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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시마시(鹿児島市, かごしまし)
규슈 남부, 가고시마 현에 있는 시 이자, 가고시마 현의 현청 소재지이다.
남규슈의 중심 도시이며 과거에는 사쓰마 번의 중심지였다. 1889년 4월 1일, 일본에서 최초로 시 제도를 시행했을 때 시로 지정된 31개 도시 중 하나이다. 1996년 4월 1일, 제1기 중핵시로 지정되었고, 가고시마 만의 앞바다 사쓰마만은 '동양의 나폴리'라고도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갖고 있다. 마치 게가 집게발을 벌린 모양으로 바다를 품고 있어 차라리 큰 강처럼 보여 비단결 같은 강이라는 뜻으로 긴코만(錦江灣)이라고도 불린다. 2004년 11월 1일, 인접한 요시다 정, 사쿠라지마 정, 마쓰모토 정, 고리야마 정, 기레 정 등 5개 지역이 편입되면서 면적이 2배, 인구 60만 명 규모의 새로운 가고시마 시가 탄생했다.
사쓰마만 한 가운데 있는 사쿠라지마 섬은 화산섬으로 1980 ~90년대에 비하면 꽤 잠잠해졌지만, 2000년 이후에도 아직 활발한 화산활동을 계속하고 있어 시 중심부에도 자주 화산재가 내린다. 활화산을 포함하면서 이만큼의 인구 규모를 가지는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역사] 가고시마의 옛 지명이 사쓰마이다. 가고시마의 모든 역사적 영광은 사쓰마번을 다스려온 시마즈 가문에서 나왔다. 시마즈가는 오랜 역사를 지닌 막강한 다이묘였다. 도시로서의 가고시마의 시작은 시마즈 가문의 6대 당주 시마즈 우지히사가 도후쿠지 성(가고시마 시 시미즈 정)을 거성으로 했을 때(1340년 경)로 보여진다. 1549년,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현재의 시역에 해당되는 장소(기온노스 정)에 상륙해 일본 최초의 크리스트교 전래지가 된다.
19세기 중순에는 유럽의 기계 문명을 도입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28대 당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하에서 집성관(현·쇼코 집성관) 사업으로서 반사로나 용광로가 만들어져 일본의 근대 공업화의 발상지가 되었고 메이지 유신 때의 정치가, 관료, 군인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근대 일본 건설의 주춧돌이 된다. 중심 시가지는 사쓰에이 전쟁에 의한 포격, 세이난 전쟁에 의한 전화, 제2차 세계 대전의 공습으로 괴멸적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조카마치로서의 모습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사쿠라지마의 분화로 화산재에 덮인 가고시마 시1871년 8월 29일, 폐번치현에 의해 현청 소재지가 되었다. 1889년 가고시마 시가 성립하였고 1901년 6월 10일에 가고시마 본선이 개통하였다. 1914년 1월 12일에 사쿠라지마 섬이 대분화하고 동시에 진도 7의 지진이 발생해 58명이 사망하였다.
1945년 6월 17일, 가고시마 대공습으로 약 2,300명이 사망하였다. 1967년 4월 29일에 시 남쪽으로 인접하는 다니야마 시와 합병해 새로운 가고시마 시가 성립하였고 1980년 7월 10일에 인구가 50만 명을 돌파하였다. 1996년 4월 1일에 제 1기 중핵시로 지정되었고 2004년 11월 1일, 가고시마 군 요시다 정·사쿠라지마 정, 히오키 군 마쓰모토 정·고리야마 정, 이부스키 군 기레 정이 가고시마 시에 편입되어 인구가 60만 명을 돌파하였다.
