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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에 머물고 계신 비구니
다경스님이 번역하신 것을 보내주셔서
차에서 듣고 밭에서 듣고 하였네.
노안이 오는지 눈이 아파서 요즘 tts를 깔아 들으니 훨씬 낫구먼.
오늘 416에 둥둥 떠오르는 처연한 마음들
깊이 잠겨 아직도 떠오르길 기다리는 마음마음들을 헤아리다가
아직도 진실이 해결되지 못한 그날을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가 바로
이런 정념을 불러오는 훈련이 아닌가도 싶고.
여기서 말하는 내 마음과 친구들의 마음씨앗들이
지하실에서 옷을 입고 거실로 툭하고 튀어나오게 되는데
대체로 하이패션과 반라의 자태라 당황스럽고 어떻게 다뤄야하나 싶곤 하기에.
그저 정념을 불러오는 훈련을 할밖에.
그러나 종종 자주 나의 소용과 무용을 생각한다.
산길을 걷다 만나는 흙 시냇물 나무들 돌들..
까닭 모르고 각각 거기 존재하는데
그 자체로 어우러지고 아름답다.
자연 속에 들면 편안한 이유가,
자연은 시비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자연은 옳고 그름 없이 나를 비추고
그대로 존재하는 그들에게 큰 위안을 얻고 돌아오곤 한다. 내가 미세친구들을 밭을 숲삼아 다녔던 까닭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난 오늘 아침부터 또 주전자를 태워먹었고
정념과 집중은 아직 멀었구나 또 강제로 겸손해지고
집안과 내면에 아직도 연기가 자욱한채 416을 맞이한 나를.. 팽목 대신 송호바다로 달마산 숲으로 데려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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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각자에게는 여리고, 아픈 아이가 하나씩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려움의 시간들과 트라우마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요. 미래에 일어날 고통에 맞서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면서, 그 고통스럽고 아픈 시간을 잊으려 노력합니다. 매 순간 그 아프고 고통스러운 경험과 맞닥뜨려야 하지만 그것을 참아낼 수 없다고 믿기에, 아픈 기억들을 무의식, 그 깊은 곳에 밀어 넣어버립니다. 아마도 수십 년간 이 상처받은 아이와 마주치지 않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 아이를 외면한다고 거기에 없는 게 아닙니다. 상처받은 아이는 항상 거기에 있으면서 우리들의 관심을 받으려고 하고 있어요.이 작은 아이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 나 여기에 있어요. 나는 여기에 있어요. 그대여 당신은 나를 피할 수 없어요, 그대는 나로부터 도망갈 수도 없어요!”
우리는 우리 내면의 깊은 곳으로 이 아이를 밀어냄으로써 고통을 끝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회피하는 것은 고통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픔을 지속시킬 뿐입니다. 상처받은 아이는 거기에 있지만 우리는 알지도 못합니다.
이 아이가 있다는 것은 실재지만 볼 수는 없어요. 이렇게 볼 수 없는 것을 일종의 어리석음, 무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 세포 하나하나에 이 상처 받은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를 위해 과거를 되새길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몸속에 세포마다 고통이 내재해 있는 것처럼 우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지혜와 행복의 씨앗도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내면에 등이 하나 있습니다. (마음챙김=정념=마인플니스; 이하 정념이라 칭하겠습니다) 정념正念 의 등불입니다. 이 등은 언제나 밝힐 수 있습니다. 이 등의 연료는 자신의 호흡, 걸음걸음, 그리고 평화로운 미소입니다. 여러분은 이 正念의 등을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그러면 이 등불은 어두움을 물리치고 밝음만이 가득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正念수행은 등불을 밝히는 구체적 행동이지요. 여러분이 상처받은 아이를 잊고 지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할 때, 이 아이에 대한 깊은 사랑과 자비를 느끼며 正念의 에너지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Listening
‘ 연민심과 함께 들어주기’ 에 대해 말하면 우리는 주로 타인을 연상시키곤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반드시 내 안의 아이 목소리에 깊이 귀 기울여야 합니다. 상처받은 이 아이는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하거든요.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이 이 작은 아이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요. 여러분이 正念을 가진다면 이 아이가 도와달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을수 있고, 그 순간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내면 깊은 곳으로 돌아가 이 작고 여린 아이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 주세요.여러분은, 사랑스런 말로써 아이와 이야기 나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너 혼자 남겨두고 나는 도망갔어. 정말 미안하구나. 미안해 이젠 널 꼬~옥 안아 줄게.” 이렇게도 이야기 할 수 있어요. “ 사랑하는 이여! 나는 당신을 위해 여기에 있어요. 당신을 진심을 다해 돌볼 게요 당신이 많이 아프고, 고통스러웠는데... 나는 바쁘게만 살아왔어요. 당신에게 너무나 소홀했어요. 이제 지금부터 당신에게 돌아갈 게요.”
