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성계의 황산대첩
① 사실 개요
황산(荒山)은 남원시 운봉읍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진 해발 695m의 바위산이다. 1380년(우왕 6)에 삼도순찰사 이성계(李成桂)는 이 산에서 배극렴(裵克廉), 이두란(李豆蘭) 등과 함께 거느리고 함양에서 공격해오는 왜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적이 험지에 자리 잡고 버티자 이성계는 위험을 무릅쓰고 산 위로 올라가 무찌르고, 활을 쏘아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사살했다.

* 황산대첩비각, 파비각, 사적비각
② <용비어천가>의 노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이에 관해 노래했다. 제47장에서는 “片箭편전 나태 島夷도이 놀라니 어늬 구더 兵不碎병불쇄리고”(짧고 작은 화살 하나에 섬도적이 놀라니, 어느 것이 굳어 적의 군대가 부수어지지 않겠습니까?)라고 해서 활로 적장을 죽인 것을 말했다. 제48장에서는 “石壁벽에 올이샤 도 다 자시니 현번 운 미 오리가”(석벽에 말을 올리시어 도적을 다 잡으시니, 한 번 아니라 몇 번을 뛰어오르게 한들 남이 오르겠습니까?)고 해서 석벽으로 말을 타고 올라가 도적을 잡는 것을 말한다.
③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동국여지승람> 운봉현(雲峯縣) 조에 싸움의 경과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왜구(倭寇)가 함양(咸陽)을 도륙하고, 또 남원산성(南原山城)을 치고는 물러나 운봉현(雲峯縣)을 불질렀다.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하고서 장차 북상(北上)하겠다고 소리치매 온 나라가 소란스러워졌다. 태조(太祖)가 변안렬(邊安烈)과 더불어 남원에 이르니, 배극렴 등이 길에 나와 배알하고 기쁘고 좋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가 이른 아침을 기하여 적과 싸우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은 험한 곳에 의지하고 있으니,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만 못할 것이라”고 했다. 태조가 “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니, 적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인데 이제 적을 보고서도 치지 아니한다면 되겠느냐”라고 했다. 밝은 아침에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동으로 운봉을 넘어 적과 수십 리를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황산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鼎山)의 봉우리에 오르는데, 길 오른편에 험한 길이 있었다. 태조가 이미 험지에 들어, 적들이 날카로운 창을 가지고 튀어 나왔다. 태조가 50여 발을 쏘아 적의 면상을 적중시키니, 활을 당기기만 하면 죽지 않는 놈이 없었다. 적이 험한 산에 의지하고 스스로 굳게 지키매, 태조는 사졸을 지휘하여 요해지에 나누어 의거하니, 적은 죽을 힘을 다하여 대항했다. 태조는 다시 소라를 불어 군대를 정돈하고 개미처럼 붙어 올라가니, 적은 태조를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태조가 그 자리에서 여덟 놈의 적을 죽여 없애니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하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겁이 나는 자는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을 터이다.” 하니, 장사들이 감동되어 용기백배했다.
적장 중에 나이 겨우 십오륙 세 되고 이름이 아지발도라는 자가 있었는데, 태조는 용맹스럽고 날랜 것을 아껴서 사로잡으려고 하니, 이두란은 “죽이지 아니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해할 것이라”고 했다. 태조가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맞히니 투구가 떨어졌고, 이두란이 재빨리 사살하니, 이에 적은 기세가 꺾였다. 태조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시냇물이 붉은 핏물이 되었다. 처음에 적의 수는 아군의 10배나 되었는데 겨우 70여 명이 지산으로 도망하였다.”

