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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 병서 墓誌銘 幷序
유심춘柳尋春
금상 16년(1816, 순조16) 병자 6월 갑인일에 입재(立齋) 선생이 우산(愚山)의 산수헌(山水軒)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기축년(1819) 가을에 선생의 장남 정상진(鄭象晉)이 선생의 묘지명을 지어 달라고 나에게 부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묘에 지(誌)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건대, 그 옛날 우리 선인(先人)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하던 분들 중에 집사께서 친하고 또 오래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부탁드립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식견이 얕아 아는 것이 없으니 이른바 “이천(伊川)의 얼굴을 보았지마는, 이천의 마음을 얻지는 못하였다.”라는 자이니, 어찌 이 부탁을 감당하겠는가. 그래서 조심스럽게 여러 번 사양하였지만 받아 주지 않았기에, 삼가 행장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차례하여 쓴다.
선생은 휘가 종로(宗魯), 자는 사앙(士仰), 성은 정씨(鄭氏)로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진양 정씨는 고려조에 휘 택(澤)이 있으니, 상주 지사(尙州知事)를 역임하였고, 아들 한 명을 그대로 상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여러 대를 전하여 휘 경세(經世)에 이르렀으니, 관직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며 호는 우복(愚伏)으로,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백세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이분이 휘 심(杺)을 낳으니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 벼슬을 하였다. 심이 휘 도응(道應)을 낳으니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관직은 자의(諮議)를 지냈다. 도응이 휘 석교(錫僑)를 낳으니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관직은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선생에게 증조(曾祖)가 된다. 조(祖)는 휘가 주원(胄源)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고(考)는 휘가 인모(仁模)이고, 비(妣)는 부림 홍씨(缶林洪氏)이니 목재(木齋) 선생 홍여하(洪汝河)의 증손녀이고 진사 홍익귀(洪益龜)의 따님이다.
선생은 원릉(元陵) 무오년(1738, 영조14) 11월 13일에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모부인이 꿈에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이 성대한 위의(威儀)의 모습으로 문에 다다른 것을 보고 꿈에서 깨어나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릴 때 특별한 자질을 지녔고, 총명하고 영특하며 단정하고 빼어났다. 글을 읽고 암송함에 가르치고 감독함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겨우 성동(成童 15세)의 나이에 이미 학문에 뜻을 두고 손수 《소학(小學)》을 베껴서 항상 소매에 넣어 다니면서 보았다. 경서와 사서(史書)를 두루 읽었고, 간간이 자못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국어(國語)》, 《사기(史記)》, 《한서(漢書)》와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등 제가(諸家)의 글을 두루 보았다.
문장을 지음에는 간결하고 심오하며 전아하고 법도가 있었다. 하루는 탄식하며, “문장 짓는 것은 작은 기예일 뿐이니, 도(道)에서 이미 멀어진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곧 날마다 사서(四書)와 《심경(心經)》 및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글을 가져다가 깊이 젖고 푹 잠기어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연구하여, 터득하지 못하면 놓지 않았다. 한결같이 회암(晦庵 주희(朱熹))과 퇴도(退陶 퇴계(退溪) 이황(李滉))를 준칙으로 삼았으니, 거경궁리(居敬竆理)의 공부에 날마다 나아가 그치지 않고 공부하였다. 이윽고 호상(湖上)에 있는 대산(大山) 이 선생(李先生)을 뵙고 학문하는 큰 요체를 물었다. 일찍이 백불암(百弗菴) 최공(崔公), 남야(南野) 박공(朴公)의 도의(道義)와 풍범(風範)을 사모하여,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간간이 당시의 여러 어진 이들과 더불어 종유하며 강론하고 절차탁마하여 더 도움을 받았다. 자연 속에서 수양하고 고요히 지내면서 글을 읽고 도(道)를 강론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없었다. 일상생활에서 실천함은 평이하고 성실하며 도탑고 독실하였다. 오직 내 분수에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효우(孝友)는 신명(神明)에 통할 수 있었고, 교범(敎範)은 규문(閨門)에 절로 시행되었으며, 종족과 향당에 처함과 인(人)과 물(物)을 접함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도(道)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마음에 터득하여 몸으로 체현한 것이 순일하였다.
