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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역사공원에서 집결지를 잠실 종합운동장으로 급 변경하였습니다. 참가의사를 전해 온 동창들의 접근성을 고려한 결과였습니다. 출근시간 때와 맞물린 집결시간, 짐을 들고 이동하기가 불편하다는 판단에 아들에 도움을 받아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이 여사 동문들 반가운 얼굴입니다. 아들 차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 버스로 이동하여 짐칸에 실어놓은 후 허리를 펴 일어선 후 차 밖으로 나와 서 있는 동문들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이 여사 동문들에게 다가 가 듣은 첫 말은 바로 세월을 비켜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나의 용모에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모아 악수를 한 후 반가움을 표현했습니다. 참 반가웠습니다. 행사 때마다 만난 사람들은 낯설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너무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변화과정이 생략된 기억이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한 것 같습니다. 젊음에서 노년으로 확 바뀐 추월된 현실감은 받아들이기에 거부감이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중간중간 만났던 사람들은 변화의 추이가 연상될 수 있어 당연 시 되지만~~~ 아무튼 반가운 인사는 차밖과 차 안에서 까지 이어졌습니다. 특히 동문들 부군들과 나누는 인사는 묵직한 감이 들지만 동문들과 나누는 인사는 밝고 경쾌함이 느껴졌습니다. 짐 운반도구를 어텍을 사용한 관계로 버스 맨 뒤로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차는 마지막 인원이 탑승한 후 개인사정으로 참가 못하는 동문들의 배웅을 받으며 잠실을 떠나 미사리 방향으로 진행한 후 양양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북동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박 4일 함께 할 분은 월명투어 이창하 대표였습니다. 차량은 최고급 차량입니다.
중간 휴게소에서 30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 속초 아바이 마을, 회냉면으로 유명한 식당을 찾았습니다. 1시간 동안 식사와 차를 마신 후 다시 북으로 달려 통일 전망대 입국 신고와 안보교육을 수료 후 다시 달려 통일전망대에 도착하였습니다. 평일에도 통일 전망대를 찾아온 내국인과 외국인들이 상상외로 많았습니다. 하긴 현재까지 3000만 명 이상의 탐방객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되고 있답니다.
해발 70m 동산에 세워진 고성통일전망타워는 높이 34m입니다. 먼 곳에서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고성에는 대형 건물이 없어 돋보이는 건물입니다.. 고성통일전망타워는 종전 통일전망대 서쪽 옆에 있으며, 두 건물은 대조적으로 비교됩니다. 기존 통일전망대는 1984년 2월에 건립되었고 고성통일전망타워는 2018년 12월 개관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DMZ의 ‘D 자’를 형상화한 고성통일전망타워는 1층과 2층은 연다라 있지만, 3층은 엘리베이터와 계단, 양 축을 지지대 삼아 공중에 뜬 형태입니다. 1층에는 안내 데스크와 특산품홍보장, 2층은 전망교육실과 통일홍보관, 3층은 전망대가 자리 잡았습니다. 2층 전망교육실에서는 전면이 유리로 된 교육실에서 해설자가 부근 경관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우리들이 방문하였을 때에는 해설자가 없어 스스로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먼저 해안가에 붙어 있는 작은 섬, 송도를 비롯하여 금강산 전경과 육로와 철로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군사분계선과 두 개의 고성으로 갈라진 설명을 통해 분단된 국가의 비운에 대하여 설명해 줄 때는 저절로 역사적 아픔이 몰려왔습니다.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 한반도~~~ 언제나 통일을 이룰런지??
바위로 이루어진 구선봉
금강산 구선봉(낙타봉) 남쪽 밑에 있는 감호입니다. 국민학교 때 배운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깃든 호수입니다.
소나무 두 그루가 있다고 하여 송도라 불리는 섬입니다.
저 멀리 바위산이 금강산 12,000봉의 마지막 봉 구선봉입니다. 낙타봉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다에 펼쳐진 섬들을 해금강이라 합니다.
확대한 해금강 모습입니다.