*황산대첩 사적을 기록한 황산대첩비
④ 전설 1 : 아지발도와 할머니
왜구 장수 아지발도는 나이가 어린데도 무예가 뛰어나고 두꺼운 갑옷과 투구를 쓰고 있어서 화살을 쏘아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성계는 아지발도를 잡으려고 며칠째 황산에서 기다렸으나, 아지발도는 꼭 황산 앞에서 자기들 진지로 되돌아가 계속 실패만 하였다. 아지발도는 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누이로부터 조선의 황산을 조심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루는 아지발도가 자고 있는데, 아직 새벽이 되지도 않았는데 닭이 울었다. 아지발도는 닭이 우니까 새벽인가 싶어 일어나 고남산 쪽으로 올라갔다. 이성계는 “옳다!” 싶어서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할머니를 시켜서 아지발도 앞으로 보냈다. 아지발도가 “여기 어디에 황산이란 곳이 있느냐?” 하고 물으니 할머니는, “여기엔 황산이란 곳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랬더니 아지발도는 안심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왔다.
이윽고 날이 완전히 밝을 무렵 아지발도가 황산으로 올라오므로 퉁두란이 화살을 쏴서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추었다. 아지발도는 땅에 나뒹굴며 입을 벌렸다. 그 때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목구멍에 활을 쏘았다. 아지발도는 많은 피를 흘리고 죽었다.
아직도 황산 아래 바위가 벌겋다. 사람들은 그것이 아지발도의 피라고 하면서 그 바위를 피바위라고 부른다. 이성계가 아지발도를 죽인 것을 계기로 고남산은 태조봉이라고도 불린다.
⑤ 전설 2 : 아시발도를 쏜 이성계의 화살
이성계는 왜구와 싸울 때 팔량치 바람을 끌어 들여 화살을 실어 쏘았다. 화살의 방향과 바람의 방향이 같아 화살의 위력이 두 배로 강해졌다. 결국 화살은 아지발도의 목을 뚫고 대승을 거두었다. 아지발도가 온몸이 갑옷으로 무장되어 있어 화살이 뚫을 수 있는 곳은 목뿐이었다. 바람이 불어와 갑옷을 날리니 아지발도가 “아! 황산바람 세구나” 하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입에 화살을 쏘았다. 바람을 인도해 왔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인풍리(引風里)라 하였다.
⑥ 전설 3 : 이성계와 울독치
이성계는 왜구와 전투에 대비해, 도술을 사용해, 부근의 돌들을 모두 이곳 황산으로 모이도록 했다. 주변의 초목들도 황산 쪽을 향하라고 했다. 모여든 돌들은 적개심에 들떠 왜구와 싸울 때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산대첩으로 왜구는 섬멸되고 말았다. 돌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다. 돌들은 왜구가 인월(引月)에 침입해 온갖 만행을 자행했으므로 분함을 참지 못해 울고, 자기들이 왜구를 물리치지 못해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울독치, 웃도치, 명석치라는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그 후에도 전란을 당할 때마다 이곳 바위들이 밤새 서서 울었다고 한다. 지금도 돌들이 선 채로 있다.

*<어휘각> 이성계가 황산대첩이 자기 혼자의 공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공으로 이룩되었다는 성지를 석벽에 새긴 유적이다. 1945년에 일제가 황산대첩비와 함께 비전을 폭파하여 그 잔재를 모아 어휘각을 건립하였다.(연경)
⑦ <황산대첩비>
당시의 승전 사실을 길이 전하기 위해 1577년(선조 10)에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건립했다. 김귀영(金貴榮)이 글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썼다. 1945년 1월에 일제의 경찰은 비를 폭파하고 비문의 글자를 긁어 버렸다. 1963년에 이 비를 사적으로 지정하고, 용을 새긴 이수(螭首)와 거북 모양의 귀부(龜趺)는 남아 있는 것을 그대로 이용하고 비를 만들어 세웠다. 1973년에는 비각을 세우고 주위를 정비했다. 깨어진 비는 파비각(파비각)에 보존하고 있다.
황산대첩비터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아 약 50m쯤 가면 어휘각(御彙閣)이 있다. 황산대첩 후 1년이 지나 이곳을 다시 찾은 이성계가 황산대첩의 승전을 기리고자 자신의 이름과 함께 황산전투에 참가했던 장수들의 이름을 이 바위에 새겨 넣었는데, 일제는 이것도 정으로 쪼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 1972년 새로 한글로 만든 황산대첩비