정조 기유년(1789, 정조13)에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선생은 곧 선조의 음덕으로 된 것이라 자처하고, 이윽고 사은숙배하였다.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초수(超授 등급을 뛰어 넘어 제수함)됨에 임금께서 인대(引對)하여 조용히 하문하셨으니, 특별한 은전이었다. 선생은 송구스러워 감당하지 못해서 곧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출처(出處)로써 묻는 사람이 있으면, 선생은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의(義)가 다만 이와 같이 해야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병진년(1796)에 주상께서 경연(經筵)에 든 신하에게 물으시어, “정 모(鄭某)의 행의(行誼)와 문학(文學)에 대해 내가 익히 들었거늘, 하물며 이 사람은 곧 문장(文莊)의 사손(嗣孫)임에랴.”라고 말씀하시고, 이에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하였다. 이윽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하고, 특별히 유시를 내려 서둘러 올라오도록 하였다. 선생은 어버이는 늙고 자신은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 소장을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임금께서 비답을 내려 “집안과 인물이 영남 지방에서 명망이 있기에 전석(前席)에 불러다가 그 보존한 바를 물어보고자 하는데, 그대는 어찌 이리도 지나치게 사양하는가.”라고 하고, 이어서 문장공(文莊公)의 사당에 치제(致祭)를 하도록 명하셨다.
정사년(1797) 6월에 외직으로 나가 강령 현감(康翎縣監)에 보임하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선생은 어머니의 나이가 80여 세라는 이유로 나라의 법령에 의거하여 사직하였다. 곧바로 대신(大臣)이 연석(筵席)에서 품의함으로써 함창 현감(咸昌縣監)으로 바꾸어 어머니를 봉양하기에 편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임금의 특별한 은전에 감격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관직에 나아갔다. 잔을 받들어 축수를 올리고, 고을의 기로(耆老)들을 모아 술자리를 마련하고 음악을 연주하여 기뻐하며 드시도록 하였으며, 임호서원(臨湖書院)에서 향음례(鄕飮禮)를 마련하니, 함창현의 인사(人士)들이 보고서 감동하였다.
당시에 심한 가뭄을 만났는데, 선생은 몸소 재해로 손상된 상태를 살펴 감영(監營)에 보고함에 반드시 그 실수(實數)를 기준으로 하였다. 백성들에게는 정밀히 하고 아전들에게는 대충하였던 적곡(糴糓)을 각각 저축하고 각각 조곡(糶穀)하도록 하였고, 호군(犒軍)을 점검하는 것에 이르러서도 모두 방편을 두니, 백성들이 소란스럽지 않아 일이 제대로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두창(痘瘡)이 나돈다는 이유로 곧 사직서를 올리고 돌아왔다. 대개 관직에 오래 있는 것은 본래의 뜻이 아니어서였다. 돌아올 때 짐 꾸러미가 단출하였고, 관의 창고는 부임할 때와 같았으니, 후임자가 탄복하며 군자(君子)다운 사람이라 하였다고 한다.
무오년(1798)에 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경신년(1800)에 정조께서 승하하셨다. 당시에 선생은 바야흐로 복중(服中)에 있었기에 분상(奔喪)을 할 수 없어서 매양 초하루 보름 때는 북쪽을 향해 곡(哭)을 하였고, 삼 년 동안 여상(如喪)의 애통함을 다하였다. 신유년(1801, 순조1)에 상복을 벗었다. 당저(當宁) 무진년(1808)에 장령(掌令)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체직되었다.
선생은 일찍이 나이가 상유(桑楡)에 가깝도록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던 것을 지극히 한스럽게 여겼었다. 임신년(1812)에 힘써 군덕(君德)을 진보함에 대하여 상소하려 했던 것이 있는데, 거기에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절제하여 수명(壽命)을 양생함”, “기거(起居)를 삼가하여 위의(威儀)를 무겁게 함”, “학문(學問)을 돈독히 하여 지식과 견해를 넓힘”, “중용(中庸)을 말미암아 실천을 도타이 함”, “정신(精神)을 면려하여 정리(政理)를 살핌”, “치우치고 사사로움을 제거하여 공공(公共)을 보임”, “출척(黜陟)을 분명히 하여 사(邪)와 정(正)을 분별함”, “엄체(淹滯)된 인물을 진작시켜 어질고 재주 있는 이를 수용함”, “억울함을 풀어 주어 온화한 기운을 불러일으킴”, “임금의 결단을 넓히어 조정의 대권을 총괄함”이라고 하였다. 정성스럽게 쓴 수천 언어가 모두 선(善)을 아뢰어 간언을 받아들이라는 지극한 뜻으로, 체용(體用)이 모두 갖추어지고 짜임이 주밀하였으니 당시 급한 시무(時務)에 대개 깊이 관심을 가졌던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미처 올리지는 못하였다.