한 때는 남한의 국민들이 금강산 관광을 위하여 오고 갔던 길은 그대로 열려 있는데 북쪽에서는 이미 각종 관광 시설물을 철거 또는 폭파해 버렸습니다. 인적이 끊긴 도로를 보면서 민족의 비극적인 현실을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에 빠져 들었습니다.
해설자 없이 스스로 해결한 후 전망경을 이용하여 살펴본 후 여러 장의 사진을 남기고 실외로 나가 전망대 주변 시설물을 탐방하였습니다.
동행한 동문 부군들입니다.
이번 행사에는 유럽팀은 현지 사정으로 빠졌습니다. 대신 국내를 비롯하여 미국, 캐나다 형성되어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옛 통일전망대 동쪽 철책선 해안 방향으로 통일을 염원하는 각 종교단체에서 세워 놓은 비석과 동상을 세워 통일동산 만들었습니다.
성모님에게 다가 가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사진촬영을 하였습니다.
다음 일정을 위하여 통일전망대에서 모든 일정을 내려놓고 화진포 호로 이동하였습니다. 화진포 호 주변은 경관이 뛰어나 예로부터 별서 자리로 각광을 받던 명승지입니다. 수복 전에는 김일성 별장이 있던 곳이었지만 6.25 동난 당시 수복하고부터는 이 승만 대통령 별장과 이기붕 별장이 들어서게 된 곳입니다. 겨울철만 되면 고니 때가 날아와 장관을 이루던 곳입니다. 오후 일정은 화진포 호에 들러 이승만 대통령 별장을 비롯하여 김일성 별장을 탐방한 후
화진포는 바다였던 곳이 시간이 흐르며 바다와 격리되면서 형성되었으며, 담수와 해수가 섞인 석호입니다. 호수의 둘레는 15km정도입니다. 화진포 앞바다에 자리한 금구도에 광개토대왕의 능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하는데 진실은 어느 역사학자의 주장을 전설로 둔갑해서 홍보하는 것이라 하는군요.
전해 오는 설화에 의하면은 이곳에 이화진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합니다. 이 사람은 성질이 고약하여 금강산 건봉사에서 시주를 받기 위해 찾아온 스님에게 소똥을 한가득 넣으며 시주했으니 그만 돌아가라며 골탕 먹였답니다. 그러나 승려가 오히려 복 받으십시오 하며 빈손으로 돌아가니 마음씨 착한 며느리가 용서를 빌며 시주를 하러 따라갔고 승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잠시 후 갑자기 뒤에서 "쾅"하는 하늘이 무너질 듯 한 큰소리가 나자 며느리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폭우가 마구 쏟아지고 이화진이 살던 집이며 논밭이 순식간에 모두 호수로 변하였답니다. 스님은 이미 홀연히 사라져 버렸고 며느리는 애통해하다가 그만 돌이 되어 버렸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화진포는 삼팔선 이북 지역으로, 6.25 이전에는 소련군 통치와 북한의 영토였습니다. 화진포가 북한 땅이던 시절 김일성은 가족과 함께 화진포를 자주 찾았다고 전해 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화진포 돌 집이 김일성이 자주 머물렀다는 별장이라 합니다. 6.25 전쟁 이후 고성군 지역이 대한민국의 수복하에 들어가게 되어 ,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도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별장을 짓고 자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화진포에 도착하여 금구도를 배경으로 설치된 사랑의 열쇠 자리에서 기념촬영을 가졌다. 늘 그렇지만 찍고난 후 살펴보면 빠진 사람이 있었다. 그렇다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체사진을 이어서 개인 사진을 만들고
성곽처럼 지어진 김일성 별장을 들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김일성 별장을 떠나 우남 이승만 대통령 별장을 방문하였다. 이 대통령의 숙원은 북진통일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북쪽을 바라보고 세워졌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가 상세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목사님으로 재직 중이신 분께서 이승만 대통령 별장에서 구국과 대한민국의 번영과 통일과 관련하여 기도회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마침 이 분에 고향이 강릉입니다. 그래서 여행 중에 생가에 다녀오기도 하였습니다. 별장 안에 전시된 각종 자료를 통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과정 등에 대하여 자세히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공과 과를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다들 감탄하는 시간을 갖었습니다. 어느새 시간은 저녁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남은 일정은 저녁식사와 오늘 숙소로 정해 놓은 낙산 비치호텔 체크인 후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습니다.
