐? 아이를 키울 때 어미는 아이에게 순전한 젖을 먹여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아이가 어떻게 되겠느냐? 신앙 면으로 이걸 생각해 봐라. 그러니까 열국의 어미가 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좁혀서 질적인 면에서 이룰구원 차원의 진리이치로 자기에게 적용시켜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역사적으로만 보면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의 뜻을 모르는 거다.
주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 무슨 말을 했던 내가 하나님의 본질의 교훈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말을 할 때는 ‘마지막 시대에까지, 더 나아가서 천국에서까지 하나님 앞에 참말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까지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말 한 마디를 하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의 말의 질이 영원히 변질이 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상달이 딱 되는 말이어야 한다. 특히 우리 입장에서 이룰구원의 사상은 더 그렇다.
계:에 열두 가지 보석이 나오는데, 이게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33년간 이 땅에 사시면서 언행심사와 사고방식 하나하나를 구별하고 분별하며 하나님 앞에 본질로 되어진 사상을 말해주는 거다. 말하자면 이게 보석이다. 하늘나라에까지 들어가는 사상이 보석이라 그 말이다. 세상의 정신과 사상에 뽑히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 연단된 강한 정신을 말한다. 주님께서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신 것은 말세에는 이런 신앙정신과 사상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 이게 없다.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데, 이 교회사는 ‘교회가 어느 시대를 거쳐 어떻게 나왔고’ 하는 걸 다루는 거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런 것보다 더 중한 것은 진리본질, 생명의 본질을 알고 내가 그런 사람으로 되는 거다. ‘시대적으로 역사적으로 전쟁이 나고, 문화 문명이 어떻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 교회는 어떻게 변천을 했고’ 하는 것은 껍데기이고 지나가는 거니까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가운데 살면서 얼마나 진리본질의 사람으로 만들어졌느냐?’ 이게 중요한 거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현실에서 ‘언제부터 교회에 다녔고, 몇 년이나 집사직을 했고’ 하는 것은 표면적인 일일 뿐이고 문제는 언제부터 믿었던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의 본질의 사람으로 만들어졌느냐?’ 하는 게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거다. 하나님의 본질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되어가는 거지 본질이 아니면 교회에서 아무리 직분이 높고 열심히 충성봉사를 해도 하나님의 역사는 없는 거다.
우리가 이스라엘 역대의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특히 왕들을 보면 하나님의 본질을 찾기가 참 힘들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이스라엘을 다스림에 있어서 자기 멋대로구나. 이걸 오늘날 교회로 보면 교인들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과 구주 예수를 믿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인들의 신앙정신이 제 멋대로구나.
오늘날 교인들의 마음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산당이 들어앉아 있고, 우상을 섬기고 있고,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상태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볼 때 이런 상태의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왜냐? 목사부터가 짐승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보호가 되겠느냐? 보호가 안 되면 이스라엘의 결말이 어떻게 되더냐? 이방민족에게 포로가 되어서 고생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는 거다.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니느냐, 안 다니냐?’ 하는 걸 가지고 ’믿는구나. 안 믿는구나‘ 이렇게 보지만 지금 이 말은 ‘믿는다. 안 믿는다’ 이런 차원을 논하는 게 아니라 ‘믿기는 믿는데 진리냐, 비진리냐?’ 하는 걸 말하는 거다. 예를 들면 가룟유다가 믿는 거냐, 안 믿는 거냐? 믿는 거다. 그런데 신앙정신을 보면 안 믿는 거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믿는 거냐, 안 믿는 거냐? 믿는 거다. 그런데 신앙정신을 보면 안 믿는 거다.
그러면 이런 상태에서 언제 믿음이 바로 들어가는 거냐? 그 동안 옳은 교훈을 받아오다가 성령을 받았을 때 성령님의 역사로 바꿔놓는 거다. 그러니 바른 교훈마저 못 받는다면 이 사람은 신앙정신이 바로 서기란 막막한 거다.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사라가 열왕의 어미가 되었으니 이제 골치 아프게 생겼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는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라는 말씀을 했다. 열왕의 어미가 되면 골치가 아픈 건데 하나님께서는 이게 복이라고 말씀을 하는 거다. 골치 아픈 일을 왜 복이라고 하실까?
어미가 하는 일이 어떤 거냐? 자녀를 낳아서 먹이고 가르쳐서 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거다. 그러니까 열왕의 어미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대해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바른 길로, 즉 하나님 앞에 복된 길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거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이보다 더 복되고 귀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여러분들 가정에 자녀들이 있는데, 자녀가 있다는 자체가 복이냐, 믿는 부모로서 이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게 복이냐? 후자다. 자녀를 기르면서 세상의 제물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은 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교훈을 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만들어지도록 하는 게 복이다. 이렇게 되면 누가 그 자식에게 ‘내가 당신을 왕으로 세웁니다’ 라고 하지 않아도 이 자식의 머리통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 왕의 지식이다.
