護軍李公墓碣銘 並序 (小訥先生文集卷之三十八) 공은 휘는 유기(有杞)이고 字는 수일(守一)이며, 호는 심헌(心軒)이다. 이씨는 신라 개국공신 알평(謁平 )의 후손으로 본관은 월성(月城)이다. 七세인 휘는 우칭(禹偁)에 이르러 재령(載寧)으로 옮겨 봉해졌다. 상장군(上將軍) 휘 소봉(小鳳)이 있었는데, 고려 공민왕(恭愍王) 따님에게 장가들어 사재령(司宰令) 일선(日善)을 낳았다. 사재령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맏은 신(申)이니 지평(持平)으로 호는 계은(溪隱)인데 효행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다음은 술(戌)이니 사정(司正)이며 축(丑)은 진사(進士)이며, 오(午)는 진사로 호는 모은(茅隱)인데 서원(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다섯째가 유(酉)이니 은거(隱居)하고 벼슬하지 않았으니 공에게 八대조가 된다. 증조부는 휘가 사선(士善)이며, 조부는 휘가 득부(得富)이니 동중추(同中樞)이며 아버지는 휘가 몽간(夢柬)이니 어모장군(禦侮將軍)이다. 공은 원효왕(元孝王) 원년 을묘년(乙卯年, 1675년)에 태어났다. 五세에 아버지가 제삿날을 당해 재계하는 것을 보고 옆에 모시고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고기를 주자, 그를 물리치며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께서 잡수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六세에 취학(就學)하였는데, 날마다 四十자씩 외웠다. 이어서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집과 마루를 물 뿌리고 청소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린아이가 힘들지 않느냐’ 하니, 끓어 앉아 대답하기를 ‘소학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것을 먼저 합니다. 글을 읽고도 행하지 않으면 글을 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무릇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일체 <소학>에 의하여 행하였다. 一五세가 되자마자, 이미 육경(六 經)을 다 읽었다. 이에 책 상자를 지고 먼 지방을 노닐며 그 학업을 넓혔다. 이때 조정에서 무사를 모집하였다. 공이 기우(器宇, 도량 덕량을 말함)가 장대하고 풍체가 헌걸차다 하여, 천거하는 이가 있었다. 주상이 공을 불러 보고 겸사복(兼司 僕)을 제수하고, 다시 관직을 제수하였다. 병신년(1716년)에 붕당(朋黨)이 날마다 일어나서 조정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휴가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서실(書室)을 지어 자제들을 가르쳤다. 이듬해에 어영천총(御營千摠)으로 부름을 받았다. 부임해서는 힘을 다해 일을 보고 사졸들을 다독거려 기름으로써 환심을 깊이 얻었다. 경자년(1720년)에 원효왕(元孝王=숙종)이 승하하자, 공은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애통하며 뷰루짖어 울었다. 붕당의 논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형륙(刑戮)이 무상하게 행해지자, 하늘을 보고 탄식하기를,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족하다‘ 하고, 마침내 귀전원시(歸田園詩)를 짓고 돌아와서, 그 활과 말의 기구를 다 버리고 성리서(性理書)를 가져다가 읽었다. 그리고 손수 선대의 사적을 써서 간직하며 말하기를, ’내 자손이 이를 보고 가문을 욕되게 함이 없는 것이 행복하겠다.‘ 하였다. 경오년(1750년)에 고년(高年)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여 용양위 호군(龍驤衛護軍)에 제수되었다. 원릉(元陵=영조) 병자년(1756년)에 함안군(咸安郡) 안대산(安代山)의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마치니 수가 八二이다. 돈지(遯池) 선영(先塋) 임방(壬方)을 등진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으로 벽진(碧珍) 이성달(李聖達)의 딸이다. 三남 二녀를 길렀다. 아들은 지창(枝昌) 지영(枝永) 지삼(枝三)이고, 딸은 각각 조종원(趙宗元) 윤세형(尹世亨)의 아내이다. 손자는 정호(挺皓) 정록(挺祿) 정춘(挺春) 정휘(挺輝) 만백(萬白) 동백(東白) 성백(聖白) 성배(聖培) 성태(聖泰)이다. 六세손 전 비서승(秘書丞) 우영(宇榮)씨가 옛 상자 속에서 유초(遺草)를 얻었는데, 족히 가문 대대로 전해오던 고사(古事)를 증명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 참봉(參奉) 수학(壽鶴)을 시켜 그를 편집하여 장차 영구 전하게 하는 한편, 돌을 다듬어 묘도(墓道)를 표시하려 하면서, 나에게 묘갈문(墓碣文)을 청했다. 내가 저으기 생각하면, 공은 휼륭한 재능을 품고 밝은 임금을 만났으니, 바야흐로 아침 저녁 사이에 공적을 세울 수 있었을 터인데, 곧 자신을 거두어 물러났으니, 시운이며 천명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得之縫夜之列 선비의 반열(班列)에서 얻어 而養爲干城之具 간성(干城)의 재능을 배양하였으니 哲辟之知也 이는 착한 임금이 알아줌이고, 未遂尊攘之志 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而遽畏黨錮而歸 갑자기 당쟁의 화를 두려워하여 고향으로 돌아 왔으니 志士之悲也 이는 지사(志士)의 슬픔이다.
계축년(1913) 九月下旬 光州 盧相稷은 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