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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무각합장
일 러 두 기
주의력이란 집중력과는 다른 상태이다.
마음은 과거의 결과물이기에 쉴 새 없이
과거와 미래를 오르락내리락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산만한 마음의 움직임을
집중력에 의해 차분한 상태로 이끌어야 한다.
그것은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힘이 생겨나면
육신을 차분히 고요하게 만듦으로써 가라앉는다.
그런 다음에는 산만한 마음의 상태에서도
항상 무언가가 지켜봄을 행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에 마음이 분주하고 산만한 상태라도
본인이 산만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주의력이며 주의력이 등장하면
굳이 시간을 따로 내서 마음을 집중하지 않아도
마음이 제멋대로 흐트러지지 않는다.
지켜보는 눈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지켜보는 마음의 눈은 어디로부터 온 것도 아니고
어딘가로 떠나지도 않는다.
언제 어느 때건 우리와 늘 함께 하면서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마음을 깨달은 선사들은 무위를 강조하는 반면에
우리는 육신을 제어하려는 유위적인 행위를 통해
번뇌를 벗어난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고 있다.
육신은 유위적인 집중력을 통해 차분해질 수 있지만
마음은 얻고 구하려는 의도가 많을수록 산만해진다.
이러한 두 가지 이치에 눈뜨지 못한 탓으로
육신만을 제어하거나, 이치와 논리에만 집착하는 것은
한쪽 날개로 날려는 새처럼 중도를 이루지 못한다.
이와 같이 육신을 집중하는 것과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집중한다는 것은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맑은 물이 드러나는 것과 같으며,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산만하고 혼란한 마음일지라도
그것을 낱낱이 알아차리는 지켜봄이다.
언제 어디서건 내면을 지켜보는 눈이 존재함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인지도 모른다.
내면이 혼란하더라도 지켜봄은 혼란에 물들지 않으므로
혼란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깜쪽같이 속일지라도
자신을 속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과학이 발달하여 인간의 뇌를 능가하는 인조인간을
만든다 해도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언어를 끊임없이
지켜보는 그것을 만들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생명인 까닭이리라.
목 차
1.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될 일은 없다 ------------- 6
2. 마음은 상대적 관념의 산물이다 ---------------- 15
3. 갈등과 혼란 ---------------------------------- 20
4. 번민과 갈등 --------------------------------- 37
5. 존재계는 남고 모자람이 없다 ----------------- 42
6. 허공의 눈 ----------------------------------- 48
7. 동쪽으로 자란 나무는 동쪽으로 넘어진다 ------- 67
8. 스크린과 영상은 제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78
9. 우리가 곧 세상이다 -------------------------- 86
10. 세상에서 완전한 것은 없다 ------------------- 94
11. 취하고 버리려는 욕구가 고통이다 ----------- 113
12. 삶이 인도하는 대로 걸음을 옮기라 ---------- 126
13. 주장하려는 마음이 사라졌기에 평화롭다 ------ 137
14. 백묵과 지우개 ------------------------------ 145
15. 약을 찾지 않으면 마음은 병들지 않는다 ------ 157
16.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 165
17. 고독감을 몸 전체로 받아들여라 -------------- 174
18. 텅 빔과 충만함 ----------------------------- 184
19. 절대적 존재 -------------------------------- 195
20. 내면의 채찍까지 내려놓으라 ----------------- 202
21. 갈망과 두려움 ------------------------------ 206
22. 지켜봄은 본성의 마음이다 ------------------- 215
23. 애착과 기대감 ------------------------------ 223
24. 마음을 쉬는 자리 --------------------------- 233
25. 마음이란 본래 없는 물건이다 ---------------- 240
26. 소란과 고요 -------------------------------- 250
27.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즐기라 -------------- 257
28. 지켜봄은 원인 없이 존재한다 ---------------- 266
29. 고통과 번민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 ---------- 280
1.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될 일은 없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많은 혼란과 갈등도 결국 그러한 혼란과 갈등을 종식시키고 싶다는 욕구가 문제를 일으킨다. 만약 문제를 삼지 않는다면 문제될 일은 없다. 다만 살아가면서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쯤으로 인식되어질 것이다.
이처럼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은 세상이나 주변 환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문제를 만들어 내고, 그러한 문제로부터 벗어나기를 희구하는 한 우리의 노력은 아무리 오랜 세월을 흐른다 해도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계속 다른 문제를 끄집어내면서 해결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 받는 문제가 세상이나 주변 환경에 의한 것이라면 모든 사람이 공통적인 괴로움을 겪어야 하지만 항상 문제는 이원적으로 존재한다. 똑같은 문제를 놓고 느끼는 감정이 상반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를 일으키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일 것이다.
어쩌면 마음을 문제 삼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고통과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바르고 정직한 마음을 지니는 것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한 살 일이 없으므로 주변 사람들이 그를 해롭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살기가 각박해지고 치열한 탓으로 이득을 위해서는 정직한 마음을 쓰기보다는 쉽고 빠른 지름길을 택하다보니 현실과 타협하는 경우가 많아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정직하고 바른 마음은 점점 주눅이 들어가고 주눅 든 마음에서 벗어나 자유롭기를 원한다. 그러나 마음의 자유를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을 살펴보면 문제를 정복하여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욕구가 잠재되어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마음이 어떤 사슬에 묶여있더라도 걸림 없이 당당한 마음의 상태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묶고 있는 사슬을 풀어헤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진정한 힘이란 세상의 온갖 파도를 극복해내려는 정신력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정신력은 스스로가 갈고 닦지 않는다면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세상의 온갖 파도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자신만의 안전지대에 머물기를 바란다면 온실 속의 화초와 같아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은 찾아볼 수 없다.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지혜를 의미한다. 깊은 내면에서부터 살아 숨 쉬는 지혜야말로 어떤 환경에 처하든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밝은 빛을 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의식에는 의식과 잠재의식이 있다. 마음은 자꾸 생각하는 쪽으로 기울어 잠재의식에 각인되기 때문에 무심코 나온 말 한마디, 뜻 없이 행한 행동 하나에 그 동안 살아오면서 일구어 놓은 본인의 전체의식이 담겨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의지적인 행위도 결국 잠재의식이 일으킨 그림자일 뿐이다.
마음을 갈고 닦는다는 의미는 의지적인 노력보다는 잠재의식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잠재의식과는 어떠한 소통도 할 수 없으며 도무지 감 잡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없는 것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도 몸이 영 말을 듣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만일 잠재의식이 존재하지 않고 표면적인 의식만으로 살아간다면 삶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같이 움직일 것이므로 설령 일이 잘못되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음을 반대하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갈등하고 번민하면서 혼란을 겪는 것은 마음과 마음에 대하여 문제 삼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처럼 마음을 문제 삼으려는 무언가는 우리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틀 잡힌 마음이 행하는 것이다. 잠재의식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오랜 습관으로 틀 잡힌 성격은 누구든지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다.