만약 필요하다면, 여러분의 상처 받은 아이와 함께 울어도 좋습니다. 이 아이와 언제 어디서라도 함께 앉아 호흡을 함께 해보세요.
“ 숨을 들이 쉽니다. 나는 나의 작고 상처 받은 아이에게 돌아갑니다. 숨을 내쉬면서, 여리고 상처받은 나의 아이를 보살핍니다”
하루에 여러 번 아이와 대화를 해보세요. 그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깊고 따스한 포옹과 함께 다시는 이 아이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하면서 아이를 안심시킵니다. 아이는 오랜 기간 홀로 내버려져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당장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할 것인가요? 하루에 5~10분 만이라도 이 아이의 목소리를 자세히 듣기 시작한다면 치유는 시작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멋지고 아름다운 산에 등산을 간다면 상처 받은 아이를 초대하세요. 금빛 노을을 바라볼 때도 여러분의 아이를 초대해 함께 감상하세요. 이렇게 한다면 몇 주, 몇 달 안에 아이는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수행의 넓은 관점에서 본다면 아이는 단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아이는 여러 세대의 상징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들도 당신들의 삶속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아마 부모님들은 당신들의 상처받은 아이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스스로의 아이를 깊이 안아 주는 것은, 여러분 조상들의 상처받은 아이도 함께 안아 주는 것이 됩니다. 이 아름다운 수행은 우리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수없는 선대 조상들과 앞으로의 후대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조상들이 상처받은 아이를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아이가 물려진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은 이 반복을 끝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상처받은 아이를 치료할 수 있다면, 스스로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우리에게 폭력을 행한 사람들도 함께 자유로워 질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폭행의 가해자는 한편으로는 폭행의 희생자입니다. 자신의 상처받은 아이와 더불어 상처와 고통에 대한 학습과 배움이라는 전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가족, 친구들의 인간관계가 훨씬 쉬워집니다. 이해함, 자비로움의 손길이 닿지 못해 우리는 아픕니다. 우리의 상처받은 아이를 위해서 자비, 이해 그리고 正念의 에너지를 길러낸다면 앞으로는 덜 아플 겁니다. 또한 자비와 이해, 正念들을 길러낼 때 타인의 사랑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모든 일,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있거든요. 자비심은 타인과의 관계복원에 도움을 줍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 친구들도 내면에 심하게 상처받은 아이가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다스린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치유할 때 상대방과의 관계는 훨씬 쉬워질 것이고 점점 더 평화로움과 사랑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자신에게 돌아가서 스스로를 돌보세요. 몸과 느낌, 의식들이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의 상처받은 아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의 아픔들은 당신이 알아봐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세요. 걷기, 호흡하기를 하면서 正念을 길러보세요. 그렇게 모든 것들을 해 나갈 때 온전히 현존할 수 있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The energy of mindfulness
상처를 치유하는 연고 같은 正念에너지는 우리에게 상처받은 아이가 있음을 알아보고 치유해 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길러나가야 할까요? 불교 심리학에서는 의식識을 둘로 분류합니다. 하나는 심식心識이며 하나는 장식藏識이다. 심식은 행위 자각이며 서양심리학에서는 활동의식이라고 칭합니다.여러분은 생생히 살기위해 모든 행위에서 ‘온전히 지금’ 의 에너지를 길러내려고 애씁니다.차를 마시고 운전을 하면서 도심을 통과할 때에도 여러분은 ‘온전히 지금’이길 원하며, 걸음을 걷고 호흡을 할 때도 ‘온전히 지금’이길 원합니다. 장식은 의식의 뿌리와 토대로 불리어집니다. 서양 심리학에서는 ‘잠재의식’ 이라고 불리며 과거의 모든 경험을 저장하며 정보를 배우고 처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종 마음은 몸과 함께 하지 못하곤 합니다. 때때로 일상생활에서도 ‘심식’ 없이 생활을 하고 있지요. '장식’ 만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의식은 다른 수천가지의 일들을 생각해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도심을 통과하는 운전을 할 때 ‘심식’은 운전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도 길을 잃거나 사고 없이 목적지까지 갈수 있지요. 이것은 ‘장식’이 스스로 작용을 한 것입니다.
