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 기념책자를 배부하고....
이래 저래 이번 일주일은 좀 바빴네요.
백주년 기념행사 시 각 기수별로 배당된 기념책자는
총 5권 이었습니다.
주고 싶은 친구는 많은데 물량은 턱없이 적어서 고민이
살짝 되었는데, 염치불구하고 위윈장 선배님을 찾아가
부탁을 해서 추가로 몇 권을 더 구했습니다.
회장님과 상의하여 나름대로 정기총회에 참석 현황,
찬조내역 등을 참고하여 동기회 발전에 도움을 주고
상대적으로 기여도가 크다고 생각되는 친구들에게
직접 전달하거나 택배로 보내 드렸습니다.
(위의 참고자료는 약 10년 치의 Data를 참고하였음)
그 외에도 그날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 하신 모든
친구들에게도 보내 주었으면 좋겠으나 한정된 물량으로
그러하지 못한 점 널리 양해를 바랍니다.
특히 마음 같아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오고 싶어도
쉽게 내려 오기 어려운 친구들에게도 고향의 향수라도
달래보라고 책을 전해주고 싶습니다만,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그렇게 할 수 없으니 그 점 아쉽게 생각합니다.
만약에 추가로 기념책자가 더 확보된다면 고민을
해 보겠습니다만....
아내가 아직도 말을 안합니다.
때문에 집안의 공기가 매우 갑갑합니다.
그렇다고해서 성격 상 아내에게 알랑방구를 낄 줄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이번 달 말까지는 조용히
은인자중[隱忍自重] 하며 지내야 되겠습니다. ㅎㅎ
책자를 받으신 분은 보셨겠지만 아래 글은 차성환 친구가
적은 추억담입니다. 어린 시절 한번도 가보지 않은
진하 바다로 소풍을 간다는 마음에 좋아서 부푼 마음에
잠도 설치고 폴작폴짝 뛰는 모습을 담담하게 잘 그려 놨네요.
그러고 보니 10년 전만 하더라도 동창회 하는 날이거나
가을여행을 떠나기 전날에는면 꼭 어릴적 소풍 갈 때처럼
가슴이 설레고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난다는 기대로 잠을
설치곤 했지요.
그새 모두 나이가 들어 많이 시들해진 느낌이 드네요.
아무래도 예전 같지가 않고...
이제는 그 옛날의 설레임은 다시 없을까요?
우리들 모두의 숙제이겠죠.
그래도 난 예전 어린시절의 순수함을 오래 간직하고
싶고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러한 느낌이 더욱 소중하게 생각되더군요.
서로 위하고 베풀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물질이 아니더라도 좋은 말로 마음 보시라도 하며 말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비록 예전과 같지는 않더라도
어릴적 비슷한 느낌으로 살아 갔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오랜 친구와 막걸리 한잔하며
서로 덕담을 나누는 시간이 제일 행복이지 않나 싶네요.
부디 모두 건강하세요~~♡♡
고딩 친구가 산에 가자고 전화가 옵니다.
난 무리라고 답을 줍니다...
이제는 산에 가는 것도 힘드네요.
그냥 강변이나 천천히 걸어야겠습니다.
일요일 즐겁게 잘 보내시길~~
- 소풍 작사 바다 작곡 추억의 노래 –
차성환/ 온양초 43회
두 해 전쯤 울산 고향집에 내려간 일이 있었다.
고향을 멀리 두고 살아가는 객향(客鄕)살이에서
고향이라는 이름만큼 가슴으로 파고드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고향은 가늠하기 어려운 큰 그릇이어서 고향에
얽힌 그 어떤 말을 주어 담아도 한 켠에는 여전히
자리가 비어 있다.
어쩌면 담고 또 담아도 채워지지 않는 것은 마치
또 다른 화수분(貨水盆)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을까 여겨 지기도 한다.
초등학교 유년시절의 고향집은 딱정벌레를 닮은
초가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집은 어머니의 속살에
묻혀 있는 젖무덤만큼이나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랬으므로 고향과 어머니는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연리지(連理枝)로 남아있다.
고향을 떠올리면 어머니가 그려지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면 고향이 다가온다.
울산에 내려간 날, 친구와 서생 진하마을을 찾았다.
일출이 아름답다는 간절곶 언덕배기에 ‘반갑다,
바다여 (헤이메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불어(佛語)로
쓰여진 카페에서 동해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이때 불현듯이 오십여년 전 기억의 은빛 편린(片鱗)들이
햇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오늘 어데로 소풍가노?”
벤또를 사고 있던 엄마가 아침에 말문을 열었다.
변변치 못한 반찬 쪼가리가 마음에 걸렸는지
평소와는 달리 목소리가 자못 잦아 있었다.
“엄마, 내 있제 오늘 바다 간다.”
나는 원족(遠足)을 간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들뜬 표정을 지으며 말을 했다.
“그리고, 바다는 내가 처음 가는 곳이 데이”
“야가 머라카노?”
“니 바다에 한번도 안 가바떠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마는 놀라는 말투로
말을 가로 채는 것으로 보아 믿기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처음이다. 오늘 바다 가서 신나게 놀다 올끼다.”
5학년 봄소풍을 서생 진하 앞바다로 간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나는 새 신을
신고 뛰어보는 그 기분이었다.
대안마을을 옆에 끼고 발리마을을 눈맞춤 하며
먼 길같이 느껴지지 않는 먼 길을 걸었다.
진하 앞바다는 내가 아는 천국(天國)이었다.
솔향이 전해지는 넓은 솔밭길을 지나고 끝없이
이어진 하얀 모래톱은 숨소리조차 멎게 하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안겨주었다.
신기루 같은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았고
잔잔한 파도가 쉬임없이 밀려왔다 부서지며,
오래된 목선(木船) 하나가 밧줄을 붙잡고
오수(午睡)를 즐기고 있었다.
목선 너머로 보이는 명선도(名仙島)는
어느 구도자의 참선 모습을 보는 듯했다.
사실 평화롭다는 말을 설명하거나 표현을 할때면
그저 망설이고 주저하고 곱씹기도 하였는데,
진하 앞바다가 보여주는 천국 같은 그림을
보고 난 뒤부터 이를 두고 평화롭다고
쓰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흔히 소풍을 인생에 접목(接木)하기도 한다.
삶의 여정을 소풍으로 노래한 시인이 있다.
시인 천상병은 ‘귀천(歸天)의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읊조렸다.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돌아가서 아름다웠더라 고 말하리라.’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