선생은 나이와 덕이 모두 높고 명망과 실상이 날로 융성함에 옷을 거머쥐고 가르침을 청하는 선비가 먼 거리를 멀다 하지 않고 오자, 재주에 따라 가르쳐 주면서 각각 그 방도를 다하였다. 매양 장횡거(張橫渠)의 “서면 반드시 함께 서고, 이루면 홀로 이루지 않는다.”라는 말을 첫 번째의 의(義)로 삼았다. 수계사(修稧社)를 두어 매양 봄가을에 강좌를 마련하였는데, 먼저 《대학장구》를 강독하고 다음으로 《논어》를 강독하였고, 《중용장구》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순서를 두어 강독을 하니, 둘러서서 듣는 사람이 백여 명이었는데 감발(感發)하여 흥기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병자년(1816) 5월 20일 감질(感疾)을 앓을 때 선공(先公)의 기일(忌日)을 당하였는데, 자제들이 제사를 주관하지 말고 더욱 조섭하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병이 심한 데는 이르지 않았고, 또 내년의 일을 알 수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몸소 관헌(灌獻)을 행하였는데, 슬퍼하는 모습이 좌우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로부터 병이 점차 심해져서 6월 6일에 손발을 열어 살펴보았고, 죽음에 임박하여 정신과 기운이 좀 안정됨에 힘쓰고 경계하는 뜻을 알려 주고 나서 편안히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9세였다. 8월에 함창현(咸昌縣) 황령산(黃嶺山) 을향(乙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병술년(1826, 순조26)에 상주(尙州) 치소(治所) 서쪽 곡부(曲阜) 임좌(壬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대개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은 나의 선조(先祖) 문충공(文忠公)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니, 참으로 도산(陶山) 재전(再傳)의 적통이 되므로 연원(淵源)의 정맥이 원래 유래가 있었다. 선생은 가정에 전해 오는 서업을 잘 이어받아 도(道)의 오묘함에 묵묵히 계합하였다. 뜻을 세움에는 곧 성현(聖賢)에 이를 수 있는 경지라고 여기고, 경(敬)을 실천함에는 곧 동정(動靜)을 통하여 한결같이 하였으며, 존양(存養)ㆍ성찰(省察)의 요체를 간단(間斷)하는 때가 없이 하면서도 치지(致知)가 학문에 나아가는 바가 된다고 여겼다. 사물(事物)ㆍ궁격(竆格)의 공부에 침잠하고 천인(天人)ㆍ성명(性命)의 오묘함을 발휘함에는, 분석하여 그 정밀함을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었고 통합하여 그 큼[大]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처하는 곳마다 근원을 만났고 깊이 나아가 스스로 터득하였다. 그윽이 홀로 있는 가운데서도 이를 보존하였고, 일상생활에 평상적인 곳에서도 이를 체득하였다. 지(知)와 행(行)이 나란히 진보하고 문로(門路)가 단정하고 알맞았다. 오호라, 어찌 하늘이 사문(斯文)을 도와 무궁하게 후손을 이끌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학자들과 강설(講說)을 할 때는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지 않고, 반드시 남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반복하여 헤아려 보아 논증함이 명백하고 철저해서 가르침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듯이 하도록 하였다. 평생의 논저(論著)가 거의 백여 거질이 되는데, 이치가 분명하고 수사가 잘 전달되어 성대하게 강하(江河)를 틔우듯 하였다. 〈태극동정설(太極動靜說)〉과 ‘칠정(七情)에도 이발(理發)이 있다.’라는 등의 설은 전인(前人)이 발명하지 않았던 것을 발명하였으니 후학들에게 크게 공이 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이 있다고 함은 선생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도(道)가 보존되고 스승이 존재함에, 가까운 곳의 사람들은 기뻐하고 먼 곳의 사람들은 사모하였으니, 인심(人心)을 맑게 하고 세교(世敎)를 부지하도록 한 바가 어떠했겠는가. 아, 성대하도다.
