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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양진씨 예빈/정자공파 7~9世>사적/系代 재구|…―* 카페장 미완성자료
사적재구자▶진흠(陳欽) 참판공 16대손 25世 해송(海松) 옥수(玉洙)
| 조회 0 |추천 0 |2016.01.31. 20:38 http://cafe.daum.net/jinssisarangbang/O2KI/3618
註 1) 世祖 2卷, 1年(1455 乙亥 / 명 경태(景泰) 6年) 12月 27日(戊辰) 3번째기사 -前略- 行注簿池自沺、承訓郞金孟孫、宣敎郞金南ㆍ崔洧ㆍ咸尙正、宣務郞全南寶ㆍ陳欽ㆍ金由敬、行司正崔海、務功郞李枝茂、直長金敎明、啓功郞李繼富、從仕郞金日新、承仕郞兪濕、務功郞李祐、行司勇崔厚通、仕郞金成剛、行錄事田成、錄事劉興達ㆍ崔潤河、注簿尹洪ㆍ林尙露ㆍ河潝、萬戶潘衡、司直李美ㆍ李恒ㆍ全司勇ㆍ朴貴老、司正尹之成、萬戶李處義、副司正朱尙質、郡事邊大海、少尹禹傅、行注簿禹繼孫、直長楊浩、注簿李貴根、判官李承碩、直長柳眙、副直長李恂、錄事孫億、直長李文埤、丞朴斯悌、錄事鄭而元、副使金承幹、署令權念、使金稷孫、行注簿金强、丞金致精、判官李九寬、奉訓郞李保基、少尹元昊、丞李文疆、副丞趙怡、甲士司勇朴孝康、部令鄭而虞、正郞鄭承韶、司勇全進穆、都萬戶李興茂、司勇金善擧、行判官偰從、副丞韓致亨、修義校尉柳思義、司直朴景愼、行副司正趙瑠、進勇校尉申孝誠、承義校尉李仲美、司正朴明、進勇副尉李興孫ㆍ康敦孝ㆍ姜應周、承義校尉金悰ㆍ朴榮生、行司勇鄭之實、進勇校尉安欽ㆍ金振綱ㆍ張允倫ㆍ鄭懷山ㆍ朴禮生、承義副尉韓承胤、進武副尉金從仁、司直許禮、副司直尹璜、承義校尉文汝楨ㆍ郭庥、修義校尉裴鉤、承義校尉尹成美、承義副尉丁安義ㆍ辛致義ㆍ張繼興ㆍ宋存禮、承義校尉崔得潤、敦勇校尉權自誠ㆍ羅有精、承義副尉金孝智ㆍ金輅、進勇副尉朴春山ㆍ李季夏、修義副尉李昌ㆍ申崇德ㆍ李崇禮、進勇校尉李淳中、承義副尉李樸ㆍ李恂、承義副尉金德山、進勇副尉朴孝璘ㆍ崔自洋、承義副尉文克明ㆍ張安老、進勇副尉李夏ㆍ崔自淵、司正朴興孫ㆍ金寧、副司直金仲賢、司正李季孫、副司正李仲彦、司勇趙成萬ㆍ張乙守ㆍ金尙永、司直朴義文、副司直申權ㆍ孫衡ㆍ安處性、司正白良寶ㆍ金自麗、司勇辛汝海、副司直韓仲恭ㆍ權敬智、司正卓季貞ㆍ趙智孫ㆍ安石强、副司正宋耆ㆍ金尙仁ㆍ李淳山、司勇金敬德ㆍ林叔枝、司正金好義、司勇徐軾、副司直姜近之ㆍ姜彪、司正金用智ㆍ李興雨ㆍ李孝孫、副司正慶生、副司正黃處中ㆍ李孝中、司勇成自達ㆍ許幹ㆍ金備、司直金安俊、副司直鄭綜ㆍ朴重生、司正宋之精ㆍ朴敬雲ㆍ白終生ㆍ李日新、副司正周義生、司勇薛春信、修義副尉李孟孫、進勇副尉朴升孫、進武副尉朴自ㆍ朴美、進義副尉李興春ㆍ金潤德ㆍ吳季孫ㆍ柳石泉ㆍ吳孝達、 修義副尉金石伊ㆍ朴季生、承義副尉李暉、修義副尉李致和ㆍ張彦ㆍ趙禮ㆍ崔乙夫、承義副尉黃益善、修義副尉林允德、進武副尉朴明ㆍ金自公、掾吏李瑞山、典吏張貴亨ㆍ梁允澄、司鑰尹希壽、令史梁水岸ㆍ楊自漢ㆍ金祉ㆍ文德澮ㆍ康得齊ㆍ陳良ㆍ金屑ㆍ金從善ㆍ李從生ㆍ西門湜、典事洪自瓊、別監咸今生、典樂金灑生ㆍ金致、令史羅綺ㆍ金吉祥ㆍ李繼山ㆍ金允德ㆍ車自貞ㆍ李春卿、典事沈長壽、令史金敬忠、學生金敬禮、令史韓承敬ㆍ尹生ㆍ金九龍、別監金同、令史李明禮、吹螺赤金處江、別監陳治、直律許恩、司勇朴衆伊、典樂黃孝誠ㆍ金允山ㆍ宋太平ㆍ宋田壽、管事李勝連、副典律金吉生、典律柳雨、直律梁忘吾之、典樂都末生、書吏金存壽、補充軍權季同、別監金每方、奴朴今經、別監金龍守ㆍ朴今剛、給事金今音同、奴玄勿金、才人天雨、副給事金檢松等錄三等。” 遂下敎曰: 紀功行賞, 有國之令典。 予以寡德, 叨居大位, 顧念潛邸艱難之時, 賴同德之臣, 左右先後, 以保寡躬。 或是予同列, 或是予寮佐, 或戚屬之近, 或隨從之舊, 或與朝天共跋涉之勞, 或參靖難有捍衛之勤, 下逮僕隷之奔走, 咸有原從之功, 式至今休, 予敢忘哉? 當先示褒賞之典, 以堅終始之義。 咨爾議政府體予至懷, 宜速擧行。 一等各加一資, 子孫承蔭, 宥及後世, 父母封爵, 子孫中一人從自願加散官一資。 二等各加一資, 子孫承蔭, 宥及後世, 子孫中從自願加散官一資。 