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룡 천 주 교 회 사
“박해의 폭풍이 복음의 씨를 멀리 날렸다.”
-달레신부 한국 교회사-
산골 교우 촌 형성 배경.
1801년 신유 대 교난으로 주 문모 신부를 비롯한 교회 내 지도급 인사 들인 남인 학자 들이 참수 , 유배형에 처해 졌는데 이들의 죄명은 모두 역적 모반죄에 적용되었다.(조선의 건국이념은 유교에 그 기원 을 둔다, 따라서 유교에 반하는 것은 곧 국가를 반대 하는 것 이다, 유교는 삼강오륜에기초하는 인간 계급사회(반상제도)이며 지배계층 양반 상민 천민 하인 종 백정으로 구분 되며 종의자식 은 종 이다, 이에 반하는 하느님과 인간사랑 을 원칙으로 하는(인간평등) 서학(천주학) 은 바로 국가전복 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산이나 토지는 남김없이 빼앗겼고 처, 자는 대부분 벽지의 관노비로 넘겨졌으며 심한 경우 멸족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양반의 자손이나 처자들은 모든 것을 약탈당한 채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들은 사학죄인으로서 신앙인 이라는 이유 하나로 유리걸식 하며 이곳저곳으로 떠 돌 아 다니며 방랑 생활 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때 다시 박해가 일어날지 몰라서 서로 흩어져 살면서 깊은 산 속이나 산간벽지 로 들어가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유교난(1801년) 때 순교한 많은 교우들의 가족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가가 드문 산 속에 숨어들어 살았기 때문에 박해 중에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교우들은 하나 둘 씩 이러한 교우들이 사는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해서 한 동리나 촌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마을이 바로 교우 촌을 형성한 최초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그 많은 교우 촌중에서 이 곳 구룡(현 대구 대교구 용성 본당 구룡 공소) 은 1801년 신유 대 교난으로 청송 노래 산 진보 머루산 두 곳에 교우 촌이 형성되어 경상도 내륙 지방 오지로써 많은 교우들이 신앙생활을 이어 가던 중 1815년 을해 박해 때 경주감영, 안동감영, 대구감영 포교들이 동시 습격으로 그 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로 초토화되어 100 여명이 세 곳 감영에 투옥되고 처자와 노약자 또는 입으로만 배교한 자와 그들 가족들은 또 다시 사방으로 흩어져 외교인들 속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며 살아야 했다.
또한 교우로써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불행히도 입으로만 배교했던 많은 신자들은 상처받은 마음을 안고 몰래 산속으로 숨어들어 와서 하늘을 향해 처절한 기도를 하며 초근목피로 생 을 연명 하여 겨우 목숨만 이어가는 삶을 또다시 시작 하는 것이다
이들 중 영천지방 경주지방에 흩어져 있던 교우들이 더 깊은 산속 깊은 계곡을 찾던 중 이 곳 구룡산(해발 675m) 에 다시 경주 이씨, 밀양 박씨, 경주 최씨, 경주 김 씨 등의 가족들이 모여 새로운 신자 촌 을 이루어 힘겨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생업을 준비하여 가족들을 먹여 살리면서 자유로이 천주께 모든 기도를 바치고 교회 법규를 실천하였다.
만일 그들이 일반 동리 사람들과 같이 살았다면 부락에서 행하는 많은 미신이나 부락제에 참례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미신 행위에 참례하지 않으면 즉시 천주교 신자임이 발각되기 때문에 천하에 없는 고생을 하면서도 새로운 신자 촌을 형성할 수 밖 에 없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새로운 교우 촌으로 형성된 이 곳 구룡 산을 중심으로 동편(경주 산내 진 목정), 서편(경산 용성 매남리 큰골), 등에 집단 교우 촌이 형성되었으며, 북편(북안면 중리동 대창면, 용상동, 신광동, 괴연동) 남으로 (청도면, 운문면) 등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살았다.
그 후 1836년 입국한 프랑스인 샤스땅 신부님이 경상도 지방 순회 전교때 이 곳 공소에 와서 성사를 주었으며,
1849년 4월 19일 사백 주일(지금의부활제2주)전에는 부활주간은 흰옷을 입고 부활축제 주간을 지내고 일반 옷으로 갈아입는 주일을 사백 주일 이라함)신품을 받은 최 양업 신부님은 12년 동안 전국 산간 교우 촌을 순회 사목 하셨을 때에 이 곳 에도 다녀가셨으며 특히 이곳에서 멀지 않은 언양 살티 간월산 죽림 굴에서 4개월간 거처하신 기록으로 보아 상주 문경으로 가실 때 다녀가신 것 같으나, 현재 기록이 없어 명확히 입증자료가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 후 1866년 병인 대 박해 때 는 영천지방 이규일(1835-1880년) 현 신광공소 곽 동수 회장의 외 고조부가 조상 대대로 신광 동 효일 부락에서 혼자 세례 받고 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단신으로 구룡 에 들어와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했으며 남부 지방의 최대 공소인 언양 간월 공소 첫 신자 후손인 김 영제 베드로 (장하 치명순교자) 또한 이곳(매남 큰골)에서 3년간 피난생활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목자의 공적기록으로는 1883년 경상도 지방 사목담당이신 김 보록 로베로 신부님의 사목 보고서에서 구룡 의 총 교우 수 60명 사규고해 53명 영세 6명 예비자 10명 견진 10명의 사목 보고서가 1888년 까지 기록이 부산 교구 전사에 있습니다.
또한 영천교회사 전사 (용평 성당)의 선교 배경이 구룡 이며 하양 본당 설립 전사 최초 신자로 용성 큰골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이사 간 진량 북동의 박 성예 (아가다), 조부 박 수환(다두 1853-1903)이다.