▣ 가고시마의 역사적 인물들
가고시마는 유형의 문화유산은 빈약하다. 조선 도공이 사쓰마야키(薩摩燒)를 연 미산(美山)마을과 이 지역을 통치하던 시마즈(島
津) 가문의 별저(別邸)인 선암원(仙巖園, 센간엔) 외에는 특별히 꼽을 만한 것이 없다. 그 대신 가고시마는 일본 근대사에서 뛰어난 역사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여 그들이 남긴 자취는 어느 지역도 따라올 수 없는 무형의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시내 곳곳에는 이 역사적 인물들의 동상이 서 있으며 메이지유신의 고향임을 보여주는 ‘유신의 고향(후루사토)’ 거리를 조성하여 여기가 가고시마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19세기 중엽 메이지유신 전후 일본 근대사에서 역사의 주 무대로 부상했으며, 이곳 출신들이 보여준 활약상은 화려하다. 본래 사쓰마는 서구 세력들이 일본으로 들어오는 초입이어서 개화 사상이 일찍이 일어났다. 이때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라는 개명(開明) 번주가 등장하여 근대적인 산업을 일으켰고 인재 양성에 온 정성을 다 바쳤다.
1863년 영국과 벌인 사쓰에이(薩英) 전쟁에서 패하자 사쓰마는 더욱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당시 에도 막부가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음에도 사쓰마번은 독자적으로 19명의 청년들을 영국에 유학 보낼 정도로 진취적이었다. 막부를 무너뜨리는 도막(倒幕)에 앞장선 것도 사쓰마였다. 메이지유신 3걸 중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모델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2~77)와 메이지정부 출범의 공로자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78)가 이곳 출신이다.
러일전쟁 때 해군 제독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도 이곳 출신이고, 2차 대전 때 두 차례나 외무대신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또한 이곳 출신이다.
또한 예술에서도 가고시마는 근대 일본의 선구였다. 일본 서양화단에 첫 번째 등장하는 대가인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가 바로 이곳 출신이다. 외광파(外光派)라는 일본화된 서양화풍으로 신선한 충격을 일으키고 도쿄미술학교에 서양화과를 설치한 화가로 우리나라 초기 서양화가들은 거의 다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가고시마는 일본 우익을 대표하는 지역이다. 현재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정치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전 자민당 총재와 일본 총리를 지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가 이 지역 출신이다.
▶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무장으로 시마즈가의 17대 당주가 되면서 시마즈가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장 중 한명이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1600년 세이카하라 전투에서 맹활약했다. 사쓰마야키를 연 박평의와 심당길은 정유재란 때 그에게 끌려온 조선 도공들이었다.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정유재란 때 1천여척의 연합 함대를 조직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 이 지휘하던 조선 함대를 격파했고, 1598년 봄 사천성 전투에서는 1만명의 병력으로 20만명을 대적하여 승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12월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기 위해 5백척의 함대를 이끌고 갔다가 이순신 장군에게 참패했으나 퇴로를 화보하고 돌아왔다. 이것이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다. 우리 역사서에 나오는 심안돈오(沈安頓吾)가 바로 시마즈 요시히로이다. 우리로서는 악연의 왜장이었다.
▶ 개명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시마즈 나리아키라
본래 사쓰마는 서구 세력들이 일본으로 들어오는 초입이어서 선교사 사비에르가 기독교를 처음 전래하기도 했고,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대포와 총을 들어오기도 했다. 19세기 중엽 개명(開明) 번주인 28대 당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가 등장하여 근대화를 이끌면서 일본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당시 막부는 쇄국으로 일관했지만 그는 사쓰마로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들어오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장(商館長)과 가까이 지내 서양식을 따르는 다이묘라는 ‘난벽다이묘(蘭癖大名)’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상고집성관
1840년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그는 서양제국에 맞서기 위해 일본이 하나가 되어 근대적인 국가로 개조하여 강력한 힘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1851년 42세에 분주로 취임한 이후 선암원 곁에 근대식 공업 단지를 조성했다. 그것이 훗날 상고집성관(尙古集成館, 쇼코슈세이칸)이다. 여기에는 용광로, 대포 공장, 가마솥 제작소, 금속 세공소 등을 세웠다. 또 사쓰마 곳곳에 제철 · 방직 공장 등을 세워 근대 산업을 통한 부국강병, 식산흥업정책을 밀어붙였다. 그중에서도 괄목할 만한 것은 조선소를 세워 증기선을 건조한 것이다. 재임 7년 만인 1858년에 자신의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길러낸 인재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이후 일본을 이끌어가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さいごうたかもり,
사이고 다카모리 (1828.1.23. ~ 1877.9.24)
일본의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정치가이자 무사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고 1877년 사쓰마 번 무사들의 반란인 세이난 전쟁의 패배 후 자결했다.
