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리가 있나? 피라미드의 파일들은 모든 지부가 똑같이 가지고 있는데 우리만 가지고 있는 파일이 있었다는 말인가?"
중세의 고서적, <종말의 서곡>의 백업파일을 찾으려고 전 세계의 사이버캅 지부에 공문을 띄웠지만 돌아온 것은 모두 '그런 파일은 존재하지 않음' 이라는 한결같은 답변뿐이었다. 그 파일을 학수고대하던 P 박사도 역시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일이 가능한가?"
"아니야, 절대 불가능해. 이건..., 무언가 음모가 있어."
"혹시, 총본부장이란 자가 손을 쓴 게 아닐까?"
"뭐? 그럴 리가..."
P 박사의 말을 부인하려던 안 박사는 잠시 멈칫하며 다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아니야.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자라면 충분히 그럴 위인이야. 조사를 해 봐야겠어."
"조사? 어떻게?"
"지부장은 아무 지부에서나 피라미드 파일들을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있거든. 하긴 어느 지부나 다 같은 파일들이니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혹 피라미드를 도용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감찰의 권한을 준 것이지. 우선 코스모스 시티에 공문을 띄우고 허가가 나면 접속이 가능해."
다음날 아침 7시 30분.
허가 공문이 떨어졌다. 경계실에는 접속준비를 마친 안 박사와 P 박사가 VR접속기에 들어가 앉았다. 미치와 가무가 그들이 접속하는 동안의 비상연락을 맡기로 했다.
"이거 어색하군. 이런 건 처음이라서 말야."
P 박사는 유난히 큰 머리에 헬멧이 잘 맞지 않는지 자꾸 손으로 끼웠다 뺐다 반복했다.
"차츰 익숙해질 거야. 이 때까지 이런 거 한번 안 해봤다니 자네도 참 어지간하군."
P 박산느 녹색의 캡슐을 들고 말했다.
"이런 그린캡슐을 꼭 먹어야 하나?"
"그걸 먹어야 접속의 현실감이 더 높아진다네."
"참, 이건 꼭 마약 같구만."
P 박사는 찜찜한 기분으로 캡슐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미치가 상황을 보고사자 안 박사와 P 박사는 버츄얼 글라스를 내리고 접속버튼을 눌렀다. 순간 빛이 눈앞에서 얼굴 옆으로 확 당겨지며 안 박사와 P 박사의 아바타가 사이버스페이스에 떠올랐다.
"어이쿠."
P 박사는 허공에 서 있는 듯 방향감각을 찾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안 박사가 웃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난 P 박사는 그래도 헬멧이 이상한지 바로 쓰려고 애쓰고 있었다. 헬멧에 달린 글라스가 흔들리면서 P 박사의 눈에 들어오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영상이 지직거렸다.
"박사님, 웬만하면 참고 계시죠. 원래 큰 머리를 어떡하겠어요?"
웃음을 잔뜩 참고 있는 듯한 미치의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려왔다.
"알았네. 이럴 것 같아서 이런 건 안 하려고 했는데..."
"호호, 박사님도. 이제 준비 끝나셨으면 이동에 들어갑니다."
P 박사와 안 박사는 허공에 띄운 화상에서 이동 버튼을 눌렀다. 도착지는 코스모스 시티, 사이버캅 총본부. 순간 그들의 화상이 쉭 하고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이동에 들어가자 미치와 가무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딱히 할 일이 없는 그들은 멀뚱멀뚱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가무가 문득 물었다.
"미치! 넌 왜 이 사이버캅에 들어온 거지?"
"그냥. 멋있잖아."
"고작 그거야?"
"응, 글쎄.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좋아하긴 했어. 그러는 넌?"
"난...."
가무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사이버캅이 되었는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치도 대충은 알고 있었기에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가무를 보며 미치가 말했다.
"아주 어렸을 때 말야. 아빠는 바이오닉 제조공장에 다니는 인부였어. 그 때 아빠가 애완동물을 사준 적이 있어. 토모라고, 고양이야. 전쟁통에 공장에서 아빠가 돌아가시고 내게는 토모밖에 없었어. 그런데 이 토모가 이상해져서 집을 나가버렸어. 난 너무 외로웠지 근데 몇 주 호에 길거리에서 죽어있는 토모를 발견했는데 정말로 놀랐어. 그게 고양이가 아니고 장난감 로봇이었단 말야. 알고 보니 아빠가 다니던 공장에서 만들던 것이 바로 그런 거였데. 아빠가 돌아가신 것도 그 바이오닉들 때문이었다고 들었어."
"바이러스 때문이었구나."