회진포 투어를 접고 다시 버스에 올라 속초 외옹진 항구로 출발하였습니다. 잠실을 출발하면서 버스에서 각자 선물로 준비한 선물과 먹거리도 나누고 보내며 시작했던 출발이 빠르게 흘러 저녁식사 때가 된 것입니다. 외옹치항은 복잡한 대포항 바로 위에 한적한 곳이 자리를 잡고 있는 작은 항구입니다. 미식가들이 찾는 조용한 곳입니다. 음식이 깔끔하고 전부 활어입니다. 가격도 참한 편입니다. 회정식이 오늘의 메뉴입니다.
회정식으로 저녁식사를 마친 후 내일 설악산을 찾기 위하여 첫 숙박지를 낙산비치 호텔로 재선정 하여 체크 인을 하기 위하여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튿날
호텔식으로 조식을 챙긴 후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모든 짐을 챙겨 버스에 실었습니다. 설악산 탐방을 한 후 주문진으로 자리를 옮겨 생선구이로 점심을 해결하고 강릉으로 이동하여 오죽헌 등을 답사하는 일정입니다. 경포대에 있는 숙소를 체크 인 하기 전에 저녁을 초당두부찌개를 석식으로 선택하려고 합니다.
1970년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65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그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1982년 유네스코로부터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관리되고 있는 지역입니다. 설악산국립공원의 총면적은 398.237㎢에 이르며 행정구역으로는 인제군과 고성군, 양양군과 속초시에 걸쳐 있는데 인제 방면은 내설악, 한계령~오색 방면은 남설악, 그리고 속초시와 양양군 일부, 고성군으로 이루어진 동쪽은 외설악이라고 부릅니다. 설악산은 주봉인 대청봉을 비롯하여 소청봉, 중청봉, 화채봉 등 30여 개의 높은 산봉우리가 웅장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설악동 공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방문객을 반기는 것은 설악 반달곰 동상입니다. 반달곰 등뒤로 마등령 능선이 정면으로 보이고 우측으로는 울산바위, 좌측으로는 권금성과 토왕성 폭포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자로 활동 중인 부군과 사모를 모시고 사진을 찍어 드렸습니다. 남해 일대를 여행할 때 동행한 적이 있어 반가웠습니다.
설악동(정가평)에서 사진 촬영 후 신흥사 일주문을 지나자 두 사람이 눈에 띄어 위치를 잡아주고 사진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한 여름 같은 폭염이 느껴지는 날씨라 잠시 그늘에서 쉬어가며 일정을 소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이다. 652년(진덕여왕 6)에 자장(慈藏)이 창건하여 향성사(香城寺)라 하였으며, 당시 계조암(繼祖庵)과 능인암(能仁庵)도 함께 지었습니다. 이때 자장은 구층탑을 만들어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이 구층탑이 어느 탑인지는 자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향성사는 698년(효소왕 7)에 능인암과 함께 불타 버린 뒤 3년간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701년에 의상(義湘)이 자리를 능인암터로 옮겨서 향성사를 중건하고 절이름을 선정사(禪定寺)라고 고쳤으며. 이때 의상은 아미타불 · 관세음보살 · 대세지보살의 3 존불을 조성하여 이 절에 봉안하였습니다. 선정사는 1000년 동안 번창하였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구층탑이 파괴되었고, 1642년(인조 20)에는 화재로 완전히 타 버렸습니다. 1644년에 영서(靈瑞) · 연옥(蓮玉) · 혜원(惠元) 등이 중창을 발원하던 중, 하루는 세 승려가 똑같이 소림암(小林庵)에서 나타난 신인(神人)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수만 년이 가도 3재(災)가 범하지 못할 것이라고 일러주는 꿈을 꾸고, 선정사 옛터 아래쪽 약 10리 지점에 다시 절을 짓고 이름을 신흥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사천왕문을 줄여서 천왕문이라고도 한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시는 곳으로, 이 문 안에는 그림 또는 조상(彫像)한 사천왕을 봉안하게 된다. 사천왕은 천상계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신화적인 존자들로서,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방을 지키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천왕들이다. 고대 인도의 신이었던 그들은 불교에 채택되면서부터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천왕(護法天王)의 구실을 맡도록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천왕문 내에 있는 사천왕의 지물(持物)은 시대별로 다양하게 나타나며, 여러 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인도 전래의 형상과도 차이가 있다. 통일신라시대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모두 무장형(武將形)으로 칼, 창, 금강저, 탑 등을 들고 있다. 오른손에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의 제외한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의 경우에 등 칼, 창, 금강저, 탑 등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다. 이후 사천왕의 대중화에 영향을 받아 다양한 양식으로 전개되어 갔다.
