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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재훈
ARCADE 0019
2023년 9월 20일 발간
정가 30,000원
A5(138×210)
양장본
351쪽
ISBN 979-11-91897-61-6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그럼에도 확실한 것이 있다면, 여전히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는 정재훈 평론가의 첫 번째 비평집으로, 「‘문’ 앞에서 쓴, 당신께 보내는 편지」 「마음에서의 시, 그것을 바라보는 비평」 「당신(들)이 말하는 ‘새로움’에 대한 개인적인 의심」 등 25편의 비평이 실려 있다.
정재훈 평론가는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재일코리안 문학과 조국](공저) [키워드로 읽는 아프리카 소설 2](공저)를 썼고, [‘재일’이라는 근거](다케다 세이지 저, 공역)를 옮겼다. 경희대학교, 광운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뉴래디컬 리뷰]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패’의 문법은 흔히 겸양사의 정중한 표현으로 쓰이거나, 좀 더 적극적으로는 ‘실패’를 극복의 대상 또는 과정으로 삼아 보다 정련된 자기를 기획하려는 전략적 장치로 활용되곤 한다. 그런데 이때 ‘실패’는 결국 성공을 향한 도정이거나 그것의 샴쌍둥이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과감하게 말하자면 우리 세계에서 ‘실패’는 애초부터 논외였던 셈이다. 그런데 ‘실패’를 주저 없이 고백하고 자인하는 평론가가 등장했다. 이번에 첫 비평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를 펴낸 정재훈 평론가가 바로 그다. 정재훈 평론가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자면 우리 세계에 횡행하는 ‘실패’의 용법은 실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그릇된 인식”이며, “그리고 그 인식에는 누군가의 ‘살아 있음’을 배제하려는 악의가 숨겨져 있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우리 세계에서 실패의 선택적 배제는 참혹하게도 “가난한 목숨들”에게 “무관용의 낙인”을 찍는다. 생각해 보면 ‘실패’는 쓰기와 읽기의 과정 내내 작동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기원이자 나날의 삶이 진행되는 곳곳에서 발생하는 실존적 상황인데 말이다. 그러니 “실패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는 정재훈 평론가의 말은 “살아 있음”의 징표로서 ‘실패’를 다시 발견하자는 제안이자, ‘실패’와 더불어 살아갈 새로운 가능성을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며, 나아가 “생존의 논리”로 전락한 ‘실패’를 인간 본연의 구성적 조건으로 끌어안자는 선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재훈 평론가는 이를 두고 자신의 비평집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의 지면 여기저기에 “시를 쓰려는/쓰는 마음”이라고 옮겨 적는다. “지금도 어디선가 시를 쓰려는/쓰는 마음은 생존의 논리가 예상하지 못할 결과물인 시를 토해 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울리는 소리야말로 지금의 위기를 견디며 사는 누군가에게 온기와 위로를 줄 수 있는 시이며, 인간다운 용기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울고 있다면, ‘마음’을 지닌 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똑같은 울음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까지 무감각해져 가고 있는 이곳의 무시무시한 변이를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정재훈 평론가의 첫 비평집의 제목은 이해의 불완전함에 따른 불안의 토로가 아니라 비로소 진정한 이해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지로 ‘실패’를 적극 수용한 자의 자기 갱신의 모멘트다. 이렇게 말이다. “저마다의 시는 울림/흐름을 내장하고 있다. 한 편의 시도 읽는 이에 따라 그 울림/흐름이 제각각이다. 어제의 경험으로 비춰 보고 내일의 가능성으로 열리게 될 또 다른 읽기, 그렇게 다시 알아보기가 허락되는 여백이 있기에 우리 각자의 공책에 서로 다른 무늬들이 물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 책머리에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얼굴들이 떠오른다. 절망과 슬픔을 주는 얼굴, 그리고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얼굴들이 있다. 누군가의 작품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글에 깃든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작품은 이미 그것들을 구조화한 것이다. 그것에 깃든 얼굴과 목소리, 그 외의 모든 것들에 대해 공감하려 하지 않는다면 독자로서의 책무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편적인 시각으로만 몇 가지를 들면서 함부로 작품을 해체하려 한다면, 그것은 작품에 깃든 얼굴과 목소리들을 지워 버리는 꼴이다. 9할을 견디는 1할의 각오로 쓴 작품들이기에 나 또한 그만한 각오를 해야만 했다.
