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서사(鷲棲寺)>
단아하고 향기롭고 수려한 천년 사찰이다. 첩첩이 쌓인 봉화의 산들을 굽어보면서 문수산 자락에 들어앉아 역사와 품격을 간직하고 있다. 아름다움에 단아함에 그리고 역사의 굴곡에 깊은 신심을 담고 있다. 봉화의 불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차로 진입하기 좋아서 여행자들에게는 더욱 매력적인 절이다.
1. 사찰 대강
명칭 : 축서사(鷲棲寺)
위치 : 경북 봉화군 물야면 월계길 739
방문일 : 2024.8.14.
입장료 : 없음
2. 둘러보기
2차선을 1차선을 한참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절이지만, 어려운 코스는 하나도 없다. 고마운 일이다. 주차장에 도착하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발아래 깔린 아름다운 산세 풍광에, 그 위를 덮은 하늘 지붕의 광활함에 압도되기 때문이다. 청량사처럼 높이 오르지 않아도 산으로 만들어진 산평선?을 죄다 내려다 볼 수 있어서 봉화의 깊이가 그대로 감지되는 기분이다.
보광전의 석조비로자나불상과 광배, 그 앞 석등 앞에 서면 산에서 하늘에서 다시 불심의 바다로 돌아온다. 청량사, 각화사와 함께 봉화에 가득한 사찰과 불자를 생각하며 불교의 심연을 더듬어본다.
1) 소개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문수산(文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73년(문무왕 13) 의상(義湘)이 창건했다.
당시 인근 지림사[智林寺 : 지금의 水月庵]의 주지가 어느 날 밤 산 쪽에서 서광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가 의상에게 이를 고하고 함께 산에 올라가 보니 비로자나불이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의상은 이곳에 축서사를 짓고 이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867년(경문왕 7)에 부처님 사리 10과를 얻어 부처님 사리탑을 조성했다. 참선 수행 도량으로서 명맥을 이어오다가, 1705년(숙종 31) 중건했다.
당시에는 법당 등 전각 6동과 광명루(廣明樓), 승방 10여 동이 있었으며, 도솔암(兜率庵)과 천수암(天水庵)의 암자가 있었다. 1875년 경 대웅전・보광전・약사전・선승당・동별당・서별당・청련당・백화당・범종각 등이 있고 상대・도솔암・천수암 등 세 개의 산내암자가 있었으나 조선 말기에 일본군이 의병 토벌을 목적으로 불태워 대웅전 1동만 남겼다.
삼층석탑은 867년(경문왕 7)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석탑조성명기(石塔造成銘記)가 있는 매우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기단부 하대, 3층 옥신과 개석, 상륜부가 일실된 상태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문수산축서사. 일주문
보탑성전
범종각
선열당(시민선원)
종무소
대웅전과 새로 조성된 앞 마당 석탑
대웅전
대웅전 내부 불상
2) 봉화 축서사 석등(奉化 鷲棲寺 石燈)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축서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8각 석등으로,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는데, 꽃잎의 끝마다 작은 꽃조각이 달려 있다. 그 위에 세운 가운데기둥은 약간 짧은 편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을 이어주고 있다. 윗받침돌의 밑면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연꽃조각을 두었다. 화사석은 네 곳에 창을 두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는데, 짧은 가운데기둥에 비해 몸집이 커보여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 심하게 부서진 지붕돌은 특별한 조각을 두지 않았고, 꼭대기에는 지붕을 축소한 듯한 머리장식을 올려놓았는데 여덟 귀퉁이마다 조그마한 꽃조각이 솟아 있다.
전체적인 구성이나 조각기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위키백과 전재)
보광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198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2)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및 목조 광배
奉化 鷲棲寺 石造 毘盧遮那佛 坐像 및 木造 光背
봉화 축서사 석불좌상부광배
198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불상 높이 108㎝, 대좌 높이 96㎝. 영주 부석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인지 부석사 부근의 여러 석조비로자나불상과 비슷한 유형이다. 불분명해진 육계(肉髻)와 나발(螺髮)의 머리카락은 9세기 중엽 이후부터 보이는 수법인데, 865년(경문왕 5)에 제작된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머리 모양과 비슷한 편이다. 얼굴도 도피안사 철불의 얼굴처럼 단아하면서도 섬약해져 있다. 수도에 정진하는 고행승(苦行僧)의 일상적인 마른 모습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더구나 가는 눈, 빈약한 코, 작은 입의 표현으로 현실의 사람 모습, 그 가운데에서도 수도승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즉, 불(佛)의 이상적인 모습보다도 현실적인 인간 모습을 더 선호하는 경향, 이른바 현실적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준다.