"그래. 아빠를 돌아가시게 한 그 바이오닉을 내가 그렇게 옆에서 돌보았다는 게 정말 믿을 수 없었지. 그 때부터 난 바이오닉에 대해 광적으로 혐오감을 가지기 시작했어. 그게 아마 사이버캅에 들어온 이유가 될 거야."
"그랬구나.... 그래도 넌 그런 기억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난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전혀 없어. 그냥 중간에 툭 끊어진 것 같거든."
분위기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미치는 그런 분위기가 갑갑하다는 듯 말했다.
"그딴 거 뭐가 중요해? 지금이 중요한 거지. 안 그래?"
미치가 그렇게 말하자 가무의 얼굴이 이내 밝아졌다. 항상 그랬다. 미치는 조금이라도 심각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반면 가무는 늘 심각함에 빠져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가무는 그렇게 무겁게 가라앉기만 하는 자신이 싫었다. 가무는 가끔 생각했다. 미치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자신은 어쩌면 그 무거움 속에서 끔찍한 일생을 보냈을 것이라고.
경계실 계기판에 P 박사와 안 박사가 도착했다는 사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코스모스 시티. 사이버캅 총본부 네트워크.
P 박사와 안 박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이버캅 총본부 대기실에 도착해 있었다.
"이거 정말 놀랍군. 지구 반대편에 내 몸뚱아리가 있다는 게 믿어지질 않아."
"자네 같은 원시인도 없을 걸세."
잠시 후 네트워크 속으로 한 여자가 떠올랐다. P 박사는 유령처럼 나타난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 뒤로 주춤거렸다. 그녀는 P 박사를 무슨 괴물 보듯 힐끗 본 후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환영합니다. 전 샤샤라고 합니다. 두 분이신가요? 통보는 한 명으로 받았는데요."
조금은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이국적인 여자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사이버캅 요원인 듯 습관적으로 나오는 절도 있는 동작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 이 친구는 내 수행원일세."
"알겠습니다. 안 박사님. 어떤 자료를 열람하길 원하시나요?"
미처 그런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준비하지 못한 안 박사가 P 박사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안 박사는 사실 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마찬가지 였기 때문이다. P 박사가 짤막하게 말했다.
"단테의 '신곡'."
"아, 예. 그 자료에 문제가 생겼나 보죠?"
"사소한 문제요. 폰트에 이상이 생긴 정도니까."
P 박사가 대충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것은 단테의 '신곡'이 중세서고에 보관되어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이 척 잘 어울리는 샤샤는 근육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를 흔들며 앞서 걸어갔다.
"지금 이 곳은 한밤중입니다. 원래 한창 경비를 서야할 시각이지만 오늘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모든 경보를 해제해 놓았습니다. 보안상 시간은 1시간 정도로 제한됩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1시간이면 충분하니까요."
입구를 들어서며 샤샤가 말했다. 평소에 그 입구는 외부인이 들어오면 순식간에 지옥으로 돌변할 무시무시한 장치들이 되어 있었지만 경보가 해제된 상태라 평범한 벽돌로 세워진 굴을 연상케 했다. 벽면에는 어두운 복도를 밝혀주는 횃불이 타고 있었고 커다란 철문들이 각각의 표지판을 단 채 굳건히 닫혀있었다.
길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미로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P 박사와 안 박사는 마치 '신곡'에 등장하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연옥과 지옥을 향해 여행을 하는 주인공처럼 샤샤를 따라갔다. 안내자가 없었다면 틀림없이 길을 잃었을 것이다. P 박사가 맨 뒤쪽에서 안내자를 놓칠세라 허둥대는 모습인 반면 안 박사는 그 길이 익숙한 듯 여유 있게 주위를 둘러보며 피라미드의 밑으로 밑으로 계속해서 내려갔다.
피라미드 중간 지점을 지나 바닥에 가까워질 즈음 <중세서고>라는 표지가 달린 방이 눈에 들어왔다. 샤샤가 문고리 옆에 달린 스위치에 몇 개의 버튼을 누르자 쿵 소리와 함께 문의 잠금쇠가 풀렸다. 그녀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엄청난 두께였지만 그 문은 쉽게 열렸다. 문 앞에 선 샤샤가 안 박사에게 말했다.
"직접 찾아보시겠습니까? 전 사실 이런 방면에는 익숙지가 않아서요."
"그러지."
"전 밖에 있겠습니다."
"알았네."
안 박사와 P 박사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서고는 저자의 이니셜을 따 ABC 순서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들은 N이라고 적혀있는 책장 앞에 멈춰 섰다. P 박사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음, 그랬었군."
"뭐가?"
"'이니셜 N'은 <종말의 서곡>의 저자, 노튼을 말하는 거였어."
"'이니셜 N'이라니?"
