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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함께 열어가야 할 훤한 세상을 위하여> 거꾸로 가는 노동정책
얼마 전, 내가 살고 있는 안산의 한 노동조합의 초대를 받아 그곳에 간 일이 있었다. 마침 점심 시간이 되어 노조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다가 내 입에서 이런 농담이 튀어나왔다.
"회사 밥 축냈다고 절도죄로 고소 당하지나 않을지 몰라."
다들 한바탕 걸판지게 웃기는 했지만 이 농담이 한낱 우스개 소리만은 아니다.
89년 공안 한파가 몰아닥쳤을 때, 나는 난감한 지경에 빠진 안산 지역의 몇몇 노동자들을 변호하게 되었다. 그때, 그 노동자들은 노동법과 집시법의 위반은 물론이고 절도죄까지 들씌어져 있었다. 외부와 고립된 채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이 회사에 있는 쌀로 밥을 지어 먹은 것이 그 빌미였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만 이런 일은 도처에서 밥먹듯이 벌어졌다.
연전에 읽은 어떤 소설에는 가구 공장 노동자가 못쓰는 나무토막으로 장난감을 만들어 자기 아이에게 주는 바람에 절도범이 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노동문제로 세상이 온통 들썩들썩하던 그때, 나는 구속된 노동자의 변론을 자주 맡았다. 그러다 보니 노동 쟁의가 벌어지는 과정에도 공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몇몇 선진적이고 의욕적인 노동자들이 은밀히 조직을 만들어, 작업 환경이나 관리자들의 비인간적인 대우 등 생산 현장의 여러 문제점을 하나하나 수집하고 정리한다. 그러다가 작업장 내에 어느 정도 유리한 여론이 형성되면 디데이를 잡는다. 디데이에 지도부는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노조결성을 선언한다. 그 다음은 간부 사원들을 모두 작업장 밖으로 내보내고 바리케이트를 친다음 파업농성에 들어간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면 회사 측의 조종을 받는 구사대가 결성된다. 이 때 회사에서는 노동자를 분열시키기 위해 돈으로 매수를 하거나 협박을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구사대는 물리력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노동자들은 맞서 싸우다가 신나를 온몸에 끼얹고 저항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끝내는 온몸에 불을 당기는 비극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크고 작은 폭력 사태가 벌어지는 데, 법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들이 당한 폭력이 아니라, 구사대나 회사측이 당한 피해에 집중된다. 노동자에게만 죄를 묻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노동쟁의는 거의가 노동자들의 패배로 끝난다. 시간이 지나 파업을 열기도 시들해지고 패배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할 때면 회사 측의 회유와 협박도 힘을 발휘하게 된다. 태산이라도 옮길 듯이 드높던 사기는 어느새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추고 한 사람 두 사람 농성장을 떠나게 된다. "옷 갈아 입고 오겠다"며 집으로 간 사람은 영영 나타나지 않고 경찰 병력이 투입된다는 정보가 꼬리를 문다.
그렇게 또 얼마쯤 버티고 나면 핵심적인 지도부만 남고, 그들은 구사대나 경찰에게 끌려나와 경찰서를 거쳐 공안 검사의 손으로 들어가 기소된다.
노동문제를 둘러싼 재판은 언제나 치열했다. 노동자를 불순세력으로 몰려는 공안검사나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다고 주장하는 노동자 사이에는 불꽃 튀는 접전이 벌어진다. 노동자들은 자기 죄를 인정하기는커녕 정권의 하수인 노릇이나하는 검사와 판사를 준엄하게 꾸짖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재판이란 유죄를 이끌어내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실제로 내가 변호한 노동자들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적용되는 죄목도 풍부해서 노동법, 집시법은 말할 것도 없고 폭행이나 절도 도로교통법까지 들고 나오는 일이 허다했다. 집시법이나 노동법을 위반했다는 것은 도리어 명예롭고 떳떳한 일이었다. 그들이 위반한 것은 법이 아니라 독사독재와 비인간적인 세상이기 때문이다. 감옥에 갇히더라도 그들은 죄수가 아닌 양심수 였다.
그러나 폭력이나 절도로 기소된 노동자들의 신념이나 자부심은 무참히 짓밟힌다.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폭행 때문에 도매금으로 넘어가거나, 엉뚱한 트집을 잡히는 노조 간부는 전혀 모르는 가운데 이뤄진 폭행에 대해서도 도매금으로 넘겨진다. 엉뚱한 트집을 잡고 증인으로 나온 구사대원의 부풀려진 증언에 의해 노동자들이 전격 구속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뿐 아니다. 모든 경우에 대한 판결이 실제 증거나, 공법 여부에 관계 없이 괘씸죄의 적용을 받아 일사천리로 처리되는 일이 허다했다. 아무리 변론을 잘해도 결과는 늘 법정의와 무관했다. 모든 판결은 증거나, 공범 여부에 관계없이 괘씸죄를 적용하거나, 정치적 의도에 따라 일사천리로 내려졌다. 그렇다고 노동자의 투쟁이나 나의 변론이 헛된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패배가 예정된 싸움이었지만 이를 통해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노동자들도 그렇고 나 또한 그렇다. 다만 우리가 너무 고지식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는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게 운동의 일관성과는 다른 폐해를 낳았다.
가령, 노동운동의 방법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반성도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지는 싸움을 마냥 되풀이해서는 노동운동의 진전을 이룰 수는 없을 터이다. 노동법에 따른 파업이 가능한데도, 앞서 말한 공식대로 파업을 감행해, 참담한 패배를 낳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 한 번의 패배는 생각보다 큰 퇴보를 낳는다. 늘 지기만 하는 노동자는 노조를 지킬 힘마저 잃고 만다. 합법적으로 파업이 가능한지 숙고해 보지도 않고 짜여진 대로 파업을 하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몇몇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는 크나 큰 희생을 치렀던 현장이 지금은 노조는 물론이고 노동운동이 현명한 길을 찾을 길 없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이는 노동운동이 현명한 길을 찾아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당위를 여실히 드러내 준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주체적인 방법론을 따지기 이전에 따져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합법적인 파업마저도 불법이 될 만큼 그물망 처럼 펼쳐져 있는 갖가지 악조건이다.
문민정부는 지금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 개혁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유독 노동부문에 대한 개혁은 거론조차 안되고 있다. 노동정책은 물론이고 대표적인 노동악법마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현재까지 노사협력을 중시하는 여론 때문에 불법 쟁의가 줄고, 노동쟁의의 횟수도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노사관계의 안정세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는 군사정권이 만든 "노동악법"을 무기로 노동 운동을 억누르고 있다.
노동관계법은 김영삼 정부의 출범 이후 곧 개정될 것처럼 보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에 와서는 기약도 없이 보류되고 말았다. "복수노조 금지", "제3 자 개입금지" 조항처럼 명백히 노동자의 단결권을 침해하는 조항이 여전히 그 위세를 떨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제3자 개입금지"는 80년 말 국보위에 의해 노동법이 개악될 때 삽입된 조항이다. 이 조항이 5․6공 시절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데에 매우 요긴하게 쓰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민정부를 자처하고 개혁을 정치적 목표로 하는 김영삼 정부가 이 조항을 적용하여 노동 운동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은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아도 단단히 맞지 않는 일이다.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군사독재 권력이 만든 법을 문민시대에 적용받아 구속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한국 정부에게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의 개정을 권고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며, "국제노동기구" 역시 이미 세 차례에 걸쳐 개정을 권고한 바 있다. 이렇듯 국제적인 비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정부는 "제3자 개입금지"를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꿋꿋하게 고수하고 있다. 이는 김영삼 정권이 수구세력을 품에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개혁을 목놓아 외치고는 있지만 진정한 개혁에는 영판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희대의 악법인 "제3자 개입금지"를 없애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뿐 아니라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은 한국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앞두고 통계청이 95년 5월에 발표한 「통계로 본 OECD 국가와 한국」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우리 나라 제조업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OECD 국가들에 비해 적게는 주당 3시간, 많게는 주당 17시간이 길다.
김영삼 정부는 노동자의 권리를 증진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는 일에는 아예 두 손을 놓고 있다. 체불임금이나 부당 노동행위는 안전에도 없다. 산업재해나 직업병을 방지하기 위한 어떠한 새로운 정책도 내놓은 바가 없다. 그들의 관심은 고작 임금 인상율을 한 자리에 묶어놓는 것이나, 기업이 원하는 만큼 싼 값에 노동력을 살 수 있는 변형근로제 같은 것이나 부활시키는 데 머물러 있다.