미미하게 보이는 1할일지라도 9할의 무게를 견디며 나온 것이라면 단단할 수밖에 없을 테다. 굳은살처럼 투박하게 보여도 상관없다. 포복하며 나아가듯이 썼던 기록이라고 해 두자. 범박하게 말하자면 이 책의 제1부는 편지로 시작한다. 비평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의 길을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한 부분이다. 제2부는 예전 코로나 시국과 지금의 엔데믹 상황에서 기억의 윤리는 왜 필요한 것이며 시적인 힘은 무엇인지를 거칠게나마 썼다. 제3부는 시집 해설을, 제4부는 시들에 대한 리뷰를 실었다. 모르는 자의 표정으로 지나왔던 길이기에 다시금 찾아간들 역시나 모르는 자의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만 작품을 따라가 보겠다는 각오만이, 그때의 전율만은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다.
비평집의 마지막 글 제목을 ‘운명에 걸 판돈은 아직 남았다’라고 했다. 9할의 실패를 겪고 마지막 1할을 갈망하며 던졌던 주사위의 지난 궤적이 희미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익숙했던 것들의 죽음과 낯선 것들의 탄생을 기도(企圖/祈禱)하려는 자의 운명”이 꼭 시인만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람 앞에 거칠게 흔들리는 깃발, 이미 던져진 주사위처럼 지금도 하루하루가 절망의 9할과 희망의 1할을 오간다. 아직 살아 있기에 이 판을 무작정 털고 일어날 수도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낯설고 차가운 이국에서 자신의 운을 시험해야 했을 망명자처럼 운명을 향해” 몸을 숙인다. 최대한 낮은 자세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향해.
•― 저자 소개
정재훈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재일코리안 문학과 조국](공저) [키워드로 읽는 아프리카 소설 2](공저)를 썼고, [‘재일’이라는 근거](다케다 세이지 저, 공역)를 옮겼다.
경희대학교, 광운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뉴래디컬 리뷰]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차례
005 책머리에
제1부
021 ‘문’ 앞에서 쓴, 당신께 보내는 편지
037 마음에서의 시, 그것을 바라보는 비평
053 당신(들)이 말하는 ‘새로움’에 대한 개인적인 의심
067 끝까지 살아 있는 존재를 꿈꾸며
082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
제2부
101 묵시적 재난에서 개별화된 재난으로—편혜영, [홀]
116 지금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131 전염의 시대와 기억의 윤리
143 감정의 수축이 필요할 때
158 발효의 시간—사람을 움직이는 시의 힘
제3부
173 슬픔과 상심으로 쓴 인간/곤충기—김성신, [동그랗게 날아야 빠져나갈 수 있다]
190 불온한 감정의 포교자—이원복, [리에종]
201 푸른 피를 알았다/앓았다—이용임, [시는 휴일도 없이]
216 고통을 스케치하려는, 그 성실한 손짓에 대하여—김겨리,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226 우리는 울 준비가 되었는가—박은영,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237 당신을 위한 레시피—김안녕, [사랑의 근력]
제4부
251 흔적으로만 남을, 당신께 보내는 편지—안미옥의 시
263 신의 마침표를 찢어 버린 하와의 문자들—김광섭의 시
273 당신을 위한 밥, 그리고 우리를 위한 시—김사이,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한다]
281 당신을 위한 알약들—이지호,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
290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최지인,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302 우주인을 꿈꾸는 시인—김학중,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
313 감추고 있는 너의 발톱을 보여 줘—박소란의 시
327 고통을 사랑하는 이상한 시인을 구합니다—민구의 시
339 운명에 걸 판돈은 아직 남았다—전형철의 시
•― 책 속으로
당신에게 보내는 이 글도 실패로 끝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렵거나 부끄러운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당신과 제가 살고 있는 이 디지털의 시대에서 ‘실패’는 또 다른 의미로 쓰여야 합니다. 기술이 발전했어도 누군가는 번거롭고 불편한 것들을 찾습니다. 일부러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을 선택하기도 하고요. 지금의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지금도 홀로 책장을 넘기며 어느 문장(文)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겠지요. 문장들을 바라보는 눈빛의 머뭇거림과 손끝의 망설임은 인간이 자아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빛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무늬(文)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이 부족한 글이 부디 당신의 무늬를 오롯이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편지라는 형식으로 당신에게 무턱대고 건넨 저의 이 당돌함을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그럼 안녕히. (「‘문’ 앞에서 쓴, 당신께 보내는 편지」, p.36.)