대구로는 날뫼( 현비산동) 성당의 초대 교우들 중 박 바오로(1860 -?) 구룡 에서 이사 간 사람이다.
이 외에도 박해가 끝나고 사방 각처로 이주하여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구룡 신자 촌의 후손들에 의해 오늘 날 500만 한국 천주교회초석을 일구어내신 수많은 분들을 들 수 있다.
조선교회사 명동 천주교 자료집 2호에 보면 조선 교구 8대 교구장이신 뮈델 주교 님 께서 사목방문차 1893년 11월 7일 경주 (월성군 산내면 의곡리) 의실을 거쳐 나귀를 타고 바거리(지촌) 을 거쳐 구룡 에 도착 견진을 주고 다음날 11월 8일 큰골에서 성사를 주고 11월 9일 대구로 가신 사목일지에서 당시 사정을 일부 볼 수 있으며 또한 1911년 남방교구가 분리되면서 대구에 주교 좌를 설치하고 교구장에 착좌하신 드망즈 안 주교 님 께서 주교님 되시기 11년 전 부산 선교사 시절에 1899년 사목 방문 하셨고 22년 후인 1921년 남방교구 초대교구장으로 사목방문 오셔서 하루를 묵으시면서 성당 축성 (주보 성모 설지 전) 을 해 주시는 등 신자 촌 형성 1세기를 지나면서 구룡 을 중심으로 이 지역 선교의 요람으로 선교의 모체로써 사명을 충실히 해 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공적 기록상 가장 많은 신자들이 생활했던 기록으로는 1885년 김 보록 로베로 신부님 사목 보고서에 의해 구룡 총 신자 83명이 최고의 기록입니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힘겹지만 오직 천주님들 향한 열정적인 신앙생활은 사목 자를 절실히 필요로 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사목 자 양성에 힘써 무학 중 고등학교 설립자 이신 이 임춘 펠릭스 심부님을 필두로 여덟 분 의 사제가 탄생하시게 됩니다.
여덟분의 사제로는
이 임춘 펠릭스 신부님 ( 무학 중 고 교장 ) 큰골 태생
이 재원 욥 신부님 ( 용계 본당 ) 구룡 태생
서 덕교 야고보 신부님 ( 교 구 청 ) 구룡 태생
박 석재 가롤로 신부님 ( 교구 사무처장 ) 할아버지 고향
박 수태 비 오 신부님 ( 구미 도량 ) 아버지 고향
이 상영 베드로 신부님 ( 수원 대신학교 ) 고조부님 고향
이 상준 다 두 신부님 ( 서 울 ) 고조부님 고향
김 병렬 보니파시오 신부님 ( 경기 이천 ) 증조부님 고향
네 분 수녀님
박 성혜 엘리사벳 수녀님 구룡 태생
서 아 순 따 수녀님 구룡 태생
이 테 레 사 수녀님 구룡 태생 ( 고성 갈멜 수녀원 원장 )
이 분들의 성소는 바로 순교정신으로 신앙을 지켜 오신 선조 신앙 인 들의 신앙생활 정신과 하느님의 크신 은총의 결실입니다.
전국 방방골골이 피비린내 나는 박해 속에 생계는 눈물겹도록 힘겨웠지만 형제애로 가족애로 모든 교우들이 함께 사랑하며 신앙을 지켜 왔기에 이곳은 박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순교자가 있는 곳에는 밀고자 배교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순교자가 없기에 아쉬움이 있다면 또한 밀고자 배교자가 없는 만큼 더욱 철저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천주계명을 모두 잘 지켰기에 더욱 보배롭고 값진 사랑의 결실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이 보배로운 성전은 1921년 12월 11일 남방교구 주교님 이신 드망즈 안 주교님 사목 방문 기념으로 새 성전 건립을 추진 전 교우 절미 절식 (쌀을 식구들 숫자 되로 한 끼에 한 숟갈 씩 모으는 운동)운동을 전개하여 12년만인 1933년 9월 13일 건물상량을 하게 됩니다.
건물 형태는 민가와 는 다르게 ( 궁궐, 관청 ) 오량 식 건물 양식으로 정성을 다해 지어 사용 해오던 중 1950년 남북전쟁의 비극으로 빨치산들 의 주요 거점 지역이 되어 빨치산 토벌작전 지역이 지정 되어 구룡 전 주민 하산 명령과 심산계곡 일대 빨치산 토벌을 위해 산불을 지르기로 결정한 정부 측의 결정을 목숨을 걸고 전 주민 일치단결 하여 신앙 선조들의 유산을 몸으로 지켜 후손들에게 남겨주어 현재까지 보존되어 오던 중 1993년 4월 11일 부활 대 축일 대구 대 교구장이신 이 문희 대 주교 님 께서 이곳에서 부활 대 축일 미사를 집전 해 주셨습니다.
이 때 성당과 부속 건물의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건물 수리와 성지로써의 개발을 지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셔서 현재의 성당과 사제관 피정의 집은 수리를 마쳤으며 주변 땅 1만 여 평 의 부지도 마련되었습니다.
지나온 180여년 하느님의 손길이 함께한 이 곳 구룡 은 신앙 선조들의 순교정신이 담긴 유서 깊은 땅으로써 다음 세대들에게 신앙의 산 교육장으로 다시 태어나 모든 이들에게 주님 사랑을 체험 할 수 있는 피정공간으로써의 충실한 역할을 해 나갈 것입니다.
위 내용은 1985년부터1999년까지 구룡 회장(이 영조 가밀로)님과 교우 들 에게서 수집한 이야기 자료 수집 등을 간략하게 정리 한 것 이다,
아직도 찿지 못한 자료는 방대하지만 찿아 지는 되로 모으고 정리 할 것이다,
자료정리 천주강생2000년 새날 전 화수(요아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