선생의 부인은 이씨(李氏)이니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의 후손 한림(翰林) 수대(遂大)의 손녀이고 학생(學生) 이민현(李民顯)의 따님으로, 능히 군자(君子)의 짝이 되었고 여사(女士)의 행실을 지녔다. 3남 2녀를 낳았다. 장자는 곧 선릉 참봉(宣陵參奉) 상진(象晉)이고, 다음은 후사로 나간 상승(象升)이고, 다음은 역시 후사로 나간 상관(象觀)이며, 딸은 최식(崔湜), 황석로(黃錫老)에게 시집갔다. 상진은 4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민수(民秀), 민충(民衷), 후사로 나간 민병(民秉), 민채(民采)이고, 딸은 강주영(姜胄永), 김재흠(金在欽), 유기목(柳祈睦)에게 시집갔다. 상승은 3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민목(民穆), 민직(民稷), 민직(民稙)이고, 딸은 신학휴(申鶴休), 이돈구(李敦九)에게 시집갔다. 상관의 사자(嗣子)는 민병이고, 딸은 김중수(金重銖), 김약수(金若洙)에게 각각 시집갔다.
나는 선생의 집안과 세교가 있는 집의 후생으로 문하에서 선생을 모셨는데, 선생은 나를 자질(子姪)들과 똑같이 보아주어 가르쳐 줌이 매우 지극하였다. 지금 묘지명을 짓는 일을 함이 매우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알지만 또한 감히 사양하지 못할 점이 있다.
기억해 보건대, 병진년(1796, 정조20) 가을에 대산루(對山樓)에서 선생을 문후하였다. 그때 선생은 바야흐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사양하고, 새벽에 일어나 가묘(家廟)에 참배하고 계셨는데, 가만히 선생의 용모와 행동거지를 엿봄에 풍채가 아주 맑아 희디흰 옥이 서 있는 듯한지라, 중얼거리며 고인(古人)이 이른바 ‘수면앙배(睟面盎背)’라고 한 것이 참으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완연히 어제 같도다. 슬프도다. 비록 도덕(道德)의 환한 빛을 다시 가까이하고 싶지만, 어찌할 수 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선생은 일찍이 안자(顏子 안회(顔回))의 학문을 성인(聖人)의 경지에 가깝다고 여기고, 또 일찍이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타고난 자질을 안자와 비슷하다고 여기고서, 매번 학자들에게 들어 보였고, 퇴도 부자(退陶夫子)에 있어서는 곧 문득 꿈에 뵈었다. 대개 선생의 자질은 이에 서로 부합되는 점이 있고 학문은 의거하는 바가 있었으니, 봄의 화창함처럼 성대하고 산이 서 있는 듯 우뚝하였다. 도(道)를 몸에 쌓고도 스스로 있다고 여기지 않고, 행실을 세상에 높이 행하면서도 스스로 족하다 여기지 않고서, 항상 힘써 행하면서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이것은 선생의 학문이 날마다 고명(高明)한 데 나아가 그 세 부자(夫子)의 도에 깊이 터득한 바가 있었던 이유이다. 곡부(曲阜)의 언덕은 오직 선생이 묻힌 곳이다. 도를 따라 살다가 세상을 마쳤으니 백세토록 더욱 빛나리라.
문인(門人) 풍산(豐山) 류심춘(柳尋春)이 찬술하다.
[주1] 산수헌(山水軒) : 산수정(山水亭)으로, 경북 상주 우복(愚伏) 종가의 사랑채를 가리킨다. 정종로가 거처했던 곳이다.
