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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복 있는 사람
(시1:1~6) 찬송 ; 236장.
2010. 2. 1. 새벽설교
오늘 본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바로 정의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남이 볼 때는 행복해 보이는데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불행해 보이는데도 자신은 행복에 넘쳐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행복한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불행에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산더미 같은 불행의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강철회사로 유명한 카네기는 말하기를 “행복이란 외계의 정황에 따라 결정되기보다는 마음의 상태여하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첫째,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은 지혜로운 삶을 선택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인생을 나쁜 꾀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진실과 성실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꾀에는 악한 꾀가 있고 선한 꾀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꾀는 악하게 사용되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시편10:2절 말씀을 보면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라고 했고, 잠15:26절에서도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도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꾀는 인생을 사는 악한 방법과 수단을 의미합니다. 머지않아 우리는 줄을 서게 될 것입니다. 악한 꾀를 좇아 산 사람들이 서는 줄이 있고, 선을 좇아 산 의인의 줄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줄에 서야 할까요?
둘째,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인의 길은 멸망의 길입니다. 심판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서 있는 사람을 절대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죄인의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것은 회개를 통한 새 사람으로의 전환을 가리킵니다. 그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본문 1절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성경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교만한 사람이나 성읍은 한결같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교만하다 쫓겨나고 그의 왕조가 끝났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벨사살 왕도 교만하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교만가운데 가장 무서운 교만은 무신론입니다. 시편10:4절에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16:18절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하며, 약4:6절에서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것이 참 행복임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넷째,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이 그 말씀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라면 그 말씀을 즐거워하고 아침저녁으로 묵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야입니다. 주야는 낮과 밤을 이야기하지요? 그러면 낮은 무엇을 말합니까? 밝고 형통하고 즐거울 때를 가리킵니다. 밤은 어둡고 슬프고 실패할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환경을 초월하여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본문에서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본문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누리는 행복은 무엇일까요?
본문 3절에 보면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통이란 막힘이 없는 삶을 말한다. 본문은 형통한 삶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나무. 이것이 형통한 자의 모습입니다.
본문 시1:6절 말씀을 보면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한 삶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입니다. 가장 행복한 일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시는 일과 살아가시는 삶은 하나님이 인정하실만 합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러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2강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
(시2:1-6) 찬송 ; 335장.
2010. 2. 2. 새벽설교
본 시편 말씀은 그리스도가 최고의 왕으로서 이 세상을 궁극적으로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군왕들과 관원들이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허사가 될 뿐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서 열방을 지배하고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본 시편의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1. 그러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첫째, 열방과 민족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방”과 “민족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받은 소수의 백성들을 제외한 모든 국가와 민족들을 뜻합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했습니다. 다른 종교들과 무신론자들이 민족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해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현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서 성공한 나라나 민족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역사가 증거 하는 진리입니다.
둘째, 군왕과 관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군왕”은 나라의 통치자를 말하고, “관원”은 군왕 아래에 있는 권력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모두 이교와 무신론자들을 대표하는 이 세상의 세력들을 의미합니다.
셋째, 불신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미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성령님을 거역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직간접적으로 대적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지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은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속을 벗어버리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얽매이고 구속당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 예속되지 아니하면 다른 것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예속되는 것은 오히려 자유하게 되는 예속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기를 고집할 때 세상의 영원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참 자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에게는 언제나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 자유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역설적인 것이었습니다. 죽음으로써 사는 것입니다. 버림으로써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속됨으로써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태도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분노하며(1절), 정책적으로 서로 연합하여 대적합니다(2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 군왕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세상 권세로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지 아니하시면 그들의 권력도 물거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허용하실 때에만 인간 권력과 권세는 가능한 것입니다(사울의 왕권).
인간이 영원히 섬겨야 할 참된 권위는 시온 산에 세움 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권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8:16절 이하에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와 연합된 우리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아멘.
제3강
메시야의 통치
(시2:7-12) 찬송 ; 377장
2010. 2. 3. 새벽설교
어제 아침에는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대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군왕과 관원들입니다. 그들은 통치자로서 군림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나 어떤 대상으로부터 통치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헤롯 왕).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온 우주의 최고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이 세상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준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 시편 저자는 이 말씀에서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의 의미.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창조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본문에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는 문구가 있습니다만 이 말씀의 본뜻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행사하셨던 통치권과 기업의 소유권을 메시야에게 위탁, 위임하셨음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야는 하나님이 세우신 기업의 주인이시며, 온 우주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통치자이십니다(8절).