사람이 시대나 환경을 타지 않는 영원히 변질이 없는 생명적 지식을 가지게 되면 이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거기에 동화되지 않고 그걸 자타의 이룰구원에 이용 활용을 하게 된다. 아무리 예수를 믿더라도 생명적 지식이 없으면 세상에 이용을 당하게 된다. 세상에 이용을 당한다는 것은 세상에 빠지는 걸 말한다. 생명적 지식이 아닌 죽은 지식을 주격으로 하고 살게 되면 자기가 세상에 빠져놓고도 빠진 줄을 모른다. 이런 사람은 세상의 환경과 유행바람에 한없이 떠내려가는 거다. 거슬러 올라오지를 못한다.
일반적으로도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도 자기가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서 헤쳐 가듯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적 지식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매사를 자타의 이룰구원에 목적을 두고 일반적인 삶을 지혜롭게 살아나간다. 자기에게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에라, 모르겠다. 나 혼자 살기도 바쁜데 언제 주변을 돌아보느냐’ 라고 하는 사람은 세상에 빠진 거다. 세상파도가 치는 대로 그냥 떠내려가는 거다. 세상의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것은 죽은 거다.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현재 부모가 된 여러분들이 ‘열국의 어미의 정신이 들어있는지, 아닌지?’ 하는 것은 ‘자녀들에게 어떤 정신이 들어가길 원하는지?’ 하는 교육심을 보면 알 수 있다. 부모가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정신을 자녀들에게 넣어주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하늘을 향한 예수님의 정신을 넣어주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교회에 와서 베운 이룰구원의 정신을 넣어주려고 하는 건지?
자녀가 이룰구원 면으로 자라길 원한다면 자녀에게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지 않고 자녀들의 행동이나 친구나 사회생활 등을 다 보는 거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겠지’ 라는 믿음의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신앙의 이치를 깨우쳐 줘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부모가 매사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 부모가 뭔가 하나라도 허점이 생기면 ‘엄마도 그러면서’ 라고 하며 엇나가 버릴 수 있다. 엇나간 것을 바로 잡으려면 몇 배 더 힘이 든다. 그러니 얼마나 머리가 아프겠느냐?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너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라고 하셨으니까 사라가 이삭을 낳았을 때 얼마나 신경이 쓰이겠느냐? 사래로서는 하나님께서 이삭으로 통해서 자자손손으로 왕이 나온다고 말씀을 하셨으니까 이들에게 변질성이 없는 하늘나라의 본질적인 교훈이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식을 그 시대의 주격자가 되도록 키우는 게 아니라 신앙 믿음을 주격으로 살도록 해야 한다.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신앙을 주격으로 하고 살지 않는다는 거다. 자기는 열심히 교회에 나가는데도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할 때는 자기의 신앙성분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려면 본질적인 신앙이라야 하는 건데, 오늘날 교회적으로 신앙의 본질을 알게 해 줄 자가 누구냐?
신앙의 본질을 염두에 두고 사라를 볼 때 뭐가 사라에게 참 복이냐? 후손들에게서 왕이 많이 나오는 게 복이냐? 뭘 보고 복이라고 하는 거냐? 진리교훈을 두고 말하는 거다. 그러니 자녀가 있다면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에 가서 무엇에 잡아먹히는 건지를 봐라.
거북이가 모래에 많은 알을 낳아도 살아남는 것은 몇 마리가 안 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미 거북이로서는 거북이 새끼가 많이 살아남는 것을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새끼가 대부분 살아남지 못한다고 해서 어미 거북이가 ‘에이, 이제는 알을 안 낳겠다’ 라고 한다면 그나마도 남는 자식이 있겠느냐? 다시 말하면 자식이 부모의 교육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다고 해서 그대로 놔둔다면 그 자식은 마귀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후손에게서 왕이 많이 나오는 것도 좋은데 왕으로서 그만한 실력을 닦게 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뭔가 좋은 것을 물려받지 못하면 그 자식이 시집장가를 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점점 미궁으로 빠지고 더 안 좋아지는 거다. 이게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는 현상이다. 이 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점점 내려가면서 점차적으로 되어지는 거다. 교회의 인도자 입장에서 볼 때 아래로 내려갈수록 안 좋은 것이 내려가는 일에 자신이 마치 사다리의 발판 하나를 딛게 하는 것고 같은 역할을 했다면 기가 막힌 거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이걸 느낄까?