"아담 프로젝트를 시작한 동기가 된 편지가 있었네. 그 편지에는 스스로 성장하는 메모리가 네트워크 어딘가에 실재한다는 내용과 그 네트워크에 도달할 수 있는 비밀코드 'SKY'가 들어있었지. 그 편지를 보낸 자의 이름에 '이니셜N'이라고 적혀 있었네."
"그렇다면 노튼이 자네에게 편지를 보냈었단 말인가?"
"그래. 에덴의 메모리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 것도 그였지."
"그렇다면 이 책은 확실히 중요한 문서가 되겠군."
"글세..., 일단 그 책을 찾아보면 뭔가가 나오겠지."
그들은 N 목록이 적혀있는 책장의 모든 책들을 샅샅이 뒤져 노튼이라는 이름의 저자가 쓴 책을 찾기 시작했다. 거의 20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들은 더 이상 찾아볼 책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동명이인의 전혀 다른 몇 개의 서적이 있을 뿐 어디에도 <종말의 서곡>이라는 책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없군. 누군가 파괴한 것이 틀림없어."
낙심한 안 박사가 황망히 일어서며 뻑뻑해진 허리를 두드렸다. 그 때 P 박사가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가만. 이것 좀 보게."
"뭐가 말인가?"
"이겨, 이 부분이 비어있지 않나?"
P 박사가 가리킨 곳에는 책 한 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비어있었다.
"그렇군. 혹시 그 공간이?"
P 박사는 그 빈 공간의 옆쪽에 있는 책들을 꺼내 들었다.
"맞았어! 바로 여기 있었어!"
P 박사가 들고 있는 책의 표지에는 무언가 금분으로 흐릿하게 <종말...서...>이라는 글자의 흔적이 찍혀 있었다. 아마도 이 파일을 싸고 있는 이미지 표면 파티클이 손상되었던 모양이다.
"본부장 그 자가 한 짓이 틀림없어. 권력에 눈이 멀어 이렇게 중요한 서적을 파기하다니. 이건 도저히 묵과할 일이 아니네."
안 박사는 분노에 차 불끈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무엇보다 책이 파기되었다는 사실이 몹시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P 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 책 안에 아담의 메모리를 복원할 수 있는 단서가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파기되었다니...
"이럴 게 아니네. 아직 파기되지 않았을지도 몰라."
"자네가 몰라서 하는 얘기야. 백업파일은 완전한 보관용일 뿐이야. 그게 사라졌다는 건 파기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거란 말야. 그리고 지워져 버린 파일은 영원히 복원될 수 없단 말일세."
"백업파일이 있다는 건 원본이 있다는 말 아닌가?"
"그것도 이미 알아봤는데 그 서책의 파일은 보관자가 노튼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리고 이 파일은 백업파일밖에 남아 있지 않아 사실상 원본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원본이었다구? 음....."
P 박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안 박사는 이미 그 파일은 찾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 때 P 박사가 자신 없는 어투로 말했다.
"최후의 방법이지만 시도해볼 만한 게 있어."
안 박사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P 박사를 바라봤다.
"진짜 원본은 남아있을지도 몰라."
안 박사의 머리에 불이 반짝 들어왔다.
"진짜 원본?"
"그래. 다행히 내가 아는 고서적 가게가 있으니 거기에 한번 가보지. 그 가게 주인이 생각보다 발이 넓으니까."
"그게 가능할까?"
"글쎄...잘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노력은 해봐야지."
그들은 대충 책을 정리해놓고 일어섰다. 이 때 갑자기 문이 확 열리며 샤샤가 뛰어들어왓따. 샤샤의얼굴은 심한 축역을 받은 듯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박사님. 죄송하지만 지금 즉시 나가주셔야 되겠습니다."
"왜 그러나?"
"총본부장님이..., 상해되셨답니다!"
"뭐라고?"
그들은 급히 피라미드를 빠져 나와 본부장의 방으로 달려갔다.
네트워크에 뜬 총본부장의 방은 깔끔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쪽에 침상이 한 개, 그리고 접속을 할 수 있는VR접속기가 방안에 놓여진 집기의 전부였다.
총본부장은 접속을 한 상태에서 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그의 아바타는 버츄얼 글라스를 그대로 끼고 있었고 접속기에 앉은 채로 죽어있었다. 총본부장의 우측 머리 쪽에는 그가 접속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듯 화면 하나가 허공에 떠 있었다. 건드리면 퉁겨져 나올 듯했던 뚱뚱한 몸체는 이제 차갑게 굳어 있었다. 안 박사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뇌 손상에 의한 사망일세. 즉사했어. 외부로부터 네트워크를 통해 공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네. 아마도 순식간에 당한 일이었을 거야."
"도대체 어떤 자가 감히!"