자신의 성향이 어떤지도 알며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또는 게으르거나 부지런하다는 등으로 자신을 파악하고 있다. 그것은 마음보다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을 지배하는 것을 잠재의식이라고 부르며 습관으로 틀 잡힌 마음을 반 무의식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의식은 표면의식과 반 무의식, 그리고 잠재의식의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란 틀 잡힌 마음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려는 노력이 생겨나는 것은 무언가 마음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에 대하여 사사건건 시비를 일삼는 틀 잡힌 마음을 내 마음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만일 틀 잡힌 마음이 내 마음의 주인이라면 우리는 언제든 표면적인 마음에 대해서 문제를 삼고자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 마음의 주인공이 무엇인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마음은 표면의식과 반 무의식, 잠재의식 중에서 주인공이 존재할 수 있다. 표면의식이란 보고 듣고 맛보며 촉감을 느끼는 등의 의식이므로 거기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보이고 들리는 것은 어떤 차별도 없이 평등하게 보이고 들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내 입장과 형편에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으로 나누고 있다.
만일 표면의식이 마음의 주인이라면 굳이 나눌 필요도 없다. 내 입장과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안 보이고 안 들리도록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므로 표면의식은 주인이라고 여길만한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잠재의식은 우리가 어떠한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하므로 주인이라고 가리킬 무언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반 무의식을 주인공으로 여기면서 살아온 것이다. 여기서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내 입장과 형편에 맞추려 하기 때문에 욕망과 분노를 일으키는 무명의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만일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여기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욕망과 분노를 일으키면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늪에 빠진 것이다. 진정한 내 마음이라면 그 마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감 잡을 수 없어야 한다. 내 마음이라고 가리킬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결국 틀 잡힌 마음의 손아귀에 붙들린 것이므로 여전히 틀 잡힌 마음이 주인 노릇을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육신 따로 마음 따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내 마음이라고 할 수 없다. 보고 듣고 맛보고 촉감하는 표면의식은 바깥 경계에 대해서 반응하므로 표면의식을 내 마음이라고 한다면 바깥 경계를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잠재의식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으므로 일단 제외시키고 보면, 무언가 이름붙일 수 없는 또 다른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꿈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식은 깊이 잠들었어도 깨어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마음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면서도 내면의 모든 움직임을 낱낱이 알아차리고 있다. 심지어는 남에게 거짓말로 속이려는 의도까지도 파악하고 있다. 남을 속일 순 있어도 자신까지 속이지 못하는 것은 늘 깨어있는 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처럼 깨어있는 의식이 있으므로 슬픔도 느끼고 기쁨도 느낄 수 있다. 만일 마음으로 슬픔을 아는 것이라면 마음은 온통 슬픔으로 물들었기 때문에 기쁨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도 기쁨이 일어나기도 하며 기쁜 중에도 슬픔을 겪기도 한다.
그것은 슬픔과 기쁨에 의해 물들지 않는 속성을 지닌 마음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틀 잡힌 반 무의식의 마음은 물드는 속성을 지녔기에 과거의 기억으로 얼룩진 이미지를 간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보고 듣는 표면의식은 단순히 보고 들을 뿐이므로 물들지는 않지만 스스로 보고 들음을 알아차릴 수는 없다. 그것은 눈과 귀가 스스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뜻이므로 방금 죽은 사람이라면 멀쩡한 눈과 귀는 살아있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보고 듣지는 못한다. 눈동자에 사물이 비춰도 반응을 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어쩌면 그와 같이 물들지 않는 마음이 바탕으로 존재하기에 표면의식과 반 무의식, 그리고 잠재의식도 자리 잡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늘 변함없이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기에 무수한 영상이 스쳐가려면 스크린이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의 바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그러한 마음을 우리가 느낄 수 있고, 가리킬 수 있다면 여전히 틀 잡힌 마음이 내 마음이라고 하겠지만 이것이 그것이라고는 전혀 가리킬 수가 없다. 또한 그 마음은 육신과 잠시도 분리되지 않고 존재한다. 몸에 무언가 닿이는 촉감을 느끼는 것은 닿이지 않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표면의식은 경계에 대한 반응이므로 어떤 대상을 좇아서 나타난다. 만일 사물도 없고 소리도 없고 촉감과 맛을 느끼게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마음은 생겨나지 못할 것이다. 기억할 만한 재료가 없기 때문이다. 몸에 닿이는 촉감을 느끼는 것은 작동스위치가 켜진 상태이고, 닿이는 촉감을 못 느끼는 것은 스위치가 꺼진 상태이다.
몸이 스스로 작동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은 가능치 않다. 육신은 마음이 들어서지 못하면 한 웅큼의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그렇다고 표면의식이 항상 깨어있어서 켜고 끈다면 잠들지도 말아야 한다. 잠들어도 전부 보고 듣고 깨닫고 안다면 잠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육신에는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지켜봄이 늘 존재하고 있다. 지켜봄과 육신은 이것과 저것으로 나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존재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라고 말하지도 못한다. 달에는 달빛이 항상 빛나지만 달을 달빛이라고 할 수도 없고, 달과 달빛을 분리시킬 수도 없음과 같다.
지켜봄과 육신을 제각각 분리하려는 것은 스크린에서 영상만을 떼어내려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그러한 지켜봄을 가리킬 수가 없는 것은 육신이 곧 지켜봄인 까닭이다.
내 몸을 내가 가리킨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나를 붙들려는 것과 같다. 내 손으로 내 몸을 붙잡는다고 한다면 손은 내가 아니란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도 바로 나이다.
우리가 나를 나로 알지 못하는 것은 상대적인 관념으로 생겨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탓이다. 상대적인 관념을 통해서는 달과 달빛, 스크린과 영상 등이 둘 아님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과 저것은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2. 마음은 상대적 관념의 산물이다
마음이란 상대적인 개념을 지니고 있다. 상대적인 개념이란 반대편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높고 낮고, 크고 작고, 밝고 어둠 등의 개념을 통해 존재한다면 이것과 저것 중에서 고르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고르고 선택하기 위해서는 보고 듣고 맛보는 등의 감각을 느끼고 기억하여 자신이 원하는 쪽을 선택하도록 길을 지니고 있다.
마음이란 --할 것이다, --하겠다는 의지를 지녔고, --하고 싶다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입장에서 기준 잡힌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내 입장에서 보고 들으며 내 형편에 맞는 것은 내 것으로 취하려는 아상 중심적인 사고로 동작되고 있다.