의식은 집으로 비유한다면 ‘장식’은 지하실에 ‘심식’은 공동생활공간인 거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화남, 슬픔, 즐거움 등은 씨앗의 형태로 ‘장식’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화, 절망, 편견, 공포, 불안, 자비, 공감, 각성 등의 여러 씨앗들을 가지고 있지요. ‘장식인 저장의식’은 온갖 종류의 씨앗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모든 씨앗들을 보존하며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그 씨앗은 ‘저장의식’에 있다가 무엇을 듣고, 보고, 읽을 때 서로의 접촉을 통해 기쁨, 화남, 슬픔 등을 만들어냅니다. 마음씨앗이 발아되어 거실로 튀어 오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더 이상 씨앗이라 불리지 않고 心相應(옷을 입은 마음씨앗)이 됩니다.무슨 일을 하거나 어떠한 말로써 ‘화’의 마음씨앗에 접촉했기에 화라는 옷을 입은 마음씨앗이 심식에 나타날 것입니다.
옷 입음이라는 것은 많은 조건들이 함께 밀접한 관계성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리적 옷 입음. 생물학적 옷 입음. 정신적 옷 입음. 불교 심리학에서는 51가지 마음씨앗이 51가지의 다양한 빛깔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화는 그중 하나이며, 저장의식에서는 하나의 씨앗이었으나 심식에서는 그것을 ‘화’이라는 형태로 불려 지게 됩니다. 씨앗 ‘화’가 거실로 튕겨 나올려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념인 각성의 씨앗’도 함께 초대해서 튕겨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실에는 두 가지가 공존하게 되지요. 이것이 ‘화’에 대한 正念입니다. 正念이라는 뜻은 무엇에 대한 正念입니다. 호흡을 챙김, 이것은 호흡에 대한 正念입니다. 걸음을 걷거나, 음식을 먹을 때도 그것에 대한 正念하는 것입니다. 위의 경우는 화남에 대한 正念이라 할 수 있겠지요. 正念은 화를 인지하고 감싸 안아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은 不二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화’는 우리의 적이 아니지요. 正念 ,화,모두 우리 자신입니다. 正念은 억누르거나 대항하지 않고 알아차리면서 보살피는 것입니다.마치 큰 형이 동생을 돌보듯, 이 에너지로 부드럽게 포용되었습니다. 正念의 에너지가 필요할 때마다, 正念으로 걷고, 숨 쉬고, 미소 지으면서, 알아차리고 감싸 안는 에너지를 가져서 내면 깊은 곳을 전환하게 됩니다.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며 설거지를 하고 산책을 하면서 호흡을 챙겨 나갈 수 있다면, 正念의 에너지는 더더욱 튼튼해지고, 성장할 것입니다. 正念은 집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두 에너지가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합니다.
The mind needs good circulate
우리 몸에 독소가 있다는 것은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몸이 순환이 잘 되지 않으면 독소는 계속 쌓이게 되지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몸은 독소를 배출합니다. 혈액순환이 원활하며 콩팥이나 간이 독소를 없애는 역할을 충실히 합니다. 마사지도 혈액순환에 좋은 도우미이지요. 우리의 의식 또한 좋지 않은 환경일 때는, 고통, 좌절, 슬픔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 의식의 독소와 같습니다. 이것을 내적장애라고 말합니다. 슬픔과 고통, 아픔에 대해 正念에너지로 감싸 안는 것은 의식의 마사지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혈액순환이 잘 안 될 때, 우리의 장기들은 적절한 역할을 할 수 없고, 몸이 아프게 됩니다. 정신도 마찬가지고 순환이 원활히 되지 않으면 마음이 아프게 됩니다. 正念은 아픈 여러분을 살펴서 순환을 촉진시킵니다. 여러분의 고통, 슬픔 ,화남, 절망들은 항상 거실로 튀어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크게 자랐기 때문에 관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저장의식에서 튀어나오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환자 같이 아파 보여서 거실로 초대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래서 튀어나오는 것을 차단하고 지하실에서 잠자고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서 습관적으로 거실을 다른 손님으로 꽉 채웁니다.10분이나 15분의 여유 시간이 있어도 무엇이라도 해서 거실을 꽉 채우지요. 친구에게 전화를 걸거나, 책을 고르거나, tv를 켜거나, 드라이브를 가거나… 이 거실이 꽉 차면 기분 좋지 않은 마음 씨앗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 소망합니다. 그렇지만 순환이 필요합니다. 그 기분 좋지 않은 씨앗들을 나타나도록 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순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병과 우울증이 몸과 마음에 발병하기 시작하지요. 때때로 두통이 있어 아스피린을 먹어보지만 통증이 가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두통은 마음병의 현상일 때가 있습니다.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을 먹어보지만 통증이 계속될 때가 있지요, 오히려 이러한 약은 통증을 더욱 악화시킵니다.