김영삼 정부의 노동정책은 노동운동을 하던 노동자를 절도로 몰건 어이없는 전 시대의 관성에서 빠져나오고 있지 못하다. 그들의 경제학은 여전히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부자를 위한 경제학"이다 21세기를 앞두고도 우리는 아직 70년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제5부 함께 열어가야 할 훤한 세상을 위하여> 가수 정태춘의 외로운 싸움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의 한 방편으로 시작한 "가요사전 심의제"가 드디어 사라졌다. 앞장서서 이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은 가수 정태춘이다. 그는 일부러 사전심의를 받지 않은 불법 음반들을 내면서 싸움을 시작했다. 나는 신문에서 이 소식을 듣고 웃을을 머금었다. 먼저 일을 저질러놓고 시작한 그의 과격한(?) 전투 방법이 마냥 신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변호사로서 이 일을 맡았다. 가요계를 대표해서 외롭게 싸움을 시작한 정태춘의 동반자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시절의 젊은이들처럼 대학 시절에 김민기와 양희은의 노래를 좋아했다. 포크송이 풍미하던 시절이었는데, 정태춘의 노래는 그 말미에 걸쳐 유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의 초기 대표곡인 "시인의 마을"과 "촛불"은 정태춘 특유의 짙은 서정성으로 대중들의 가슴에 파고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로 그는 "음유시인"이라는 꽤 그럴 듯한 별칭까지 얻었는데, 내가 달고 다니는 인권변호사라는 딱지에 비하면 그의 딱지는 더없이 아름답게만 여겨진다.
하지만 음유시인인 그도 고통에 찬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80년대에 들어서서는 현실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기에 이르렀고, 집회현장이나 운동권 공연장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이로 해서 그는 "운동권 가수"라는 새로운 칭호를 하나 더 보유하게 되었다.
정태춘이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노래를 만들고 부르게 된 것은 우연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애당초 그의 노래에 짙게 배어 있던 서정성은 시류에 영합하거나, 상업주의에 침윤된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노래는 언제나 진지했으며 그 진지함이 현실을 바로 보려는 노력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예술세계를 열게 된 것이리라.
그는 자신의 변모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내 노래는 계속 변해왔습니다. 이제 내 노래에 모두가 바라는 세상을 담고 싶습니다. 서정성에 머무르기 보다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리얼하게 표면하면서 대중들과의 친화력도 높여가야 하겠지요. 서정성은 단지 제 노래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한 부분일 뿐입니다."
아무튼 그는 정치, 사회적인 환경을 비판하거나 고발하는 노래들을 거침없이 불러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고, 운동권 사람들은 놀라움을 넘어, 곧 "동지적 애정"의 관계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현실에 눈을 돌리고 나서 만든 노래 가운데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노래는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노래는 그가 구가하던 아름다운 서정과는 완연히 달랐다. 대개 씩씩하거나 비장함이 감도는 이전의 운동권 노래와도 달랐다. 그 노래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크나큰 모순을 고발하고 있었으나, 분노하고 있지는않았다. 그러나 노래는 듣는 이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분노와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제재로 삼아 만든 노랫말을 들어 보면 나의 이런 느낌을 짐작할 것이다.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어/ 텔레비전에는 아버지 어머니는 나오지 않고/ 더 이상 갖고 놀 게 없어서/ 성냥불 켰다가/ 훨…훨…"
대중들이 주는 찬사와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척박하고 험난한 세계에 들어선 그를 나는 매우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음반사전심의제 반대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보면서 나의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가 나서기 전에 누구도 "음반사전심의제"를 그토록 완강하고 전투적으로 부인한 적이 없었다.
말이 심의이지 사실상 "검열"이라고 해야 할 음반사전 심의제는 노래를 만드는 이들의 창의성을 꺾는 것은 물론이고, 자유롭게 창작한 노래를 들을 자유마저 박탈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정신에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본래 검열은 일제 시대나 일제 시대나 군사독재 정권 때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유린하던 제도였다. 그러던 것이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조금씩 달라졌는데, 유독 가요에 대해서만은 "청소년 문화를 해치는 저질퇴폐음반이 나올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전 심의를 계속해왔다.
혹자는 정부의 우려대로 "음란 퇴폐물이 청소년의 손에 닿지 않도록 거를 것 은 거르는게 마땅하다"는 입장을 옹호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감추어진 논리를 읽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심의를 거쳐야 할 것은 가요가 아니라 컴퓨터 통신을 통해 무차별로 유통되는 음란물들이나 불법으로 거래되는 갖가지 퇴폐 상품들이다. 청소년의 정서를 심각하게 해치는 이들 퇴폐 상품이 넘쳐나는 것은 사전 심의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엄격한 법의 손길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가 가요에 대한 사전 심의를 감싸고 도는 까닭은 청소년의 정서를 보호하려는 갸륵한 정성 때문이라기보다는 권력에 비판적인 소리를 내는 노래를 대중들의 뒤에서 떼어놓으려는 속셈이 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 시대의 가요가 사랑과 이별 타령으로 일관하면서 우민화의 첨병 노릇을 했던 사실을 돌이켜 보면 이런 생각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백보 양보해서 정부가 청소년을 염려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사전심의제를 감싸고도는 것이라 해도 그냥 지나칠 문제는 아니다. 국가가 예술 문화 행위에 대해 사전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법제도적으로 보아도 넌센스일 뿐 아니라, 명백히 사회의 문화적 진보를 가로 막는 행위다. 그것은 반문화적이고 야만적인 일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런 잘못된 제도가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도 여전히 그 올가미를 드리우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대체로 그러려니 하고 말았겠지만 직접 대중가요를 만드는 사람들은 아마도 목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정태춘처럼 노래에 비판적인 내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입장에서는 옴치고 뛸 자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절박함을 이해한다면 그가 그토록 "과격한 투쟁"을 펼치고 나선 까닭이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태춘은 사전심의제가 지켜야 할 가치가 전혀 없는 법이라고 간주했다. 따라서 공윤의 심의 자체를 거부해 버린 것이다. 그는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고, 그 음반을 판매한 광주 지역 소매상 여섯 군데는 열흘 동안 영업 정지를 당했다.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가운데 "음반제작자는 문화체육부장관에게 등록해야 한다"는 조항과 "누구든지 공윤의 심의를 받지 않은 음반을 배포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적용된 것이다.
그 뒤, 정태춘은 일곱 번째 음반 "장마․종로에서"를 내면서도 다시 공윤 심의를 받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음반사전심의제 철폐운동이 거세게 일어, 노무현 변호사를 비롯한 각계의 5천여 명이 철폐에 참여했다.
정태춘의 6년여에 걸친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얻는 데 성공했다. 재판부는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음반을 제작, 배포할 경우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한 "음반및 비디오물 에 관한 법률"이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결정을 내리고, 위헌 여부에 대해 심판해 줄 것을 헌법재판소에 제청한 것이다.
결국 사전 심의제를 없애고, 음반 및 비디오물의 수입 허가제를 추천제로 바꾸는 등 각종 규제를 크게 완화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개정안이 국회에 통과되었다.
이 개정안에는 제작업을 기획제작업과 제조업으로 구분하고, 제작업자의 등록 조건도 음반 복제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설만 구비하면 가능하도록 하여 창작 활동에 새로운 분기점을 마련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대중 음악인들을 옥죄어온 사전심의 조항의 폐지이다. 창장․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새 법률안의 통과로 대중음악인들의 상상의 영역은 더욱 넓고 깊어질 테고, 다양하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가요를 듣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하던 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공윤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4집 앨범 "컴백홈"을 제작한 음반회사를 검찰에 고발하고, 문체부에 행정조치를 의뢰한 것이다. "컴백홈", "필승",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의 일부 가사가 심의 때 제출한 가사와 다르다는 이유였다.
이 앨범에 수록된 "시대유감"은 사전 심의과정에서 공윤이 수정 지시를 내려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노랫말을 수정해서 자신들이 의도했던 내용을 훼손하느니 차라리 노랫말을 모두 없애고 연주곡으로 대체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것은 선택이라기 보다는 저항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들의 저항은 인기만큼이나 동조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시대유감이 아니라 공륜유감이다."
"우리는 들으라는 것만 들어야 하나요?"
"지금은 문민시대인가요? 군사정권시대인가요?"
이런 비난에 공륜은 가사가 전반적으로 너무 부정적이며, 특히 위의 세 구절은 문제가 있다고 보여서 수정을 요구 했다고 밝혔다.
이 문제는 그대로 논란을 거치며 지나칠 듯했다. 그러던 차에 다른 몇몇 노래 가사가 심의 때 제출한 가사와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고 고발에까지 이른 것이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네… 네 가슴에 맺힌 한을 풀 수 있기를…"
이쯤의 단순한 생각을 표현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니!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더구나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사전심의"조항을 그토록 엄격하게 적용했다니, 공윤 심의위원들의 업무에 대한 성실함과 신념어린 노고에 찬사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치졸하고 무지막지한 꼴을 더 이상 보지 않게 해준 정태춘에게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쯤은 해야 할 것이다.
<제5부 함께 열어가야 할 훤한 세상을 위하여> 용모 단정과 여성평등
얼마 전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고졸 여사원을 뽑으면서 키와 몸무게 따위의 외모를 입사 자격 요건으로 제기해, 온 나라 여성들의 빗발치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여성단체에서는 곧바로 그 기업을 고소했다.