마음이 보고 듣고 맛보는 등의 작용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길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마음과 거스르는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고 반발하는 등의 갈등이 빚어진다. 맥주를 흔들면 거품이 생기듯 마음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애착과 원망이라는 거품이 생겨난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성품과 다른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마음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거품이 생겨난 것이다. 거품을 걷어내면 본질을 볼 수 있듯이 마음도 거품이 사라지면 그것이 본성의 마음이다. 여태껏 잠들었던 성품을 깨우려면 마음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본성의 마음을 이름하여 참마음 또는 참성품이라는 말로 마음과는 달리 표현하는 것이 이해를 돕는다.
단순히 본성의 마음을 보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성의 마음을 보는 순간 여태 사용하던 마음이 허망한 물건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면 그 순간 이후로는 순수하고 완전한 존재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우리가 본성의 마음을 보는 순간 세상에 집착하면서 온갖 허망한 꿈을 꾸던 모습이 끓는 물에 얼음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여 놀란 사람이 밧줄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진다. 욕망과 분노의 불길이 마음을 흘러내리는 것은 본성의 마음이 본래 나라는 사실에 눈뜨지 못한 탓이다.
구름이 모여 여러 가지의 형상을 이루듯 생겨난 세상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에 일으킨 집착이 우리를 고통의 늪으로 내몰고 있다. 그렇기에 그토록 짧은 인생 동안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조바심내고 안타까워하면서 목숨을 마치는 것이리라.
내 입맛에 맞는 세상을 꾸리기 위해서는 잠시도 다른 것에 주의를 돌릴 틈이 없다. 필요한 것을 채우기에도 시간은 충분치 않다. 그러나 가끔은 창문을 열어 주위를 신선한 공기로 환기 시키듯 쓸모없이 허접한 생각들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내 마음의 주인을 바로 세우는 것도 해롭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가장 큰 고통이라 할 수 있는 애환을 겪는다.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이 사랑에 대한 좌절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피 끓는 젊은 날에 겪게 되는 사랑의 고통은 우리를 성숙하게도 만들지만 세상을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더없는 비참함에 몸을 가눌 수 없게도 한다.
애환을 겪는 것은 이상스럽게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는 인연이 닿질 않고 인연이 닿는 사람에게는 호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신히 인연의 끈이 닿아 만났는데 덜컥 끊어져 버린 것이다. 만일 내 뜻에 맞고 안 맞고를 따지지 않는다면 애환이 그다지 고통스럽진 않을 것이다.
애환을 겪는 것은 그만치 내 뜻을 세상에 반영시키고 있다는 의미이다. 고통에 마음 아파하지 않으려면 미움도 사랑도 없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선택하는 데로 세상이 맞추어 주면 신바람 나겠지만 그보다는 어긋나는 것이 더 많은 세상이다.
내 뜻을 세우지 않고 선택 없이 살아가는 삶이 차라리 바람직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주면 먹고 안 주면 안 먹고,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그런데 마음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내가 세상의 부림을 받기보다는 세상을 내가 부려야겠다는 오기심의 발로가 아상중심이다.
우리는 그 물건 때문에 좌충우돌하며 삶이 고달프기도 하지만 자존심이 뭉개지는 것보다는 고달픔을 감수하고자 한다. 결과야 어쨌거나 우리는 선택의 마음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도 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처럼 아상의 깃발을 높이 꽂은 삶이다.
내 맘에 드는 모든 것들을 내 곁에 두고 싶어한다. 그래서 마음은 선택을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것이 더 좋은지를 비교하고 분별해야 한다. 마음은 이럴까 저럴까로 흔들린다. 갈등도 생겨난다. 그것이 내 마음의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택이란 좋은 것을 손에 쥐려는 것이다. 그러나 번번이 나한테 어울리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닌 것들이 내 삶을 침범한다. 그들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나가지도 않고 버티고 있다.
그처럼 내 뜻과 어긋나고 싫은 것에 대해서는 분노와 원망을 일으킨다. 우리는 싫고 좋은 것에 매달려 살다보니 집착을 일으키고 집착 때문에 모든 것이 그르치는 경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좋아함이 없다면 싫어함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증오한다면 그것은 한때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헌신에 대하여 배신을 당했거나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미워함과 좋아함은 사실상 같은 감정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가 밉고 곱고 하는 마음을 안고 산다는 것은 그것이 본래 한 뿌리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렇기에 선택에 물든 마음이란 당연히 갈등을 겪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좋고 싫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등과 혼란을 당할 이유가 없음에도 스스로 밉고 곱고 하는 뜻을 세웠기에 분열된 마음으로 살고 있다.
3. 갈등과 혼란
보고 듣는 것에 대하여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를 가늠하는 것은 집착하기 위한 준비를 끝낸 것이다. 만일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를 가늠하지 않는다면 좋은 것은 기분이 좋고 나쁜 것은 기분이 나빠지는 수준에서 끝나게 된다. 그러면 집착이 달라붙지 않으므로 커다란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집착이 달라붙게 되면 좋은 것은 욕망으로, 욕망은 애착으로 번져가고 분노와 원망을 일으키는 불길을 내뿜게 된다. 이것이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가 욕망을 통해 삶의 갈증을 해결하려 한다면 계속적으로 욕망의 강도는 깊어질 것이며 끝없이 타오를 것이다.
욕망에 심취한다는 것은 우리들 배후로 버티고 있는 노사(老死)의 문제를 회피하고 싶은 까닭인지도 모른다. 허망한 삶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들지 않도록 욕망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눈길을 주지 않으려 해도 노사는 소리 없이 다가서고 있다.
주인에게 무조건 무릎을 꿇는 낙타처럼 욕망을 따라 달린다면 정신을 병들게 한다. 마음은 깨진 항아리와 같아서 아무리 채워도 금방 새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욕망의 갈구는 큰 폭으로 늘어나며 결국 자신과 주변으로부터 고립 당하게 된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변화는 일어나기에 두려움은 더욱 커질 뿐이다. 그래서 내면을 깨어있는 의식으로 살피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잊기 위한 방법에 몰두하게 된다.
즐거움을 주는 대상에 탐닉하고 매달리면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든다. 자신을 외면함으로써 나타나는 갈등과 혼란은 결국 스스로를 고통 받도록 만드는 것이다.
폭넓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을 낱낱이 읽어내는 객관적인 의식이 우선되어야 한다. 세상을 읽기 위해서는 나부터 읽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찾아 나섬을 할 수 있으며 올바른 찾아 나섬을 통해 올바른 결과를 손에 쥘 수 있다.
세상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면도 있지만 노력 여하를 따져본다면 결과도 예측할 수 있다. 너무 욕심스럽게 손을 안으로만 굽히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다. 세상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관계를 통해 유지되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타인과 상응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이다.