Dismantling Barriers
만약 우리 고통의 난제들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걸 배운다면, 이 난제들이 거실로 튀어 오르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둘 것입니다. 正念으로 그들을 감싸 안으며 전환시켜 나갈 것입니다. 지하실과 거실사이에 장벽을 무너뜨릴 때 숨어있던 고통이 떠오르기에 조금은 아플 것입니다. 상처 받은 아이는 지하실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 지냈기에 두려움과 분노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正念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正念이 없다면 이 아픔들이 나타나는 그 자체로 불쾌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正念에너지를 매일매일 길러내는 그 자리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正念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포용하고 보살피는 강력한 에너지입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이 부정적 마음 씨앗이 나타날까봐 주저하게 됩니다. 많은 두려움, 의심들을 감추려고 하지요. 몇 번의 시도로 포용하려 하더라도 힘센 마음 씨앗들은 다시 지하실로 되돌아 갈 것입니다. 그러나 전보다는 훨씬 힘이 약한 마음 씨앗으로 남을 것입니다. 매 순간 매 순간 샤워를 해주세요. 아픔들은 점점 가벼워질 것입니다. 두려움, 분노, 절망들을 샤워시켜주세요. 몇 일후 몇 주후에는 매일 데려오세요. 그리고 다시 돌아가게 도와준다는 당신의 내면은 좋은 순환상태를 만드는 것이 됩니다.
The function of mindfulness
正念의 첫 번 째 기능은 알아차리고 싸우지 않기 입니다.내면에 상처받은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언제나 멈출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상처받은 아이를 알게 되었을 때, 반갑게 인사하세요. 그것이 필요한 전부입니다. 만약 아이가 슬퍼하면, 인사하고 호흡을 하면서
“(숨을 들이마신다)내게 슬픔이 나타나는 것을 알고 있다. 안녕! 슬픔아! (숨을 내 쉰다) 난 널 보살필 거야.”
우리 안에 상처받은 아이를 알아차리면, 正念은 깊이 감싸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 째 기능입니다. 감정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잘 보살피는 것입니다.
正念은 절친인 집중을 함께 데려옵니다. 처음에 몇 분 동안의 알아차림과 상처받은 아이를 포근히 감싸 안는 것은 약간의 고통완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난해한 감정들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픔은 훨씬 가벼워질 것입니다. 세 번 째 기능은 상처 받은 아이를 감싸 안음으로써 난해한 감정들을 진정시키고 통증을 완화 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단지 아이를 부드럽게 안아줄 뿐인데 우리의 감정들이 편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강렬한 감정을 正念과 집중으로 포옹해줄 때 감정의 뿌리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시작의 뿌리를 볼 때 고통들은 완화될 것입니다. 正念에너지는 집중에너지뿐 아니라 슬기로움의 에너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집중은 오직 한 가지에 초점을 두게 합니다.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은 내면을 좀 더 튼튼하고 슬기롭게 합니다. 슬기로움은 언제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正念이 있다면 생생하게 정념을 유지하는 것이 집중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또한 생생하게 집중을 유지하게 된다면, 슬기로움은 다가올 것입니다. 正念에너지는 삶을 깊이 바라보며 ,삶을 변화시키는 슬기로움을 얻을수 있게 해줍니다.
출처: Healing The Inner Child (2010) by Thich Nhat Hanh
https://m.blog.naver.com/dgwisom74/221219059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