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리고 여백이 있는 곳] 루비처럼 영롱한 날의 회상
화장대 서랍 정리를 하던 중에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루비 반지를 발견했다. 여기 있었구나! 나는 환호를 했다. 왼쪽 약지 손가락에 끼어 보았다. 오랜 세월 속에 손가락이 굵어져서 안 맞으면 어쩌나 하고 짧은 순간 걱정을 했는데 잘 맞는다. 손가락에 낀 반지를 살펴본다. 초등학교 시절 앳된 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슴이 뭉클했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내게 장미원 길 시장에 함께 가자고 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아도 대답 없이 그저 가자고 했다. 약간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며 따라나선 나를 아들은 금은방으로 데리고 갔다. 모은 용돈으로 엄마에게 반지를 사 주고 싶어 금은방에서 얼마인지 미리 사전 조사를 하고 금액 상담까지 마쳤다 했다. 금은방 주인은 어린이가 엄마에게 반지를 사 주려고 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최대한 저렴하게 해 주겠다고 했단다. 어려운 살림에 반지 하나 없이 살아가는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아들이 사 준 백금의 루비 반지는 내가 처음 가져 본 보석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내 왼쪽 약지를 예쁘게 장식해 준 빨간 루비 반지를 애지중지하며 아꼈다. 그 후 나의 바쁜 일상은 루비 반지를 화장대 서랍에서 잠자게 했던 것이다.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더 좋아하던 아들을 책상 앞에 앉히기 위해 나는 무던히 힘썼다. 하교 시간이 되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집으로 데리고 오기도 했고 책상 앞에 마주 앉아서 문제 풀이를 시켰다. 채점을 해 주고 잠시 부엌에서 저녁 식사 준비하다 방에 가보면 아들은 어느새 뒷담을 넘어 오락실에 가 있곤 했다. 나는 아들을 찾아 주변 오락실을 이곳저곳 찾아다니기도 했다. 아들은 내가 오락실로 찾아 가면 큰 반항 없이 집으로 와서 공부했다. 공부하기 싫으면 함께 죽자는 말까지 했을 만큼 그 시절 내 삶의 목표는 아들의 학업 성취에 맞추어져 있었다.
사일구 탑과 아카데미하우스의 중간쯤에 있었던 우리 집에서는 장미원 길 시장을 이용 했다. 시장과의 거리가 멀다 보니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자주 심부름을 해 주었다. 어느 날 심부름 간 아들이 의외로 늦게 왔다. 나는 친구와 놀고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들은 중국 음식 배달하는 자전거를 피하다가 전봇대에 부딪혀 기절했었다고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개구쟁이며 장난기 많던 아들의 위험한 동심이 내리막길에서 자전거 손잡이를 놓고 탔다고 했다.
영하 16도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겨울밤이었다. 늦은 퇴근을 한 남편이 공부하느라고 머리가 아프다고 떼를 쓰는 아들을 보자 반바지와 반팔 티셔츠를 입고 나오라고 했다. 남편도 같은 차림으로 아들에게 극기 훈련시킨다며 5km 정도의 밤거리를 달리기했다. 청소년의 활력이 넘치는 아들은 거뜬히 달려 들어오는데 남편은 추워서 엉거주춤 웅크리며 들어 왔다. 아들은 머리 아픈 것이 나았는지 말없이 다시 공부했다.
어느 휴일 새벽에 우리 가족은 북한산 등반을 했다. 남편은 나와 아이들에게 주머니에 갖고 있는 현금을 다 꺼내 달라고 하였다. 음식을 사 오려나 보다 라는 생각으로 주머니에 갖고 있는 돈을 모두 내주었는데 남편은 백운대 위에 우리를 두고 혼자 집으로 가 버렸다. 나와 아이들은 그날 오후 3시경이 되어서야 배고프고 지친 몸으로 집에 왔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 체험시키려 했다고 말했다.
재수하고도 서울대 법대에 떨어지자 남편은 또 서울대 법대를 고집할 거냐고 화를 내면서 아들을 집에서 쫓아내 버렸다. 기계제조업을 하던 남편은 아들이 공대를 가서 남편 사업을 이어 가기를 원했지만, 그 뜻에 따르지 않고 법대를 고집하는 아들을 못마땅해했다. 대학 입시에서 실패했다고 집에서 쫓아냄으로써 마음을 다잡고 더 열심히 공부하게 하려는 남편의 뜻을 이해하면서도 나는 많이 울었었다. 그렇게 공부한 아들은 다음 해 입시에서 의대, 치대, 한의대를 모두 합격했는데 그 시절 가장 인기였던 한의대에 진학했다. 대학 합격 통지를 받고서 아들은 내게 오늘의 영광이 있도록 보살펴 줘서 고맙다고 했다. 또한, 기다려 준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했다. 그 후 한의학 박사가 되어 대학원에서 강의도 하던 아들은 현재 한의원을 운영하며 본인의 삶에 충실하고 있다.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둔 아들이 얼마 전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과하다 할 만큼 강하게 키우려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 나는 아버지가 너희들 잘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다. 라고 말했단다. 그래서 모든 아내는 자식들에게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말 해 주는 줄 알았다고 했다. 가장으로 살아가는 아들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마음이 짠했다.
지난날 내가 아들에게 공부하라며 집요하게 닦달했던 일들이 아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과연 잘한 것이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한편 미안한 마음도 든다. 인생은 짧은데 그냥 놀고 싶을 때 맘껏 놀게 둘 걸 잘못했다는 생각도 든다. 누구를 위한 삶인지 무엇이 행복한 삶이며 정답인지 모르겠다. 이 나이가 되니 앞만 보며 살아온 날들이 아쉽기만 하다. 어려움을 딛고 오늘을 이룬 아들이 고맙고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 마음이 짠한 것은 세월 속에 묻어 있는 아들의 노력과 힘들었던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인가 보다.
꼬깃꼬깃 모은 용돈으로 반지를 사서 내게 건네던 아들의 작은 손이 생각난다. 풋풋한 아들의 얼굴과 개구쟁이 소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슴이 아리다.
빨간 루비 반지가 내 약지에서 영롱하게 반짝인다. 엄마를 생각하는 아들의 마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