집안에 내력이 있듯이 신앙에도 그런 게 있는 거다. 그래서 자기에게서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180도로 바꿔야 한다. 먼저는 정신 면을 하나님의 속성으로 바꾸고, 그 다음에는 상황에 따라 방편성을 달리하면서 바꿔나가야 한다. 이 일은 한꺼번에 확 되는 게 아니라 서서히 되어지는 거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을 할 때는 상대가 내 마음 같지 않은 것이라서 한꺼번에 확 바꿀 수 없는 거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한 것처럼 하라고 강요를 하게 되면 억압 강압이 돼서 안 된다. 내 자식이라도 내 마음 같은 게 아니다. 억압 강압적으로, 공갈 협박적으로는 안 된다. 하물며 상대의 마음을 자기 마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을 해서 강압적으로 하려고 하면 도리어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학생이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안 듣고 공부도 못하고 말썽만 부린다면 이게 날 때부터 그런 거냐? 가정적으로 보면 부모의 성격 성질에 영향을 받은 거다. 학교에서 바로 가르쳐도 집에 돌아가면 부모가 막 돼먹은 짓을 하면 그 자식은 학교에서 배운 게 소용이 없게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사가 비뚤어져 놓으면 교인들도 같이 비뚤어진다. 이렇게 되면 우리 입장에서 이룰구원 면으로 보면 그 교회는 끝난 거다.
17절: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소리를 내서 깔깔 웃는 웃음이 아닐 거다.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어떤 사람이 들어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여자가 백세가 되었으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세상인간들에게 다 물어도 자식을 못 낳는다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도 인간들과 같은 생각을 하실까?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
그러면 구십 세에 자식을 낳으면 이게 흉볼 일이냐? 기뻐할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늙어서 무슨 주책이냐?’ 라고 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구십 세에 아기를 낳으면 그 어머니는 아기를 기르느라 치매에 안 걸릴 것 같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이상하게 아기가 귀엽고 사랑스럽다.
결혼을 하고 구원을 이뤄가는 게 좋겠느냐, 결혼을 안 하고 구원을 이뤄가는 게 좋겠느냐? 결혼을 안 하고 구원을 이루려면 사도바울처럼 되어야 한다. 그만한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목회자는 가정을 가지라고 한다. 안 가지면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특히 여자 청년들이 문제가 된다. 어느 교회는 목사가 장가를 안 가놓으니까 처녀들이 서로 붙어서 목사님의 빨래를 해 준다는데, 처녀들이 많다보니 서로 목사님의 빨래를 하겠다고 얼마나 싸우겠느냐? 성경대로 결혼을 하고 목회를 하면 편할 텐데 왜 그런 일을 만드느냐 그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가정을 가지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18절: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믿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의 말이다. 여자는 경수가 없으면 생산을 못한다. 생명력이 없으면 생산을 못한다. 그러니 사라는 분명히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닌데도 하나님께서는 늙은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 첫째는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시니까 못하실 게 있겠느냐? 또 하나는 우리의 이룰구원 면으로 이 말씀을 보면 100% 맞는 말이다. 이런 경우는 영적인 면이 된다. 여러분들이 늙어서 할머니가 되어도 그 마음에 진리 생명력이 있으면 영적인 자녀를 생산할 수 있다. 교훈적 자녀를 키울 수 있다. 생명력이 있는 자녀로 성장시킬 수 있다.
디모데가 외조모 로이스의 신앙을 이어받았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니게인데,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라고 한 것을 볼 때 디모데의 외조모가 유니게에게 신앙교훈을 물려준 것을 디모데가 이어받았기 때문에 마치 외조모 로이스가 디모데를 낳은 것처럼 말이 되어진 거다. 디모데가 신앙교훈을 받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왜 디모데를 부르겠으며, 왜 쓰시겠느냐? 하나님은 언제나 영적인 면을 주격으로 보는 분이다.
19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삭과도 언약을 세우겠다고 한다.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 영원한 언약 속에는 족보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다. 이 언약을 영원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 세상에서 변질이 없고 변치 않음은 물론이고 영원 궁극적인 세계에까지 해당이 된다는 거다.
20절: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찌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이스마엘도 이스라엘과 똑같이 열두 방백을 낳는다고 한다.
21절: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성경을 보면 이삭에게는 언약이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 이스마엘에게는 언약이라는 말이 없는 것 같다.