其中無子孫者, 兄弟、壻姪中從自願, 加散官一資。 三等各加一資, 子孫承蔭, 宥及後世。 功臣內通政以上, 則子孫、兄弟、甥姪、女壻中, 一人從自願加散官一資, 身死者, 各依本等施行, 追贈一資。 犯罪作散者, 竝敍本品, 在喪及無故作散者, 加一資敍用, 永不敍用者, 許通仕路。 收告身者還給, 妾子勿限品, 公私賤幷免賤, 私賤則償以公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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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
世祖 38卷, 12年(1466 丙戌 / 명 성화(成化) 2年) 2月 24日(丙申) 5번째기사
병조에서 말을 죽게 한 겸감목의 말을 징납할 것을 건의하다
○兵曹啓: “都草島兼監牧 ▶陳孝友牛一百八頭內, 三十八頭死;
露島兼監牧黃善輅馬六百六十八匹內, 二百十匹死;
龍流島兼監牧閔孝悅馬一百六十匹內, 五十八匹死;
昇荒島馬八十六匹內, 六十二匹死;
大山串兼監牧朴仲宗馬四百八十匹內, 一百二十匹死;
山達島兼監牧洪永河牛七十四頭內, 三十頭死;
元山島兼監牧金莘馬一百匹內, 八匹死;
沙邑時島兼監牧金貴命馬六十匹內, 十七匹死;
興陽串兼監牧鄭淑馬四百二十五匹內, 三十六匹死;
大小山兼監牧張允愼馬二百三十六匹內, 四十四匹死。
罪在赦前, 雖不得追論, 請依法徵納。” 從之。
【태백산사고본】 14책 38권 17장 A면
【영인본】 8책 9면
【분류】 *교통-마정(馬政) / *사법-행형(行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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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국역> 세조 38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2월 24일(丙申) 5번째기사
병조에서 말을 죽게 한 겸감목의 말을 징납할 것을 건의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도초도 겸감목(都草島兼監牧) ▶ 진효우(陳孝友)는 소 1백 8마리 가운데 38마리가 죽었고,
노도 겸감목(露島兼監牧) 황선로(黃善輅)는 말 6백 68필 가운데 2백 10필이 죽었고,
용류도 겸감목(龍流島兼監牧) 민효열(閔孝悅)은 말 1백 60필 가운데 58필이 죽었고,
승황도(昇荒島)는 말 86필 가운데 62필이 죽었으며,
대산곶이 겸감목(大山串兼監牧) 박중종(朴仲宗)은 말 4백 80필 가운데 1백 20필이 죽었고,
산달도 겸감목(山達島兼監牧) 홍영하(洪永河)는 소 74마리 가운데 30마리가 죽었고,
원산도 겸감목(元山島兼監牧) 김신(金莘)은 말 1백 필 가운데 8마리가 죽었고,
사읍시도 겸감목(沙邑時島兼監牧) 김귀명(金貴命)은 말 60필 가운데 17필이 죽었고,
흥양곶이 겸감목(興陽串兼監牧) 정숙(鄭淑)은 말 4백 25필 가운데 36필이 죽었고,
대소산 겸감목(大小山兼監牧) 장윤신(張允愼)은 말 2백 36필 가운데 44필이 죽었는데,
죄가 사유(赦宥) 전에 있어서 비록 추론(追論)할 수 없으나, 청컨대 법에 의하여 징납(徵納)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4책 38권 17장 A면
【영인본】 8책 9면
【분류】 *교통-마정(馬政) / *사법-행형(行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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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도초도
