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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순감옥(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
여순일아감옥구지전시관은 현재 중국 요녕성 대련시 여순에 위치하고 있다. 이 감옥은 청일전쟁 후에 요동지방을 점령한 일본을 삼국간섭을 통해 축출하고, 청나라 정부를 핍박하여 러시아가 조차한 후 1902년에 건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러일전쟁으로 중단되고 러시아군의 야전병원과 기병병영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은 요동지방을 점령한 후 감옥서를 설립하고 여순에 본 감옥, 대련에 분 감옥, 금주에 출장소(임시구류소)를 각각 설치하였다. 동시에 러시아가 완성하지 못한 감옥건물공사를 확대 시공하여 1907년에 완공하고 ‘관동도독부감옥서’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일본 식민통기관의 변화에 따라 감옥의 명칭도 따라서 변하였는데, 관동청감옥(1920)·관동청형무소(1926)·관동형무소(1934)·여순형무소(1939) 등으로 지칭되었다.
감옥은 부지 27,500㎡, 감방 253개와 지하감방 4개, 그리고 15개 부설공장을 가진 대규모로, 동시에 2,000여명을 수감할 수 있는데 그 모양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와 매우 흡사하다. 이 감옥은 중국 공산당원들을 비롯해 한국·일본·러시아·이집트·터키·독일 등의 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곳이다. 그 중에는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도 포함되어 있다.
▲ 사형당한 사람의 유골
해방 후에 장기간 방치되어 있다가 1971년에 진열관으로 개관되었다. 1988년 중국정부는 감옥건물을 ‘전국중점보호단위’로 지정하였고, 1994년에 대련시정부는 또 ‘애국주의교육기지’로 지정하였다. 이후 일약 대련지방의 관광명소가 되어, 한해에 약 60여만 명의 관람객들이 찾고 있다. 100여 년의 세파 속에서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여순감옥은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침략하고, 약속민족의 인권을 유린한 유력한 역사적 증거이다. 오늘도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고귀한 뜻을 길이고 인류의 평화를 지향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고 있다
▣ 몸 수색실(檢身室)
감옥의 동쪽에는 3칸으로 된 몸 수색실이 있다.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은 매일 아침에 감옥 부속 공장으로 복역하러 갈 때면 이곳에서 죄수복을 벗고 간수의 검사를 받았다. 저녁에 감방으로 돌아올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것은 죄수들이 흉기를 소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엄동설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몸 수색실에는 죄수들이 착용하였던 죄수복이 진열되어 있는데, 붉은 색은 수감된 지 얼마 안 되는 죄수들이 복장이고 푸른색은 장기수들이 착용하였던 복장이다. 수감된 죄수들을 이간·분화하려는 일본인 간수들의 간교한 술책을 엿볼 수 있는 일면이라고 하겠다.
▣ 동쪽 감방
▲ 죄수들이 사용한 밥그릇 - 크기가 다르다
동쪽 감방은 3층으로 되어있는데 총 87칸으로 정치범을 수감하였던 곳이다. 1·2층은 보통감방으로 규정상에는 한 칸에 7∼8명을 수감하였지만, 흔히 십여 명씩 수감하였기 때문에 죄수들은 누워 잠을 잘 수조차 없었다. 3층은 독방으로 사형을 판결 받았거나 판결을 대기하는 죄수들을 수감하였던 곳이다.
감방 벽에는 중·한·일어로 된 감옥 규정이 붙어져 있다. 규정에는 죄수들은 감방 내에서 서로 마주하거나 말을 하는 것을 금지하며 무릎을 꿇고 있거나 혹은 방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약 이를 위반한 죄수가 있다면 가벼운 자에게는 밥을 적게 주는데 그쳤지만, 중한 자는 고문실에 끌고 가 나무틀에 묶어 놓고 혹은 높은 곳에 달아놓고 호된 매질을 하였는데, 그래도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암방에 가두었다. 감방구석에는 나무로 만든 변기와 물통이 있고, 가름대 위에는 식기가 놓여 있다. 감방 문 옆에는 나무 패쪽이 있는데, 간수들은 패쪽에 있는 번호에 따라 죄수를 점검하였다.
▣ 암방
암방은 일본 관리에게 복종하지 않는 항일지사와 애국동포들을 잔혹하게 학대하던 감옥 안의 감옥이었다. 암방은 모두 4칸이 있는데, 매 칸은 길이 1.7m, 너비 1.45m, 높이 2.38m밖에 안 된다. 사면이 벽으로 완전히 막혀, 하루 종일 아무런 광선도 없고 습기가 또한 가득하였다. 벽에는 나팔모양의 구멍이 있었는데, 간수는 이 구멍을 통하여 죄수의 일거일동을 감시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복하면 특수 제작한 무거운 수갑을 채우고 고무로 만든 옷을 입히는데, 암방에 갇히면 적어서 3∼5일, 많게는 1주일 동안 갇히었다. 수일 동안 암흑 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와 강렬한 햇빛을 보고 실명한 죄수들도 있다고 한다.