세상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주변 환경을 일구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 대한 책임과 원인을 자신부터 살펴나가는 안목이 열릴 때 세상과 나는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상대방의 작은 눈짓 하나로도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처럼 남들도 자신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상대를 대하고 있는 나의 태도를 살필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전체를 살필 수 있는 안목을 열어준다. 남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소홀하다고 여긴다면 나 역시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상대를 대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책임을 마음으로 돌리려 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모든 문제로부터 해결되는 열쇠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문제에서 정답을 찾으려는 것과 같다. 내 언어와 마음 씀과 행동거지가 상대로 하여금 그대로 비출 뿐인데 병에 걸리지도 않은 사람이 약을 구하려는 것처럼 어리석을 뿐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자유롭기를 바라고 있다. 본인의 몸이고 본인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과 마음을 지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본인의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도 없다. 철사를 원하는 대로 구부릴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을 자기 생각대로 관리하고 통제하고 싶어 하는 것이 모든 인류의 일관된 꿈일 것이다.
인간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해 왔고 앞으로도 끝없이 마음과 투쟁하려는 행렬은 이어질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한 결 같이 생각하는 문제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라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본인은 누구란 말인가, 생각을 다스리고 싶은 배후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자신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것은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점유되어야 가능하다. 이러한 모순을 지니게 된 것은 나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는 마음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마음에 의해 곤경에 빠졌다는 말도 된다. 그러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욕망과 분노 질투 조바심 성급함 등의 감정 표현일 것이다.
인내함으로 해서 결과가 나빠지는 것은 별로 없다. 조금을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거나 행동이 과격해짐으로 해서 나타나는 결과가 본인을 곤경에 빠지도록 만든 것이다. 그 말은 튀어나오는 데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도록, 본인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마음을 희망한다는 것이다.
본인의 의지대로 마음이 움직여 주길 바란다는 것은 마음을 틀 잡으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에는 마음을 틀 잡지 않고 살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틀 잡고 싶은데 그것이 잘 안되니까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마음,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위력을 지닌 영웅적인 마음을 원하고 있다.
만일 내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인간으로서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것이다. 그만치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도전해왔고 실패의 쓴 잔을 마셨다. 실패의 원인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서 우선 마음의 행동 양식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마음 그릇이 큰 사람들은 그만큼을 사용하도록 세상이 길을 내준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하려는 이기심으로 채워지면 터준 길도 다시 막아버린다. 무엇 때문인가, 주변의 사람들이 올려놓고 끌어내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를 알기에 바다처럼 관대한 마음을 지니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행동은 전혀 딴 판이다. 그래서 마음을 문제시 하게 된 것이다.
마음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문제를 살핀다면 깨어있는 의식을 지녀야 하는 이유가 드러날 것이다. 계곡을 따라 흘러가는 냇물이 만약 생각과 의도를 지녔다면 모두가 푸른 숲이 우거진 곳으로만 흘러가고 싶어할 것이다. 모든 냇물들이 푸른 숲이 우거진 곳으로만 흘러간다면 머잖아 숲은 물에 잠기고 만다. 냇물도 사라지고 강과 바다도 사라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세상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높고 낮음이 균형을 이루도록 생태계가 질서를 잡아가는데 산에 나무가 전부 아름드리 나무로만 이루어졌다면 산이 버티질 못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높은 곳은 낮은 곳을 만들어 내고 낮은 곳은 높은 곳을 의지하여 생겨나는 세상의 이치를 거부하는 것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은 보다 강력한 나를 이루고자 하며, 비교와 의도를 통해 생각을 틀 잡으려는 움직임을 지니고 있다.
보고 듣는 등의 감각이 반응하여 일으킨 것이 생각이다. 생각에는 의지가 담겨있지 않은 상태이다. 눈에 비치고 귀에 소리가 들려온 것이 무언지를 알 뿐이다. 마음은 생각에 대하여 의지와 욕구를 동반한 것이다.
즉 마음이란 나타난 생각에 대하여 하고자 하는 바를 덮어쓴 상태로 존재한다. 음식을 보면 저것은 먹는 음식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생각이라면, 먹고 싶다는 의지가 생겨난 것이 마음이다.
생각이 의도를 지닌 마음으로 변하는 것은 내 입장과 형편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내가 기준 잡혀야 비로소 보이고 들린 것에 대해서 비교와 의도를 지닐 수 있다. 마음은 이와 같이 자신의 의지를 반영시키므로 아상 중심적이다. 아상이 높아질수록 남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탓에 혼란을 겪게 된다.
또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의지대로 움직여 준다 해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유명인사가 되고 부자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중에서 조금 덜 유명하거나 조금 덜 가진 사람이 하급 계층으로 전락하게 된다.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었기에 하나같이 행복해야 하고 후진국의 사람들은 전부가 불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란 지구상의 어디를 가더라도 인종에 관계없이 공통적인 부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주어진 환경에 시간이 지나면 식상하거나 더욱 나은 환경을 원하게 되는 습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앉으면 눕고 싶고 말 타면 벼슬하고 싶은 마음의 습성으로 인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 상태에 대한 만족감이 소멸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 당시에는 모르고 지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시절 그때가 행복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마음은 주어진 환경에 대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식상해지는 것은 반복된 생활로 인하여 만족감이 점차 줄어들기 때문이다.
마음은 지금 현재에 대한 만족감이 줄어드는 것은 마음이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려 하기에 남의 떡이 커 보인다. 마음은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흔들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정의 마음을 지녔으면 하는 바램이 나타나고, 그러한 바램으로 인하여 현재의 마음은 볼 품 없이 억눌리게 된다.
마음이 무한대로 확장되기를 꿈꾸지만 꿈을 지닌 마음은 몸과 따로 놀게 된다. 육신은 멈추고 싶어 해도 마음이 말 듣지 않거나 육신은 계속 하고자 해도 마음이 싫증을 낸다. 중독된 습관이 되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데도 계속 저지르고 만다. 욕망과 분노의 불이 타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몸 따로 마음 따로 살고 있는 ‘나’ 를 지녔으니 마음의 주인이 되고자 마음을 찾아 나서고 싶은 운명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같은 직장에서 똑같이 힘든 일을 해도 마음먹기에 따라 어떤 사람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같은 일이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 완전히 다른 마음가짐이 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고된 삶도 되고 즐거운 삶도 되는 것이지 삶의 모습 자체에 평가가 내려져 있는 것은 아니란 의미일 것이다.
만일 삶을 배움의 터전으로 생각하는 자세를 지녔다면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한 바를 이룰 것이다. 삶을 끝없는 배움터로 생각하며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놓치지 않고 살피는 사람들에게 고통은 고통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내 마음이라면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저런 마음을 지니고 싶다는 것은 현재 하는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란 뜻도 된다.
그렇다면 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되었으면 한다든지, 저렇게 되었으면 한다든지 하는 생각이 없는 마음이라면 그것이 내 마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내 마음이라면 이렇게 든 저렇게 든 변하고 싶어 안달을 부리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마음을 누구나 지니고 있다.