2. 메시야의 3중직.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시기 위하여 세 직종의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어 세웠습니다. 즉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입니다.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들은 기름부음을 받아 그들에게 부여된 고유의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장, 선지자, 왕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직능을 예표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을 통해서 이 삼중직을 감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께서는 메시야가 왕의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철장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 말씀에 보면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의 사랑을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것이 메시야의 한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는 악인들에 대해서는 철장 권세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그 메시야 앞에서 질그릇과 같이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진정한 복과 극한 저주는 이 메시야에 대한 이생의 순종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 이하에서는 열왕들을 향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열왕들에 대한 경고.
열왕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한 마디로 지혜롭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 지혜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둘째, 메시야에게 입 맞추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종으로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메시야에게 굴복하고 그를 섬기는 길만이 무서운 진노에서 벗어나는 길일뿐만 아니라 복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참된 지혜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멘.
제4강
우리가 믿는 하나님
(시3:1-8) 446장.
2010. 2. 4. 새벽설교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 당하는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좌절감을 느끼거나 혹은 포기하거나 낙심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다윗 왕이 우리가 상상키 어려운 고통을 당하면서 기록한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여유가 있는 왕의 품위를 보였습니다.
그러면 그것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요? 왕이란 체면이 가져다 준 것입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아직도 많은 군사가 자기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그것도 한 가닥의 희망은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윗 왕이 하나님을 믿었으며 자기가 당한 모든 어려움을 그 하나님께 모두 맡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은 우리가 믿던 하나님의 절대성을 의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항상 믿고 있다면 환난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그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평안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믿고 의지했던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하나님을 의지했기에 그 환난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었겠습니까?
1.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 4절 말씀에 “내가 나의 목소리를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부르짖었다는 것은 간절한 기도를 말합니다. 다윗은 많은 반역하는 원수들의 떠드는 비방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도리어 소리 높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사탄 마귀는 우리가 빨리 좌절하고 포기하는 소릴 듣기 원합니다. 우리 입에서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젠 틀렸다. 이젠 망했구나! 이젠 안 된다 하는 절망의 소리가 나오기를 마귀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에 처할수록 더욱 열심히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시34:4, 시50:15,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소경). 우리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 5절 말씀에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격은 시련은 얼마나 컸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그런 핍박과 환난이 많은데도 근심하지 않고 평안히 잠자고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안히 잠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천만 사람이 원수가 되어 그를 해친다 해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리고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127:2의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하는 말씀대로 그는 평안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시4:8, 시16:8).
3.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 7절 말씀에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원수를 갚으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에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원수 갚으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 다윗은 그 아들로 인하여 얼마나 슬퍼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자기의 처지를 슬퍼한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의 반역이 승리하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께 심판 받을 것을 알고 슬퍼한 것입니다. 다윗은 시23:5에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신다.”고 했습니다. 시59:10절 말씀에서도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세상이 일시적으로 잘 되어 나가는 것을 부러워 마시기 바랍니다. 시6:10절 말씀에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서 물러 가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시9:3절에서는 “원수들이 주 앞에서 망하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 줄 알고 믿으십니까? 우리가 처한 세상은 환난의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으로, 또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그리고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다윗이 믿었던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 어려운 환난 가운데서도 평안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도 평안을 얻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제5강
고난 중에도 기뻐하라
(시4:1-8) 찬송 ; 409장.
2010 2. 5. 새벽설교.
본 시편 말씀은 다윗이 자신의 생애 속에서 경험한, 즉 고난 중의 기쁨을 노래한 시입니다. 본 시편의 배경에 대해서는 대표되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추적할 때를 배경으로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또 하나는 시편 3편과 마찬가지로 다윗이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후자가 지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고통 중에서도 기뻐하고 평안히 잠들 수 있다는 역설적인 교훈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1. 악한 인생들에 대한 경고(1~5).