하급 무사 사이고 기치베 다카모리[西郷吉兵衛隆盛]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시이하라씨[椎原氏]이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세 명의 배우자를 맞이하여 4명의 아들들을 두었다. 그는 이름을 여러 번 바꾸었는데 최종적으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이름이 아버지와 같은 이유는 왕정복고(王政復古) 식전에서 위계(位階)를 수여 받을 때 아버지의 이름으로 잘못 올려 진 것을 계기로 아버지 이름과 같은 다카모리를 이름으로 썼다.
사쓰마번[薩摩藩]의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난 사이고 다카모리는 열여섯 살 때 번(藩)의 작은 직책을 맡았다. 총명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번주(藩主)인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錦]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그의 측근으로 일하게 되었다. 에도막부의 14대 쇼군[將軍]을 옹립할 때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함께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를 지지하였으나 최종적으로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가 쇼군이 되자 유배형에 처해졌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번주 나리아키라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뜻을 같이 하여 토막(討幕) 운동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1866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소개로 조슈번[長州藩]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와 비밀리에 연합하여 사쓰마-조슈 동맹, 이른바 삿초동맹[薩長同盟]을 맺었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 선봉에 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1866년 에도막부의 두 번째 조슈정벌[長州征伐]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에도막부 타도를 본격화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최종적으로 에도막부를 몰아내고 천황에게 정치 권한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던 중 사이고 다카모리는 토막파(討幕派)의 리더였던 이와쿠라 도모미와 함께 에도막부를 토벌하자는 밀칙을 내렸다. 밀칙에 따라 1867년 10월 14일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같은 날 이들에 앞서 에도막부가 대정봉환(大政奉還)의 상주문(上奏文)을 올렸고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에도막부가 정치 권한을 천황에게 돌려주자 밀칙은 취소되었으나 사이고 다카모리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토막파 및 급진파 공경(公卿)들과 모의하여 에도막부 토벌을 감행하였다. 이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1867년 12월 9일 각 번(藩)에서 모인 군사들을 이끌고 궁정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반(反) 토막파를 제외한 공경들을 소집하여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선언하였다. 이 사건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 하며 이로써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
메이지유신이 성공하고 1869년 메이지천황이 천황이 권력을 되찾는 데에 공적이 있는 인물들에게 위계(位階)를 수여할 때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장 높은 위계를 받았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는 새 정부에 관료로 들어가는 것을 사양하고 사쓰마번이 있었던 가고시마현[鹿兒島縣]으로 돌아가 운둔했다. 그 후로 여러 번의 제의가 있자 1871년에야 정부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가 이끌었던 만 명의 군사들은 정부군이 되었고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는 여러 번들을 복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산키[參議, 참의]에 임명되어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함께 새 정부의 정책을 만드는 책임을 맡았다.
