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 고정희(1948-1991)
고향집 떠난 지 십 수 년 흘러 어머니, 스무 번도 더 이삿짐을 꾸린 뒤 가상하게도 이 땅에 제집이 마련되었습니다 경기도 안산에 마련한 이 집, 서른일곱의 나이에 가진 이 집, 열쇠를 가진 지 두 해가 넘도록 아직 변변한 집들이 한번 못하고 동당거려온 이 집에 어머니, 오늘은 크낙한 고요와 청명이 찾아오고, 구석구석 청소를 끝낸 후 저 들판 마주하여 마음을 비워내니, 간절한 사람, 어머니가 이 집에 들어서는 꿈을 꿉니다 어머니가 이 집을 돌아보는 꿈을 꿉니다
공부방 둘러보고 이부자리 만져보고 유리창 활짝 열어 햇빛 들여오시며 이제 네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해거름녘 정물처럼 웃으시는 당신, 그 얼굴 그리워 몸서리 칩니다 그 얼굴 보고 싶어 가슴 두근거립니다
왜 그닥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불현 듯 상경하신 지난 가을, 얘야, 이승길 마지막 나들이다 네가 사는 문지방 넘어 보고 싶구나 왜 단호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바쁘다 매정하게 돌아서는 저에게 그냥 탈진한 사람처럼 손 흔들며 그래 내년 봄에 다시 오마 해놓고선 정작 꽃삼월엔 아주 가시다니요 이게 살아 있는 날들의 아둔함인가 싶어 하염없는 눈물만 못이 되어 박힙니다
시인을 수식하는 말이 있다. ‘여성 해방 의식을 구현한 시인’이란 말이다. 그에 걸맞게 『또 하나의 문화』 2호에 여성 문학 70년사를 점검하는 논문 「한국 여성 문학의 흐름」을 발표했는데 여성 문학의 개념도 정립되지 않은 때 선구적인 시도를 했을 만큼 그의 의식은 남달랐다.
고정희는 남녀동등권 쟁취뿐만 아니라 인간 해방 운동의 차원에서 여성 운동이 펼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이를 시에 구현하려고 심열을 기울였다. 역사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 전환되는 슬픔의 정서(공분)를 담아낸 시집 『지리산의 봄』에 어머니와 할머니에 이르는 부재의 정황을 세심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 가운데 산문시 「집」은 오늘의 현실 문제인 정신과 공간을 형성하는 이중성을 시현하였다.
시인에게 “가상”한 일이 생겼다. 고향 떠나 스무 번 이상 이삿짐 꾸리고 셋방을 전전하던 그에게 집이란 게 생겼다. “서른일곱”이 돼서야 자기 집 “열쇠”를 가지게 됐다. 하지만 “두 해가 넘도록” 집들이 한번 못하고 사는 꼴이라니,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동당거려 온” 집에 “간절한 사람”이 생각났다. 꿈이나 하룻밤 모정에 사무치는 빈 공간이 슬프도록 드러난 자랑스러운 딸네 집이다.
내 집이 생긴 뒤 어머니가 몹시 “그리워 몸서리”쳐지고,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도타운 정을 더 믿었다가 생긴 처사를 뉘우치지만 돌이킬 수 없는 후회뿐이다. “이제 네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는 어머니 말로 듣고 있지만 사실 어머니는 꿈의 존재일 뿐이다. 이렇게 스스로 위안을 삼아보지만 어머니에 대한 타박으로 슬픔은 한층 더 깊어진다. “네가 사는 문지방 넘어 보고 싶구나 왜 단호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닦달해보지만 꿈과 현실은 상실의 간극을 더 벌어지게 하고 있다.
“문지방”은 시인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승”과 “저승”의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 문지방은 살아서 넘든지, 아니면 죽어서 넘는 것이다. “바쁘다”는 딸과 “탈진한 사람처럼 손 흔들”던 어머니와의 기약은 문지방을 두고 한 사람은 이승으로 넘고, 한 사람은 저승으로 넘어 다시 봄이 온 마당 “꽃삼월”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시인은 인간의 공통성 앞에서 처절해진다. “이게 살아 있는 날들의 아둔함인가”라는 절규는 살아 있음의 존재자로 고백하는 실존의 문제, 초월적(공통성) 문제다. 이처럼 현실은 또 다른 이중성이 들어 있는 모순의 함수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처는 큰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상처의 눈물은 집이 없어 전전하던 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집이 있어도 “못이 되어” 박히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우리에게 집은 정주의 공간으로 더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어머니는 정신(spirit)과 공간의 요체이기 때문에 그 상처는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