▣ 고문실
고문실은 수감된 죄수들의 인권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던 곳이다. 1908년, 일본 관동도독부는 「벌금 및 태형 처벌령」을 반포하고 감옥 내에서 임의로 형벌을 가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는데, 감옥 내에서는 간수가 감옥규정을 위반한 죄수와 구류하였으나 판결하지 않은 사람은 대나무로 만든 곤장과 쇠몽둥이로 구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실지로 일부 항일투사들은 이른바 이러한 심문 중에 생죽음을 당하였다.
▣ 서쪽 감방
서쪽에는 감방이 모두 82칸이 있는데 2층으로 되어 있다. 2층에서도 아래층을 감시할 수 있도록 복도 바닥에 철 막대기를 깔아놓았다.
▣ 삼각구역(三角地)
서쪽 감방 건물과 가운데 감방 건물 사이에 있는 삼각구역은 죄수들이 소풍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죄수들은 소풍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서로 소식을 전하고 고무 격려하였는데, 1941년 왕기환·구청평·녕학현 등 3명은 바로 이곳에서 중국 옥중지부를 설립하였다.
▣ 북대문(北大門)
감옥 후문으로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북대문이라고 한다. 1944년 가을, 제8공장에서 일하는 죄수들은 가위 반쪽으로 간수를 찔러 죽이고 집단 탈옥하였다.
▲여순감옥 사형장
▣ 사형장(死刑場)
사형장은 1934년에 신설한 교수형장인데, 여기에서만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수천 명의 항일지사와 애국동포가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만도 700여 명이 처형된 것으로 집결된다. 1942년 12월의 어느 이틀 사이에 이곳에서 기수선 등 9명의 항일지사들이 처형되었다. 일본은 항복한 이튿날에도 이곳에서 중공당원 유봉천·하한청 등 6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 증거물 전시
1894년 청일전쟁부터 대련과 여순지방은 줄곧 제국주의 치열한 쟁탈 속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감수하였다. 특히 1904년 여순에서 발발한 러일전쟁은 근대역사에서 보기 드문 대전으로, 오늘까지도 전쟁의 유적과 유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 안중근 의사 흉상
▣ 안중근 의사 전시관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동양평화의 교란자요 일본 제국주의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고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었다.
▲ 안중근 의사의 유묵-옥중 붓글씨
일본은 당시 하얼빈을 관할하고 있던 러시아에 압력을 행사해 러시아 헌병으로부터 바로 안중근 의사를 넘겨받아 주하얼빈일본총영사관에서 기본취조를 마치고 11월 3일 여순감옥에 수감하였다.
안중근은 수감 중에 여순 소재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6회의 공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안중근은 항고를 포기하고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자서전은 탈고하였으나 동양평화론은 서론부분인 전감만을 쓸 무렵, 일본이 약속을 어기고 조기 사형집행을 강행하여 본론과 결론 부분에 대한 대강은 고등법원장과의 대화를 통한 속기록으로 남겼다. 또 수감 중에 200여편의 주옥같은 유묵을 남겨서 현재 발견된 진본의 상당수가 국가보물로 지정되었다. 안중근의 수감 감방과 순국지, 유해매장지 등은 일본의 철저한 은폐로 아직도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2000년 7월 6일 안중근의사의 순국당시의 교형장 위치를 알려주는 자료를 여순수도국 당안관에서 발굴하여 관련 학자들의 고증을 거쳐 한-중 양국에서 동시에 언론에 발표하고, 교형장에 안중근 의사 동상과 자료 등을 설치, 안중근 의사 독립전시관을 마련했다.
2. 여순감옥과 독립운동가들
▣ 신채호(申采浩)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어났다. 19세인 1898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신채호는 그곳에서 백암 박은식이 주도한 진보적 유학을 접하면서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신채호는 1905년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에 논설기자로 입사하게 되면서 한말 언론계에 입신, 애국계몽운동의 이론가로서 그의 이름을 떨치게 된다. 1906년부터는 대한매일신보에 참여하여 주필로서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노력하였다.
1907년 신채호는 안창호 등과 신민회 창립위원으로 참가하여 대한신민회취지서를 기초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같은 해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 본인 자신은 금연을 결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채호는 역사 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태리건국삼걸전, 을지문덕, 이순신전 등 위인전을 저술하였고, 독사신론을 통해 민족주의 역사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국권회복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국민의 애국심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민족주의적 역사를 저술하여 온 국민에게 읽히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함을 통감하였다. 그리하여 독사신론에서 격렬한 필치로 초기 식민주의사관의 거짓학설에 학문적 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족주의에 입각한 한국고대사 재구성에 노력했다.