인간은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곳을 빠져 나와야겠다는 생각에 불의와 타협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용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비굴하게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불의와 타협하지 말 것을 교훈 하십니다. 지금 다윗이 처한 형편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압살롬의 군사들에 의해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아주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반역하는 것은 허사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당장에 중지하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2절). 그러면서 사악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풍전등화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도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진리 편에 서 있는 자를 오른 손으로 붙드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3절).
2. 주님께서 주신 기쁨과 평안(6~8).
인간의 추구하는 가치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은 이 두 가지를 비교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아멘.
대조되는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내면에 속한 심령의 기쁨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다윗은 물질적인 풍요로움 보다 내면에 있는 심령의 기쁨을 더 귀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이처럼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서도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의 심령 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도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신앙이 그를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삶으로 살게 했습니다(8절).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과 고통에 대처하는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가운데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평안히 눕게 하시고 안전히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제6강
하나님이여 나의 간구를 들으소서
(시5:1~12) 찬송 ; 337장.
2010. 2. 6. 새벽설교.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그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 상담할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고 또 큰 힘이 됩니다. 더구나 우리의 문제를 듣고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상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근심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오늘 본문 역시 다윗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간구하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사 자신의 심사를 통촉해 주시라고 말문을 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그렇게 인정하십니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가장 행복한 사람들일까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은 그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1. 자신의 심정을 기도로서 호소하는 다윗(1~3절).
그러면 다윗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을까요? 본문 1~3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진실하고도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유형은 다양합니다. 통성기도, 묵상기도(무언의 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산기도 등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하고 간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진실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드려지는 기도였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가를 발견할 수 있는데 다윗은 하나님을 가리켜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하는 우리들은 그리고 그 기도가 응답되기를 원하는 우리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2. 주의 집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는 다윗(4~7절).
성도의 소원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값진 것은 없습니다. 옛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부모님에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집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죄인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의 때문입니까? 우리가 가진 재물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지식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롭다고 주장할지라도 우리의 의는 낡은 옷과 같고 온갖 때로 얼룩진 걸레와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풍성한 인자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늘 본문 7절 말씀에서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셔서 악이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으며 악인이 주의 목전에 설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에게 있어서 한 가닥 소망은 무엇입니까? 오직 주님의 인자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였던 것입니다(시23:1).
본문 8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악한 무리들로부터 구원받기를 간구하며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대하여 확신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의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기도로 응답하십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의 풍성한 응답으로 채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제7강
하나님의 징계와 긍휼
(시6:1~10) 찬송 ; 338장.
2010. 2. 7. 새벽설교
시편 6편은 7개의 회개시(6, 32, 38, 51, 102, 130, 143)중에서 첫 번째 것입니다. 시편6편 1~7절까지 주로 하나님 앞에서 깊이 통회하는 내용들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특별한 제목을 가지고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공의대로 자신을 심판하지 말아달라는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8절부터는 통회하는 마음이 변하여 믿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너무 인본주의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나오는 신음소리가 차츰차츰 교회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만족이 있는가 또는 없는가가 중요하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때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침해되었기 때문에 무서움에 떨고 몸부림치는 것은 비현대적 개념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성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격을 무너뜨리는 징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때 반드시 기쁘고 행복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면 죄가 죄로 드러나고 불의가 불의로 나타나고 징계가 필요한 곳에 징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찌할꼬.” 하는 통회가 반드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1. 애통 중에 부르짖음(1~7).
첫째, 심한 두려움과 연약함(2~3).
이 구절은 본 시편을 기록하고 있는 다윗의 온 인격이 연약하고 두려움이 싸여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하나님을 친구처럼 너무 가볍게 대합니다. 그래서 전능자에 대한,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무례를 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엄위와 징계의 손길 앞에서 심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만 아니라, 동시에 거룩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옳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데서부터 오는 슬픔(5~7).
다윗은 자신이 받은 징계로 말미암아, 사망, 곧 음부에 내려갈 때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감사가 없을 것에 대하여 심히 슬퍼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으면서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그날그날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매우 불행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런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며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이런 때에는 스스로 자신을 도울 수 없으며, 좋은 충고도 효력이 없습니다. 기도도 메마르고, 기쁨은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가 범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노로 다스리려고 하실 때에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역설적인 말 같지만 그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의 마음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입을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데도 이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2. 되찾은 확신(8~10).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과 사탄에게 정죄를 받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파괴시킬 목적으로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런 공격은 우리가 보혈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물리치시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징계는 그 동기가 구속적인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그처럼 아프고, 두렵고, 떨리다가도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용서하셨다는 확신이 생기면 갑작스러운 변화가 오게 됩니다.