[ 都草島 ]
요약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면에 딸린 섬.
위치
전남 신안군 도초면
면적
41.94㎢
면적 41.94㎢, 해안선길이 42㎞이다.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47㎞ 지점에 있다. 신라시대에 당나라와의 무역기항지로서 당나라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을 때 자기나라의 수도와 비슷한 지형이면서 초목이 무성하다 하여 ‘도초(都草)’라 하였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귀양지로 알려졌으며, 흑산도와 중국 장쑤성[江蘇省]을 잇는 상업 통로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아차산현에, 고려시대에는 나주목에, 조선시대에는 해남군·나주군·완도군·지도군·진도군 등에 속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무안군에 속하였다가 1969년 신안군 창설시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1981년에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최고점은 금성산(219m)이며, 남쪽으로는 산지가 형성되어 있고, 북쪽과 서쪽은 구릉지와 평야가 발달하였다. 중부지역 수항리 일대에 펼쳐진 고란평야는 신안군 도서 중에서 가장 넓은 들을 이루고 있다.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며, 남서쪽 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이다. 1월 평균기온 0.8℃ 내외, 8월 평균기온 26℃ 내외, 연강수량 844㎜ 정도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농산물로 쌀·보리·고구마 등과 특산물로 담배가 생산된다. 근해 일대에서는 갈치·농어·참조기·새우·우럭·붕장어·가자미 등이 잡히고, 김 양식업이 이루어진다.
유적으로는 고란리 장군상, 김권일의 효행비, 도초도 초가집 등과 만년사·한산사·성각사·만덕사 등의 사찰이 있으며, 남쪽 해안 만입부에는 시목해수욕장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1996년 9월에 비금도와의 사이에 연도교가 개통되어 비금리 및 연평해수욕장과 연계되었다. 목포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과 쾌속선이 1일 2∼3회씩 운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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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도초도
[ 都草島 ]
소재지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면
관리자
신안군,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비금도초지구 관리사무소
문화재 지정번호
국립공원
문화재 지정일
1981년 12월 23일
목차
정의
개설
명칭 유래
자연환경
형성 및 변천
현황
정의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면에 속하는 섬.