지금 이곳의 위기를 향해 문학으로써 응전하려는 ‘자기’의 울림은 생존의 논리를 견디려는 굳은 각오와 함께 발현된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로써 다른 이들을 무한히 상상하고자 하는 마음에는 어떠한 울림이 있다. 이 울림에는 바깥에서 소비되기를 한사코 거부하려는 몸부림도 뒤따른다. 이것에 응답하려는 비평도 있어야 한다. 비평이 자리 잡아야 할 위치는 아직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마음에도 기꺼이 다가가려는 데에 있고, 또 거기에 ‘같은’ 마음이라는 자격으로 응답하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같은’ 위기를 함께 견디며 살아가는 ‘같은’ 마음으로서 비평 또한 시인의 마음을 바라봐야 한다. 굳이 거창한 이론이나 미학적 전략, 세대론과도 같은 것들이 개입될 필요는 없다. 지금도 어디선가 시를 쓰려는/쓰는 마음은 생존의 논리가 예상하지 못할 결과물인 시를 토해 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울리는 소리야말로 지금의 위기를 견디며 사는 누군가에게 온기와 위로를 줄 수 있는 시이며, 인간다운 용기이다. (「마음에서의 시, 그것을 바라보는 비평」, p.52.)
우리가 해야 할, 현실에 민감한 반응으로서의 문학은 그 현실이 묵과하고 있는 아니면 침묵하고 있는 것들을 되돌아볼 때만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건 새롭다기보다는 더 이전의 것들에 대해 계속해서 반응하고자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명분만을 고집한다면, 오히려 이는 자칫 폭력으로(‘다르게 읽기’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에서 비롯된다)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누군가의 삶, 그 현실에 다가간다는 것은 ‘쓸 수 없는 영역’에 접근하려는 시도이다. 쓸 수 없다는 것은 곧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이며, 이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그 문제 앞에서 어떠한 목적을 선취하기 위한 누군가의 해체와 재정립은 불가하다. 그리고 새로움이라 하여 모두가 그 기치 아래에 모일 필요는 없다. 또 다른 문학과 비평의 길은 반드시 있다. 바깥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만 “앞으로 해야 할 이야기”들이 무엇인지 더 알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 진지하게 다가가고자 할 때 비로소 그 이야기들은 문학적 생명력을 얻는다. (「당신(들)이 말하는 ‘새로움’에 대한 개인적인 의심」, pp.64-65.)
당연한 말이겠으나, 시는 데이터나 정보 따위가 아니다. 저마다의 시는 울림/흐름을 내장하고 있다. 한 편의 시도 읽는 이에 따라 그 울림/흐름이 제각각이다. 어제의 경험으로 비춰 보고 내일의 가능성으로 열리게 될 또 다른 읽기, 그렇게 다시 알아보기가 허락되는 여백이 있기에 우리 각자의 공책에 서로 다른 무늬들이 물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끝까지 살아 있는 존재를 꿈꾸며」, pp.80-81.)
시집을 지탱하는 (감정의) 근육이 생각보다 훨씬 단단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만한 근력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다. 한동안 쓰지 않았던 (감정의) 근육을 쓰면서 천천히 이 섬을 한 바퀴 걷다 보면, 당신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함부로 말해져서는 안 될 무언가가 당신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너’와의 인연을 끊고자 마음먹은 이후부터 줄곧 표류했을 시인의 마음, 그 고독과 슬픔의 격랑 한가운데 놓인 이 외딴 섬의 이름이 한낱 ‘제주’여서는 안 될 것 같다. 이 섬의 끝자락, 바다가 보이는 길목에 서 있게 될 당신의 뒷모습도 시인과 조금씩 닮아 간다.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 마음에는 얼마나 실금들이 생겼는지 ‘내’가 선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당신도 이제 누군가에 의해 함부로 말해져서는 안 될 것이 생겼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 pp.91-92.)