사원 모집 조건에 학력이나 전공, 자격증 여부와 더불어 "용모단정"이라는 말이 따라다니기 사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용모단정이 몸을 깔끔하게 단장하라는 뜻인지 아니면 미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인지는 아직도 확실히 모를 일이지만, 그 말을 접하면서 기분이 썩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기분나쁜 말이 하다못해 전봇대에 나붙어 있는 광고 쪼가리나 술집 여급을 "급구"하는 광고에도 한동안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키는 160센티미터가 넘어야 하고, 몸무게는 50킬로그램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구체적인 규정이 명시된 것은 아니었다. 보는 사람이 알아서 '용모단정'을 해석하고 판단하라는 도량깊은 배려마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구체적인 규정은 스튜어디스 같은 유별난 직업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스튜어디스의 키가 160센티미터가 넘어야 하는 까닭이 안전 때문인지, 아니면 키 작은 사람보다 시차 적응에 유리하다는 것인지 나는 아직 짐작조차 못 하고 있지만, 아무튼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요즘의 스튜어디스들 역시 한결같이 늘씬하고 예쁘다. 작거나 통통하거나 그다지 예쁘지 않은 스튜어디스는 눈 씻고 찾아도 없다.
스튜어디스는 그렇다 치고, 보통 회사에서 요구하는 용모단정의 구체적인 기준은 이번에야 드러난 셈이다.
"키 160센티미터 이상, 몸무게 50킬로그램 이하"
이것은 한 마디로 늘씬해야 뽑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 짐작에 이 광고의 초안에는 한 가지 조건이 더 붙어 있었을 것 같다. 광고 문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차마 삭제할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못 생긴 얼굴은 사절합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야 다이어트나 지방질 제거 수술이면 족하지 성형수술이 문전성시를 이룰 까닭이 없지 않은가.
아무튼 대기업 여직원을 채용할 때 "용모 단정"이라는 명목 아래 당연한 조건으로 내세워왔던 "미모 요구"관행이 이번 일을 계기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번 일은 여자상업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여성단체에 고발을 하면서 만방에 알려지게 되었다. 성적이 우수하고 일처리가 야무진데도 키가 작거나 뚱뚱하다고 해서 혹은, 얼굴이 예쁘지 않아서 취업이 안 되는 제자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학생은 학생대로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심한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시쳇말로 "용모단정"이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이젠 용모단정이 밥까지 먹여주게 되었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노릇이다.
여성단체들은 더 이상 이 썩어빠진 관행을 없애기 위해 여러 대기업을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으로 고소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들 기업을 모두 무협의 처리했다. 그러면서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 주었다.
"여성 사원만을 별도로 채용하면서 신체조건을 명시한 것은 여성 상호간의 불평등이므로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다"
어이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검찰은 공정한 법 집행자의 시각이 아닌 여성차별 의식이 몸에 밴 남성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본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런 사원 모집 요건을 내세운 대기업과 한통속이나 다름없다. 한통속이 한통속을 심판했으니 무혐의일 수밖에.
여성계가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남녀고용평등법에는 "사업주는 근로자의 모집 및 채용에 있어서 여성에게 남성과 평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법이 현실과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노동부에서 내놓은 "남녀고용평등 업무처리규정"을 보더라도 "직무수행상 반드시 필요하지 않는 채용 조건을 부과하는 경우"와 "모집과 채용에 있어서 여성에 대해서만 제한적인 조건을 부과하는 경우"를 위반 행위로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성에게만 적용된 "키160센티미터 이상, 몸무게 50킬로그램 이하"를 무혐의 처리한 것은 남녀고용평등법을 빛좋은 개살구로 전락시키는 행위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이 법의 저촉을 받아 기존의 잘못된 악습을 시원스레 해결한 사례가 한 차례도 없는 게 우리의 한심한 현실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여성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살림이나 잘 하고 남편에게 귀여움이나 받는 존재"로 치부하는 해묵은 의식을 깨뜨려야만 한다. 고용의 기준이 업무수행 능력이 아니라 신체조건이라면 학교에서는 지금 당장 가르치고 있는 일체의 교과를 작파하고, 1교시에는 맛사지, 2교시에는 에어로빅, 3교시에는 머리손질법, 4교시에는 성형수술 강좌를 여는 것이 학생들을 위해 상책일 것이다. 기왕에 그렇게 하려면 점심시간에 단체로 다이어트하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여성이 "꽃"으로 머물러 있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그런 사회에서는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도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도 행복할 수 없다.
"여성들이여! 그대들도 권력을 잡아라!"
아무래도 여성문제의 해결은 이 길 밖에 없는 것 같다.
<제5부 함께 열어가야 할 훤한 세상을 위하여> 수의를 입은 대통령의 인권
노태우씨가 처음 법정에 서던 날, 텔레비전으로 그 모습을 지켜 보았다. 수의를 입은 모습에서는 수감될 당시 "이 땅의 모든 불신을 안고 가겠다."던 자신만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재임 당시의 여유로움이나 그윽한 미소도 온데간데 없었다. 80년 무렵 한 떼의 군인들이 제복을 입고 기념촬영을 한 사진에서 보이는 서늘함도 사라지고, "베싸메무초"를 즐겨 부르고 "데미안"을 읽는다는 자못 낭만적인 모습도 찾을 길이 없었다.
흰색 웃옷에 회색 솜바지, 흰색 고무신을 신고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다소곳이 피고인석에 선 전직 대통령의 초라함이 눈에 들어왔다.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그의 위세, 바위처럼 엉버티고 민주화의 길목을 가로막던 그 완강함이 일거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나는 씁쓸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거짓말에 대해 생각했다. 몰락한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왜 거짓말이라는 말이 떠올랐을까. 물론 그가 무수한 거짓말을 한 경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재임 시절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했고, 깨끗한 정치를 펴겠다고도 했다. 비자금 같은 것은 있지도 않으니 그런 것이 있다면 찾아 달라고까지 했다. 그의 거짓말은 내 머리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나를 위해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그의 거짓말에 관한 기록을 도표로 만들어 상세히 상기시켜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도표에 그려지지 않은 거짓말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사람들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역대 대통령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이를테면 박정희를 "박통"이라고 불렀고 전두환을 "전씨 아저씨", "대머리"등으로 칭했다.
한편에서 대통령 각하라고 부으며 알랑거리고 있을 때, 백성들은 각하는 고사하고 아무개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 마저도 마뜩잖게 생각했다. 그러니 "국가원수를 모독 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곤경을 치를 위험도 무릅써가며 극구 이런 불경스러운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대통령을 대통령이라 부르고 싶었겠는가. 우리 국민들의 마음에는 정말이지 너무나 오랫동안 대통령에 대한 부끄러움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오죽하면 대통령같은 대통령을 한번 뽑아 보는 게 소원이란 말까지 나돌겠는가. 국민들이 "박통" 이니 "대머리"니 하는 얄궂은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한 것은 그들을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태우씨도 이전의 대통령과 다를 바 없었다. 그도 훌륭한(?) 별호를 하나 지니고 있었다. 내가 그의 별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6.29선언이 있고 나서 얼마쯤 지난 뒤, 후배들과 생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였다. 후배들은 "안주로 노가리나 씹자"고 하면서 박장대소햇다. 안주로 노가리를 시키는 게 무슨 웃을 일인가 싶어 나만 멋적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노가리는 바로 노태우씨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노가리란 거짓말을 뜻하는 비속어인데, 그 별호가 인물과 썩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어 남들 다 웃고 난 뒤에 나도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는 노가리라는 별호를 단 사람답게 행동했다. 하지만 그의 거짓말은 늘 감추어져 있었으므로 짐작과 해석으로 넘겨짚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이제 백일하에 드러나 "노가리"란 별호가 얼마나 적절하게 붙여졌는가를 새삼스레 음미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릴 때 매양 듣던, 거짓말하면 언젠가는 탄로가 나고 혼쭐이 나게 된다는 어른들의 가르침이 괜한 말이 아니었음을 상기해본다.
이야기를 다시 수의로 돌려보자. 수의를 입은 노태우씨의 모습은 다른 여러 나라에도 방영되었을 것이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수의라는 사실을 모르는 외국인은 별달리 생각지 않았을 테지만, 그 옷이 수의라는 사실을 아는 외국인이라면 틀림없이 "저렇게 야만스러운 나라니까, 저런 저질 대통령이 나오지."했을 지도 모른다.
형을 받지 않은 피고인에게 수의를 입히는 것은 명백한 인권 침해다. 유․무죄가 분명치 않은 때는 물론이고, 따로 따져볼 것도 없을 만큼 유죄가 명백한 피고인이더라도 형이 선고되기 전까지는 죄인이 아니다.
이런 연유로 선진국에서는 피고인이 재판정에 나올 때 평상복을 입는다. 멋진 외출복에 치장까지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죄수복을 입엇다는 것은 이미 죄인이라는 뜻이고, 그것은 법정에서 한 수 꿀리고 들어가는 셈이다. 재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전직 대통령이 수의를 입고 재판을 받는다고 해서 새삼스레 문제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번기회에 피고인의 인권에 대해 우리 모두 한번쯤 짚고 넘어가는 것도 괜찮을 성 싶기 때문이다.
법정에 선 노태우씨를 보면서 또 한 가지 눈에 띈 것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수갑을 차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법정에 들어오는 수많은 피고인들은 수갑은 말할 것도 없고 포승에 꽁꽁 묶여 나온다. 그러나 노태우씨는 포승은 커녕 수갑도 차지 않았다. 노태우씨의 절친한 친구 전두환씨 역시 마찬가지다.