생각을 틀 잡으려는 마음도 있지만 아무런 의도 없이 묵묵히 모든 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그것이다. 분별하고 판단하는 활동의 마음과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존재한다.
지켜보는 마음은 단순히 알아차림만을 수행하고 있다. 만일 활동하는 마음과 지켜보는 마음이 서로 같은 종류라면 자신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기 합리화를 시키려는 마음과 그와 같은 의도를 알아차리는 마음은 서로 같은 마음일 수가 없다. 마치 타인의 생각을 읽어나가듯 마음의 활동을 지켜볼 수 있다면, 마음은 분명하게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판단하고 선택하고 갈등을 겪는 등의 마음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것을 낱낱이 지켜보는 마음이다.
심지어는 마음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고요하여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때라도 마음이 쥐죽은 듯 움직임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지켜봄의 마음이 없다면 활동의 마음은 간섭할 사람이 없는 아이와 같아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찾아서 움직일 것이다.
마음은 욕망과 그에 따른 분노를 일으키면서 잡초가 무성히 자란 황무지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마음을 지켜보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넘어선 안 되는 테두리를 지니고 있다.
마음을 지켜본다는 것을 깨어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깨어있는 의식을 사용치 못하고 마음이 요구하는 바를 따라 육신이 끌려 다니면, 생각과 행동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율배반의 삶으로 이끌려 나간다.
즉 몸은 연꽃으로 피어나려 하지만 마음은 흙탕물에서 뛰어놀고자 한다. 이런 부조화는 사물과 자신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름과 모양에만 매달려 집착하려 한다.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겉모양에 기준 잡혀 있다면 그에 따른 갈등과 혼란이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겉모양이란 시간을 따라서 변해갈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 탓이다.
즉 형상에만 집착하는 이해력의 부족으로 생겨난 갈등은 항상 이것과 저것의 사이에서 혼란을 겪어야 한다.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마음속에서 이것과 저것을 놓고 저울질을 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말도 된다. 내면을 관찰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면 끊임없이 갈등과 혼란이 터져 나오게 된다. 갈등과 혼란이란 요구하는 바가 많다는 의미이다.
이런 것은 원하고 저런 것은 싫다는 것이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즉 원하고 요구하는 마음들이 많아지면서 갈등과 혼란을 일으킨다는 단순한 사실조차도 내면을 관찰하지 못한 탓으로 지나쳐 가기 때문이다.
세상은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원인이 있음을 알아서 내게 일어나는 이런 저런 일들을 폭넓게 수용해야 한다. 때론 억울함도 느끼겠지만 이러한 이해력이 얼마큼 우리를 넉넉하게 만드는지 알 수 있다.
모든 일들이 나한테 일어나기까지의 감춰진 부분이 있음을 이해한다면 꽃망울이 봄바람을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듯 세상은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을 보며 비가 올 것을 알아차리는 이해력과 같이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미세한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깨어있는 지켜봄으로써 의식적인 행동과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행동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나 행동이라 해도 느닷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곡절이 숨어있기에 돌출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내면의 미세한 움직임, 즉 생각 없이 행하는 행위의 의도나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이러한 것들의 배후에는 그러한 것들을 행하게 만드는 저것들이 쌓여 있는 것이다.
또한 저것들이 있음으로 해서 알게 모르게 이것들을 행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 없이 행하는 일이라도 생각 없는 것이 아니다. 생각 없이 행하는 말과 행동 뒤편에는 감추어진 무언가가 있음을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이처럼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과 행동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치 내면이 어둠에 묻혀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는 의식적인 행동보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말과 행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실은 그것들에 의해 의식적인 말과 행동이 장악되고 있는 것이다. 나의 감추어진 실상을 발견하는 것을 일컬어 내 마음의 주인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내면이 어둠으로 묻힌 것은 좋다고 애착을 일으키고 밉다고 원망하는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행한 말과 행동조차도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음 씀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욕망과 분노이다. 그것들의 속성은 불과 같아 한번 타오르면 쉽게 꺼지지를 않는 탓으로 자신과 주변을 해롭게 한다. 우리가 마음을 정복하고자 하는 것도 욕망과 분노에 물든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욕망이 일어나는 것은 내 뜻에 맞는 일들을 만났을 때 그것을 취하고자 함이다. 또한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일들을 만났을 때 그것을 회피하고자 함이다. 즉 욕망과 분노는 내가 중심이 되어 생각하는 아상중심으로 인하여 생겨난다.
욕망과 분노의 중심에는 나라는 아상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나인데 거기에서 굳이 나라고 하는 아상을 세울 필요가 없지만 그런데도 아상을 놓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어째서 우리는 아상을 손에 쥐고 놓지 못하는 것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이라도 사물을 대하면 좋고 싫음을 느낀다. 그러나 아상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들은 사물을 대하여 좋고 싫음을 느끼고 그것에 매달려 애착과 원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좋고 싫음을 느끼더라도 그것에 매달려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이 행한 애착과 원망은 반드시 결과로써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아는 까닭이다.
우리가 아상을 쥐고 놓지 못하기에 탐욕과 분노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아상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애착과 원망의 불길도 거세게 타오른다. 애착함이 있으므로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원망도 모습을 나타낸다. 아상을 세우려 들지 않는 사람은 애착과 원망의 주변을 맴돌지 않는다.
따라서 지혜롭다는 것은 아상을 놓아버린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들은 보다 넓은 시야를 지니고 멀리 보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즐거움을 만나도 함부로 하지 않고 괴로움에 부딪혀도 근심을 더하지 않는다.
괴로움과 즐거움이란 항상 둘이 손잡고 다니기에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 가을바람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4. 번민과 갈등
번민과 갈등이 생겨나는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하여 애착과 원망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뜻으로 존재한다. 기쁨과 슬픔, 밝음과 어둠, 높고 낮음, 옳고 그름 등의 대극적인 개념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상대적인 관념이란 항상 둘이 반복되어 교차됨을 알 수 있다. 밝음이 지나면 어둠이 오고, 불행이 지나면 행복이 오고 기쁨이 지나면 슬픔이 오는 등이다. 둘 중에 어느 한 쪽이 올라가면 반대편은 내려가지만 어느 한 쪽이 영원히 소멸되는 법은 없다. 왜냐하면 반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을 지닌 상대적 관념이란 시소를 타듯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의미이다.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빠지면 시소의 균형을 맞출 수가 없다. 즉 허기짐을 알기에 포만감도 느끼는 것이며 어둠을 알기에 밝음도 아는 것이다.
슬픔이 무엇인지를 경험했기에 기쁨도 알게 되었다. 이런 식이라면 둘은 둘의 모습을 지녔지만 둘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마치 자석처럼 양극을 지닌 전체로써 존재함과 같다. 그런데도 우리들의 시야는 상당히 제한적이라 초점을 양쪽에 맞출 수 없다.