[주2] 세상을 떠났다 : 원문은 ‘역책(易簀)’으로,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을 가리킨다. 증자(曾子)가 임종(臨終) 때 계손(季孫)에게 받은 대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시중들던 동자가 이를 언급하자, 증자는 자신이 대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깔 수 없다고 하면서 예전에 깔던 자리로 바꾸도록[易簀] 한 다음 세상을 떠난 데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주3] 이천(伊川)의 얼굴을 보았지마는 : 정문(程門)의 제공(諸公)이 이정(二程)을 보고 나서 종종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이 주자(朱子)에게 물으니, 주자가 “저들은 단지 이천의 얼굴만 보았기 때문이다.[彼只見伊川面耳]”라고 답하였다. 《朱子語類 卷101 程子門人》
[주4] 홍여하(洪汝河) : 1620~1674.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이다. 1654년(효종5)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경성 판관,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목재집木齋集》이 있으며, 편서로 《휘찬여사(彙纂麗史)》, 《동사제강(東史提綱)》 등이 있다.
[주5] 거경궁리(居敬竆理) : 거경(居敬)은 내적(內的) 수양 방법으로, 마음을 성찰하여 성실하게 기거동작(起居動作)을 절제하는 것이고, 궁리(窮理)는 외적 수양 방법으로, 널리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해서 정확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주6] 대산(大山) 이 선생(李先生) : 이상정(李象靖, 1711~1781)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이다. 1735년(영조11)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예조 참의, 형조 참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대산집(大山集)》이 있다.
[주7] 백불암(百弗菴) 최공(崔公) : 최흥원(崔興遠, 1705~1786)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초(太初), 호는 백불암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 세자익위사 좌익찬(世子翊衛司左翼贊)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백불암집(百弗菴集)》이 있다.
[주8] 남야(南野) 박공(朴公) : 박손경(朴孫慶, 1713~1782)으로,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효유(孝有), 호는 남야이다. 이상정, 최흥원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추앙받았으며, 저서로는 《남야집(南野集)》이 있다.
[주9] 스승에 대한 예 : 원문은 ‘납배(納拜)’로, 존장(尊丈)이 단정히 앉아서 후진(後進)의 재배(再拜)를 받는 예를 말하는데, 송나라 정이(程頤)가 “납배의 예는, 자기가 존경하는 바가 덕의가 있는 자가 아니면 쉽게 이를 행하지 못한다.[納拜之禮, 非己之所尊敬有德義者, 不可用易.]”라고 한 데서 가져왔다. 《朱子大全 卷37 上黃端明》
[주10] 전석(前席) : 임금이 신하의 이야기를 더 잘 들으려고 앞으로 나와 바짝 다가앉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좌천되어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있다가 일 년 남짓 만에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니, 문제(文帝)가 선실(宣室)에 있다가 그에게 귀신의 본원(本源)에 대해 물었다. 이에 가의가 귀신의 유래와 변화 등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한밤에 이르자 문제가 그 이야기에 빠져서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앞으로 당겨 가의 가까이 다가갔다 한다. 《史記 賈生列傳》
[주11] 어머니 : 원문은 ‘판여(板輿)’로, 노인을 편히 모실 수 있는 푹신한 가마를 말한다. 진(晉)나라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 “모친을 판여에 모시고 가벼운 수레에 태워 드린 다음, 멀리는 궁성을 유람하고 가까이는 집 안 뜰을 소요한다.[太夫人乃御板輿, 升輕軒, 遠覽王畿, 近周家園.]”라는 구절에서 가져왔는데, 여기서는 어머니를 편히 모실 수 있는 의미로 쓰였다.
[주12] 임호서원(臨湖書院) : 경상북도 함창(咸昌)에 건립한 서원이다. 표연말(表沿沫, 1449~1498),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채수(蔡壽, 1449~1515), 권달수(權達手, 1469~1504), 채무일(蔡無逸, 1496~1546)을 배향하였다.
[주13] 적곡(糴糓) : 나라에서 봄철의 춘궁기(春窮期)에 창고의 곡식을 내어 백성들에게 꾸어 주었다가 가을에 돌려받던 일 또는 그 곡식을 말한다.
[주14] 조곡(糶穀) : 환자(還上) 제도는 봄에 각 고을의 사창(社倉)에서 창고에 있는 곡식의 반(半)을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얹어서 받는 것이었는데, 조곡은 봄에 창고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빌려주던 일을 말한다.
[주15] 호군(犒軍) : 군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여 위로하는 것이다.