절에 이러한 천왕상을 봉안한 천왕문을 건립하는 까닭은 절을 외호 한다는 뜻도 있지만, 출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수호신들에 의해서 도량 내의 모든 악귀가 물러난 청정도량이라는 신성관념을 가지게 하려는 데도 뜻이 있다. 또한, 수행과정상의 상징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일심(一心)의 일주문을 거쳐 이제 수미산 중턱의 청정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이 천왕문에 이르기 전에 따로 금강문(金剛門)을 세우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천왕문의 입구 문에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모습을 그리거나 따로 금강역사상을 봉안하여 금강문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하며 때로는 인왕역사(仁王力士)를 봉안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가람수호를 위한 제일 관문의 신이다.
현재 동기회 회장을 수행하고 있는 동문입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해외 동문들과 수시로 연락을 하며 시기를 조율하느냐 수고가 많았습니다. 단체로 함께 행동하려면 부단하게 조율을 해야 할 문제들이 참 많습니다.
절에 들어서는 산문 중에 첫째 문을 일주문이라 하는데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주(四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건축양식은 주로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 문에 많은 현판(懸板)들을 걸어 사찰의 격(格)을 나타내기도 한다. 일주문을 지나서 만나는 산문 중에 금강문과 천왕문은 사찰에 들어설 때 만날 수 있는 산문(山門)이다. 금강문은 야차신을 거느리고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모신 문이며, 천왕문은 사천왕(四天王)상을 두고 외부의 사악한 모든 것을 막는 의미가 있는 산문이다.
둘레 약 3,500m. 일명 설악산성(雪嶽山城)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성벽은 거의 허물어졌으며 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 산성은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화채능선 정상부 칠성봉과 집선봉 북쪽 산 끝을 에워싸고 있는 천연의 암벽 요새지입니다. 이 산성의 정확한 초축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옹 금산석성(擁金山石城)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둘레가 1,980보라고 되어 있으나, 『신 증동국여지승람』에는 권금성이라 하고 권(權)·김(金)의 두 가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난리를 피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낙산사기(洛山寺記)』를 인용하여 고려 말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인근 주민들이 이곳에 성을 쌓고 피란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아 고려 말기 이전부터 존속해 오던 산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의 대부분은 자연암벽을 이용하고 일부는 할석으로 쌓았는데, 인근의 토왕성(土王城)과 규모가 비슷합니다. 좌우로 작은 계곡을 이루며 물이 흐르므로 입보농성(入保籠城)에 알맞은 산성이지요. 그러나 너무 높은 위치여서 오르내리기에 큰 힘이 들었으므로 조선 시대 이후로는 차츰 퇴락하여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권금성에서 화채 능선 쪽으로 오르면 집선봉이 있고 그 위로 칠성봉이 나온다. 그리고 화채능선으로 연결되어 중청, 대청으로 이어진다.