전직 대통령이든 옥황상제든 피고인은 피고인일 뿐이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수갑을 풀어 버릴 양리면 모든 피고인의 수갑을 풀어주는 형평성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제5부 함께 열어가야 할 훤한 세상을 위하여> 호남차별과 지역감정
내 고향은 목포 앞바다에 떠있는 자그마한 섬 암태도이다. 나는 지역차별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전라도 출신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호남 출신이라는 것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다. 이는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고 해서 심한 차별을 받은 기억이 별반 없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거의 모든 전라도 사람들이 몸소 지역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나는 반쪽짜리 전라도 사람인지도 모른다.
전라도 땅에서 나고 자랐지만 나는 지역차별에 직접 노출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어린 시절이나 학창시절은 마냥 행복했으며, 공부를 곧잘 했던 까닭에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자치하다시피 했다. 그런 나에게 지역차별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는 멀찌감치 비켜서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에도 판검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변호사가 되었으니 권력의 그늘에 의지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승진을 해야 할 일도 없고,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할 일도 없었으며, 전라도 출신이라고 해서 불이익을 당하지도 않았다.
이런 까닭에 지역차별에 대해 주체적인 입장에서 심각하게 고뇌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처럼 "반쪽짜리 전라도 사람"도 "전라도 사람"이라는 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어떤 자리에서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해지고 괜한 주눅마저 들었던 기억마저 있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기억도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전라도 사람으로서 내가 겪은 심리적인 압박은 어린시절에 같이 뛰놀던 이웃집 형이나 누나들, 친구들이 겪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뼈저린 설움과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전라도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전라도 사람들은 사기를 잘 친다." 는 등 근거 없는 편견 때문에 직장을 놓치기도 했고, 부당한 의심을 받기도 일쑤였다.
심지어 "전라도 사람은 사위로 맞을 수 없다."는 부모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도 있다. 단지 특정한 고장에서 태어났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고, 자존심을 상하고, 사랑마저 이룰 수 없는 비극에 빠지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이토록 지독한 편견이 왜 생긴 것일까. 그것은 경제가 뒤떨어진 전라도에서 고향을 떠난 사람이 많았고, 그들은 타지에서 빈민으로 어렵게들 살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일이 많았을 테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그들을 멸시하는 태도도 생겨났을 것이다. 그것이 과장되어 전라도 사람 일반에 대한 편견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는 외국에 간 한국 사람이 그릇된 편견 때문에 크고 작은 설움을 당하는 것과 꼭 닮았다. 외국에서 살면서 당한 설움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그런 설움을 전라도 사람들은 국내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지역 차별문제를 온전하게 해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생활의 경험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호남차별은 그보다 훨씬 깊은 심연을 안고 있다.
호남차별의 역사는 고대사회로 거슬러 올라가서도 만날 수 있다. "지역패권주의의 한국"의 저자 남영신은 지역차별의 유래를 고려를 창건한 왕건의 "훈요 10조"에서 찾고 있다.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밖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함께 배역으로 달리니 인심도 또한 그럴 것이다. 저 아래 고을(지금의 충청도 일부와 호남)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의 친척이나 인척들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국가를 변란하게 하거나, 전대와 백제를 병합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임금이 가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며, 권세를 농하고 정사를 어지럽힘으로써 재난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도 마땅히 벼슬 자리에 두어 일을 보게 하지 말라"
백제 사람들이 관직에서 배제된 것은 물론이고 아예 "문제있는 근성을 지닌 백성"으로 낙인찍히면서 주류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풍수를 빙자한 지역차별 정책이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호남차별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이어진다. "정여립의 난" 등으로 호남지역은 이왕조로부터 홀대받았고, 호남사람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경향은 계속 이어졌다.
일제 때는 전라도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뿌리를 뽑았고, 격렬하게 일어나는 소작쟁의를 가혹한 수탈과 핍박으로 억눌렸다.
남영신의 글에는, 일제 때 먹고 살기 힘들어 유랑길에 오른 호남인의 남루한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사회의 어디에도 이들을 따뜻하게 막아주는 곳이 없었다. 조선 사회전체가 피폐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훈훈하게 받아줄 여유가 없었고 막 산업 사회로 이행하려는 사회구조 밑에서는 없는 사람이 전혀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들은 서울 등지의 대처로 나가서 일찌감치 대도시의 하층구조를 이루고 구차한 모습으로 외부 사회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는 이전의 시기에 사대부들에 의해 관념적으로만 편견의 대상이 되었던 전라도 사람들이 실제로 꾀죄죄한 모습으로 외지의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학의 아들딸들이 거지의 모습으로 외지에 나타났을 때 이 초라한 무지렁이들의 모습에서 무심한 외지 백성들은 전라도에 대한 편견을 쌓기 시작하고 특히 일제의 악의적인 선전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무리들에 의해 전라도는 또다시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기에 이른다"
타지로 이주한 호남인 1세대의 비애가 가슴에 저미는 글이다. 호남에 대한 지역차별은 이토록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 이러니 호남사람이 가슴에 담고 있는 지역 정서를 "한"이라고 일컫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를 암담하게 하는 것은 이런 전근대적인 지역차별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지역차별, 지역감정이란 망령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금의 지역차별은 고대사회까지 소급해야 할만한 성질의 것도 아니다. 적어도 이승만 정권 때에는 경상도에서는 경상도 사람만이 출마하고, 전라도에서는 전라도 사람만이 출마해야 국회의원이 되는 악습은 없었다. 경상도 출신이 전라도에서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고,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에서 국회의원이 되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박정희 정권은 정통성 없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자신의 고향인 경상북도에 공업단지를 유치하고, 도로를 넓히거나 다리를 만드는 따위의 사회간접자본을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그리고 모교인 대구고보 졸업생들과 그 후신인 경북고 졸업생을 중용했다. 심지어는 일본육사와 "황군"출신 인물을을 정치에 내세웠다. 그러면서 호남 출신 인물들은 권력에서 철저히 배제시켰다. 71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라도 사람이 집권하면 경상도는 망한다"는 말을 유포시켜, 영남표를 휩쓸었고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렇게 박정희 정권 때부터 새롭게 악용되기 시작한 지역감정은 80년, 광주항쟁을 분기점으로 더욱 극에 달했다. 광주학살의 주범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등은 지역 감정을 더욱 정밀하게 조장하고 이용했다.
87년의 대통령선거와 88년 4.26총선, 그 뒤의 대통령 선거와 지자체 선거에서도 판도를 좌우한 것은 다름아닌 지역감정이었다. 누군가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는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으리라는 전망을 내놓을 법도 한데, 그런 발언은 들어본 적이 없다. 난망한 노릇이다. "지역감정 망국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지상 토론과 텔레비젼 토론에서는 각계의 명사들이 열변을 토한다. 하지만 선거철만 되면 그 모든 노력이 한낱 공론에 불과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만다.
지역간의 갈등은 유독 우리 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이건 크고 작은 지역 간의 갈등을 안고 살아간다. 지역감정과 자기 고장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경계선이 모호할 때가 많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지역 감정이란 어느 정도까지는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배세력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의도적으로 지역차별 정책을 펴고, 다시 그것을 이용해서 집권을 연장하는 나라는 그 유례가 없다.
<제5부 함께 열어가야 할 훤한 세상을 위하여> 세계화와 경쟁무기'
'"당신의 경쟁 상대는 누구입니까?"
"네, 덴마크 농부예요."
"독일 주부예요."
한동안 우리는 이와 비슷한 대사가 등장하는 공익 광고를 눈 귀가 닳도록 보고 들었다. 얼마쯤 지나 이 광고는 "당신의 경쟁 무기는 무엇입니까?"하는 자못 협박에 가까운 물음의 새로운 광고로 발전되었다.
나는 이 광고를 볼 때마다 유치한 내용을 참 세련되게 치장했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도대체 우리 농부와 주부를 덴마크의 농부와 독일의 주부에게 견주는 몰주체적인 발상부터가 언짢기 짝이 없다. 덴마크 농부와 경쟁하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덴마크 농부를 따라하라는 것인데, 그들의 농업현실과 우리의 그것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렇듯 처지와 조건은 따지지도 않고 무턱대고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거북이더러 토끼와 경주를 해서 이기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쪽 주부나 농부에게 모범적이고 훌륭한 면이 있다면, 그것을 우리가 처지에 맞게 받아들이자고 하면 될 것을 우선 경쟁부터 붙여 놓고 보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무리다.
경쟁이란 발전을 촉진하고, 삶의 질을 높여주는 약으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자칫하면 독이 될 수도 있다. 무분별한 경쟁 원리를 온 국민 속에 유포시키려는 분별없는 짓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더욱이 "당신의 경쟁 상대는 누구입니까?", "당신의 경쟁 무기는 무엇입니까?" 하는 물음은 늘 국민에게만 주어진다. "한국 정부의 경쟁 상대는 누구입니까?"하고 묻는 법은 결코 없다. 아마 한국 정부가 이 물음에 답을 해야하는 처지였다면 매우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나만해도 이 광고를 보고 나서 경쟁 상대가 누구인지 곰곰이 따져 보았지만 여지껏 찾아내지 못 했다.