샤샤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 때 P 박사는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총본부장의 굳어있는 자세를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총본부장은 손바닥을 바라보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었고 무엇엔가 굉장히 놀라는 표정으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P 박사가 안 박사에게 말했다.
"바로 전에 총본부장이 접속한 곳을 확인할 수 있겠나?"
"물론이지."
안 박사는 총본부장의 아바타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총본부장의 손을 쥐고 허공에 떠 있는 화면에 그 손가락을 찍었다. 화면에 시간 순서대로 접속한 주소가 적혀져 나왔다.
코스코스 시티/ 피라미드/ 중세서고. 02:15.
쥬피터 시티. 01:17.
새턴 시티. 24:23.
비너스 시티. 24:02.
머큐리 시티. 23:41.
우라노스 시티. 23:22
넵튠 시티. 22:16.
안 박사와 P 박사가 알겠다는 듯 서로 눈을 마주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안 박사가 샤샤에게 말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되나?"
"아마, 제게 보고한 친구와 저, 그리고 박사님들뿐일 겁니다."
"그렇다면 샤샤, 자네는 이 사건이 외부에 누설되지 않도록 해주게. 그리고 지금 급히 각 지부에 비상회의를 소집한다는 통고를 해주게."
"예?"
"이 사실이 누설되면 어떤 혼란이 벌어질지 모르네. 일단은 내부적으로 본부장을 새로 선임한 후 사망소식을 알리는 게 순서일 것이네."
"알겠습니다."
"일단 우리는 이 정도에서 돌아가도록 하지. 지금 내가 한 말 명심하게."
오전 9시경.
가이아 시티. 사이버캅 경계실.
미치는 졸고 있었고 가무는 경직된 채 계기판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충 P 박사와 안 박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터라 가무는 이미 상황을 거의 파악하고 있었다. 가무가 급히 미치를 깨웠다.
"응...?"
"미치. 박사님들이 돌아오고 있어. 아무래도 중대한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아."
"무슨 일?"
여전히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미치가 물었다.
"총본부장이 살해된 것 같아."
"뭐?"
잠시 후 공간이동으로 가이아 시티에 돌아온 안 박사와 P 박사가 접속을 끊고 VR 접속기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같은 시각, 샤샤는 각 지부에 비상회의 소집을 통고하고 있었다.
"대충 상황은 들어서 알겠지? 하지만 절대 이 사실이 외부로 누출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돌아가서 평소대로 근무하되 사이버캅을 떠나지 않도록."
"예, 알겠습니다."
안 박사의 지시에 미치와 가무가 나가자 P 박사가 그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자네 아까 그 본부장의 자세를 봤나?"
"그래. 대충 짐작은 했지."
"무언가를 읽는 모습이었어. 분명히 그 책일 거야."
"접속 기록을 보니 총본부장이 각 지부에 직접 접속을 했더군. 일반적으로는 동시에 접속을 하거나 메일을 보내는 것이 상례인데 말야. 무언가 긴말한 얘기를 나눈 것이 틀림없어."
"맞아. 본부장은 다른 지부에 그 파일을 모두 파기하라고 명령하고는 본부에 있는 그 파일에 호기심이 생겼던 거야. 그리고 파기하기 정에 읽어보았던 거지. 그러다 사고를 당한 거야. 누군가 그 파일을 독점하려 하고 있어."
"독점한다구?"
"그렇지. 그 속에 그런 엄청난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네. 그건 본부장의 사망 직전 표정에도 나타나 있지 않나?"
"일단, 난 비상회의에 참석해 이 사태를 논의해봐야겠어. 도대체가 말야, 다들 썩었어. 외부의 적이 들어오고 있는데 내분을 일삼고 있으니 말야."
"그래. 그런 게 항상 문제지. 난 그 문서의 원본을 찾아보겠네."
오전 10시 14분 경.
C 구역. 하늘 위로 무반선 하나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 무반선은 C구역의 슬럼가로 곧장 날아갔다. 그리고 한 지점에 멈춰 서더니 서서히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반선이 내린 곳은 슬럼가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허름한 가옥들이 몇 채 있었지만 대부분은 비어있는 듯했고 거리에는 아이들조차 없었다. 무반선에서 P 박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유령도시처럼 텅 빈 거리를 가로질러 한 상점 앞에 서더니 누렇게 바래져 글자조차 희미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개미 고서적.
그는 기름칠이 되어 있지 않아 끼익끼익대며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는 뻑뻑한 문을 간신히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봐, 호리! 문 좀 고치라고 했더니 여전히 그대로군."
P 박사는 문을 열며 그렇게 말했다. 어둠 속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치긴 왜 고쳐? 누가 오면 소리나라고 일부러 그대로 두는 건데."