새 정부가 추진한 폐번치현(廢藩置縣), 금록공채(金祿公債), 폐도령(廢刀令)과 징병제(徵兵制)와 같은 정책들은 메이지유신을 성공으로 이끈 사족(士族), 즉 무사들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족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러한 상황을 깊이 우려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무사들의 불만이 반란으로 표출되기 전에 전쟁을 일으켜 이를 해소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와의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최종적으로 전쟁은 하지 않기로 결론이 났다. 이로써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3년 정한파(征韓派) 산키들과 함께 사퇴하고 새 정부 내에 있었던 백 여 명에 이르는 세력을 이끌고 고향인 가고시마현으로 돌아갔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고시마로 돌아간 후 사학교(私學校)를 설립하고 사족들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학교를 설립하였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1877년 즈음에는 재학생이 2만 명에 이르렀다. 새 정부에게는 아직 정부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고 사족들의 지배체제가 유지되는 유일한 지역이었던 가고시마현이 큰 걱정거리였다. 게다가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세력이 결집되어 있고 사학교의 규모가 날로 커지자 위기감이 높아졌다. 새 정부의 오쿠보 도시미치는 가고시마를 공격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1877년 1월 ‘가고시마현이 보유하고 있는 병기와 탄약을 오사카[大阪]로 운반할 것’을 명하여 사이고 다카모리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사학교 학생들이 앞장서서 가고시마의 군수 공장과 해군기지를 공격하였고 1877년 2월 사이고 다카모리를 옹립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군사를 이끌고 도쿄[東京]로 향하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구마모토[熊本]에서 정부군과 맞닥뜨려 6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어졌다. 이로써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이 시작되었고 이후 규슈[九州] 전 지역에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의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패전을 거듭하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몇백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다시 가고시마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도시의 전경이 보이는 언덕에 서있었다. 9월 24일에 정부군은 최후의 공격을 가하였으며, 상처를 입은 사이고는 자결하였다. 동시에 그의 부하가 그의 목을 베었다고도 한다. 무사와 정부군들 양쪽에서 12,000명의 사상자와 20,000명의 부상자를 내고 말았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상황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1877년 9월 가고시마로 돌아왔다. 그리고 뒤쫓아 온 정부군이 최후의 공격을 단행했던 1877년 9월 24일 자결하여 49세에 사망하였다.
도쿄 우에노 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좌우명은 "敬天愛人(자연의 섭리에 대하여 존경을 하고, 사람들을 사랑한다)"이다.
▶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9.26 ~ 1878.5.14.)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성공으로 이끈 유신삼걸(維新三傑) 중의 한 사람으로 일본의 근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830년 사쓰마번[薩摩藩]의 무사였던 오쿠보 도시오[大久保利世]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미나요시 호우도쿠의 차녀였던 미나요시 후쿠이다. 본명은 오쿠보 도시사다[大久保利濟]이며 몇 차례 이름을 바꾸었다가 1865년 최종적으로 오쿠보 도시미치로 개명하였다.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보 도시미치는 당시 명망 있는 난학자[蘭學者]였던 외할아버지 미나요시 호우도쿠로부터 해외 각국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로부터 배웠던 학문과 지식을 바탕으로 17세에 사쓰마번의 서기 보좌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세가 되던 1849년 번 내에서 ‘오유라[お由羅] 소동’이 일어나 사쓰마번 내에서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의 개혁파와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의 보수파가 대립하였다. 결국 보수파가 승리하여 개혁파였던 아버지 오쿠보 도시오는 유배되었고 오쿠보 도시미치는 파면되었다. 그러다가 1855년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다시 정권을 잡아 사쓰마번의 번주[藩主]가 되자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면되어 복직되었다. 1875년 다시 보수파가 집권하여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유배 되는 등 개혁파 세력이 탄압을 받았으나 오쿠보 도시미치는 보수파와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시마즈 히사미쓰의 아들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에게 접근하여 신임을 얻었다.