[주16] 여상(如喪) : 백성들이 마치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임금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 〈순전(舜典)〉에 “제(帝)가 세상을 떠나자 백성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삼년복을 입었고, 음악 소리가 끊어져 천하가 조용해졌다.[帝乃殂落, 百姓如喪考妣三載, 四海遏密八音.]”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17] 당저(當宁) : 저(宁)는 문병(門屛)의 사이로서 금상(今上)과 같은 말로, 《예기》 〈곡례(曲禮)〉에 “천자는 저에 당하여 선다.[天子當宁而立]”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18] 상유(桑楡) : 해가 질 때 햇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 꼭대기에 비치는 것으로, 인생의 말년을 비유하는 말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 제3권에, “해가 서산으로 떨어질 때 햇빛이 나무의 꼭대기에 비치는 것을 상유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주19] 깊이 …… 것 : 원문은 ‘삼치의(三致意)’로, 깊이 마음을 쓴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굴원전(屈原傳)〉에 “군주를 보호하고 나라를 일으키며 그것을 반복하려거든 한편 가운데 깊이 마음을 쓸 것이니라.[其存君興國, 而欲反復之, 一篇中, 三致意焉.]”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20] 옷을 거머쥐고 : 원문은 ‘구의(摳衣)’로, 옷자락을 치켜든다는 뜻이니, 스승이나 어른 앞에서 몸가짐을 공손히 하는 태도를 말한다. 《예기》 〈곡례(曲禮)〉에 “옷자락을 치켜들고 구석을 향하여 종종걸음으로 가서 앉고, 반드시 응대를 삼가서 해야 한다.[摳衣趨隅, 必愼唯諾.]”라고 한 데서 가져온 말이다.
[주21] 먼 …… 않고 : 원문은 ‘백사중견(百舍重趼)’으로, 먼 거리를 고생하며 찾아오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천도(天道)〉에, 사성기(士成綺)가 노자(老子)를 찾아뵙고 “백 리마다 한 번씩 쉬면서 발에 물집이 겹으로 생겼어도 쉬지 않고 왔습니다.[百舍重趼而不敢息]”라고 한 말에서 가져왔다.
[주22] 장횡거(張橫渠)의 …… 말 : 장횡거는 송나라 장재(張載)를 가리킨다.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에 수록된 장재의 말에 “성은 만물의 동일한 근원으로 자신이 사사로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오직 대인만이 그 도를 다할 수가 있다. 이 때문에 서면 반드시 함께 서고, 알면 반드시 두루 알고, 사랑하면 반드시 아울러 사랑하고, 이루면 홀로 이루지 않는다.[性者萬物之一源, 非有我之得私也, 惟大人爲能盡其道. 是故立必俱立, 知必周知, 愛必兼愛, 成不獨成.]”라고 하였다.
[주23] 관헌(灌獻) : 제사를 지낼 때 하는 의식으로, 술을 땅에 부어서 신령이 강림(降臨)하도록 비는 의식이다.
[주24] 손발을 열어 살펴보았고 : 원문은 ‘계수족(啓手足)’으로, 죽음에 임박했음을 뜻한다. 증자가 임종(臨終) 때 제자들에게 “나의 발을 펴고 나의 손을 펴라.[啓予足, 啓予手.]”라고 하고 세상을 떠난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泰伯》
[주25] 문충공(文忠公) : 류성룡(柳成龍, 1542~1607)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고, 1566년(명종21)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다. 저서로는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있다.
[주26] 사물(事物)ㆍ궁격(竆格)의 …… 없었다 : 《대학혹문(大學或問)》에 “밝은 덕을 밝힘……천하가 비록 크지만 내 마음의 체가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고, 사물이 비록 많지만 내 마음의 용이 관통하지 않음이 없음을 보니, 대개 반드시 분석함에 그 정밀함을 극진히 해서 어지럽지 않은 뒤에 이를 통합함에 그 큼을 다해 남음이 없다.[明明德者.……以見夫天下雖大而吾心之體無不該, 事物雖多而吾心之用無不貫. 蓋必析之有以極其精而不亂, 然後合之有以盡其大而無餘.]”라고 하였다.
[주27] 칠정(七情)에도 이발(理發)이 있다 : 《입재집》 권12 〈답김공목(答金公穆)〉에 나온다.