60대 정도로 보이는 노인 호리가 꾸부정한 허리를 하고 힘겹게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호리의 얼굴은 어딘지 개미를 닮아 있었다. 뾰족한 턱에 삐죽 나온 입, 뿔테 안경 너머로 쑥 들어간 눈자위, 그리고 비쩍 마른 상체와 반대로 살이 두툼하게 오른 하체. 특히 그 반짝 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속을 가늠하게 어려울 정도로 깊었다.
"불 좀 켜게. 어두워서 원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나?"
호리는 한 쪽에 놓여진 촛불에 불을 붙였다. 여전히 침침하지만 내부를 비추기에는 충분한 빛이었다. 빛을 받아 드러난 실내는 보기보다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아무렇게나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책장 같은 것은 아예 없었고 대충 던져진 듯한 책 위에는 두텁게 먼지가 덮여 있었다.
"뭣 땜에 왔어? 벌써 다 읽었나? 그 뭐였더라? 그래. 라블레의<가르강튀아>라는 책 말야. 하여간 이상한 취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어쨌든 자네가 주문한 <팡타그뤼엘>이라는 책을 구해놓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닐세. 다른 책을 찾고 있어."
"이번엔 또 어떤 걸까 궁금해지는데?"
"여기에 중세고서적들이 얼마나 있나?"
"글세 세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이 도시에서는 제일 많을 거야. 자네도 잘 알면서 그런 건 왜 물어?"
"이건 좀 특이한 책이라서 말이야."
"어떤 건데?"
"노튼이라는 사람이 쓴 <종말의 서곡>."
"거 참 제목 한번 살벌하군 그래. 들어보지 못한 제목인데...한번 찾아보지."
"지금 당장 찾아봤으면 하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
그렇게 반문하면서 호리는 P 박사의 얼굴을 살폈다. 제법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으므로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좀 더 그럴 듯 한 가격을 부를 수 있을 거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바로 찾을 수 있는 책도 일부러 다음에 올 때까지 찾아놓겠다고 하며 사람들을 돌려보내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책이 귀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두 배에 가까운 책값도 아깝지 않은 듯 선뜻 내밀곤 했던 것이다. 물론 P 박사도 그의 그런 수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속는 척 해오고 있었다.
"가격은 얼마라도 좋네. 당장 사갈 수만 있다면."
호리의 입에 헤벌어졌다. 사실 요즘 들어 이런 가게를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일단 먹고살아야겠기에 그는 거의 반값에 책을 마구 팔고 있었다. 그런데 부르는 게 값이라니.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찾아볼까?"
호리는 손을 탁탁 쳐가며 의욕을 보였다.
"그런 귀한 책들은 이 곳에 없지. 날 따라와 봐."
그는 촛불을 들고 가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 쪽 끝에 지하로 내려가는 나선형 계단이 있었다. P 박사는 그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계단을 내려가면서 P 박사는 적잖아 놀라고 있었다. 웬만한 도서관 수준을 능가할 만큼 책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간은 더욱 넓어졌고 그만큼 쌓여진 책들도 점점 더 많아졌다..
"이거 완전히 개미굴이구만. 자네가 이 굴에 둥지를 틀고 밖으로 안 나오는 이유를 알겠어."
"모르는 소리하고 있구만. 이 책들은 여왕개미나 마찬가지야. 언제나 나 같은 일개미의 손길을 요구한다구."
지하 5층 정도 내려왔을까? 호리는 계단을 빠져 나와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중세서적들이 있는 곳이지. 어때? 생각보다 엄청나지?"
"대단하군. 자넨 시대를 잘못 타고났어. 한 3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자넨 아주 유명한 골동품상이 되어 있을 거야."
"사실 우리 노인네가 꽤 유명한 골동품상이었지."
"그러면 이 집 전 주인이라는 사람이 자네 아버지였나?"
"그래. 그깟 골동품상이면 뭐해? 요즘 시대에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구. 이 가게와 책을 유산으로 받고는 내 평생 이 곳에서 썩었어. 이 많은 책을 어디 갖다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도 없고. 젠장, 빌어먹을 책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야."
호리는 괜히 화가 나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보게. 자네의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훌륭한 일인지 잘 모르는군."
"훌륭한 게 밥 먹여 줘? 요즘 이딴 책들은 컴퓨터 속에 가면 다 있다구. 자네 같은 머저리나 책을 찾지."
"허허, 그만두세.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자네가 지금 찾고 있는 그 책은 인류의 운명을 바꿀만한 것일세. 자네가 찾아낸다면 자넨 실로 엄청난 일을 하게 되는 것이지."
"자네 날 놀리나? 잔말 말고 여기 어디쯤 있을 테니까 같이 좀 찾아보자구."
호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수천 권은 되어 보이는 책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쌓여있었다.