개설
동경 125°57′, 북위 34°42′에 위치하며, 목포에서 서남쪽 54.5㎞ 지점에 있다. 면적은 42.38㎢, 해안선 길이는 42.0㎞이다. 2007년 말 현재 인구는 2,970명(남 1,474명, 여 1,496명)이고 세대수는 1,338호이다. 남쪽 해안 암목리에 시목해수욕장이 있고, 수다리에서 고란리까지 고란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도초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는 섬이며, 2007년 3월 비금도초분소가 개설되었다.
명칭 유래
도초도는 신라 시대에 당나라와의 교역 때 기항지였으며, 당나라의 수도와 같은 형태로 초목이 무성하여 목마지로 활용되었으므로 도초라고 칭하였다. 혹은 부근의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이라 도치도라 불렀다는 설도 있고, 섬의 형태가 고슴도치처럼 생겨 도치를 도초로 불렀다는 설도 있다.
자연환경
암석은 중생대 백악기의 산성 화산암류로 유문암과 응회암이 대부분이다. 연평균기온은 13.9℃, 1월 평균기온은 0.8℃, 8월 평균기온은 26℃, 연강수량은 984㎜이다. 북가시나무·녹나무·후박나무·동백나무·구실잣밤나무·사철나무가 자라고 있다.
중앙 저지의 ‘고란들’은 신안군 도서 중에서 가장 광대한 들을 이루고 있다. 섬의 남쪽은 금성산(219m) 등의 산지가 형성되어 있고, 동서쪽은 구릉성 산지가 발달하였다.
형성 및 변천
고려·조선 시대에는 귀양지로 알려졌으며, 흑산도와 중국 장쑤성(江蘇省)을 잇는 상업 통로였다. 삼국시대에는 마한, 신라 시대에는 나주목, 1888년(고종 25)에는 해남현에 속하였다가 1894년나주군에 환원되었다. 1896년 또다시 해남군에 속하였고 1897년에는 지도군에, 1903년에는 진도군에, 1914년에는 무안군에 속하게 되었다. 1969년 1월 1일무안군에서 분리되어 신안군에 속하게 되었다.
현황
2007년 말 현재 경지 면적은 논 9.64㎢, 밭 4.74㎢, 임야 22.00㎢이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음식숙박업도 병행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고구마 등이며 임산물은 밤·대추 등이 생산된다. 연안 어장에서는 농어·갈치·조기·새우 등이 잡히고, 미역·김 양식도 활발하다. 염전이 발달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시목해수욕장은 모래사장이 반원형으로 둥글게 펼져져 있다. 물이 수정처럼 맑고 깨끗하며 주변에 감나무가 많다고 해서 시목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만큼 수려한 자연 경관으로 이름난 곳이다. 한산사·만덕사·만년사 등 광복 이후에 지은 사찰이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도초초등학교 도초동초등학교 도초서초등학교, 도초중학교와 도초고등학교가 있다. 1996년 비금도와의 사이에 연도교가 개통되어 도초도 접근이 용이해 졌다. 목포여객선 터미널에서 도초도 화도를 잇는 여객선이 운항된다.
참고문헌
『제48회 신안통계연보』(신안군, 2008)
『전남의 섬』(전라남도, 2002)
『신안군지(新安郡誌)』(신안군편찬위원회, 2000)
『한국도서백서(韓國島嶼白書)』(전라남도, 1996)
『도서지(島嶼誌)』(내무부, 1985)
『한국지명요람(韓國地名要覽)』(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신안군청 홈페이지(http://www.shinan.go.kr/)
신안문화관광 홈페이지(http://tour.sinan.go.kr/)
다도해해상국립공원 홈페이지(http://dadohae.knps.or.kr/)
[네이버 지식백과] 도초도 [都草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