무심히 지나치면 될 것을 광고 한 편 갖고 그렇게까지 가시를 돋친 말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 테고, 공익 광고란 원래 그런 게 아니냐고 시큰둥하게 말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이 광고가 정부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고, 그 정책에 대한 동의와 참여를 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예사로 넘길 일만은 아니다.
"일등만을 기억한다"는 어느 재벌기업의 이미지 광고는 더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이지만, 자기네 기업이 1등으로 좋은 물건을 만들어서 1등으로 많이 팔겠다는 상업적 언사이므로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광고가 온 국민을 상대로 협박에 가까운 질문을 퍼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수긍이 안 간다.
이 광고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온 나라가 "세계화"의 물결에 휩싸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대통령은 해외를 순방하는 비행기 안에서 예의 "세계화"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러자 모든 언론, 정부 부처, 여당 할 것 없이 오뉴월 개구리처럼 들고 일어나 세계화를 부르짓었다.
그러면서 온 사회는 세계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었다. 대통령의 한 마디에 온 세상 사람들의 목표가 갑자기 세계화가 되어 버린 것같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그 물결은 거셌다. 그러나 정작 겉으로 드러난 세계화는 요란한 변죽과 함께 기껏 배낭 여행을 비롯해서 외국 구경을 나가자는 열풍을 부채질 하거나, 갓 태어난 아이에서부터 사회의 중견들에게까지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의 부실한 일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본보기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호들갑을 떠는 언론도 언론이려니와 온 사회가 떠들썩해진 것은 우리의 정신적 지반이 그만큼 허약하다는 뜻도 된다.
어떤 의미에서 세계화는 미국과의 자동차 협상이나 쌀시장 개방에서 보여준 정부의 무력감을 정당화하는 캠페인으로도 비친다. 세계화 시대에 시장 개방이란 어쩔 수 없는 대세이고 불가피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유포시키려는 것이다.
이런 세태를 한 순간에 외국 문물이 밀려들어 허둥대던 조선 시대의 개항기에 빗대어 "제2의 개항" 이랗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자세히 생각해 볼 짬도 없이 어느 틈엔가 우리 앞에 다가와, 마음만 바빠지게 만든 "세계화"는 이렇듯 의심스러운 구석이 너무 많다.
김영삼 대통령이 내세운 세계화의 주된 내용은 국가 경쟁력 강화인 듯하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는 곧 재벌 중심의 기업 경쟁력 강화이고, 그 이면에는 노동 강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업 현장의 땀흘리는 노동자가 공익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고, 이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UR, WTO 체제 이후, 세계 환경은 우리 기업에게 새로운 경영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선진 강국들의 경제 패권주의는 우리의 앞날에 넘기 힘겨운 장애물로 버티고 서 있다. 수출주도의 고도 성장을 이룬 한국 경제는 대외 의존적 성격이 강하고, 이러한 무역 장벽은 우리에게 더욱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에 국가와 국민은 무언가 새로운 지표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세계화" 의 본래 취지이고, 그것은 변화한 국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국민 다수의 복리를 증진하고 민족 구성원 모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이 중대한 구상이 정부 내 정책 입안자들의 토론을 거쳐 체계화된 것도 아니고, 일찌감치 국민들의 참여와 동의를 얻은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 혐의는 짙다. 세계화의 기치가 대통령의 해외순방 길에 발표되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즉흥적이고 얕은 생각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니 겉보기에는 활기차고 힘있게 추진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알맹이가 무엇인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아펙 회의에 참석한 직후, 누누이 강조해오던 "국제화"를 "세계화"라는 새로운 용어로 포장해 국정의 지표로 제시하고 그 화살을 국민들에게 돌렸다.
그러나 세계화의 대상은 국민들뿐만이 아니다. 국민들보다 먼저 정부가 나서야 한다. 한국 정부가 얼마나 세계화에 뒤처지거나 역행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그 이유가 자명하다.
21세기의 목전에 다가온 지금, 우리 사회는 선진국이 50년대에 설정한 사회보장의 최저 기준 조차 확보하지 못 하고 있다. 낮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높은 사회 복지 비용을 들이는 서구의 여러 나라들과는 반대로 우리는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음에도 사회 복지는 후진국 수준이다. 교육, 주택, 환경, 고용, 의료, 복지서비스 할 것 없이 속시원하게 해결되었거나, 해결될 기미가 보이는 분야는 거의 없다.
삶의 질은 인권과 무관하지 않다. 인권의 종합적인 보장 그 자체가 삶의 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오래 전부터 국제인권법에서 공인하고 있는 바이며, 지금도 수많은 국제인권기구에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국민생활의 최저선 확보를 위한 노력에 너무나 게으르다.
이래서야 정부가 국민에게 세계화를 말할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군사독재 시절에 제정한 반민주 악법이 여전히 정권 유지를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세계화가 통치를 위한 이데올로기 이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제반 반민주 악법은 세계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특히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에 대해 광범위한 처벌을 규정한 국가보안법은 그 구성요건이나 개념규정이 추상적이고 모호해 인권탄압의 소지가 높은 대표적 악법이다. 또한 노동법에는 "제3자가 개입금지 조항"이 그대로 남아 있어,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유엔 인권이사회나 국제노동기구로부터 개폐 권유를 받는 등 국제사회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92년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을 때에도 국가보안법은 가장 먼저 도마에 올랐고, 연전에 우리 나라를 다녀간 일이 있는 아이드 후세인 유엔 "표현의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은 최근에 국가보안법과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제3자 개입금지뿐만 아니라 복수노조금지, 노조의 정치활동금지, 공무원의 단결권 제약 등도 국제노동기구로부터 여러 차례 시정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그저 묵묵부탑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다. 이래서야 정부가 국민에게 세계화를 외칠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형행법이나 보안관찰법, 사회보호법 등 인권 유린의 소지가 높은 법률도 여전히 건재하다. 지금도 400여 명의 양심수가 갇혀 있고, 정부는 아무런 해결책도 강구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산업기술연수생 제도를 만들어 외국인 노동자들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으며, 그들의 인권이 유린되는 것을 묵인하고 있다.
지난 92년 동두천에서 한국여인을 무참히 살해한 미군을 수사하다가 "수세식 변기가 없어서 수사를 진행할 수 없다"며 살해범을 미군 수사기관에 넘겨버리는 참으로 자존심 구겨지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이래서야 정부가 국민에게 함부로 "당신의 경쟁 무기는 무엇입니까?" 하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거꾸로 이제 국민이 목청을 높여 정부에게 물어야 한다.
"정부의 경쟁 무기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제5부 > 메뚜기가 튀는 방향과 5.18 특별법의 관계
대통령이 5.18 특별법을 제정한다는 발표에 "늦었지만 크게 환영한다", "놀랍다", "YS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내 생애 최고의 기쁜 날이다", " 광주 문제가 잘 해결된다면 김영삼 정부를 제1공화국이라고 칭하는 영예를 주고 싶다" 며 감격과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히려 쿠테타 주역에게 영원한 면죄부만 주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언제는 역사에 맡기자더니, 역사가 검찰청이냐" 며 그다지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다들 알다시피 김영삼 대통령은 군사 쿠테타로 집권해서 국민들에게 무수한 고통을 안겨주었던 5, 6공 세력을 심판하자는 여론에 대해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는 점잖은 말 한 마디로 찬물을 끼얹으며 3년 가까이 딴청을 피웠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느날 갑자기 그는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지만 "역사의 심판"을 포기하고 새로이 "법의 심판"을 선택한 데 따른 설명은 한 마디도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오류를 반성하는 능력이 있다. 대통령도 사람이므로 자신이 범한 오류를 정정할 수 있고, 그렇게 할 때 국민의 믿음을 얻게 된다.
사사로운 일이라면 대통령이더라도 혼자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지만, 적어도 나라의 역사와 앞날을 규정하는 5.18특별법같은 중대한 사안이라면 사려깊은 설명이 뒤따라야 했다.
그러나 끝내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에서 "법의 심판으로 역사를 바로 세운다"로 말을 바꾼 것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은 없었다. 그 설명 대신 자신이 역사 바로세우기의 선봉에 서 있다는 화려한 광고만이 횡행했다.
이렇게 볼 때, 항간에 떠도는 소문대로 김영삼 대통령이 5.18특별법을 제정하기로 한 것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려는 정략적인 결단 이상이 아니라는 의구심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김 대통령이 5.18 가해 세력과 결탁함으로써 비로소 정권 창출했으며, 이런 의미에서 그는 5.18의 수혜자이다. 그렇다면 5.18 문제를 해결하는 대통령의 입장은 먼저 자신의 정치적 불구성을 인정하고, 5.18 가해 세력에게 받은 은총과 혜택을 반납하는 데서 시작해야 했다.
5.18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광주를 비롯하여 전국의 양심적인 세력들이 꾸준히 주창해온 문제다.