"정말 지긋지긋하게 많군. 이런 서점 하나 갖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에 호리가 P 박사를 노려보았다. P 박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밑에서부터 책을 하나하나 살펴가기 시작했다.
오후 1시경. 사이버캅 회의실.
숨막힐 듯한 정적이 무겁게 장내를 짓누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 정적을 깨고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안 박사는 잔뜩 불쾌한 얼굴로 앉아 테이블 위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코스모스 시티를 제외한 21개 지부 중 3개 시티의 지부장들이 불참했기 때문이었다. 안 박사는 그 날 12시경 샤샤로부터 전날 밤 3개 시티의 지부장들이 살해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들도 무도 총본부장과 같은 자세로 싸늘하게 식은 채 발견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별고 없이 참석한 18개 시티의 지부장들도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총본부장의 명령이라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안 박사가 서슬이 퍼런 안색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정적을 뚫고 안 박사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보관하는 문서를 마음대로 파기하는 그런 권리는 또 언제부터 당신들이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이 문제로 자신들의 목이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난번 회의가 끝나고 개별적으로 총본부장과 접촉했고 그의 권고대로 이 회의에 참석한 인원들은 모두 <종말의 서곡>이라는 서적의 파일을 파기시켜 버렸다. 나머지 3명의 지부장은 역시 호기심에 이끌려 총본부장과 똑같은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왜 모두 벙어리가 됐습니까? 말을 해보세요! 말을!"
쥬피터 시티의 지부장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땠다. 왠지 그는 쥐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안 박사.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저희들도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겁니다. 잘 아시다시피 총본부장의 명을 거역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잖습니까?"
사이버캅 조직은 원래 피라미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가장 높은 사람이 군림하는 그런 체계가 아니라 소수가 높은 지위에 있고 다수가 낮은 지위에 있어, 언제라도 뒤쪽의 잘못을 다수가 지적하면 물러나는 그런 체계였다. 하지만 살해당한 코스모스 시티의 총본부장은 그런 식으로 조직을 운영하지 않았다. 그는 술수와 기만을 파벌을 조성하여 아랫사람들을 매수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넓혀 놓았다. 결국 민주적인 체계는 무너지고 총본부장은 모든 지부장들을 장악하고 그 위에 군림했다. 총본부장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파면을 의미했다.
안 박사가 조금 화를 누그러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쥬피터 시티의 지부장이 그 기회를 놓칠세라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과거의 잘못만을 탓할 게 아니라 총본부장을 선임하는 것이 우선일 듯 싶습니다."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던 지부장들이 모두 나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습니다. 총본부장의 자리가 공석이 되면 네트워크는 순식간에 아노미상태가 될 것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안 박사를 생각해 왔소만."
"그게 좋겠습니다."
"나도 찬성이오."
그러나 정작 안 박사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의 차가운 눈빛이 다시 지부장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난 관심 없소. 총본부장은 당연히 임기가 끝날 때까지 코스모스 시티의 부본부장이 맡아야 할 것이오. 그리고..."
안 박사가 듣기 좋으라고 떠들어대던 지부장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이 창피했던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이 본격화된 네트워크 전쟁을 막을 대안을 세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방법이 있습니까?"
고양이 앞의 쥐같이 고개를 숙이고 지부장들의 눈치를 살피던 쥬피터 시티의 지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방법? 그게 사이버캅을 맡고있는 지부장이 할 소립니까? 우리가 막지 않으면 그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일단은 돌아들 가서 전시상황으로 조직을 제정비하고 힘을 하나로 모아야합니다. 그리고 각 지부에서 현재 진행중인 벨라도나에 대한 연구결과를 공유하고 그 백신을 하루빨리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각 지부장들은 '벨라도나에 대한 연구결과'라는 말에 뜨끔했다. 사실 그들은 권력다툼에 정신이 팔려 연구에 그다지 열성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을 익히 아는 안 박사는 이젠 달래는 듯 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까지의 잘못을 자책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연구팀을 조직해 백신을 만드는 데 총력을 다해봅시다!"
그제서야 지부장들은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엔 무언가 해봐야겠다는 결의가 엿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안 박사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도대체 그 놈의 바이러스에 대항할 백신이 어떤 것이란 말인가? 그것을 제조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백신과 바이러스는 백지 한 장 차이지만 파괴하기는 쉽고 복원하기는 어려운 것이 이치라...그 바이러스가 최상의 기술로 만들어졌다면 백신을 제조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오후 2시 52분. 개미 고서적.
P 박사는 벌써 3시간 째 지하 5층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책을 찾고 있었다. 많이 쌓여있기도 한데다가 정리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아서 찾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분명히 있을 거야. 거의 대부분의 중세서적들은 여기 다 있거든."