한편 1911년에는 독립운동을 위하여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 이동휘, 이갑 등과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3년에는 신규식의 주선으로 상해로 가서 동제사에 참여하고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조소앙 등과 함께 박달학원을 세워 중국에 있는 한국청년들의 민족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봉천성 회인현에서 윤세복이 경영하는 동창학교의 교사로 초빙을 받아 청소년들에게 국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조선사’를 집필하기도 하였으며, 이
▲ 감방 앞에 전시된 신채호 사진
시기에 만주 일대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민족사학의 실증적 토대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에 가까워지자 국외의 망명지도자들 사이에는 국제정세의 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하였고 신채호 역시 이 두 선언에 참여하였다. 또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경, 천진 등에 유학하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단이 조직되었는데 이때 단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이어 상해로 가서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의정원회의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그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이를 반대하고 퇴장하였다. 제2회 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제5회 의정원회의에서는 전원위원회 위원장과 충청도 위원에 선출되었다. 1919년 9월 상해임시정부가 노령임시정부(국민의회)와 한성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통합 임시정부로 발전할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다시 분개하여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反) 임시정부의 노선을 취하였다.
그 후 의열단의 요청을 받고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하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이 선언은 국내외 동포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일제 당국은 큰 전율과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 여순 감옥의 신채호 흉상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창조파에 가담하여 상해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집필하여 근대 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신채호는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으며, 1927년 9월에는 이필현과 함께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1928년 일경에 피체되어 10년 형을 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이회영(李會榮)
우당 이회영(1867~1932) 선생은 1867년 서울 남산골 저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였다. 아버지 이유승은 이조판서를 지냈을 뿐 아니라 그의 10대조는 임진왜란 이래 다섯 번의 병조판서, 세 번의 좌․우정승과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이다. 백사 이래 이유승에 이르기까지 9대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승․판서․참판을 지낸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이 가문에서 우당을 비롯해 형 건영, 석영, 철영과 아우인 시영, 호영 등 일곱 형제 중에 6명의 형제 50여 가족이 1910년 모두 만주로 가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6형제 50여 가족이 만주로 망명, 항일한 후 20여 명만 살아남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는 우리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가문 차원의 헌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가문에서 사회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솔선수범하는 것)의 모범으로 손꼽힌다. 만주와 상해 등 광활한 대륙에서 그들 형제가 인재양성과 독립투쟁을 계속하는 동안 전 가족이 겪은 고초와 희생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다. 해방 후에 아우 시영만이 살아서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간 지나온 세월이 그들 가문에게 얼마나 잔혹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이들 형제 중 우당은 가장 먼저 봉건적 인습과 사상을 타파한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고 온 몸을 던져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대가족 망명 역시 우당이 주창했음은 물론이다. 둘째형 석영도 말을 앞세우기보다 자기 살을 도려내서 실행을 우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6천 석이라는 거대한 재산을 모두 독립 운동자금으로 내놓았다.
우당은 스무 살을 지나면서부터 집안의 노비에 대해 존댓말을 씀은 물론 평민으로 풀어주기까지 했다. 또한 여동생이 청상과부가 되자 관습을 깨고 과감하게 재혼을 시켰다. 당시 정서로서 판서 집 딸이 재혼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당은 아무도 모르게 누이동생을 시가로부터 데리고 온 뒤 “이 판서 집 딸 아무개가 급환으로 죽었다”고 거짓 부고를 냈다. 그런 후 간단하게 장사를 치르고 새 혼처를 찾아 개가를 시켰다.
이회영은 명예나 지위에 대한 욕심이 없어 평생을 독립운동과 혁명가의 길을 걸었음에도 어떤 단체․모임에서 장(長)을 맡은 적이 없다.
▲ 여순감옥의 우당 이회영의 흉상
이 때문에 우당은 아우 이시영의 그늘에 가려져 후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 아우 이시영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독주에 맞서 부통령직을 스스로 헌신짝처럼 버림으로써 우당의 6형제들이 50여 가족들을 데리고 망명한 저력을 확실히 엿볼 수 있게 했다.
우당이 독립투쟁 활동을 전개한시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3.1운동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시기이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 운동(1898), 을사오적에 대한 규탄(1905), 안창호·양기탁․신채호 등과 함께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 활동(1907), 용정에 이상설․이동녕 등을 특파해 교포 자녀교육을 하게 한 서전서숙 개설(1907), 서울 상동교회의 상동 청년학원 개설(1908), 농업 생산과 교육을 위한 교민자치단체 경학사 조직(1911), 청산리 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1912) 등이 이 시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중국에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 이념과 노선에 따라 일제에 대한 테러 등 격렬한 운동을 전개한 시기이다. 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1924), 항일구국연맹 조직(1931) 등 하나하나 모두 놓칠 수 없는 투쟁을 거칠게 전개했다.