책상 위에 놓인 같은 크기의 두 개의 글씨를 읽는다고 할 때에 한 번에 두 개를 동시에 읽어 낼 수는 없다. 이러한 원리는 마음의 작용에 있어서도 동일하여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빠르게 초점을 움직여 책상 위에 두개의 글씨를 읽어 나가는 것처럼 지극히 짧은 순간에 기쁨과 슬픔으로 움직여 갈 뿐이다. 이처럼 마음은 번갈아 움직일 순 있어도 여러 개의 생각을 동시에 행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생각이 들어오고 또 끝나기 무섭게 다른 생각이 들어오고 하는 것이다. 검은 구름으로 덮여 있어도 허공을 물들일 수는 없는 것처럼 여러 생각을 동시에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음은 상대적인 관념에 물들어버린 것이다. 즉 이것과 저것은 달라야 하며 저것은 이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므로 양변을 지닌 자석이 둘 아님으로 존재하는 이치에 눈 돌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슬픔과 기쁨이 둘 아님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기에 슬픔을 물리치고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둔 방에서 불을 켤 때 어둠을 물리치고 밝음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즉시 밝아짐을 모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의 활동성을 내 마음으로 삼으면 시시때때로 변하는 희로애락을 따라 마음의 굴곡이 큰 폭으로 움직여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싫어하고 마음에 들면 좋은 것을 분별함으로써 많은 혼란과 번민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바꾸려는 추구를 하는 까닭이다. 자석은 N극과 S극을 동시에 지니고 있지만 한 쪽만 필요하다고 하여 다른 쪽은 잘라내도 결과는 늘 마찬가지이다.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마음에 의한 흔들림이 없게 된다. 아무리 마음의 맞는 일만을 원한다 해도 자석의 반대편이 살아나듯 맞지 않는 일도 함께 생겨난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함으로 해서 마음의 병이 깊어지는 것이다.
마음의 병이란 우리가 좋아하는 것만을 집착하는 데서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둘처럼 보이는 둘 아닌 모습’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이치를 알지 못하므로 뜻에 맞는 것들을 찾는 순간이 병에 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이미 병든 상태로 존재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은 양극단을 지녔음을 알지 못한다면 마음이 평화롭기를 바라는 것은 이룰 수 없는 희망에 불과하다. 마음의 활동성으로 내 마음을 삼는지 아니면 지켜보는 마음을 내 마음을 삼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관점에 초점을 맞추는가에 따라서 감정의 기복이 변화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마음의 존재 방식은 무언가를 얻고 구하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지금 보이고 들리는 것에 대하여 과거를 끌어들여 비교하면서 좋고 나쁨을 가늠하기 때문에 취사선택의 의도를 일으키느라 여념이 없는 까닭이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핀다면 모든 말과 생각과 행동이 전부 자신의 입장에 따라 행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그로 인하여 욕망과 분노가 일어남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아상중심의 안목을 변화시키려면 마음과 투쟁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우선 싫고 좋은 것이란 어떤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형편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 좋았던 것이라면 끝까지 좋아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쁜 것으로 변하는 것은 좋고 나쁨의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밤이 지나가면 낮이 찾아오듯 상반되는 것들이 교차하면서 바뀌고 있다. 만일 내 맘에 드는 것만을 찾고 구하는데 마음을 사용한다면 자석의 한 극만을 원하여 잘라내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취한다면 반대극도 달라붙게 된다.
갈등과 혼란이란 밤과 낮이 한 뿌리로서 존재함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밤과 낮이 번갈아 바뀔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허공의 성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얼굴로 웃고 울 수 있는 것은 변치 않고 늘 한결같은 지켜봄의 성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품을 잃어버린 채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를 가늠하는 마음을 위주로 살아간다면 밤이면 울고 낮이면 웃어야 하는 희로애락에 붙들려 살아야 한다. 그것은 다람쥐가 체 바퀴를 돌아가듯 갈등과 번민으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 삶이다.
5. 존재계는 남고 모자람이 없다
네모, 세모, 원통. 직사각형 등 여러 가지의 도형이 있지만 그 중에서 둥근 모양이란 완전함을 의미한다. 둥근 원은 부족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늘을 둥글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도 처세가 모나지 않고 주변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삶도 삐걱거리지 않고 잘 굴러갈 것이다.
아마도 본성의 마음을 그리자면 둥글게 그리면 될 것이다. 어느 것 하나 튀어나온 부분이 없으니 정 맞을 일도 없고 원만한 상태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부딪히고 저기서 깨지고 하는 것을 보면 이리저리 튀어나온 부분들이 많다는 의미이다.
허공처럼 둥글며 완전무결한 본래의 마음과는 다르게 튀어나온 마음을 지니게 된 것은 취사선택의 마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취사선택이란 보고 듣고 맛보는 등의 감각작용을 통해 기억된 이미지를 비교함으로써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를 가늠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좋으면 애착하고 싫으면 원망을 일으키는 마음의 거품이 쏟아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면이 산만한 거품을 지니게 된 것은 보고 듣고 맛보는 등의 감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보고 듣는 즉시 마음에 맞고 안 맞고를 분별하며 애착과 원망을 일으키는 탓에 허망한 마음으로 돌아선 것이다.
봄이 되면 연약하고 가냘픈 줄기로 거친 땅을 뚫고 움트며 나오는 힘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참으로 자연의 신비로움이란 경이로울 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경이로운 것이 있다면 허공일 것이다.
세상의 가치는 구하기 어려우면 올라가고 구하기 쉬우면 내려간다. 다이아몬드는 지구의 중심부에 존재하던 석탄이 오래도록 압력을 견디면서 변모된 것이다. 만일 다이아몬드가 어느 곳을 가더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가치는 당연히 폭락될 것이다.
값어치에 따라 소중함의 비율도 달라진다. 생명체는 물이 없으면 일주일도 생존하기 어렵다. 그토록 소중한 것이 물인데도 구하기 쉽기 때문에 별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공기는 어떠한가, 공기가 없으면 5분도 못살기 때문에 신주단지처럼 모셔야 한다. 그러나 공기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너무 가까이 붙어 있다 보니 공기의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안 쓰고 산다.
그 뿐만이 아니다. 허공이 없으면 사방이 막힌 것이라 사물을 볼 수도 없고 소리도 들을 수 없고 냄새도 맡을 수가 없다. 참으로 소중한 것이 허공이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도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구름이 사라지면 어디로 가는가, 하늘에 구름의 집이 있어서 집으로 들어갔다가 집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만일 구름이 자신의 집에서 나오고 들어간다면 구름의 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허공에서 구름의 집을 발견할 수 없으니 구름집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구름이 사라질 때는 허공으로 흔적 없이 사라진다.