1994년에는 "김대중 내란사건"으로 처벌을 받았던 사람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5.18 가해 세력을 내란 혐의로 고소 고발했다. 나는 그 대리인의 한 사람으로서 5.18문제를 새삼 자세하게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비극적인 사태로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삶의 기초를 유린당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피해 배상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검찰은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는 대통령의 꼬봉노릇을 충실히 해냈다.
5.18 고소․고발사건은 수사한 서울지검 공안1부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해 이 사건 피의자 58명 전원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검찰의 결정은 80년 당시 초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에 대해 면죄부를 발부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검찰 스스로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법적 판단을 할 자격과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었다.
검찰은 "5.18 당시 피의자들의 일련의 행위는 혼란에 빠진 국가 전체를 지도하고 총괄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활동으로 판단해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불기소를 결정한 이유는 "공소권 없음"이었는데, 발표문을 보면 판단해야 할 실질적인 내용은 교묘하게 피해가고, 형식적 요건만 갖추었을 뿐이었다. 검찰의 불기소 결정은 외형적으로는 법률적 형식을 띠면서 그 내용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의 정치적 심판은 각계 각층의 5.18 기소촉구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교수, 학생, 시민들의 5.18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반응은 점점 폭발성을 띠어가고 있었다. 검찰의 결정은 이렇듯 시민들의 광범한 저항에 부딪쳤다. 그러던 차에 노태우 비리가 폭로되었고 김대통령은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애당초 검찰이 5.18 관련자들을 기소했다면, 문민정부는 온전한 정통성에 바싹 다가갔을 것이며, 검찰과 정부 조직 전체가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모든 공소권을 반납했다. 이처럼 검찰이 무력하게 무너진 것은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는 대통령의 정치적 가이드 라인 탓이었다는 것은 재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검찰이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놀아난 다음, 공은 헌법 재판소로 넘어갔다. 헌재가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위헌 결정을 함으로써 재수사와 기소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기소가 이루어질 경우 대통령의 정치적 이해 관계는 심대한 타격을 받겠지만, 행정부와 사법부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아름답고 조화로운 역사의 첫 장을 열어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헌재의 위헌으로 내부 합의를 이룬 다음날 돌연 "특별법 제정"을 발표했다.
이러니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두고 "메뚜기 튀는 방향을 알 수 없듯이, YS가 튀는 방향은 아무도 모른다. YS자신마저 모른다"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비록 이러한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5.18특별법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수구 세력말고는 없다. 우리는 5.18특별법이 참으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도록 두눈을 부릅뜨고 그 집행 과정을 지켜 보아야 한다.
현 정부의 정략적 목표는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그들의 몇몇 측근을 사법 처리하면서 국민의 인기를 끌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깊은 뜻"을 읽지 못한 채 조건없는 지지를 보내다가는 전직 대통령이 재판정에 서 있는 꼴을 구경하는 것 말고 우리가 얻을 게 없다. 역사도 정의도 물 건너가 버리는 것이다.
힘들 때 생각나는 선배, 천정배 변호사 -조용환 변호사-
'님'자를 붙여 불러야만 자연스럽고 또 기꺼이 그러고 싶은 선배 천정배 변호사를 내가 알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5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창립총회 때인 것 같은데 그의 이름은 훨씬 전부터 듣고 있었다. 서울법대에서 수석했다는 경력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돈 잘 버는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선배라는 것이었지만, 그런 선배들이 한 둘이 아닌데 왜 그의 이름이 후배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그를 민변창립총회에서 보고는 약간 놀랐다. 그를 민변에 가입할 사람으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나는 약간의 긴장을 느끼면서 그와 수인사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말부터 80년대를 지나오면서 그 이름들을 가슴에 새겨온 선배 변호사들과 이틀을 지내면서 그로부터 특별한 인상을 받지는 못한 것 같다. 그는 조용하게 지켜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변호사로 첫출발한 1988년은 노태우 정권의 첫 해이기도 해서 민주화 바람과 여소야대 정국 탓에 권력남용이 비교적 적은 편이었고 공안사건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민변의 첫해는 우리끼리 '청변'이라고 부르던 젊은 변호사들끼리 금요일마다 모여 여러 가지 공부를 하는 데 시간을 보냈는데, 나이나 경력으로 한참 위인 천 변호사는 청변모임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그때 내 마음 속에 있던 천 변호사는 민변에 동조는 하지만 사무실 일에 바빠 소극적인 선배 정도였던 것 같다.
그와 함께 일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1989년 노태우 정권이 공안정국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노정권은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을 계기로 공안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재야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는데 마침 리영희 교수 사건, 임수경씨와 문규현 신부의 북한 방문사건, 전교조 결성 등 대형 공안사건이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민변도 우리같은 신참 변호사들까지 총동원하여 공안한파에 맞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도 마침 독립하여 이석태, 김형태 변호사와 일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때맞춰 터지기 시작한 공안사건에 관여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고 선배들의 지도를 받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였다.
나는 한승헌, 박원순 변호사를 따라 문목사님을 변론하면서 리영희 교수님 재판을 방청하곤 했는데 그때 천변호사가 리교수님을 변론하는 것을 보고 의외라는 느낌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의 사무실과 사건의 이미지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과 평소에 자기를 전혀 드러내지 않던 그의 모습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사건을 맡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 그가 공안사건 변론, 특히 노동사건에 깊은 애정을 갖고 적극적으로 변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또다시 놀라기도 했는데 내가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임수경씨와 문규현신부 사건을 함께 변론하면서였다. 나는 이석태, 김형태 변호사와 함께 관여하였는데 천변호사는 임수경씨 부모님과 인연으로 뒤늦게 참여하였다.
이 사건에서 황변호사님의 지도로 천변호사, 김형태, 유선호변호사와 내가 사건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주로 변론준비를 하였는데, 일요일에 <김&장>에 있던 천변호사 사무실에 모여 밤늦도록 기록을 검토하며 재판준비하던 기억이 새롭다. 사실 변호사들이 함께 변론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각자 사무실에서 바쁘게 일하다가 함께 모여 재판을 준비하려면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거나 비효율적으로 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임수경 재판에서 우리는 선배인 천변호사의 주도로 열심히 함께 재판준비를 하였다. 분명히 우리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갖고 있는 그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고 겸손하게 후배들과 같은 자격으로 재판을 준비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희극 중에도 희극이라고 할 만하지만 당시 임수경 재판은 제대로 된 재판이라기보다는 정권의 뜻을 대변하는 재판부의 무리한 진행으로 온갖 파란을 겪었다.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힘으로 윽박질러 기를 꺾겠다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재판기일마다 수천 명의 전투 경찰이 법원과 법정을 삼엄하게 포위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피고인들의 권리를 위압적으로 제한하려는 재판부와 온갖 신경전을 벌여야 했으며 결국은 재판부가 경찰을 동원하여 방청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곤 하였다.
변호사로서 그런 재판을 해본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재판을 통하여 나는 천변호사와 가깝게 되었으며 열정뿐만 아니라 변호사로서 뛰어난 실력과 안정된 마음을 갖추고 있는 그는 내가 본받고 싶은 선배 변호사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나는 공안 사건 재판을 할 때마다 천변호사라면 어떻게 변론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정말로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1990년 말엔가 가진 민변회원들의 겨울수련회였다. 북한산 어느 산장에서 밤새워 한 토론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민변을 더 강화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이때는 이제 삼당합당으로 고삐가 풀린 군사정권이 마구 철권을 휘둘러 무수한 공안사건과 인권유린이 폭주하는 상황이었다. 인권을 침해당하고 호소할 데 없는 피해자들은 당연히 민변으로 몰려들었는데 민변회원들은 이 사건들을 맡아 열심히 이 법정 저 법정으로 뛰어 다녔으나 밀려드는 사건에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시대는 변하고 있었고, 이제 민변은 법정의 변론 외에 보다 깊은 연구와 조사, 기획과 연대활동 등 폭넓은 활동을 요구받고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 첫번째 결론은 오직 민변 일만 하는, 두뇌 역할을 하는 상근변호사를 두어야 한다는 데 모아졌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을까. 누가 상근변호사를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아마 대다수의 회원들이 한번 해보고 싶다는 유혹과 함께 갈등을 느꼈으리라. 자기 사무실을 그만 두고 보수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민변 상근변호사를 선뜻 맡기에는 희생이 너무 컸고 그런 반면 해야 할 역할은 막중하여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랬다. 모두들 마음 속으로는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몇몇 회원이 있었지만, 스스로 나서지 않는 이상 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소간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너무도 뜻밖의 사람이 나섰다.
내 기억에는 그가 이렇게 말한 것 같다.
"뭐가 어렵습니까. 할 사람 없으면 내가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까지 내 기억에는 <김&장>이라는 좋은 법률사무소에서 파트너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천변호사가 민변 상근변호사를 자원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나 뜻밖이었고, 그때만 해도 회원들은 그의 자원을 꼭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직을 개편할 1991년 여름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고, 상근변호사를 하겠다는 그의 약속은 언제든지 취소해도 좋은 것이었으며 누구도 약속위반의 책임을 추궁할 리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상근변호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김&장>을 그만두고 사무실을 아예 민변으로 옮기는 준비를 하면서, 분명히 고민이 없지 않았을 그는 단 한번도 후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다고 특별한 일을 하는 듯이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냥 사무실을 옮기는 평범한 모습일 뿐이었다. 자기의 것을 크게 포기하면서도 기꺼운 그의 표정이 나에게는 더욱 놀라웠다.