첫째는,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본문 8~9절 말씀에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의 죄를 용서하셨고, 하나님의 징계가 끝났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연약한 마음과 두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동안에는 그렇게 어둡게만 보이던 것들이 갑자기 환하게 보이게 됩니다.
둘째로, 승리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본문 10절 말씀에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실제로 원수들이 가까이 있었는지, 혹은 심리적으로 그렇게 느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 주셨고 원수를 물리치신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는 시편 6편에 나오는 것과 같은 신음을 더욱더 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교역자도, 평신도도, 누구든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의 매를 맞고 우리가 싸맴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더 큰 위험에서 건짐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호세아는 호6:1-3절 말씀에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이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멘.
제8강
공의의 심판을 신뢰하는 기도
(시7:1~17) 찬송 ; 321장.
2010. 2. 8. 새벽설교
애매하게 괴로움을 당하는 경우는 비단 현대 사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시편 기자의 때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애매하게 중상모략을 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써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을 주는 상황을 하나님께 의뢰함으로 그 실마리를 풀었습니다.
1. 하나님의 도우심(1~2).
우리는 종종 이것이 내게는 최악의 경우라고 발버둥칠 때가 있는데 그 때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다윗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쫒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기도를 하는 중 그에게 하나님께로부터 피난처가 벌써 나타났습니다. 히브리어의 시제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암시해 줍니다. 프로운이라는 주석가는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굴이나 바위틈이나 산이나 민첩함 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안전한 피난처에서 그는 자기의 피를 취하려는 원수를 바라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운 환경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그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 사실을 체험했기 때문에 롬8:31절 말씀에서 “그런즉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이기는 능력(3~5).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애매하게 취급을 당할 때 괴로움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도 부당하게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괴로워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프로운은 시편 기자의 반응을 “자신의 정직성을 열렬하게 주장했고, 그의 심령은 격한 감정으로 복받쳤습니다. 그가 자신이 부당하게 공격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격렬한 어조로 이를 항의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이러한 힘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외쳤습니다. 다윗의 이 부르짖음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아무도 내 심정을 알아주지 못해도 전능하신 하나님만큼은 나의 억울함을 알아주실 것이라는 신앙적인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18:1~2)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둘째로, 그는 그의 거룩한 삶에서부터 무고한 정죄를 이기는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마치 네 개의 조건문이 나와 있는 것처럼 쓰여졌으나 히브리어를 보면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세 개의 조건문을 사용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든(아무 이유 없이 나를 원수로 여기는 자를 내가 건지기는 했어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앤더슨이란 주석가는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세 개의 자기 저주의 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이 세 가지 내용이 사실이라면 5절에서 말한 것처럼 완전히 자신을 짓밟고 파괴시켜도 아무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에 그는 감히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5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그가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적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이 악독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공의로운 응징(6~16).
다윗은 범세계적인 공의가 실현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의의 실현은,
첫째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나타납니다(6~11절).
심지어는 의인도 심판을 모면하지 못합니다. 다행히도 의인이 받는 심판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고 구속적인 것입니다(고후5:10, 롬14:10).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8,9절). 다윗은 자신이 정직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공정하게 판단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의인에게는 이와 같이 공의로운 심판이 있기 때문에 커다란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러한 심판 뒤에는 징벌이 따라옵니다(12~16).
회개치 않는 자는 직접 그 자신이 징벌을 받게 됩니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을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12,13절). 여기에는 하나님의 징벌에 대한 결의와 성격이 나와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이미 확정되었고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회개치 않는 자는 허망한 삶을 이 세상에서도 살게 됩니다.
회개치 않는 자는 자기 죄의 결실을 먹고 살게 됩니다(15,16절). 물질적인 차원에서는 악한 자가 언제나 손해를 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악한 자는 항상 자기가 낳은 악으로 망합니다. 자기가 판 웅덩이에 자기가 빠지고 자기가 낳은 해와 악에 자기가 부딪히는 것이 죄인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이와 같은 영적인 법칙을 아는 자는 더 이상 악인의 핍박과 거짓말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의뢰하게 됩니다.