훗날에 보면 하갈은 상징적으로 율법이라고 말을 하는데, 율법은 껍데기 표면이다. 그러니까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열두 방백을 낳게 되지만 시내산, 즉 율법을 상징하고, 이삭도 열두 방백의 자녀를 낳는데, 생명적 계대, 즉 예수로 되어 나온다. 현실에서도 보면 제도로써 된 교회가 있는가 하면 제도가 아닌 생명적으로 된 교회가 있다.
우리교회가 지금까지 시내산의 노선을 탔다면 우리교회는 제도와 조직위주의 정신이다. 그러나 생명적 계대를 타게 되면 제도중심이 아닌 영적 정신적인 면으로 나가게 된다. 여러분들이 이런 걸 몰랐을 때는 교회에서 자기에게 뭔가 잘 해 주면 은혜롭다고 하겠지만 이제 알았다면 생명계대의 교회를 찾아서 그런 교회에 나가야 한다.
약속으로 된 생명계대가 아닌 것은 전부 제도로 된 거다. 제도로 된 것은 시내산의 사상이다. 이런 제도계통에는 생명이 없다. 생명이 생명을 낳는 거다. 그래서 교회를 잘 선택해야 한다. 과거에는 몰라서 아무 교회나 다녔지만 이제는 속지 말아야 한다.
22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세상물질을 만드신 분은 물질세계의 시간에 지역에 속하지 않고 초월하는 분이다.
23절: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이때까지 양피를 안 베었던 모양이다. 혹시 여러분들의 남편이 양피를 안 베었으면 병원에 가서 베도록 하라. 믿던 안 믿던 양피를 베어야 한다. 안 그러면 신체상 자녀들이 깨끗지 못한 자녀가 나올 수 있다. 가급적이면 어릴 때 베어야지 성인이 되어서 베면 그만큼 고통이 심하다.
그러면 양피를 베라는 것이 고통을 주고 일도 못하게 하려는 거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미래적으로 좋도록 하시는 거냐? 후자다. 하나의 상징적인 것으로서 신체 이전에 정신적인 면에 강조가 들어있는 거다. 즉 영적인 면에 할례를 하라는 거다. 영적인 면의 할례란 정신 사상이 말씀으로 거듭나고 안 나고 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자랄 때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을 생각해 보면 부부간에 통 대화가 없었다. 월급을 타거나 돈을 벌어오면 쌀을 사고 살림을 살고 할 뿐 부부로서의 대화가 없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여성으로서 원하는 것을 남편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남자는 바람을 피워도 괜찮고, 여자는 죽어서 살아야 하고 이런 식이다. 그러니 그게 사는 거겠느냐?
부부라면 필요한 대로 부족한 대로 서로 의논이 되고 만족을 얻어야 하는데 지금은 막돼먹은 부부가 많아서 각자가 다른 곳에 가서 풀려고 한다. 이건 망할 집안이다. 선악과 따먹은 세계가 이 모양이 돼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진리를 받는 목사님 중에도 이런 일이 많이 있다는 거다. 남편과 아내만이 통하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없이 부부가 물과 기름과 같아서 늘 대립이다. 이건 진리 이전에 기본부터 잘못된 거다. 사람이 인격 대 인격의 기본부터가 잘못된 거다. 이런 상태로는 목회가 안 된다.
부부는 한 몸이니 한 노선으로 가면서 하나님의 일을 놓고 서로 도와야 하는 건데 이건 없이 서로가 왕이 되어서 대립을 한다면 목회자가 일반사람의 수준만도 못한 거다. 부부라는 게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거냐? 이 험난한 세상을 부부가 손잡고 웃으면서 이겨나가야 하는데 진리커녕 일반사람의 수준도 안 된다면 쓰겠느냐? 가정에서는 무엇보다 부부가 의논이 맞아야 험난한 세파를 이겨나갈 수 있다. 가정에서부터 서로 원수가 되어서 네 불뚱 내 불뚱 한다면 어떻게 험난한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겠느냐?
24절-25절: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 구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십 삼세이었더라.’ 구십 구세가 되어서 할례를 하려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이 들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늙었어도 하나님 앞에 언약대로 살려면 말씀에 순종을 해야 한다.
26절-27절: ‘당일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어떻게 들어왔던 아브라함의 집에 사는 사람은 다 할례를 받았다. 하나님 앞에 바로 하는 거,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는 정신 사상은 믿는 사람이라면 다 가져야 한다.
믿는 사람의 집에서 하나님 앞에 바로 하고자 하는 게 없다면 이 사람은 불신자들보다도 더 악한 거다. 이런 면에서 특히 우리 목사님들과 사모님들 모두가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지 못한 목회자라면 그 정신 바탕부터가 거듭나야 만이 그 마음 속에 진리가 들어가게 되고, 그래야 하나님 앞에 목회자로서 쓰임이 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