지금의 문학에서 ‘재난’이라는 소재와 그것을 다루는 서사 방식이 문학 밖에서 소비되는 상품으로 전락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금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미세한 징후를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는 특유의 감수성을 다시 되살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근대적 시스템은 물질적・비물질적 측면에서 비인간적인 것들을 여전히 고안해 내고 있으며 이를 상품으로 확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비되는 상품들은 겉으로는 최신, 최첨단을 가장하고 있지만, 오히려 공동체나 타인과의 관계에 필수적인 감각이나 사유를 지극히 원시(遠視)적인 것으로 제한시킨다. 이처럼 보다 급속도로 나아가는 기술적 진보 상황과 그에 따라 날로 저급해지는 삶의 문제, 아울러 인간다운 삶에 관한 진정한 성찰들이 고갈되어 가는 과정이 서로 맞물렸을 때 생길 재난은 지금의 그 어떠한 상상조차도 간단히 초월하는 가공할 파괴력이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이미 그것을 경고하는 미세한 징후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본래의 자유가 탈각되고 정작 노예이면서 스스로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는 무감각한 성과 주체들의 출몰을 막기 위해서는 다시 인간에 대한 성찰로 돌아가는 방법뿐이다. (「묵시적 재난에서 개별화된 재난으로—편혜영, [홀]」, pp.114-115.)
무너져 버린 소중한 일상만큼 누군가의 표정과 목소리 또한 분명 우리의 삶에 유의미한 것들이었습니다. 타자의 얼굴로 전해지는 신비로운 기운, 그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과 목소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영적인 울림과도 같았습니다. 또한 이는 창조적인 영감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세상은 그 영감을 발휘하는 이들을 가리켜 ‘시인’이라 불렀고, 이들이 건져 올린 누군가의 표정과 목소리를 가리켜 ‘시’라고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따금 시는 세상을 경악시킬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세상의 편견과 오해로 인해 정당하지 못한 평가를 받기도 했었지요. 이제는 시를 쓰고 읽는 것 자체가 무용하다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들은 오늘도 여전히 시를 씁니다. 그렇게 ‘덕분에’ 우리는 누군가의 얼굴을 오늘도 바라봅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pp.117-118.)
우리 모두에게 슬픔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전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건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슬픔과 슬픔 사이, 그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은 바로 “곁”에서 비롯된다. “곁”의 장소성은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에 의해 비로소 드러난다. “곁”에서 감정들은 발생하고, 파열하고, 마찰음을 일으킴으로써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순간을 열어 놓는다. 어떠한 의도나 목적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곁”은 무한하다. 누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언제든 내가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남는다. 슬픔에 의해 발걸음을 멈춘 순간, “곁”의 자리가 우리 눈앞에 마련되는 것이며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던 이야기를 우리는 마침내 듣게 된다. (「전염의 시대와 기억의 윤리」, p.135.)
이근화의 ‘명랑한 상상력과 두 발의 상상력’, 그리고 김경후의 ‘시 쓰기와 말을 둘러싼 고통과 고독’은 저마다 아직 “할 수 없는 말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의 수축이다. 그들의 시는 일상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리고 고통과 고독이 길어질수록 웅크리면서 단단해진다. 함축과 절제의 미학이며 언어적 결정체라고 흔히 일컫는 시어는 이렇듯 감정의 수축에서 나오는 것이지 이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짓밟히고 있는 말들과 존재들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차가운 일상과 텅 빈 백지를 좀 더 예민하게 마주하려 한다면, 우리의 감정 또한 이완보다는 수축되어야 맞다. 우리에게 남아 있을 아직 “할 수 없는 말들”도 이러한 긴장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반대로 비상식적인 말은 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다. 흘려들을 것이 아니다. 긴장하라. 접촉하지 않고, 예민하지도 않으며, 결국 그렇게 무감각하기에 내뱉었을 그 말이 언젠가 우리의 선택과 의지, 노력까지도 무력화시킬 강력한 빌런의 잔혹한 대사가 될 수도 있으니. (「감정의 수축이 필요할 때」, pp.156-157.)