4. 감사와 찬양(7:17).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라는 말씀을 칼빈은 하나님의 미쁘심 때문에 감사한다는 내용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변함없이 공의를 베푸시어 세상은 비록 우리를 애매하게 정죄하고 괴롭혀도 하나님은 늘 공의로 우리를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극히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찬양입니다. 감사하는 이들은 찬양하리로다. 깊은 확신이 없이는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환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깊은 확신을 갖게 되고 따라서 믿음으로써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을 선언합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볼 때 의인이 애매하게 비난을 받거나 고난을 당하게 될 때 비극이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그 고난을 당할 때 적어도 하나님의 도우심, 이기는 능력, 공의로운 응징 그리고 감사와 찬양이 있는데도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신앙심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자랄 것을 믿음의 눈으로 내어다 보고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아멘.
제9강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시8:1~9) 찬송 ; 40장.
2010. 2. 9. 새벽설교
본 시편 8편은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동시에 모든 피조물들 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인격자로서의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감사드리는 시입니다.
본 시편의 말씀은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에 의해서 인간의 영화와 존귀를 찬양하는 구절로 인용되기도 하였습니다(히2:6~8). 또한, 예수님께서는 본편 2절을 마21:16절에서, 바울은 본 시편 6절을 고전15:27절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함(1~2절).
첫째, 하나님께서는 만물 중에 주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1절).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찬송합니다(2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은 지극히 신비로운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제한된 지식으로는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아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청력의 한도는 19~20킬로사이클까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비해서 개는 25킬로사이클, 박쥐는 80킬로사이클, 돌고래는 120킬로사이클까지를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청력의 한도는 후각이나 시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은 미세한 것, 너무 가까운 것, 너무 먼 것도 보지 못합니다. 또한 빨리 움직이는 것도 우리 눈은 식별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엄위하심 앞에 취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겸손한 마음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의 입을 통하여 창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찬송하게 하여 그 권능을 드러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과는 달리 편견이 없어서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배우는 대로 그대로 시인하고 잘 나타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는 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물위에 뛰어난 인간의 존귀를 감사하며 찬송함(3~8절).
본 구절에서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을 가장 탁월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어떻습니까?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온 우주에 비하면 실로 보잘것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최고의 관심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인은 본문 3~4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권고해 주심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5절 말씀에서는 인간을 만물 중에 존귀하게 하여 주셨음을 찬송하고, 6~8절에서는 창조물 들을 다스리게 하셨음을 찬송합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영적 존재는 우리 인간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할 수 있는 영광된 피조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위치입니다.
첫째, 이러한 인간을 권고하셨습니다(4절).
광대하고 방대한 전 우주를 만드시고 움직이시는 바로 그분께서 너무도 미약한 인간을 우주보다도 더 생각하시고 권고하시니 어찌 찬송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표현하고 있는 "사람"이란 말 그 자체가 연약함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사람을 질그릇으로(고후4:7), 베드로는 풀과 같은 것으로(벧전1:24), 야고보는 풀의 꽃과(약1:10~11) 안개(약4:14)같은 것으로, 이사야는 지렁이 같은 것으로(사41:14), 욥은 하루살이에게 눌려 죽을 자(욥4:19)요 구더기 같은 자로(욥25:6) 묘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보잘것없는 인생을 귀하게 생각하시고 관심을 갖고 권고해 주시니 어찌 감사하며 찬송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둘째, 이러한 인간을 존귀하게 해 주셨습니다(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천사에 버금가는 존재로 지으시고 영화와 존귀를 주셔서 귀하게 하셨으니 그 얼마나 감사한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함(9절)
1절의 송영과 똑같은 송영으로 끝나지만 그 의미는 다릅니다. 처음의 송영은 믿음의 소원을 나타내는 것이며, 여기의 마감하는 송영은 구원된 것을 기뻐 찬송하는 송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보호받고 특별한 은총을 누리고 있는 성도라면 우리를 구속하신 그 놀랍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침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로 하나님을 송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광대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연약하고 허물 많은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주의 은혜를 헤아리며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제10강
주 안에 있는 자의 찬양
(시9:1~12) 찬송 ; 464장.