호리는 코를 타고 흘러내리는 뿔테안경을 가운데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미안한 듯 중얼거렸다.
"떠들 시간 있으면 하나라도 더 찾아보겠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위쪽에 쌓인 책들을 살펴보고 있던 P 박사가 지친 듯이 투덜거렸다.
"근데. 그 서적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막 나가는 이 세상을 굴할 만큼."
"세상에 그런 책이 어딨어?"
"이 노인네, 서점 하면서 책은 안 읽나보군. 책 한 권 때문에 수천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된 적도 있다구."
"그런 책이 있다구?"
"대표적인 책이 바로 이 책이지. <마녀들의 햄머>. 마녀사냥의 지침서가 된 책이야."
P 박사는 막 손에 잡힌 그 책을 예로 들어 보이며 말했다. 책을 찾다말고 호리가 고개를 들었다.
"뭐? 무슨 햄머라고? 해머로 깨 죽였나보지? 낄낄..."
그는 툴툴대는 P 박사를 은근히 비꼬았다. P 박사는 관두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시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마녀들의 햄머>라는 책 몇 권 위쪽에 두터운 양피지로 된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하여간 마녀들은 전부 때려죽여야 돼. 요즘 세상에도 마녀들이 들끓잖나? 이미지로 현혹해서 정신을 피폐시키고 사실은 등쳐먹는 정부관료들 말야. 디지털화다 뭐다 해서 책들을 사장시킨 놈들. 나 같은 노인네를 위한 복지정책 따윈 아예 세우지도 않더라구."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부당함을 마녀들을 빌려 꼬집고 있었다. 하지만 P 박사는 호리의 말을 전혀 듣고 있는 눈치가 아니었다. 왠지 그 책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책을 힘겹게 꺼내들었다. 먼지가 두텁게 덮여있어 겉표지의 제목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바닥으로 겉표지의 먼지를 털어냈다.
"쿨럭 쿨럭... 왜 먼지는 떨고 그래? 여기 있는 책에 쌓인 먼지를 다 떨어내면 엄청난 황사가 이 도시를 가득 채울 거야. 그래, 먼지공격으로 한번 세상을 뒤집어 볼까? 히히--."
"차..찾았어...!"
이 때 P 박사의 떨리는 목소리가 지하서고에 울려 퍼졌다. 호리는 손길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몹시 흥분한 듯 희열에 찬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P 박사가 들어왔다.
P 박사가 손에 든 책표지에는 양피지 위에 금장으로 <종말의 서곡>- '마법사 노튼의 일기' 라고 쓰여있었다.
"역시 금장이었군! 금분으로 쓴 거야!"
사다리를 내려온 P 박사는 희열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호리는 아무래도 P 박사가 그렇게 흥분하는 것이 미덥잖은 모양이었다. 그가 다가와서 머리를 비쭉 들이밀었다.
"책 속에 금이라도 들어있나?"
"이 친구, 금이 무언가? 더 귀중한 글들이 들어있지."
"어디 무슨 책인지 구경이나 해보자."
그러나 P 박사는 첫 장을 넘기려던 손을 멈추고 다시 덮어버렸다.
"나중에 보게. 지금은 보지 않는 게 좋아."
본능적으로 P 박사는 그 책을 본 총본부장의 죽음을 떠올렸다. 호리는 기분이 상했지만 곧 돈 받을 생각을 하며 애써 낯빛을 고쳤다.
"칫, 알았어. 그저 희귀한 책이라면 자지가 제일 먼저 읽으려고들 난리지."
1층 카운터로 올라온 호리는대뜸 돈 얘기부터 꺼냈다.
"그래, 얼마 쳐줄건가?"
"이미 말했듯이 원하는 대로."
호리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대부분의 고서적 저격은 정해져 있었다. 물론 디지털화된 돈은 숫자로만 캐쉬카드에 입력됐지만 그 가격은 대체로 5만 디지털 머니를 넘지 않았다 그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 열 배를 불렀다.
"50만."
"알았네, 즉지 지불하지."
그 책이 가진 비밀에 비하면 그 가격은 너무나 적은 것이었다. P 박사는 주머니에서 캐쉬카드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그가 너무나 선뜻 대답하는 바람에 호리는 조금 손해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봐. 그건 순전히 책값이고 그걸 찾는데 든 수고비가 추가돼야겠어."
순 억지였다. 그 책은 P 박사가 찾은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나 P 박사는 여전히 담담하게 물었다.
"얼마면 되겠나?"
"10만."
"알았네. 도합 60만을 자네 카드에 입력하겠네."
이번에도 평소 수고비의 10배를 불렀지만 P 박사는 선뜻 그 제의를 수락했다. 호리는 더욱 욕심이 생겼다. P 박사는 카드를 한쪽에 놓은 단말기에 그은 뒤 숫자를 입력했다. 막 손을 떼려는 순간 호리가 P 박사의 손목을 잡았다.