빵과 밤 그리고 시는 이 세계 어딘가에 은밀히 매듭지어진 “아름다운 입체”를 떠올리게 한다(「매직아이」). 누군가를 위해 빵을 만들고, 타인의 고통을 자기의 몫이라 여기며, 한 편의 시를 쓸 때에도 “우리”를 떠올리려는 방식들은 이곳과는 ‘별개의 원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시는 행과 연에 ‘말’과 ‘말 아닌 여백’이 어우러져 있기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상상해야만 그 아름다움을 한껏 음미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연약한 결속이 의외의 단단함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시의 힘’을 느낀다. 처음에는 단조로운 평면처럼 일상의 사소했던 장면들이 뭉쳐져서 상상으로 발효된 입체적인 시. 허물어진 마음과 부유하는 말들이 서로 엉겨 붙게 만든 상상의 힘이 그렇게 시를 읽는 사람에게로까지 옮겨 가는 과정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공감’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발효의 시간—사람을 움직이는 시의 힘」, p.168.)
시인은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슬픔과 상심이라는 밑바닥으로 향했고, 그렇게 나방의 입맞춤을 모방해 왔다. 고독했던 습작의 밤은 나방을 둘러싼 적막과도 닮았기에 이제 어느새 시인의 혀도 나방처럼 길어진 상태였다. 어둠에 최적화된 입술을 여기저기 갖다 대며, 바닥에 긴 혀를 내밀었을 것이다. 무언가가 혀끝에 감지될 때에는 주저 없이 그것을 핥거나 씹었다.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을 때 만져지는 후렴들”일수록 혀끝에서 달콤하게 맴돌았을 것이다(「검정 1」). 또한 시인에게 이곳은 온통 “의심”으로 가득 찼었는데, 그것은 꽤나 단단해서 “오래도록 오물거리기”가 좋았다(「헤모글로빈」). 이렇게 “고독을 미감처럼 열고” 주저 없이 “삼키는 것이 主食”이 되었다(「네펜데스」). (「슬픔과 상심으로 쓴 인간/곤충기—김성신, [동그랗게 날아야 빠져나갈 수 있다]」, pp.177-178.)
리에종(liaison). 생소한 말이었다. 위 시의 말미에 시인이 사전적 의미를 덧붙여 놨지만, 그것보다는 단어를 직접 소리 내어 말했을 때 그러니까 ‘리에종’이라고 소리 내어 보았을 때, 이국적인 입말 탓인지 혀끝에 감도는 어떤 낯선 느낌 때문에 몇 번이고 더 발음하게 된다. 리에종. 이 연음 현상 덕에 ‘불어’만의 매혹적인 어감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욕설조차도 아름답다는 프랑스어라고 하지 않는가. 어쨌든 이 ‘리에종’을 곱씹다 보면 낯선 어감이 입가를 맴돌다가 조금씩 머리와 가슴으로 스미면서 응어리가 만들어지는 듯한 기분이 감돌기 시작하고 일종의 상상적 점성 같은 것이 생긴다. 이러한 점성은 유독 어떤 단어들을 곱씹을 때 나오는 순간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싶어 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불온한 감정의 포교자—이원복, [리에종]」, pp.192-193.)
우리의 언어와 인식, 감각을 둘러싼 내성은 ‘두고 옴’이 아니라, ‘(아직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교감과 연대적 흐름을 통해 횡에서 종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따뜻한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향하며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해당 개체에만 머물러 있는 폐쇄적인 상태이다. 이는 황량하게 펼쳐진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환경에 최적화된 생존 방식이다(「안구건조증」). 각자의 안위와 생존만을 명분으로 내세운 반생명적 방식이자 폐쇄적인 습성이며, 이용임이 시적으로 언설한 “한순간 생의 모든 물기를 바친 자”가 꿈꾸는 천국이 아닌 지옥인 것이다. 물처럼 심장을 쏟고 모든 생의 물기를 바치는 것은 생명의 온기와 그 본연의 힘을 외부로 전달하려는 의지이며, 공감과 연대를 위한 생명 혹은 인간다운 가능성으로서 바깥을 꿈꾸려는 시적 상상이다. (「푸른 피를 알았다/앓았다—이용임, [시는 휴일도 없이]」, p.213.)