2010. 2. 10. 새벽설교
과거 어느 때보다 현대는 확고부동하고,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런 대상을 누구로 정하는가? 뿐이지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성에 대해, 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9:1~12절은 바로 여호와를 자신의 지주로 택한 자의 찬양입니다. 그의 믿음의 눈에는 여호와가 확고부동한 분으로서 나타났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의 마음이 변하고, 사랑의 철학이 변해도 그분만은 변하지 않고, 일관성을 갖고 우리를 대해 주시는 분으로서 그는 보았습니다. “여호와가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음”(7절)을 그는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본 시편의 저자처럼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십니다(1~2절).
다윗은 본 시편을 통해서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아름다운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놀라운 승리의 결과 중 지극히 적은 일부분이라도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성취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 승리를 가리켜서 “주의 기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1절 말씀에 보면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6절 말씀에서도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고백은 그가 철저하게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음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통치자이십니다(3~8).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의 대상이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통치자이십니다. 통치자에게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통치할 수 있는 능력과 범법했을 때 다스릴 수 있는 재판권입니다. 통치하는데 필요한 능력은 내부의 소요와 외부의 침입을 모두 막을 수 있을 정도의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본문 3절 말씀에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며, 5~6절 말씀에서는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있는 나라는 절대로 전쟁에 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 수표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인 섭리에 따라서 모든 것을 이행하시므로 어떤 때에는 믿는 백성들도 전쟁에서 죽기도 하고 참패도 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일들을 우연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로 수용하였습니다. 압제와 환난에 대해서도 비감한 마음을 갖기 보다는 도리어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의를 베푸실 의지를 가지고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최종적인 공의는 아직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순간, 아니 그 전에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계시하심으로써 공의를 계속 베풀어 오셨습니다. 우리가 단편적으로 사건들을 볼 때에는 하나님께서 공의를 베푸신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가령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무참히 죽인 사건이라든지,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라든가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등을 볼 때에는 공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2,000년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이들 박해자들로 인한 그리스도인들의 순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엄청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독재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었거나 아니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또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하신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9~12).
하나님을 자신의 지주로 삼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찬송의 대상과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실 뿐만 아니라 환난 날에 피할 수 있는 피난처도 되십니다.
첫째, 피할 곳이 어디입니까?
옛날에는 그래도 방공호가 효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투기들이 그렇게 많은 폭격을 가했어도 방공호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켰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좀 다릅니다. 방공호를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와, 파괴가 되지 않아도 오염으로 우리를 죽일 수 있는 방사성 물질과, 세균 폭탄들이 너무 많아 그 어디도 안전한 피난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시간과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 진리는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9절)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잠언 기자는 잠18:10절 말씀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를 구할 분이 누구입니까?
여호와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보호해주실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우리가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분임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0~12절 말씀에서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다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안전케 하시며,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현대인들은 내외적인 여러 가지 요소들로 인하여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편안히 거할 피난처와 온갖 악의 요소들로부터 구원받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의 승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오늘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11강 고난 받는 자의 간구
(시9:13~20) 찬송 ; 484장. 2010. 2. 11. 새벽설교
고난이라든가 환난이라든가 이러한 단어와 삶은 사실상 그 누구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이는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지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고자 했던 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우리 죄를 대속하신 사건을 위시해서 수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통해 인내를 얻고 온전케 되는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5:3~4절 말씀에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난을 받아 본 사람은 역시 고난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과 비교해 볼 때 그 신앙의 차원이 다릅니다. 고난을 경험한 사람은 고난을 모르는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는 신앙의 깊이를 갖고 있는 것을 종종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세상의 산물인 고난을 통해서도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이와 같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2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9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키드너는 말하기를 시편 9편에는 두 개의 클라이막스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고난을 만난 시편 기자가 보인 두 가지 반응이라고 하면서 그 첫째가 1~12절에 나타난 긍정적인 고백과, 둘째는 13~20절에 나타난 것으로 고난 중에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받은 계시로서 고난을 당하는 모든 세대들에게 큰 위로를 받게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고난의 장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먹는 문제로 인한 고난, 질병으로 인한 고난, 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유만으로 당하는 고난, 이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고난들이 우리 앞에 산적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1. 고난 중에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기 때문입니다(13~14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때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감동 때문에 기도가 쉽게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감정도 메마르고,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에 아무런 소망도 없을 때, 또는 문제가 자꾸 누적될 때에 기도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고난당하는 자에게 있어서 기도가 그렇게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우 우리는 기도를 가장 멀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두 가지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기자는 9편1~12절에서 적을 물리친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 적들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아직도 무서운 적들이 사방에 남아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산 넘어 산이 있는 것처럼 좌절될 수도 있었으나, 그는 이미 자신이 체험한 바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구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긍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지만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도 긍휼 때문입니다. 그 긍휼만이 우리를 사망의 문에서 시온의 문으로 옮겨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8:17절에서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고난이 없으나 영광도 없는 것과, 비록 때때로 의롭게 사는 것 때문에 고난이 있을 수 있으나 영광도 함께 있는 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2.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는 이를 위해 공의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15~18).