그가 정식으로 민변 상근 변호사가 되던 날, 대표이던 황인철 변호사님께서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고 회원들의 박수 속에 그가 나섰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회원들이 하라고 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자기가 변호사로서 배운 것은 어떤 일이든지 거절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라고 덧붙였다.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상근변호사를 한 1년 동안 민변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생각하기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나의 조직이 한 개인에 의하여 변할 수 있는 범위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상근 변호사를 맡던 시기에는 본색을 완전히 드러낸 군사정권 아래 폭주하는 공안사건 변론이 회원들의 노력과 시간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자연히 상근변호사를 두면서 계획했던 사업들이 제대로 진척될 수 없었다. 그는 민변의 일상 업무에 파묻혀 많이 힘들었던 것 같고 때로 다른 간사들과 의견충돌도 일으키곤 했던 것 같다. 그 과정을 통하여 그가 가진 원칙이 대체로 드러났는데 그것은 민변이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의 편에 확고히 서야한다는 것이었다.
민변에는 우리 사회에서 약하고 그래서 자신들의 권리를 짓밟힌 온갖 사람들이 찾아 온다. 변론을 부탁하기도 하고 재정지원이나 그밖에 연대활동 등 참으로 갖가지 요구들이 들어오는데 민변이 그 모든 요구에 다 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때로는 그러한 요구들과 관련하여 회원들 사이에 날카로운 의견 대립이 일어나기도 한다.
미리 어떤 기준을 세워 둘 수도 없고, 그러다보니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서 기준이 달라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어쨌든 상근변호사로서 그가 변함없이 지키려고 한 원칙은 -때로 회원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기도 했지만-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언제나 인권피해자들의 편에 서야한다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때로는 그의 견해가 다소 경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런 오해를 개의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믿음직스럽기도 했고 조금 염려스럽기도 했다.
나는 그가 상근변호사로 있는 동안, 회원으로서 나름대로는 그를 도우려고 애썼다. 물론 여러 현안들에서는 생각을 달리 한 것이 적지 않았지만, 민변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하여는 언제나 내 제안과 생각을 전하려고 노력하였고, 그는 그의 말대로 언제나 성실하게 나의 제안에 응하였다. 사실 서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변호사들 사이에서 한참 밑의 후배가 하는 말까지 일일이 듣고 성실하게 응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그는 후배들이 거리낌없이 이런 저런 제안을 할 수 있게는 하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는 내게, 특히 민변과 관련된 문제에 관하여 반드시 의논해야 하는 선배가 되었고 그 후 자연스럽게 변론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사실 변호사로서 공안사건 재판에 참여하여 변론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양심상 받아들일 수 없는 악법들이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는 데 악용되는 현장에 법률가의 자격으로 참여하여 지켜보아야만 하는 역할이 얼마나 욕스러운 것인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 나라의 법과 변호사의 역할에 깊은 회의를 갖게 되었고 기존의 법절차가 그 악법들을 개혁하는 데 거의 아무런 쓸모도 없는 현실에 참담한 무력감을 느끼곤 하였다.
그러한 고민과 국제정세의 변화속에서 민변과 인권단체들은 국제연대활동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고 군사정권이 장식용으로 가입한 국제인권조약들은 변호사인 우리들에게 새로운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90년 겨울 유엔인권센터를 방문하여 국제인권제도에 관하여 소개를 받은 나는 일본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법률가회의 참가를 추진하고 있던 천변호사와 이 문제에 관하여 쉽게 마음이 맞았다.
때마침 한국 정부는 1991년 초 유엔인권이사회에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따라 인권보고서를 제출하였고 인권이사회는 정부대표를 참석시켜 이 보고서를 심사하는 회의를 열게 되었다.
유엔을 통하여 정부보고서를 구해 검토해 본 우리는 그 내용이 매우 부실하고 또한 한국의 인권상황과 법제도를 크게 왜곡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정부가 국제사회를 속이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반박보고서를 만들어 인권이사회에 실상을 알리기로 하였다.
민변이 주도하여 여러 달에 걸쳐 한 이 작업의 결과가 '한국인권의 실상'이라는 역사비평사에서 출판된 책인데, 민변의 동료변호사들이 수집 정리한 자료를 바탕으로 천변호사와 내가 절반 정도씩 나누어 쓰고 고친 다음 영역하여 유엔에 보냈다.
인권이사회는 회의 결과 국가보안법이 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 인권상황 개선에 중대한 장애물이므로 폐지하라고 하면서 안기부의 권한을 줄이고 경찰의 과도한 폭력을 자제하라는 등의 다양한 권고를 채택하였고 우리가 제출한 보고서는 인권이사회로부터 아주 모범적인 것이며 큰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러 달에 걸쳐, 각자 이미 충분히 바쁜 사무실일을 하면서 가외로 시간을 내어 보고서를 만드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힘들고 짜증나는 일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특히 여러 사람들이 써온 초안들을 고치고 다듬고 보충하여 전체적으로 일관성있는 하나의 보고서를 만들어내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보고서를 만들던 마지막 날, 우리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보고서 편집과 인쇄, 복사를 마무리하며 사무실에서 다음날 아침을 맞이하였고 천변호사는 보고서를 제본하여 제네바로 부치는 일까지 직접하였다.
1992년 7월 우리는 제네바에서 열린 인권이사회 회의를 참관하면서 우리가 애써 만든 보고서들이 유용하게 이용되는 모습을 확인하며 보람을 느끼기도 하였다.
일은 언제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법. 인권이사회 보고서작업은 곧 이어 다음해 비엔나에서 열린 세계인권회의참가로 이어졌다.
뒤늦게 준비를 시작한 우리 인권단체들은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함께 작업을 하였고 천변호사는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비엔나회의가 끝날 때까지 실무총책을 맡아서 지휘하였다.
우리에게는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지역 준비회의가 처음으로 참가하는 국제회의였기 때문에 이러한 회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딸리는 우리는 성심껏 노력하기로 하고 국가보안법 문제와 장기수 석방문제를 국제사회에 제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결과적으로 이 회의를 통하여 국제인권운동에 한국의 인권운동을 훌륭하게 신고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방콕회의에서 천변호사는 동북아시아 지역대표로 선임되었으며 그 활동을 계기로 비엔나에서는 전세계인권단체들의 대표모임에 3명의 아시아 지역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 93년의 세계인권회의는 우리에게는 짧은 시간에 국제인권운동의 흐름을 보고 배우며 사람들을 사귀게 된, 참으로 소중한 기회였다.
비엔나 회의에 참가한 한국인권단체 대표들은 국내 참가자와 미국과 유럽에서 지원하러 온 교포단체 회원들을 포함하여 모두 30명 가까운 대 부대였다. 회의가 다가옴에 따라 천변호사를 비롯한 선발대가 먼저 떠나 현지에서 준비를 하고 나는 나머지 참가자들과 함께 국내준비를 마무리하여 떠나게 되었다. 여러 달 동안 계속된 강행군으로 암스테르담을 거쳐 비엔나로 가는 여행은 피곤하기만 하였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생각한 것은 빨리 비엔나에 도착하여 선발대가 잡아 놓은 숙소에서 쉬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비엔나 공항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우리 선발대원들과 몇몇 교포단체 회원들이 봉고차까지 가지고 마중나와 있었다. 그러나 편안한 숙소에 대한 나의 꿈은 곧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 숙소가 모자라 30명이 한꺼번에 들 수 있는 곳이 없고 비용도 아끼기 위해 조직위원회가 비엔나 외곽에 마련해 놓은 야영장에서 텐트생활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실망감이 적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김찬국 목사님과 홍성우 변호사님, 미국에서 오신 베이커 선생 등 특별한 분들만 호텔을 잡아드린 후 우리는 야영장의 군용텐트 안에 짐을 풀어야 했다.
알프스 산맥 기슭에 자리잡은 비엔나의 날씨는 여름인데도 흐리고 비오는 날이 많고 그런 날은 우리나라의 늦가을처럼 추웠다. 더구나 첫날에는 밤새도록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번개와 함께.
꽤 튼튼하게 지어 놓은 군용텐트는 당장 무너질 듯이 흔들렸고 바닥은 완전히 강으로 변하였다. 바닥에 내려 놓은 물건들은 진흙범벅이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일인용 군용침대에서 담요 두 장으로 견디기에는 너무 추웠고 마음은 그보다 더 을씨년스러웠다. 텐트가 무너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워 잠을 이룰 수 없었지만 일어나 호들갑을 떤다고 해도 별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와지끈 뚝딱, 텐트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옆에 있는 여자회원들 숙소가 무너지지 않았을까, 겨우 일어나 틈으로 내다보니 다행스럽게도 무너진 것은 다른 것이었다. 피곤에 지쳐서였는지, 이렇게 해서 20일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불안해하며 비엔나의 첫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젖은 옷가지들을 널고 진창으로 변한 텐트를 청소하면서 간밤에 우리는 모두 서로를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게 끔찍한 폭우는 다시 퍼붓지 않았지만 비엔나의 20일을 우리는 계속되는 비와 궂은 날씨 속에 떨며 지냈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들에게는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열심히 배우고 우리나라의 인권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을 찾아보자는 목표가 있었다.