허공에 구름이 숨었으니 생기는 것도 허공이 만드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삼라만상 역시도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 그들은 어딘가 의지처가 있기에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할 수 있다. 온 세상 삼라만상의 집은 허공일 것이다.
모든 것이 허공으로 숨기만 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은 텅 빈 허공밖에 없을 것이다. 숨어버린 구름이 다시 생기려면 그것을 주관하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호흡을 하는 것도 단순히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아니다.
허공에는 프라나라는 생명력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허공이 숨 쉬면서 생명을 유지하도록 필요한 것들을 모아놓고 그것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오존층이라는 칸을 막았다.
허공이 다른 삼라만상처럼 변하고 멸하는 속성을 지녔다면 구름을 허물고 다시 만드는 힘까지 소멸되겠지만 허공은 생긴 적이 없으므로 멸하지도 않는다. 허공은 여러 가지 인연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은 한쪽의 인연이 사라지면 변하면서 부서지고 소멸되어야 한다. 생겨난 것은 소멸되지만 허공은 이것과 저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소멸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허공은 스스로 존재하기에 완전무결하다고 하는 것이다.
허공이 구름만 허물고 다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삼라만상을 거두고 다시 만들고를 반복하고 있다. 우리가 숨을 쉬지 못하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은 허공과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은 지수화풍인 4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러한 요소가 허공에 가득 들어차 있으므로 구름을 거두고 만들듯이 만물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할 수 있다.
모든 만물과 생명체는 허공이 모습을 나타냄이다. 우리도 역시 허공의 존재들이다. 허공과 우리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지켜봄의 성품을 깨우려면 허공을 바라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사람들이 앉고 걷고 눕는다면 사람들이 앉고 걷기 편하도록 허공이 자신의 배를 갈라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호흡을 들이마시면 신선한 공기를 폐로 넣어주고 다 타서 꺼진 공기를 꺼내주는 것이다. 어떤 기적이 이토록 신비로울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곧 허공이니 허공처럼 살아야 한다.
집착하고 원망하는 일없이 허공의 마음을 사용해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일을 하도록 방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 같은 허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자신이 허공인 줄 모를 수도 있기에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은 방해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분노하고 원망을 드러낸다면 맹인의 앞을 가로막는 것과 같을 것이니 그것은 예의가 아니다.
이와 같이 존재계는 허공을 따라 생멸하기에 남고 모자람이 없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고 있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이 비록 냉장고에서 썩을지라도 가득 채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마음들로 하여금 하루도 조용한 날 없이 대립하고 있다.
존재계는 남고 모자람이 없도록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고 있음을 안다면 고통 받을 일이란 하나도 없다. 고통이란 당연히 갚아야 할 빚이 있기에 생겨난 것이다. 고통에 대하여 어떤 자세로 맞이하는가에 따라 삶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태도가 결정된다.
허공을 보는 안목이 생겨나면 예전과는 다른 차원의 삶이 펼쳐진다. 스스로가 집착하면서 속박되었기에 집착의 밧줄이 풀리면 얼마나 자유로운 지를 경험할 것이다.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그곳에서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것에 대하여 분풀이하고 원망하려 들면 부정적인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 이어지게 된다.
우리를 대하는 주변과 삶의 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가 마음 쓴 것에 대한 결과이다.
6. 허공의 눈
마음에서 애착과 원망의 거품을 일으키는 것도 본인과 관계된 것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애착이 생겨나면 애착을 방해하려는 것에 대한 원망이 일어난다. 마음에 집착이 있다는 것은 시야가 한 쪽으로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형상만을 중시하므로 구름이 생과 멸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구름이 일어나면 기뻐하고 사라지면 슬픔에 젖는다.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에 젖지 않는다는 것은 구름이 일어나고 꺼지기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허공을 바라볼 수 있다.
허공의 품에 있는 그들 모두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고 또 다시 생겨남을 반복할 것이다. 허공의 눈으로 구름을 바라보면 그들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생멸을 반복하며 끝없이 흘러갈 뿐이다. 그래서 기쁘면 기뻐하고 슬프면 슬퍼한다. 기쁨이라 하여 끌어안지도 않고 슬픔이라 하여 떼어놓으려 애쓰지도 않는다. 삶과 죽음이란 것도 어찌 생각하면 허공에서 구름 한 점 일어나고 허공에서 구름 한 점 사라진 것이다.
육교 위에서 달리는 자동차를 바라본다는 사실을 안다면 자동차가 앞으로 달려들어도 초연하게 바라본다. 세상에 살면서도 젖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육교 위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허공을 보는 눈을 지녔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앞으로 달려들어도 무심의 눈으로 지켜본다.
내 맘에 들고 안 들고 하는 것들도 두 가지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육교 위에서 바라보는 허공의 눈이 없다면 자동차가 앞으로 달려오면 깜짝 놀라듯 욕망과 분노를 일으킨다. 우리가 집착하며 부둥켜안고 있던 모든 것들은 고통을 일으키는 허상이었음을 아는 것은 허공을 보는 안목을 지녔기 때문이다.
단순히 좋고 나쁨을 느끼던 상태에서 비교와 의도를 지녔기에 욕망과 분노는 애착과 원망을 일으킨다. 집착이 달라붙었기에 생겨난 애착과 원망의 감정은 본성을 외면하고, 고통을 일으키는 망념으로 돌아선 것이다.
우리는 하나같이 산에서 길을 잃은 조난자의 신세이다. 허공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허공을 잃어버린 마음은 어딘가 매달리기에 안간힘을 쓴다. 세상에 매달리고 육신에 매달리다 보니 애착과 원망을 일삼는 마음을 내 마음으로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보고 들으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를 가늠하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무작정 내달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일단 걸음을 멈추고 본성의 마음인 허공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눈을 뜨면 사물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사물이 안 보이니 눈이 보는 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장님은 못 보는가, 눈을 잃은 장님도 못 보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배경과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눈을 감은 상태로 사물을 바라본다면 사방이 어두컴컴하여 분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비록 눈을 감아도 보는 성품은 전혀 훼손된 것은 아니다. 어둡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장님이라 해도 망막이나 안근에 이상이 있을 뿐 보는 성품은 전혀 훼손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처럼 장님도 분간하지 못할 뿐이다. 장님이라고 보는 성품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역시 어두컴컴한 것을 보기 때문이다. 보는 성품에 있어서는 장님이나 우리나 전혀 다르지 않다.
의학이 발달하여 훼손된 장님의 안근을 재생시킨다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보는 성품은 생명이 존재하는 한 소멸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눈을 감고 있어도 눈꺼풀 뒷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잠이 들어도 꿈을 바라보고 있다. 보는 성품은 이처럼 항상 깨어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만일 안근이 전적으로 보는 작용을 담당한다면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면 꿈속에서 형상을 분간할 수 없어야 한다. 꿈을 꿀 때 모습과 형상을 보고 듣는 것은 마음의 눈과 귀가 보고 듣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에는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견문각지[見聞覺知]를 일으키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
감각작용을 하는 눈귀코혀몸이 받아들인 각종 정보를 의근인 뜻으로 헤아리고 인식하여 마음으로 전달하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방금 죽은 사람도 눈은 있지만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의 눈이 육신을 떠난 탓이다.