볕이 뜨거운 날이었습니다. 바위 표면을 만져보면 열기가 온돌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하는 시간 내내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보는 사람들 마음에도 우정에 물결이 깃드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됩니다. 산이 주는 중요한 교훈은 바로 아무리 고생하며 오른 길이라 해도 다시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 가 내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정상에 머물 수 없다는 교훈, 삶의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합니다. 이 사진을 끝으로 다시 하산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점심식사를 위하여 주문진 원영 생선구이 전문집으로 이동하여 4인 기준으로 생선모둠 구이로 시켜 점심을 해결한 후 오죽헌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모자(母子) 지간에 동시에 화폐에 얼굴을 알린 사람은 신사임당과 이율곡이 유일한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이를 알리듯 오죽헌 정문 왼쪽에 그 사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신사임당은 50,000권에 아들 율곡은 5,000권에 초상화가 실려 있습니다.
율곡 이이는 1536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 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烏竹軒)에서, 덕수 이 씨 통덕랑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평산 신 씨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신사임당이 태기를 느끼게 된 계기가 흑룡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 '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후 경기도 파주에 자리한 본가로 와서 생활하였습니다.
신사임당의 이름은 당호입니다. 그렇다면 본명은 무엇일까요? 현대적인 이름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신인선입니다. 신인선의 아버지는 신명화입니다. 신사임당이 속한 평산 신씨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로, 증조부가 성균관 대사성, 조부는 영월군수, 부친 신명화는 벼슬을 일부러 나가지 않았지만 당대에 이름이 높았습니다. 증조부인 신자승(申自繩)은 멀게는 태종과도 인맥이 이어집니다. 신자승의 장인인 남휘는 태종의 딸인 정선공주와 혼인했기 때문입니다.
외가 쪽도 이름이 상당히 높고 부유해서 엄청나게 강한 집안 내력이 있는데, 외조부 이사 온만 해도 강릉 최 씨집안에 둘째 사위로 장가를 들었고 신명화의 경우도 이사온의 외동딸과 결혼을 해서 초년 생활을 처가 오죽헌에서 했으며 신사임당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댁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죽헌만 해도 이사온이 장인에게 받은 것을 다시 사위인 신명화에게 넘겨준 재산으로 신사임당이 죽은 이후에 유산을 나눈 분재기를 보면 이 집안의 노비가 100명이 넘습니다.
어려서부터 시, 글씨, 그림에 매우 능하였다고 하는데 4세부터 글공부, 7세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했는데도 세종 시대의 화가였던 안견의 그림을 본따서 그릴 정도였으며 금강산에 가서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은 조선의 지식인들도 인정했을 정도로 출중했는데 신사임당의 그림에 발문을 쓴 사람 중 1명이 조선 중기의 거물 정치가였던 송시열입니다. 물론 송시열은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입장이었으므로 신사임당이 이이의 어머니이기에 그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호는 사임당이며 본관은 평산 신 씨입니다. 부친 신명화와 모친 용인 이 씨 이사 온의 딸로 5녀 중 차녀로 출생 1504년(연산군 9년) 12월 05일, 강원도 강릉 죽헌리 북평촌, 사망은 1551년(명종 6년) 6월 20일 47세로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율곡촌, 남편 이원수(1501-1561) 사이에 사임당은 4남 3녀를 두었습니다. 율곡은 3남이었습니다.
장남 - 이선(李璿, 1524 ~ 1570)
장녀 - 이매창
차남 - 이번(李璠)
차녀 - 윤섭(尹渉)의 처
3남 - 이이(李珥, 1537 ~ 1584)
3녀 - 조대남(趙大男)의 처
4남 - 이우(李瑀, 1542 ~ 1609)
강릉 오죽헌은 조선 중기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의 별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서 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이 태어난 집이기도 합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건축물에 포함되며 신사임당이 아닌 그보다 약 100여 년 전, 15세기 중엽에 최치운이 건축하였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상속을 거쳐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에게, 신명화 사위 권처균에게 상속이 이어졌습니다 오죽헌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고 권처균이 자신의 호를 오죽현이라 짓고부터 건물 명칭이 오죽헌의 되었다고 합니다. 오죽헌은 1963년 보물 제165호 지정되었으며 2021년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지정번호가 사라지면서 보물로 재 지정되었습니다.