천 변호사는 그 모든 과정을 챙기고 이끌면서 또 아시아지역 대표로 온갖 회의에 참석하는 등 일인다역의 역할을 해내었다. 회의장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서 야영을 한 우리는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식사와 준비를 해야 했고 저녁이면 전등 몇 개 켜 놓은 어두운 텐트에서 다음날 행사를 준비해야 했다. 밤늦게 회의가 끝나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술이라는 천변호사의 주도로 비엔나의 밤하늘 아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하였다. 회의기간 중 그렇게 해서 우리가 마셔버린 포도주병이 거의 텐트하나 부피만큼은 쌓였다.
10여개 인권단체에서 온 30여 명의 사람들이 하나의 조직체계 안에서 힘든 야영생활을 하면서 일사분란하게 활동한 것은 비엔나에 온, 각국의 활동가들에게 꽤 깊은 인상을 준 것 같다. 물론 교포 풍물패의 탁월한 실력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어쨌든 자기들의 행사에 참가해 달라는 요청이나 우리 텐트를 방문하고 싶다는 요청이 잇따랐다.
'아시아지역의 국가보안법에 의한 인권침해'를 주제로 우리가 주관한 심포지움도 잘 진행되었고 양심수들이 갇혀있는 0.75평 감옥을 실물 그대로 만들어 회의장에 전시해놓고 벌인, 43년째 갇혀있던 김선명씨의 석방운동도 보람이 있었다.
힘든 가운데에도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며 하루하루가 흘러 마침내 비엔나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마지막 날이었는지, 우리는 밤을 꼬박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졸다 깨다 하며 들어서 모든 이야기를 다 기억하지는 못 하지만 누군가가 직업으로 사람의 호칭을 차별하는 관습의 문제를 제기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변호사, 교수, 목사, 신부 같은 사람에게는 그 나이나 능력에 관계없이 '님'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관행에 대한 지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만 해도 '조변호사님'이라는 호칭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던 것이다.
졸면서 듣고 있던 내 귀를 번쩍 뜨이게 만든 이는 천변호사였다. 그는 조금도 스스럼없는 태도로 그 지적에 동의하면서 자기를 '정배야' 혹은 '정배씨'라고 불러도 좋다는 것이었다. 얘기 끝에 '천변', '조변' 정도가 좋겠다는 선으로 결론이 나기는 했지만, 그날 밤의 그 모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천변호사의 열린 마음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비엔나회의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마무리 작업으로 무척 분주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상근간사였던 노태훈씨가 구속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경찰은 애초의 목표대로 노태훈씨를 간첩으로 엮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 보복으로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죄로 노씨는 여러 달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부당국이 인권단체들의 국제활동을 얼마나 민감하게 받아들이는지 알게 되었고 역설적으로 우리 인권운동에서 국제연대활동이 갖는 중요성을 새삼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재판은 자연스럽게 천변호사와 내가 함께 하게 되었는데 마침 노태훈씨가 내 방에서 경찰청 보안국(남영동 대공분실) 요원들에게 불법연행되었기 때문에 나는 간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하였다.
그런저런 사정으로 천변호사가 열심히 나서서 변론하였고 형사 재판이 마무리된 다음에는 노태훈씨에 대한 불법연행과 수사에 대하여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해 지금도 진행중이다.
민사소송 1심재판에서 천변호사는 경찰과 검찰의 불법수사를 증명하기 위하여 직접 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증언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비록 법원은 천변호사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경찰과 검찰의 거짓말에 손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인권회의가 마무리되자 참여했던 단체들 사이에 그동안 공동활동의 성과를 모아서 국제활동에 함께 대처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자는 제안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한국인권단체협의회가 창립되었다. 인권협은 개별 단체들이 하기 힘든 국제연대활동을 공동으로 계획, 조정하고 수행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비엔나인권회의 후속작업으로 열린 각종 회의에 참가하고 아르헨티나 오월광장 어머니회를 초청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고 쳔번호사는 인권협 집행위원장을 맡아 2년 동안 수고하였다.
비엔나회의 참가를 위해 우리가 공대위를 만든 때부터 인권협의 활동을 통하여 우리 인권운동의 국제연대역량은 비약적으로 강화되었고 아시아지역의 인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천변호사에게 가장 큰 일은 김근태 선배가 중심이 되어 만든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에 참여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 그를 만나고 함께 일하면서 나는 그가 재야운동에 대해 가진 애정과 열정을 잘 알고 있었고 그가 국민회의 사무총장을 맡으면서는 재야의 성공적인 활동과 정치참여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한다는 소망을 여러 번 듣기도 하였다.
사실 그의 국민회의참여에 대하여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특히 비엔나회의때부터 함께 일해온 동료들은 이제 천변호사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냐는 염려를, 가능하면 만류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뜻을 담아서 말해오기도 하였다.
사실 나 자신도 염려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동료들에게는 국민회의 참여가 반드시 정치참여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사실 천변호사는 앞으로 우리나라의 인권운동을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어 그가 정치적 운동에 몸을 담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인권운동에 큰 손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또 우리가 느끼는 정치판이 너무나 혼탁하여 천변호사같은 성품의 소유자가 상처를 받지 않고 견뎌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김근태 선배와 국민회의 활동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다는 그의 소망이 꼭 결실을 이루기를, 기대와 염려를 함께 가지고 지켜보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통일시대 국민회의 참여는 다소 관념적이고 이상에 치우쳐 있던 그의 시각을 현실에 바탕을 둔 구체적인 것으로 바뀌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사람의 말을 너무나 잘 믿는 그는 국민회의에 참여한 초기에 함께 일하기로 한 재야 활동가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곧잘 감격하곤 하였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인지, 얼마나 굳은 각오로 어렵기만 한 재야 운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있는지 이야기해주곤 하였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경우, 천변호사는 재야운동에 대한 그의 신념을 듣고 너무나 감격하여 나에게
"지금도 이런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까지 말하기도 하였다.
나는 한편으로는 천변호사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결국 재야운동에 대한 천변호사의 소박하고 관념적인 애정은 국민회의 활동을 통하여 경륜있는 재야활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다듬어지고 발전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예컨대, 그가 그렇게 칭찬해 마지 않던 활동가는 특별한 사정변화 없이 얼마 뒤 집권당에 입당해 버렸으니, 그의 상심이 어땠을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무튼 국민회의라는 전국적인 조직을 운영하는 데 살림꾼으로 참여한 경험은 그의 생각과 활동의 폭을 크게 넓히고 구체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94년 여름부터 내가 1년 간 외국생활을 하게 되어 그 동안 천변호사의 활동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귀국하기 얼마전 들은 지방선거 소식은, 국내정치상황에 관하여 정확한 정보를 듣지 못하던 나를 막연한 희망으로 들뜨게 하기도 하였고 곧이은 민주당의 분당소식은 큰 실망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귀국하여 아직 숨도 돌리지 못하던 어느 날 천변호사로부터 급한 연락을 바란다는 여러 통의 전화가 와 있었다.
한 이틀에 걸쳐 서로 숨바꼭질을 거듭하면서 계속 통화를 하지 못 하다가 마침내 만나게 되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렇게 급하게 찾을까 궁금해 한 나에게 뜻밖에도 그가 물은 것은 국민회의에 참여하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우리가 나눈 대화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의 생각은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할 법하다고 내가 느꼈던 것보다 더 깊은 것이었고 나와 생각이 같은 부분도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그가 가진 고민은 이른바 정치적 야심과 거리가 먼 것이었기에 오히려 더 무겁게 나에게 전해졌다.
그가 결국 참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연락했을 때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그러나 진심으로 그의 결정을 축복했다. 사심이 없기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을 것이지만, 그래서 그는 어디서나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꼭 해야 할 일을 하려면 그와 같은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고 사람이 어디에 쓰여야 할 지는 아무도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문제가 얽히고 설켜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는 난마처럼 얽힌 문제의 실타래를 조심스럽고 끈질기게 풀어나갈 수 있는 성의와 능력을 미처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나야말로 문제를 풀 적임자라며 너도 나도 나서는 데서 더 어렵게 꼬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니 가위로 덥석 잘라버리거나 아무 가닥이나 무조건 잡아당기고 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대화와 설득으로 대립과 갈등을 풀어가는 대신 권력을 휘둘러 윽박지르고 진압하여 문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입으로는 지역감정을 없애야 한다고 게거품을 물다가 뒤돌아서서는 온갖 추악한 방법으로 그것을 부추겨 마지않는 '지도자'들은 아예 입에 올릴 가치조차도 없다.
그럴듯한 일로 자기의 명망을 만들어내는 사람보다는 막상 힘든 일을 할 때 드러나지 않는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이 정말 필요한 것을 우리가 다 알 듯이 그런 성의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작은 출발이 아닐까.
그래서 다음 세대에게는 좀 더 가벼워진 역사의 짐을 넘겨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뿌듯한 보람을 느껴야 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작은 꿈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