여전히 이곳은 고통마저 상품처럼 포장하여 매끄럽게 유통시키고 있다. 동정심을 유발하는 상품은 깔끔하게 전화 한 통만을 요구한다. 그것을 소비하는 자에게 하찮은 만족감과 우월감, 혹은 일종의 소유욕까지도 충족시킨다. 하지만 시는 고통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시는 상품처럼 쉽게 읽히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가 담고자 한 존재론적 스케치는 “꽃은 피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는 고통스러운 진리마저 붙잡아 보려는 낮은 자세에서부터 시작한다(「꽃의 자세」). 이곳의 이름 없는 변방에서, 혹은 허름하고 어두운 골목에서 지금도 희미하게 울리고 있을 생의 리듬에 귀를 기울이려는 시인의 성실함은 그래서 다분히 인간적이다. 겉치레와도 같은 표면적인 무게를 벗어던지고,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또 다른 존재적 무게를 느끼고자 하는 그의 손은 오늘도 비뚤배뚤 흘림체로 시를 써 나간다. (「고통을 스케치하려는, 그 성실한 손짓에 대하여—김겨리,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p.225.)
박은영의 시들을 읽으면서 마음 한쪽이 뻣뻣해지는 것을 자주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누군가가 울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까스로 참았던 울음이 마침내 터졌을 때, 그 이후에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곳의 황량한 풍경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메말라 있던 눈에서 누군가가 흘리는 눈물이 희미하게 비친다. 상투적인 사과와 안부에만 길들여졌던 탓에 언젠가부터 늘 의심만 해 왔던 마음의 문을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두드린다.’ 왜 이러한 상상을 하게 되었을까. 저 누군가가 ‘당신’일 수 있고, ‘나’일 수도 있으며,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누구도 될 수 있다. 누군가가 울고 있다면, ‘마음’을 지닌 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똑같은 울음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까지 무감각해져 가고 있는 이곳의 무시무시한 변이를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우리는 울 준비가 되었는가—박은영,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p.236.)
습벽인 예민함이 아직 남아 있었으니 잠시나마 곁을 둘러볼 수가 있었을 테고, 만약 어려움에 맞서는 둔감함이 없었다면 무언가를 “연구”하거나 “안간힘”을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신’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도 있었을 “사진” 한 장조차 없는 상황에서 씁쓸하고 고독한 질문들이 기척을 내며 일상 곳곳을 스친다. 그때마다 스친 마음의 부위가 쓰라리면서 정말로 ‘당신’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 처음부터 되물어봐야 했을 것이다. 예민함과 둔감함이 시인들의 습벽이라 하였으나, 「기척들」에서는 이것이 더욱더 도드라져 보이는 듯하다. 김안녕에게 시 쓰기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마음 생존법’이며 그에 관한 끈질긴 기록이다. 그 과정은 씁쓸하고 고독할 수도 있지만, 덕분에 누군가의 마음은 조금씩 더 단단해질 것이다. (「당신을 위한 레시피—김안녕, [사랑의 근력]」, pp.245-246.)
지금까지 시를 둘러싼 이러한 목소리들이 있어 왔기에 “우린 전부 여기에 있는데 왜 시만 먼저 가?”라는 의문이 시인의 마음에 싹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시」를 읽은 어떤 이들은 이른바 전위적이고 실험적이었던 그때 그 시절의 시들을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단지 창작뿐만 아니라, 비평에서도 나왔던 목소리였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그 목소리 또한 우리에게 언제나 시가 나아갈 방향이라든가 앞으로의 시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 등을 가리켜/가르쳐 왔었지요. 그런데 그런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다 보면, 마치 무중력의 세계에 던져진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론들만 잔뜩 나열하면서 시가 품고 있는 그 무한한 여백을 지적 허영심으로 채우려는 목소리는 정작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야 할 시를 더 멀리 보이게 만듭니다. (「흔적으로만 남을, 당신께 보내는 편지—안미옥의 시」, p.257.)