우당이 중국인 동지들과 함께 구축한 항일구국연맹은 생애 막바지에 사른 혁명의 불꽃이다. 상하이 북역 사건, 아모이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 톈진항 일본 군수 물자 수송선 폭파 사건, 톈진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 등 잔인한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을 흔들기 위한 의거는 사명감 속에 계속 실행됐다. 이 같은 꺼지지 않는 독립 투쟁의 기운 속에 이듬해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가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1932년 11월, 당시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린 기사가 한국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배에서 나리자 경찰에 잡혀서 취조 중 류치장 창살에 목매 죽은 리상한 로인’
이 같은 기사의 실체는 즉각 확인되지는 않았다. 일본 경찰이 사실을 은폐하고, “그 노인이 이회영 선생”이라는 당시 소문을 극구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후 이회영의 죽음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회영이 “유치장 안에서 빨랫줄로 목을 매 자결했다”는 일경의 발표는 거짓말이었다는 점이다.
우당은 밀정의 밀고에 의해 대련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5세 노인의 신체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몸서리쳐지는 고문을 받고 순국한 것이었다. 일제는 서둘러 화장까지 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서곡인 이른바 만주사변이 일어난 지 1년만의 일이다. 1932년 초 이회영은 중국 국민당을 찾아가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 지원을 약속 받았으며, 11월에는 만주의 독립운동 지하조직을 굳건히 하고 만주 주재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는 작전을 추진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대련으로 옮겨가려고 하던 차였다. 고통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 하나를 잃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안중근 사건으로 체포된 유동하
▣ 유동하와 조도선
유동하(1892~1918)는 함경남도 덕원 출신이다. 1909년 10월 연해주 코트지로의 자택에서 아버지와 안중근·우덕순·조도선·김성화·탁공규와 더불어 구국혁신을 맹세하는 ‘7인동맹’을 조직하였다. 1909년 10월 21일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편으로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하얼빈에 오는 것을 탐지하고 도착일자가 1909년 10월 26일 아침임을 확인하여 채가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중근에게 전보를 쳐서 의거를 성공할 수 있게 도왔다. 이 일로
▲ 안중근 사건으로 체포된 조도선
일본경찰에 붙잡혀 1909년 11월 안중근을 비롯한 우덕순·조도선 등과 함께 여순감옥으로 이송되고 1910년 12월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8년 가을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애국청년들과 함께 볼셰비키혁명군에 가담하여 백계노군의 축출활동을 하고 있을 때 이를 가장한 일본군에 붙잡혀 사말리야강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고 한다.
조도선(1879~?)은 1895년 러시아로 건너가 이르쿠츠크 등지에 머무르면서 세탁업, 러시아어 통역 등에 종사하다가 1909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하얼빈으로 갔다.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코코프초프과 회견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기회에 이토를 사살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우덕순·유동하와 함께 채가구역에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면 거사하기로 하고,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거사하기로 약속한 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특별열차가 채가구역을 그냥 통과하여 이곳에서의 거사는 미수로 그쳤으며 하얼빈 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여순에 있는 관동도독부감옥서에 이송되어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 최흥식과 유상근
최흥식(1909~1932)은 서울 출생으로 어렸을 때 이름은 경팔이었다. 수하공립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인쇄소 견습공이 되었다.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가입, 1932년 김구의 지시를 받고 유상근 등과 함께 국제연맹조사단 환영식에 참가하려고 만주에 오는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 등을 암살하러 만주로 갔다. 그 해 5월 국제연맹조사단이 대련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련의 한인어부조합 김정순 집에 잠복하던 중 발각되어 사형당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상근(1910~1945)은 강원도 통천 출신으로 1918년 통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가족이 용정으로 이주하게 되자, 그 곳 동명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연길 갑산촌으로 이사한 뒤로는 부득이 학업을 중단하고, 야학과 소년단을 창설하여 후배교육과 항일사상 고취에 주력하였다. 1927년 갑산촌에 조사차 나온 일본경찰과 충돌한 뒤 이곳을 떠나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5월 대련에서 김구의 지령으로 한인애국단원 최흥식·이성원 등과 함께 국제연맹조사단이 만주에 온 것을 계기로 일본의 관동군사령관·남만철도총재 등 침략 원흉을 폭살하고자 계획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관동청재판소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하다가 광복을 하루 앞두고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