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재밤... 그러니까 밀양여행 첫째날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던중 버스에서 본 영남루의 야경이다. 너무 늦은 관계로 먼발치에서 사진만 찍고 내일 아침에 이곳을 방문할 예정이다.
다음날 아침일찍 찾아온 영남루는 밀양 시가지 중심을 감아 굽이쳐 흐르는 남천강 절벽 위, 시야가 탁트인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역시 조선의 3대 누각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장엄하고 정교한 멋을 가진 누각 이었다.
영남루(보물 제147호)는 조선시대때 밀양부의 객사인 밀주관에 부속되었던 건물이라고 한다. 고려 공민왕(1365년)때 부사 김주(金湊)가 신라시대 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의 부속누각에서 유래가 되어 전래해 오던 작고 초라한 누각을 철거한 후, 진주 촉석루의 제도를 취하여 개창(改創)하였는데 이 때부터 규모가 큰 독립된 누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 몇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으나, 임진왜란때 밀양객사와 함께 불에 타 소실 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44년(헌종 10년)에 중건된 것으로 우리나라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2층 평면은 내외진(內外陣)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기와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래 끝에 부착된 귀면와(鬼面瓦)인데, 조선시대 귀면와 중 걸작품입니다. 건축형태는 누의 양옆에는 각각 1채씩 부속건물이 있는데 본루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능파각(凌波閣)을, 우측에는 침류당(枕流堂)을 익루로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건뭐지? 사진을 찍느라 해설사님 의 해설을 듣지 못했으니..
만덕문은 천진궁으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천진궁은,경상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단군이래 역대 8 왕조의 시조 위패를 봉안하고있는 곳이다. 중앙에는 단군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저 있으며 좌우로 각 왕조의 시조 위패를 모셨다. 원래는 밀양부 객사의 부속인 공진관 이였으나 국운이 쇄하던 일제시대에는 옥사로 사용되었던 굴욕적인 적도 있었으며. 광복후 1956년에 단군 봉안전이 됐으며, 매년 음력3월15일에는 어천대제, 10월3일엔 개천대제로 춘추제향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천진궁을 나와 왼쪽편에 보면, 영남루 경내와 주변에 산발적으로 분포되어있는 석화(石花)가 있는데, 그 형태가 국화꽃 모양의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비온 후에 그 자태가 선명하고 아름다워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이채로운 현상 이라고 한다. 석재의 재질이 연한 납석으로 자연적인 영향에 의하여 쉽게 부식되거나 훼손되기도 한다는 석화의 보존을 위해서 스테인 말뚝으로 울타리를 쳐놓고 있었다.
이잰 누각으로 올라가 본다. 침류각과 본 누각 사이를 달월(月)자형의 계단형 통로로 연결하여 건물의 배치와 구성에 특징을 배가 시켰는데, 웅장한 기풍으로 인해 당당하면서도 회화적인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어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명루로 일컬어 오고 있습니다.
영남제일루 는 계묘초하 이증석십세서(癸卯初夏李憎石十歲書) 라는 현판과,
이현석 칠세서(李玄石七歲書)인 "영남루" 편액이 특히 눈길을 끄는데 이는 이인재 부사의 아들 형제라 하며 10세와
7세라는 어린이의 글씨가 사실이라면 불가사이한 필력(筆力)이라 할수 있다.
영남루에서 바라 본 남천강과 삼문동의 일대의 모습이다.
'영남루 명등길 찾아가니 아랑의 애화(哀話)가 전해있네, 저 건너 대숲은 의구한데 아랑의 설은 넋이 애달프다' 영남의 대표적인 민요인 밀양아리랑 가사의 한구절이다. 밀양 여인네들은 이곳 부사의 딸이 있던 아랑의 애틋한 정절을 기려 '아랑~아랑~'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후에 “아리랑”으로 바뀌어 오늘의 밀양 아리랑이 됐다는 것이다..
영남루 바로 위쪽으로 초가집 한채가 보존되어있어 올라가서 자세히 보니 그 집은 우리나라의 대중가요사 에 한 획을 그은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생가라고 되어있고. 집 옆으로는 박시춘 선생의 흉상과 "애수의소야곡" 노래비가 세워져 있었다.
박시춘 선생 생가를 구경하고 아랑각을 돌아보기위해 영남루 아래의 남천강가로 내려가 보았다.
영남루의 바로 아래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아랑전설의 주인공인 아랑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아랑각 이다. 아랑의 본명은 윤정옥(尹貞玉)이며 경상남도 밀양부사의 딸이었다. 어려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로부터 자란 아랑은 세월이 흘러 어느덧 아름다운 처녀가 되었는데, 달 밝은 어느날 달구경 나온 아랑을 음흉한 유모와 통인(지방관아의 심부름꾼)인 백가(白哥)가 흉계를 꾸며 욕보이려 하자 아랑은 통인에게 결사코 항거하다가 끝내는 칼에 맞아 죽고, 대나무숲에 버려졌다. 아버지 부사는 아랑이 외간 남자와 내통하다 함께 달아난 것으로 알고 벼슬을 사직 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데 밀양에서는 신임 부사마다 부임하는 첫날밤에 의문의 시신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이때 이상사(李上舍)라는 담이 큰 사람이 밀양부사를 자원하여 왔는데. 부임 첫날밤에 나타난 아랑의 원혼에게서 억울한 죽음을 들은 그는 원한을 풀어주기로 약속하고 곧 백가를 잡아 처형했다. 그리고 아랑의 주검을 찾아내어 장사 지내주니 그 뒤로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물론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긴하지만....
영남루 아래에 보이는 다리가 최근에 와서는 화려한 조명으로 옷을 갈아입어 영남루와 함께 바라보는 야경이 일품이다. 영남루의 빼어난 풍광에 매료된 조선의 풍류시객 서원도는 다음과 같이 읊조했다고 한다. “눈아래 넓은 들이 아득하고 , 평평하기가 바둑판 같구나 , 큰 숲이 우거져 강물처럼 흐르는데, 그 가운데 눈부신 아침 해가 뜨고 저무는 곳, 뉘 있어 저 절경을 시화(詩話)로써 표현 하리오”
이렇듯 영남루는 밀양인들의 서정에 깊이 자리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여행객들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는 관광명소이며, 밀양강에 임한 절벽 위에 위치하여 웅장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그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1931년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16경을 선정할 때 영남루가 그 16경중에 하나로 선정된 것을 미루어 볼 때 당시의 수려했던 경관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추천버튼을 눌러주신다면 더욱 감사하지요.
▼아래의 손가락 버튼을 눌러 주시는데는 1초도 안걸립니다
로그인도 필요없어요..
추천해 주시면 더 많은 분들이 이글을 볼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
첫댓글 야경이 정말 예술인데요~ 이제 우리나라도 야경이 멋진곳이 많이 늘어나는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