뛰어난 예술가이자 현모양처로 알려 진 신사임당은 조선시대의 뛰어난 인재로 알려진 율곡을 가졌을 때 태몽으로 용꿈을 꾸었는데 오죽헌에는 몽룡실이 있어 태몽 장소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최초 모자 화폐 인물 탄생지가 바로 오죽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당시 율곡 이이 선생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사당 문성사의 문성은 인조가 율곡에게 내린 시호로서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 라는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입니다. 오죽헌 별당 후원에 세종 22년(1400년)경에 최치운이 심고 이후 신사임당과 율곡이 가꾸었다는 매화나무가 있습니다.
오죽헌 곳곳을 살펴본 후 전시실로 이동하여 신사임당의 글과 그림을 전람하고 이어서 이들 율곡의 일대기를 천천히 살핀 후 오늘 숙소가 있는 경포대로 이동하여 체크 인 전 초당마을로 가 초당두부 정식으로 석식을 해결하고 체크인 후 경포호수와 경포대 모래사장 산책을 이어갔습니다.
경포대 오리 바위와 십리 바위를 배경으로 설치된 원형 전망, 촬영 포인트 서 보고
다시 그 옆에 놓인 사각 전망 촬영 포인트에 서서 참석한 사람들만 촬영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해가 저물어 가자 각종 시설물에 불이 밝혀져 장관을 이루기 시작하였습니다.
숙소인 스카이베이 호텔에서 체크인 후 저녁산책을 하기 위하여 희망자만 다시 모였습니다. 우선 경포 해수욕장 모래사장을 산책한 후 다시 경포 호수를 산책하기로 계획을 잡았습니다. 보름 전이라 달이 근사하게 떴습니다.
스카이 베이 호텔 로비에 걸려 있는 물결이란 작품 앞에서 산책하기 전에 찍은 사진입니다. 내일도 일정을 소화한 후 다시 야간 경치를 보며 산책을 하며 풍어제를 지내는 굿도 관람하게 됩니다. 보름이란 바다와 하늘과 문명의 빛과 함께 근사하고 멋진 야경이 될 것입니다.
산책을 끝낸 후 다시 호텔로 돌아와 간단한 모임을 갖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내일의 일정은 하조대, 정동진, 죽서루(이곳에서는 케나다에서 귀국하여 시택인 삼척으로 와 대기 하고 있는 동문과 죽서루에서 합류하기로 결정되어 있습니다), 해신공원, 삼척박물관, 촛대바위를 경유하여 뷰가 굉장히 좋은 커피점을 찾아 담소를 나눈 후 강릉에서 제일 유명한 한정식 소담에서 반상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각자 짐을 정리한 후 야경 걸음 여행을 할 계획입니다.
사흘날
늘 버릇처럼 일찍 혼자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호텔식당으로 가 조식을 챙긴 후 로비로 나가보니 약속된 시간에 전부 모였습니다.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에 있는 경승지로서 하조대라는 정자가 있으며 주변은 하조대해수욕장을 비롯하여 여러 해수욕장이 해안을 수놓은듯이 줄지어 있다. 예로부터 이곳을 한번 거친 이는 저절로 딴사람이 되고 10년이 지나도 그 얼굴에 산수자연의 기상이 서려 있게 된다고 기록될 정도로 경치가 수려한 지역이다. 하조대해수욕장은 수심이 깊지 않고 경사가 완만하며 울창한 송림을 배경으로 약 4㎞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또한, 담수가 곳곳에 흐르며 남쪽으로는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절경을 이룬다. 하씨집안의 총각과 조씨집안의 처녀 사이의 사랑에 얽힌 이야기에서 하조대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며, 고려 말에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숨어산 곳이어서 명칭이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하조대를 탐방 후 정동진으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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