새로운 의미를 맞이해야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쾌락의 몫은 독자의 것이어야 한다. 시인이 찍어 놓은 마침표를 기어코 찢고 나올 쉼표와 느낌표, 물음표는 독자만이 새길 수 있는 낯선(아직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 상형문자이다. ‘잠재 독자’라 불리며 익명으로 감춰진 수많은 욕망과 그 행적들은 형형색색의 향연으로 펼쳐질 각자의 낙원들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지금도 질서와 관습, 사회적 금기라는 묵은 틀을 마치 허물을 벗듯이 던져 버리면서 자신을 갱신하려는 시인의 마음이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마음(들)도 있다. 시인의 마음은 언제나 우리를 불확실한 격랑 앞에 머뭇거리게 만들며, 알 수 없는 기묘한 불길함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안내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의 시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새로운 낙원의 길목을 가리키며 은밀하게 속삭인다. 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유혹의 목소리가 지금도 희미하게 들린다. 당신도 방금 들었는가. 그렇다면 이제 “그대가 깨문 욕망”에서부터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파과」). (「신의 마침표를 찢어 버린 하와의 문자들—김광섭의 시」, p.272.)
“밥”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흔히 ‘뜸을 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밥”이 제대로 되려면 뜸이 필요하다. 시를 쓰기 위한 과정도 이런 뜸이 있어야 한다. 지금 이곳의 황량한 길 위에서 떠돌고 있을 낯설고 누추했던 말들을 모아 ‘서서히’ 시로써 다져 나가는 작업은 나름의 찰기, 이른바 끈끈함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기에 김사이도 일상에서의 말보다 “시가 여전히 길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시)이 아직 “덜 성숙하”다면(이곳은 이를 실패라고 쉽게 단정한다) 뜸을 더 들이기 위해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시인은 여유로운 “그 믿음”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위해 손수 밥을 짓듯이 그렇게 시를 써 왔을 것이다. 혹여나 “음정 박자”가 서툰 말이 간혹 들리더라도 그것은 이곳의 무미건조한 말들에 비하면 분명 따뜻했을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살아 있음’의 온기를 지금도 품고 있으며, “아직 길은 있는 것이다”라며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야 할 방향을 묵묵히 바라본다.(「시인의 말」) (「당신을 위한 밥, 그리고 우리를 위한 시—김사이,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한다]」, pp.279-280.)
우연히 만난 사람들, 그리고 텅 빈 페이지의 가능성은 그에게 단지 “살짝”의 해프닝으로 끝날까 아니면 “엄청난” 사건으로 이어질까. 이것은 그저 영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인이라면 써야 했을 것이고, 그렇게 쓴 시는 누군가의 황량한 삶에 희미한 가능성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이번 시집에는 시인이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시 쓰기를 수업했던 일화를 담은 시도 있다).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채웠어도 그다음 페이지에 쓰일 또 다른 낱말을 기다리는 일. 페이지 위에 놓인 손의 머뭇거림이 마치 어디에도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곳을 배회하는 걸음처럼 그림자를 드리울 때, 시인이 말한 그 낱말들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올 ‘새로운 가능성’이 될 것이다. 그러니 시인이 “조금만 기억을 당겨도 물길이 왈칵 불처럼 피어오를 것입니다”라고 한 말도 틀리지 않았다(「티하우스」). (「당신을 위한 알약들—이지호,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 p.288.)
최지인의 시에서 볼 수 있었던 무기력은 이제 그 근력마저 무너져 내렸음을 의미한다. 시스템 속에서 죽어라 버틴다고 한들 한낱 개인이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도 쉽게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견고한 시스템에 의해 훼손당하고 상처받은 누군가가 다시금 삶의 근력을 회복하리라는 희망 섞인 상상도 우습긴 마찬가지다. 젊은 세대를 위로한답시고 그들의 고통과 상처를 공감한다는 따위의 기성세대의 말들도 그렇게 들린다. 물론 최지인의 시가 동년배의 독자들에게만 읽히라는 법은 없다. 그저 진지한 독자라면 크로키처럼 그려진 시인의 세계를 감상할 때 그 여백에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느낀 고통과 상처를 덧칠해 봤으면 한다. 그의 시에 담긴 고통과 상처는 다분히 의도된 바에 따라 매우 단순하게 배치된 듯하지만, 그 여백은 결국 독자인 우리의 기억으로 채워지기 위해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최지인,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pp.300-301.)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 맨 마지막에 실린 「내리막 우리 집」을 보면, ‘엄마’는 “우리 집이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집 앞의 내리막을/끌어다가 하늘과 잇는 곳에 서 있었다”라는 구절에 이르면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막연하게 허공에 떠 있다기보다는 지상에서 비롯된 상상의 힘이 응축하여 위로 쏘아져 올라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지상에서 감내해야 했던 차별과 편견, 심지어 가난까지도 조롱받는 상황(“재미로 하던 말에도 상처받던 날들”)에서 시인은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그 자리에서/나를 기다려 주는 우리 집”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곳에서 위안과 시적 영감을 얻었다. 인간은 “하늘” 아래에 있다는 진실. 그래서 누군가를 향해 “재미”로 말하기 전에 그 너머를 상상해 보려는 성숙한 자세. 김학중은 잠수함처럼 투박하게 보일지라도 매우 견고한 마음의 기술을 구축하였고, 이로써 나온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은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삶이라는 더 넓은 곳으로 항해한다. (「우주인을 꿈꾸는 시인—김학중,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 pp.311-312.)