[주28] 덕이 …… 함 : 훌륭한 덕에 걸맞은 훌륭한 말을 문집을 통해서 후세에 남겼다는 말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가 이르기를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에 합당한 말을 하게 마련이지만, 그럴듯한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꼭 덕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라고 한 말에서 가져왔다.
[주29]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 : 성종대왕의 아들이다.
[주30] 대산루(對山樓)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독서 강학하던 우산서원(愚山書院) 부속 건물로,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에 있다.
[주31] 수면앙배(睟面盎背) : 사람이 타고난 천성을 고이 보전했을 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기상을 형용한 말로, 《맹자》 〈진심 상(盡心上)〉의 “군자가 본성으로 지닌 것은 인의예지가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다. 이것이 빛을 낼 때에 맑고 윤기 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덕스러운 빛이 등에 충만해진다.[君子所性仁義禮智根於心, 其生色也, 睟然見於面盎於背.]”라고 한 데서 가져온 말이다.
[주32] 유심춘(柳尋春) : 1762~1834.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상원(象元), 호는 강고(江臯)이다. 류성룡(柳成龍)의 후손으로 상주에 거주했다.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고, 1854년(철종4)에 증손자 유후조(柳厚祚)가 급제함으로써 통정대부에 올랐다.
墓誌銘[柳尋春] 幷序
維十有六年丙子六月甲寅。立齋先生易簀于愚山之山水軒。越己丑秋。先生長胤象晉以先生竁誌。屬尋春泣而曰。墓不可以無誌。念昔日從遊吾先人門下者。執事爲親且久。庸以爲託。尋春膚淺無識知。所謂見伊川面而不得伊川心者。何敢當是寄。盖蹙然屢辭不獲。謹按狀而叙之。先生諱宗魯字士仰姓鄭氏。系出晉陽。在麗朝有諱澤。知尙州事。留一子因居焉。屢傳至諱經世。官吏曹判書謚文莊公號愚伏。道學文章。爲百世宗師。生諱杺文科翰林。生諱道應擧遺逸官諮議。生諱錫僑薦學行官縣監。於先生爲曾祖。祖諱胄源參奉。考諱仁模。妣缶林洪氏。木齋先生汝河之曾孫進士益龜女。先生以元陵戊午十一月十三日。生于外氏第。母夫人夢文莊公盛威儀臨門。覺而先生生。幼有異質。聰穎端秀。讀書倍文。不煩敎督。甫成童已志于學。手寫小學。常袖而覽焉。遍讀經史。間頗泛濫於左國史漢韓柳諸家。爲文章簡奧有典則。一日歎曰文章小技耳。去道不已遠乎。乃日取四子心經及程朱書。浸漬涵淹。精思力究。弗得弗措。一以晦庵退陶爲準則。其於居敬竆理之工。有日進而不已者。旣而拜大山李先生於湖上。問爲學大要。嘗慕百弗庵崔公,南野朴公道義風範。納拜請敎。間與一時諸賢。從遊講磨。以取資益。養靜林泉。讀書講道之外。無餘事。日用踐履。平實敦篤。惟吾分之所當爲。孝友可通於神明。敎範自行於閨門。以至處宗居鄕待人接物。