* 일제가 부순 황산대첩비를 보관한 파비각

* 일제가 부순 황산대첩비
⑨ 정약용(丁若鏞), <황산대첩비를 읽고>(讀荒山大捷碑)
溪邊繫馬杜棠枝 시냇가 팥배나무 가지에다 말을 매고
杖策上讀荒山碑 단장 짚고 올라가 황산비를 읽노라.
鐵畫巉巖伏虎豹 굳센 획 가파른 바위 호랑이가 엎드리고,
璘霦煜霅遁魈魑 번쩍번쩍 빛이 나서 도깨비도 도망가네.
赫赫神威凜如昨 혁혁하고 신령스러운 위엄 어제 일 같으니,
何況當年身値之 당시에 몸소 겪는 분들이야 어쨌겠나.
螳螂可敬蛙可式 사마귀나 개구리라도 대견하도다.
阿只拔都奇男兒 아지발도라는 녀석 기이한 남아로다.
人年十五眇小耳 사람 나이 열다섯이면 어리기 짝이 없어
蔥笛堪吹竹堪騎 파피리 불어대고 죽마 탈 시절인데,
敢與虯髥作頡利 감히 규염과 같고, 길리가 되어서
越海萬里專旌麾 만리 바다 넘어 깃발을 휘두르니.
彤弓百步落甖苴 붉은 활로 백보에서 항아리 끈 떨구고,
負樹發箭爭安危 나무 등지고 활 쏘아 안위를 다투었네.
妖星旣隕衆彗倒 요망한 별 떨어지자 뭇 혜성이 뒤집어져,
澗石千年殷血滋 시내 돌에 천년토록 검붉은 피 배어 있네.
鄭公無謀和尙媟 정공은 무모하고 화상은 함부로 구니
天意人心當屬誰 천심 인심 마땅히 누구에게 돌아갈까.
此擧夜壑舟已徙 이 공적으로 한밤중 골짝이 배가 자리 옮겨,
不待威化回軍時 위화도 회군을 기다릴 것까지 없었네.
“사마귀나 개구리라도 대견하도다”는 왜적에도 인물이 있다는 말이다. “규염”과 “길리”는 중국 당태종 시절의 반역자이다. “붉은 활로”, “나무 등지고 활 쏘아”는 이성계가 이두란과 활쏘기 시합을 하면서 뛰어난 기량을 보인 것을 말한다. 무모하다는 “정공”은 정몽주(鄭夢周)이고, 함부로 군다는 화상은 신돈(辛旽)이다. “한밤중 골짝이 배가 자리 옮겨”는 고려를 대신해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역사의 전환이 암암리에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 황산대첩은 이성계가 민족의 영웅으로 숭앙되어 조선왕조를 창건할 수 있게 하는 대사건이다. 여러 갈래의 전승에서 다투어 찬양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장 아지발도를 죽인 사람은 여진 귀화인 장수 이두란(李豆蘭, 또는 之蘭, 본명은 퉁두란)이었는데 이성계였다고 말이 바뀌어 전한다. 이성계만 숭앙되고 사람들의 공적은 약화되자, 이름 없는 할머니는 물론 바람이나 돌까지도 큰 사명을 맡았다고 하는 전설이 나타나 깊이 새겨야 할 반론을 제기했다.
황산대첩에 관한 전승을 모아서 장편 서사시를 이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용비어천가>>는 서사시이지만 단편인 언급을 하는 데 그쳤다. 정약용은 서정시를 짓는 데 그쳐 전투의 경과는 말하지 않았으며, 아지발도에 관한 이해나 서술이 서사시와는 거리가 멀고 치졸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약용이라도 다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황산대첩비를 일제가 없애고 다시 만든 것까지 포함시켜 사건의 전모를 다시 말하면서 갖가지 전승에 나타난 상반된 목소리를 살리는 작업을 역량 있는 시인이 맡아서 할 만하다.

*황산대첩비
* 태조 이성계 어진(허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