박소란의 시 세계에 등장하는 반인반수들은 아직 퇴화되지 않은 생명의 들끓음을 원동력으로 삼아 이곳 세계와 맞서고자 하는 이질적인 존재들이다. 체념과 불행에 눈을 뜨게 된 ‘나’를 비롯한 반인반수의 형제들은 이곳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종(異種)들이다.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생명의 감각’과 탐욕으로 그릇된 세계에 저항하려는 ‘체념과 불행의 교리’는 단단한 ‘살’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의 ‘발톱’, ‘송곳니’와 ‘적의’는 이곳 세계에서 자본과 기술에 억압받았던 생명들의 태곳적 흔적이자, 저항의 상징이다. 끊임없이 반생명적인 것을 전파하는 자본의 교리에 저항하고자 하는 이종들은 제 몸을 숨긴 채 세계를 향한 독기(체념과 불행)를 채워 나갈 것이다. 체념은 희망을 기대하지 않는 철저한 ‘부정성’의 사유 방식이며, 불행 또한 마찬가지이다. 상실에 아파하는 연약한 자가 아니라, 강인한 생명력에 눈을 뜬 존재로서 그릇된 세계를 향해 부정성의 힘을 현시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박소란의 시적 세계인 것이다. (「감추고 있는 너의 발톱을 보여 줘—박소란의 시」, p.325.)
그러니까 죽음 앞에서 애써 무언가 말하려 하지 않는 태도. 이것이 민구가 찾은 방식일 테다. 누군가는 죽음을 애도한답시고 온갖 말을 동원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저 자신이 가진 말로 이야기하고, 기도를 올릴 뿐이다. 죽은 자들(“하늘 높이 떠오른 사람들”)을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게 할 능력”은 신의 영역이다. 비록 그들을 다시 지상에 내려오게는 못할지라도 그들이 이곳을 떠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억하려는 자가 되도록 노력하는 시인의 자세. 시는 그렇게 나온다. 높은 곳을 애써 바라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과 같은 위치(지상)에서 고통을 견디는 이웃을 향해 다가가려는 ‘인간다움’이야말로 시적인 경험이며, (비인간적인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틀림없이) ‘이상한 경험’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고 그 고통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기형도 시인처럼 어쩌면 민구에게도 누군가의 고통은 ‘시인’으로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 사건이자, 삶의 흔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더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그가 ‘시인’이기에 희망을 건다. (「고통을 사랑하는 이상한 시인을 구합니다—민구의 시」, pp.337-338.)
오직 “하나의 단어”로 “한 개의 심지”로만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것은 마치 음영에 가려진 글씨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읽지 않는 것과 같다. 망명자의 어눌한 발음에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겼다. 그것이 어눌하다고 하여 “비난”하는 본토의 화법으로는 절대로 밝힐 수 없는 이야기들이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그중에서 특히 절망은 이 세상에서 제일 약하고 가장 볼품없는 것들을 골라 제 모습을 드러내 왔었다. 그래서 “하나의 단어”라는 빈약한 말들, 그리고 “한 개의 심지”라는 메마른 상상력으로는 이를 포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전형철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지금까지도 필멸을 예감하는 자만이 그려 낼 수 있는 “절대 방향을 알 수 없는 선”으로 자신보다 더 낮은 자들에게, 이 세상보다 더 바닥에 있는 것들에게 상실의 무늬를 음각해 왔다(「얼굴 행성」). (「운명에 걸 판돈은 아직 남았다—전형철의 시」, pp.349-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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