無不各盡其道。得於心而體之身者醇如也。正廟己酉授光陵參奉。先生卽自處以先蔭。旣出肅。超授義禁府都事。被引對賜問從容。異數也。先生踧踖不敢當。卽謝病歸。有問以出處者。則曰蔭官處義。只得如是耳。丙辰上下詢于筵臣曰鄭某之行誼文學。予聞之熟矣。况此人卽文莊嗣孫乎。仍除司圃署別提。已而拜司憲府持平。下別諭促令上來。先生上疏辭以親老身病不 允。批曰家世人器。望於嶺中。致之前席。欲叩所存。爾何過辭。因命致祭文莊公廟。丁巳六月特命外補康翎縣監。先生以親年八耋。據國典辭。旋因大臣 筵禀換咸昌以便養。先生感激恩數。奉板輿赴官。奉觴上壽。會邑之耆老。置酒張樂以餙喜。設鄕飮 禮於臨湖書院。爲縣人士觀感焉。時値旱甚。躬檢灾報營。必準其實數乃已。糴糓之民精而吏麤者。使之各貯而各糶焉。至點閱犒軍。皆有方便。民不擾而事以集。未幾有痘戒。卽呈辭歸。盖久於官非素志也。行裝蕭然。官庫自如。後來者歎服以爲君子人云。戊午又除司憲府持平。庚申正廟昇遐。時先生方持服。未能奔赴。每朔望北面哭。終三年以致如喪之慟。辛酉服闋。當宁戊辰陞掌令旋遞。先生嘗以年迫桑楡。未報國恩爲至恨。壬申擬疏勉進君德曰。節嗜欲以養壽命。曰愼起居以重威儀。曰敦學問以廣知見。曰道中庸以篤踐履。曰勵精神以察政理。曰祛偏私以示公共。曰明黜陟以分邪正。曰振淹滯以收賢才。曰雪冤枉以召和氣。曰廓乾斷以摠權綱。亹亹數千言。皆陳善納誨之至意也。體用兼該。經緯密勿。其於時務之急。盖三致意焉。惜乎。其未克上徹也。先生年德俱卲。望實日隆。摳衣請益之士。百舍重趼而至。隨才設敎。各盡其方。每以張橫渠立必俱立成不獨成。爲第一義。置修稧社。每春秋設講。先之以大學。次之以論語。以及於中庸。循循有序。環而聽者以百數。莫不感發而興起焉。丙子五月二十日感疾。値先公忌。子弟請勿將事加調衛。先生曰病不至甚。且明年未可知。遂躬親灌獻。哀動左右。自是漸篤。六月六日啓手足。臨終神定氣閒。詔以勉戒之意。恬然而逝。享年七十九。八月葬于咸昌黃嶺乙向之原。丙戌移窆于州治西曲阜壬坐之原。盖文莊公之學。得之於吾先祖文忠公之門。允爲陶山再傳之嫡。淵源之正有自來矣。先生克紹家傳。默契道妙。立志則以聖賢爲可至。居敬則通乎動靜而如一。存養省察之要。無時間斷。而以爲致知所以進學也。沉潛乎事物竆格之工。發揮乎天人性命之奧。莫不析之極其精而合 之盡其大。觸處逢原。深造自得。存之於隱微幽獨之中。體之於日用平常之地。知行幷進。門路端的。嗚呼。豈非天相斯文。以迪來裔於無竆耶。其與學者講說。不主己見。必盡人言。反覆商證。明白透徹。使聞敎者如大寐之醒焉。平生論著。殆百餘巨袠。而理明辭達。沛然如决江河。其太極動靜說。七情亦有理發等說。發前人之所未發。大有功於後學。有德者必有言。非先生之謂歟。道存而師存。近悅而遠慕。所以淑人心而扶世敎者。爲何如也。吁其盛矣。先生配李氏。茂山君悰之後翰林遂大孫。學生民顯女。克媲君子。有女士行。生三男二女。長卽象晉宣寢郞。次象升出后。次象觀亦出后。女崔湜,黃錫老。象晉四男三女。男民秀,民衷,民秉出后,民采。女姜胄永,金在欽,柳祈睦。象升三男三女。男民穆,民稷,民稙。女申鶴休,李敦九。象觀嗣子民秉。女金重銖,金若洙。尋春以通家後生。灑掃於門下。先生視同子姪。敎誨之甚至。今於撰述之役。極知不敢當。而亦有不敢辭者。記丙辰秋。候先生於對山樓上。時先生方辭臺啣。晨起謁家廟。竊覸容止之間。符彩泂澈。皎然玉立。卽心語以爲古人所謂睟面盎背者。眞如是矣。至今追思。宛然如昨日。嗚呼。雖欲復近道德之光輝。其可得耶。銘曰。先生嘗以顔子之學幾於聖人。又嘗以明道天資似顔子。每擧似學者。而於退陶夫子則輒夢見之。盖先生資有所相合。學有所據依。藹然春和。嶷然山立。道積于躬而不自以爲有。行高于世而不自以爲足。常俛焉如恐不及。此先生之學所以日造乎高明。而其於三夫子之道。深有所得焉者也。曲阜之原。維先生之藏。殉道以終。百世彌光。門人豐山柳尋春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