본문 15~18절 말씀에 보면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게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가르침에 모순되는 것 같은 느낌을 쉽게 받게 됩니다. 얼핏 보면 악담 같기도 하고 저주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윗이 그의 대적들에 대하여 독한 말로써 정죄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악의에 찬 인간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국가나 사회에 대해 심판하십니다(15-17절).
둘째, 하나님께서는 선의의 희생자들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십니다(18절).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고난을 갖다 주는 권력자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이와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약자 같고 가난하게 보이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살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득세를 영원히 방관만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19~20).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일어나사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본문 19~20절 말씀에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적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일어나시면 최소한도 다음 몇 가지를 하실 것입니다. 첫째로,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십니다. 둘째로, 인생으로 인간뿐인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고난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중에도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처지를 더 잘 아시므로 우리가 감당할 고난밖에 허락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또 고난 받는 동안에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멘.
제12강
악인의 심판을 호소하는 간구
(시10:1-18) 찬송 :
2010. 2. 12. 새벽설교
악인이 형통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개탄하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을 간구하는 본 시편은 앞의 9편 말씀과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 시편은 하나님의 공의가 멸시당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
세상이 험악해지고 불법이 난무해질수록, 그리고 악인들이 형통하고 번창할수록 신앙인들 마음속에는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당할수록 왜 하나님이 침묵만 하고 계시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인생들이 3절에는 마음의 소욕으로 자랑하며, 탐심을 내고,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사상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신론으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중대한 뜻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성도들을 훈련시키시고 연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약1:2~4절 말씀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약1:12절에서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궁극적으로는 악한 자를 꺾으십니다(15).
악한 자는 그 혀로 저주, 궤휼, 포학, 잔해, 죄악을 일삼고(7절),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함정을 팝니다(8~10). 또 이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큰소리칩니다(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14). 그리고는 때가되면, 악한 자들을 반드시 꺾으시고 마는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시는 것은 악한 자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회개의 기회 가 지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심판으로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동안에 우리 성도는 불신자의 처절한 상태를 바라보고, 저들을 건지기 위해 기도하며, 복음을 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 고난당하는 자와의 관계.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첫째, 성도를 끝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1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때 벌써 모든 것을 다 책임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영원한 왕이 되심을 알게 됩니다(16).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데 그냥 도움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열쇠를 주셨다는 것은 자물쇠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을 보관해 놓은 축복의 창고는 마귀가 건드리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잠궈져 있습니다. 이것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오직 성도뿐입니다. 그것도 오직 기도의 열쇠로만 그 축복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성도는 기도의 특권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예수 이름을 사용해야 됩니다. 이 예수 이름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바로 부를 때 역사합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꼭 깨달아야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 뒤에 있는 어마어마한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신자들이 거의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다니고 있습니다. 교회를 안다닐 수는 없고, 다니기는 다니는데, 엉뚱한 것을 붙잡고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 예수 이름을 잘 깨닫고 그 이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성도는 현실을 넘어서 초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육안(肉眼)만을 사용하는 삶에서 지안(知眼)과 영안(靈眼)을 다 활용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이 편치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부조리한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갈등에 휩싸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부조리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훈련과 연단을 받게 하는 계기가 되어 성숙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고는 악의 요소들을 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기도라고 하는 특권을 활용하게 하시므로 은혜를 체험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