"세탁비하고 세금이 빠졌네."
호리와 P 박사의 눈이 마주쳤다. P 박사가 싱긋 웃었다.
"한 10만 더 넣으면 되겠지?"
호리는 이게 웬 횡재냐는 표정을 지었다. 거의 6개월 동안 먼지를 뒤집어쓰며 모아야 하는 액수를 하루에 벌다니. 그것도 책 한 권으로. 그는 단말기에 입력된 70만이라는 숫자를 믿기 어려운 듯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P 박사는 서두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호리는 그런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숫자만이 그의 머리 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을 나서며 P 박사가 던지는 말에 호리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이 책으로 만약 세상을 구한다면 자네에게 오늘 준 액수의 100배를 지급하지. 그럼 또 봄세."
P 박사가 나가고 혼자 남은 호리는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손가락을 집어가며 액수를 계산해보았다.
'70만에 100배면...7백만, 7천만, 7억, 헉!'
호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니 기도했다.
'제발 구해라, 구해. 이 더러운 세상, 한번 구해봐라....'
같은 날 오후 3시 40분 경. 캡슐룸.
안 박사와 한 연구원은 캡슐룸에서 가수면 상태에 빠져있는 아담의 뇌를 살피고 있었다. 아담의 뇌를 체크하던 연구원이 급하게 안 박사를 불렀던 것이다.
아담의 뇌의 황금빛 속으로 점점이 보이던 붉은 입자들은 그 영역이 현저히 넓어진 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절망적입니다. 이 바이오닉의 뇌는 이미 80%가 벨라도나에 장악되었습니다. 오늘밤을 넘기면 아마 완전히 장악될 것입니다. 더 이상 방치하다가는 보다 심각한 사태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결정을 내리셔야 할 때입니다."
연구원은 이런 상태가 되도록 방치하고 있는 안 박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즉시 메모리를 지워버렸을 터였다. 그러나 안 박사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박사님!!"
"그만 됐네. 이제 자넨 나가보도록 하게."
연구원은 무언가 더 예기를 하고 싶었지만 안 박사의 성격을 아는지라 그만두었다.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연구원이 못마땅한 얼굴로 캡슐룸을 나서자 안 박사는 캡슐에 들어있는 아담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아담에게는 젊은 시절 그의 꿈이 담겨 있었다. 가장 인간 같은 바이오닉을 만들어 보겠다고 밤잠을 설쳐가며 매달렸었다.
대학시절P, 박사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시에 경쟁자였다. 어떤 것이든 자신을 한 발 앞서 나가는 P 박사를 이기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써왔다. 사회에 나와서 P 박사가 메모리 연구를 통해 촉망받는 연구원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을 때도 그는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꼈었다. 그리고 그 질투심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힘이 되어주곤 했다.
P 박사가 아담의 육체를 자신에게 의뢰했을 때도 그는 마치 자신이 그에게 인정받은 듯한 만족감을 느꼈고 최고의 육신을 만들어 그를 놀래주고 싶었다. 그리고P 박사가 그의 작품을 보고 감탄했을 때 그는 드디어 P 박사와의 경쟁에서 자신이 승리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의 승리였을 뿐이었다. 수연을 본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는 또 다시 경쟁심이 불타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수연을 차지했지만 그녀는 죽었다. 아니 죽음을 향해 달려갔다. 그것이 그에게 할 수 있는 그녀의 유일한 보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그는 사실 P 박사와 경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칠 줄 모르는 자신의 질투심과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P 박사는 은둔한 채 자신의 내면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 버렸던 것이다. 이제 안 박사에게 있어서 P 박사와 아담은 항상 부채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하짐나 이제 미모리를 지워야만 한다.
그 의미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P 박사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백지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사실 그와 그의 질투심과의 경쟁에서 승리자는 없었다. 다만 패배자와 피해자만 있을 뿐이었다. 그 패배자는 바로 자신이었고 피해자는 다름 아닌 P 박사와 수연이었다.
안 박사는 고민을 떨어버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할 일은 역시 아담의 메모리를 지워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휴대용 단말기를 꺼내 가무에게 연락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조그만 단말기 모니터에 가무의 영상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도록. 오늘 새벽에 아담의 메모리를 지운다. 단 내일 아침가지 이 사실이 외부에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라. 특히 P 박사가 이 사실을 모르도록 해야한다."
"예 알겠습니다."
무뚝뚝한 말을 내뱉은 안 박사의 지시가 더 이상 없자 가무는 단말기를 껐다. 단말기에서 가무의 영상이 사라지자 안 박사는 도망치듯 캡슐룸을 빠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