1861년 번주의 비서로 임명되어 번정개혁(藩政改革)에 착수하였고 조슈번[長州藩]이 주장하던 조정과의 공무합체(公武合體)를 통한 양이운동(攘夷運動)을 지지하였다. 그러던 중 조슈번에 공무합체를 반대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난관에 부딪혔으나,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쓰마번을 중심으로 하는 공무합체를 이룰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이후 1862년 교토[京都]로 떠나 끈질긴 설득과 교섭을 진행하여 막부개혁을 허가하는 천황의 칙서(勅書)를 받아냈다. 이 일은 오쿠보 도시미치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시기 시마즈 히사미쓰에게 ‘이치죠[一蔵]’라는 이름을 하사 받고 승진하는 등 사쓰마번 내에서도 중심적인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1866년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의 소개로 조슈번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와 비밀리에 연합하여 사쓰마-조슈동맹, 이른바 삿초동맹[薩長同盟]을 맺었다. 그리고 1866년 에도막부의 두 번째 조슈정벌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에도막부[江戸幕府] 타도를 본격화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최종적으로 에도막부를 몰아내고 천왕에게 정치 권한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에도막부를 토벌하자는 밀칙을 내렸다. 밀칙에 따라 1867년 10월 14일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같은 날 이들에 앞서 에도막부가 대정봉환(大政奉還)의 상주문을 올렸고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에도막부가 정치권한을 천황에게 돌려주자 밀칙은 취소되었으나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토막파(討幕派) 및 급진파 공경(公卿)들과 모의하여 에도막부 토벌을 감행하였다. 이에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1867년 12월 9일 각 번에서 모인 군사들을 이끌고 궁정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반(反) 토막파를 제외한 공경들을 소집하여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선언하였다. 이 사건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 하며 이로써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메이지유신을 달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함에 따라 1869년 산키[參議, 참의]로 임명되었다. 1871년에는 산키에서 사퇴하고 오쿠라쿄[大藏卿, 대장경]에 취임하였고 같은 해 7월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을 조직하고 이와쿠라 도모미를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전권대사가 되어 서양 각국을 시찰하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시찰을 진행하던 중 오쿠보 도시미치는 정부의 요청으로 1873년 귀국하였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추진하던 정한론(征韓論)을 무산시켰는데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에 분노하여 산키에서 사퇴하고 가고시마현[鹿児島縣]으로 돌아갔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사직한 후 내무성(內務省)을 설치하여 초대 나이무쿄[內務卿, 내무경]으로 취임하였다. 이 시기부터 오쿠보 도시미치가 사망할 때까지의 시기를 일컬어 ‘오쿠보 정권’이라 한다.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오쿠보 도시미치는 잇달아 징병제(徵兵制), 지조개혁(地租改革), 식산흥업(殖産興業) 등 근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더불어 새 정부의 정책으로 불만이 커진 무사 세력 즉 사족(士族)들을 회유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지방의 반란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한편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국내 여론이 강경론을 강하게 지지하자 이에 부흥하기 위해 1874년에는 타이완을 침공하였고 1876년에는 강압적인 방법을 통해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가고시마에 돌아가 세력을 키우고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큰 걱정거리로 여겼다. 그러던 중 오쿠보 도시미치는 1877년 1월 ‘가고시마현이 보유하고 있는 병기와 탄약을 오사카[大阪]로 운반할 것’을 명하여 사이고 다카모리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7년 2월 15일에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을 일으켰고 오쿠보 도시미치는 직접 정부군을 지휘하여 6개월에 걸친 전쟁 끝에 이를 진압하였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세이난전쟁을 진압하면서 국내의 반대세력을 실질적으로 제압하였다. 이로써 오쿠보 도시미치의 권력은 새 정부 내에서 압도적인 것이 되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1878년 5월 14일 도쿄[東京]의 기오이자카[紀尾伊坂]에서 세이난전쟁에 참여했던 이시카와현[石川縣]의 사족 시미다 이치로[島田一郞] 일당에게 암살당하였다. 이 사건을 ‘기오이자카의 변(變)’이라 하며 이를 계기로 일본의 정계(政界)는 조슈파의 인물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 [자료 출처 :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1 규슈, (유홍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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