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편. 설악산에서 낙산사로
12시.
점심은 생대구탕이었다.
뜨거운 국물이 나오자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 숟가락을 들었다.
“이거 국물 좋다.”
“속이 확 풀리네.”
아침부터 산길을 걸었던 탓인지 뜨거운 국물 한 숟가락에 모두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점심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오전에는 산이었다.
오후에는 바다였다.
버스가 설악산을 벗어나자 창밖 풍경도 조금씩 달라졌다.
웅장했던 산 능선이 차츰 뒤로 물러나고, 어느 순간부터 차창 너머로 푸른 동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차창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번 여행에서 보았던 바다가 하나씩 떠올랐다.
삼척의 바다,
초곡 해안의 바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의 바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바다였다.
13시 30분.
낙산사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잘 정비된 데크 길이었다.
경사가 심한 곳에도 걷기 편하도록 길이 이어져 있었고, 장애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만들어 놓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 중 한 명이 말했다.
“여기는 길을 참 잘해놨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주변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깨끗하게 정돈된 길과 전각들.
푸른 나무 사이로 보이는 처마.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그런데 문득 이 평온한 풍경이 처음부터 이렇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낙산사는 오래된 사찰이다.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바다를 품고 있고,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이 찾아왔던 곳이다.
하지만 21년 전, 이곳은 큰 화마를 겪었다.
2005년 4월 5일.
양양 일대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이 강한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지면서 낙산사까지 덮쳤다.
산에서 내려온 불길은 사찰 주변의 숲을 집어삼켰고, 결국 전각으로 옮겨붙었다.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지금의 고요한 낙산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붉은 불길이 번지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을 것이다.
나무로 지어진 전각들은 거센 불길을 견디기 어려웠다.
홍예문을 비롯해 원통보전, 의상대, 홍련암 주변의 시설 등 많은 건물과 문화재가 피해를 보았다.
특히 오랜 세월 낙산사를 지켜오던 보물 낙산사 동종도 화재로 소실되는 큰 피해를 보았다.
수백 년의 시간을 견뎌온 건물과 문화유산이 불과 몇 시간의 화마 앞에서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날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검게 타버린 나무와 잿더미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낙산사는 불탄 자리에서 다시 시작했다.
화재가 끝난 뒤 사람들은 사찰을 복원하기 위해 하나씩 손을 맞잡았다.
기록과 옛 사진을 살피고, 남아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전각의 원래 모습을 찾아갔다.
불에 타버린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그곳에 쌓여 있던 사람들의 기억까지 사라질 수 있다는 안타까움이 컸다.
그래서 복원은 단순히 건물을 다시 짓는 일이 아니었다.
낙산사의 역사와 전통을 다시 이어가는 일이었다.
한 채씩 전각이 모습을 되찾고, 주변의 숲과 길도 다시 정비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다시 나무가 자라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조금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걸었던 데크 길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이 길도, 이 전각도, 이 나무들도 모두 한 번의 큰 시련을 지나 다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광희 친구가 말했다.
“여기가 2005년에 큰 산불이 났던 곳이야. 낙산사가 거의 큰 피해를 보았지.”
친구들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그런 흔적이 하나도 안 보이네.”
그 말에 영호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시간은 상처를 지워버리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우리는 다시 천천히 걸었다.
경내를 지나 바다 쪽으로 향하자 시야가 갑자기 넓어졌다.
눈앞에 푸른 동해가 펼쳐졌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해수관음상이 눈에 들어왔다.
낙산사의 해수관음상은 바다를 향해 자비의 눈길을 보내는 관음보살상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모습의 하나다.
푸른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관음상은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화마가 지나가도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 낙산사처럼, 사람의 인생도 어쩌면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불길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무언가를 잃기도 하고,
계획했던 일이 무너지기도 하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때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일어난다.
조금 달라진 모습일지라도 다시 길을 걷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친구들이 하나둘 주변에 모였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고,
누군가는 의자 난간에 기대 바다를 바라보았다.
종삼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여기 사진 잘 나오겠다.”
태형이 옆에 서며 말했다.
“나도 하나 찍어줘.”
찰칵.
사진 한 장을 찍고는 서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영호, 재군이가 서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와 한진이는 나무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쳤다가 하얗게 부서졌다.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문득 이 열 명의 삶을 생각했다.
우리는 같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만났다.
그저 함께 뛰놀고, 웃고, 때로는 선생님께 혼나던 아이들이었다.
세월은 우리를 각자의 길로 데려갔다.
연락이 뜸해진 때도 있었다.
그런데 다시 만났다.
그리고 지금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나는 조금 전 들었던 낙산사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불이 모든 것을 삼킨 것 같았지만 낙산사는 다시 일어섰다.
우리의 우정도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세월이라는 바람에 서로 멀어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래 묻혀 있던 인연이 다시 살아나 열 명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나는 친구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광희가 앞장서 걷고 있었고,
종관이는 또 사진을 찍고 있었다.
태형과 종관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고,
종삼과 영이 천천히 뒤따라오고 있었다.
만택과 재군도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열 명의 모습이 서로 다른 속도로 길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결국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번 여행을 온 것은 설악산을 보고 낙산사를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랜 세월 각자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다시 만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낙산사의 바다 위로 바람이 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해수관음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친구들을 따라 걸었다.
여행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모두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사진 한 장을 더 찍고,
바다를 한 번 더 바라보고,
친구에게 한마디를 더 건넸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가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파도는 밀려왔다가 다시 물러갔다.
사람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멀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그리고 언젠가는 또 헤어져야 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낙산사의 바다는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천천히 출구 쪽으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