이와 같이 본성의 마음에는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견문각지가 있지만 육근처럼 제각각의 영역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통합되어 있으면서 눈과 귀라는 매개체를 통해 형상과 소리의 정보를 전달받는다.
냄새 맡고 맛을 아는 작용은 몸에 대보아 아는 촉의 작용이다. 코로 냄새가 들어오면 코 안쪽에 스폰지처럼 생긴 그물망에 접촉되면서 냄새를 맡게 된다. 맛을 아는 것은 혀의 분포된 돌기세포에서 짜고 시고 맵고 단 것을 느끼는 것이다.
몸이 촉감을 느끼는 것도 닿여야 알 수 있다. 그래서 꿈을 꾸면 냄새와 맛과 촉감은 구별하지 못한다. 실제로 접촉되지는 않았기에 보고 듣고 아는 기능(見聞知)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견문각지는 허공에 존재하는 우주적 성품이기에 모든 생명체는 함께 공유하면서 존재한다. 본성의 마음에는 애착과 원망이 자리를 잡지 못한다. 견문각지만 있을 뿐이기에 기쁨과 슬픔을 아는 작용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견문각지에 아상이 개입하면 기쁨을 놓치기 싫어하고 슬픔을 멀리 떨쳐내려는 움직임이 생겨난다. 이로 인하여 우주적 본성이라 할 수 있는 허공의 마음과는 어긋난 길로 등지고 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에 대하여 의도된 바를 지니면 망념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생각에 대하여 비교와 의도를 지녔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것이기에 아상이 개입된 것이다. 그러나 아상이 개입되지 않은 견문각지에서도 기쁨과 슬픔을 안다.
강아지도 주인을 보면 좋아서 꼬리를 흔든다. 주인을 보면 반갑고 기분이 좋아짐을 느끼는 것이다. 기쁨을 안다는 것은 슬픔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아지에게는 아상의 마음이 들어서질 못하므로 애착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렇기에 말 못하는 짐승들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 부닥쳐도 인간처럼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못한다. 기쁨과 슬픔 두려움 등이 눈에서 멀어지면 곧 잊게 되는 것이다. 만약 짐승들도 다양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인간과 똑같이 애착과 원망의 감정을 일으킬 것이다.
언어가 있음으로 해서 상대적인 관념인 너와 나, 밝음과 어둠, 기쁨과 슬픔 등의 개념이 자리 잡게 된다. 동물이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것은 음식을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포만감을 느끼는 것과 같으며, 슬픔을 느끼는 것은 음식을 먹지 못해 허기지고 기분이 다운되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상태로 끝나지 못하고 언어가 존재하면서 기쁨과 슬픔의 개념이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애착과 원망이란 감정이 본래는 없었지만 기쁨과 슬픔을 통해서 개념적으로 달라붙은 것이다. 기쁨에 대해서는 쥐고 놓치지 않으려 하고 슬픔에 대해서는 그것을 일으키도록 한 상대방에게 분풀이 하려는 감정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대립과 투쟁의 양상으로 번져가면서 인간들 사이에는 서로 쥐어뜯고 할퀴면서 끝없는 반목과 불협화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애착과 원망의 개념이 자리 잡은 것은 비교와 의도를 지닌 탓이다. 그것은 과거를 끌어들여 미래를 준비하려는 것이므로 지금 현재를 벗어난 꿈처럼 존재한다.
내 맘에 들고 안 들고 하는 양변의 마음은 견문각지의 성품에는 본래 없지만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하기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기에 마음을 허망한 개념으로 이루어진 뜻의 망념[妄念]이라고 하며 본성을 등지게 된 것이다. 허망함(妄)을 집착하므로 망(亡)하게 되니 이래저래 마음에는 망자가 붙지 않으면 말이 되질 않는다.
생각이란 견문각지를 통해 생겨난 것이므로 지금 현재하는 우주적 성품에 해당한다. 그러나 생각이 거듭 반복되면서 생각이 느낀 것들을 언어로 관념화 시키면 생각은 틀 잡히고 일정한 방향을 지니게 된다. 그것을 마음이라 부른다.
그러나 마음은 언어로 이루어진 가상의 세계이며 과거와 미래를 기반으로 삼는 거짓된 환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언어 관념을 통해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에 희로애락이 생겨난다. 그렇기에 연출된 영화를 보면서도 기쁨과 슬픔에 젖어드는 것이다.
우리가 본성의 마음을 언어적 관념으로 짐작하려 한다면 그것 역시 영화 속의 스토리에 빠져드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본성의 마음은 가상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하는 실존이므로 다른 무엇과 비교되거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 눈에 비치고 귀에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언어가 표현할 수는 없다. 다만 이름과 모양의 형태만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눈에 비친 모습일 뿐이다. 음식의 맛을 표현해 낼 수는 없는 것처럼 허깨비 같은 마음으로 본성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다.
물을 먹어본 사람은 물맛을 설명하려 들지 않듯이 본성의 마음을 알고 싶다면 언어가 떨어져 내려야 한다. 언어가 떨어진다는 것은 분별하고 짐작하고 헤아리려는 의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언어를 기반으로 삼기 때문이다.
언어가 떨어진다는 것은 상대적인 관념을 벗어난다는 것이며, 밉고 곱고를 가늠하는 마음으로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내 입장에서 보았을 때 밉고 곱고가 생기는 것이지 남의 입장이라면 또 달라지기 때문이다.
상대적 관념을 통해서 본성의 마음을 짐작하려는 것은 내 입맛에 맞는 본성의 마음을 찾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본성의 마음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본성의 마음을 찾고자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슬픔과 분노 원망 불행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항상 기쁨 행복 즐거움 평화 등으로 넘친다면 굳이 본성의 마음을 찾아 나서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성의 마음을 찾아 나서는 순간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왜냐하면 기쁨 즐거움 행복 등을 알기 때문에 불행 슬픔 원망 등이 생겨난 것이다.
기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면 슬픔도 짐작할 방법이 없다. 다만 기분이 좋아지고 나빠지는 것 등은 포만감과 허기짐을 느끼듯, 살면서 치러야 할 대가 정도로 여길 것이다.
포만감과 허기짐은 본래 집착의 대상이 아니지만 애착과 원망의 감정이 들어서면 달라진다. 허기짐을 원망하고 포만감을 애착하게 된다. 이제 포만감은 집착의 대상으로 변한 것이다. 냉장고 가득 음식물을 채워야 하며 요리에 필요한 주방기구는 빠짐없이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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