상체는 곧고 반듯하여 얼굴보다 건장하게 느껴지지만, 이 역시 양감이 절제되어 단아한 인상을 준다. 하체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두 무릎이 넓게 퍼져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무릎이 낮아 이 역시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싼 이른바 지권인(智拳印)을 짓고 있는데 역시 작고 섬약한 편이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안정감이 있지만 섬약한 모습이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모습과 비슷하다.
더욱이 전신을 덮고 있는 대의(大衣)의 평행하게 밀집된 옷자락무늬는 도피안사 철불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 옷주름 형식이어서, 두 불상이 한층 더 일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축서사 불상의 옷주름은 보다 얇아졌을 뿐만 아니라 어깨의 무늬, 소맷자락이나 발목 등에 날카롭게 자른 듯한 거칠거칠한 표현 등 한결 섬세해지고 보다 기하학적이 되었다. 특히, 가슴의 U자형 옷깃에 표현된 꽃무늬는 9세기 후반기의 특징적인 불상 수법이다. 또 9세기 후반기의 옷주름 특징을 보여주는 것은 물결식 표현이다. 두 팔에서 흘러내린 주름이 두 무릎을 덮고 다리 사이에서 부채꼴을 형성하는데, 여기에 물결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9세기 석불상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8각대좌인데,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는 복련(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과 그 아래 8각의 각 면에 사자 1구씩이 표현되었고, 중대에는 공양상과 합장한 보살형, 상대는 앙련(仰蓮: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새겨진 당시의 전형적인 대좌이다.
광배 또한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광배 등 9세기 당시의 화려하고 섬려한 광배와 같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867년 무렵 불상과 함께 조성한 광배는 파손되어 윗부분만 겨우 남아있다. 현재 불상 뒤에 안치된 나무 광배 뒷면에는 묵서명이 있어 1730년에 세균(世均)이 제작했음을 알려준다.
의의와 평가
이 석불상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던 9세기 비로자나불상 계통의 하나이다. 당시의 불상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며, 867년(경문왕 7)에 제작된 석탑과 동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확실한 기년명 불상으로 크게 주목되는 작품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석조 비로자나불좌상과 목조 광배
보광전 내부 불상과 광배.
보광전
보광전 옆 요사채
대웅전
아래로 코끼리상 두 쌍이 호위하고 있다.
아미타삼존불. 새로 조성한 불상이다.
4. 주변 돌아보기
1) 오전약수
봉화는 약수의 고장이다. 유난히 약수터가 많다. 그렇잖아도 산수가 좋은 곳인데 유난히 약수를 탐한 건 좋은 약수가 많아선지, 좋은 물이 많아 물을 알아보는 눈 덕분인지. 주변에는 아예 관광지가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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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축서사 소개 감사합니다
봉화 축서사 보광전 앞 풍광
-윤동재
봉화 축서사 대웅전 앞마당
의상대사와 아도화상이
목청을 돋우고 있네
한 번도 목청을 돋우는 일이 없던 두 사람
무슨 일일까
무슨 까닭으로 목청을 돋우는 걸까
의상대사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바라보는
저물녘 풍광이 으뜸이라 하고
아도화상은 선산 도리사
서대에 올라 팔짱 끼고 바라보는
아침 풍광이 으뜸이라 하고
봉화 축서사 부처님
두 분의 말을 대웅전 안에서 다 들으시고
대웅전을 나오시더니 흰 고무신을 찾아 신으시고는
두 분을 데리고 보광전으로 가서
보광전 앞 한낮 풍광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저것 좀 보시게나 저것 좀 실컷 보시게나
의상대사와 아도화상이
보광전 앞 풍광에 넋을 놓고 있자
봉화 축서사 부처님
두 분에게 한말씀하시기를
으뜸 풍광이 따로 없다고
제가끔의 풍광이 있을 뿐이라고 했네
<<한국신명나라>> 윤동재 몽유기행시 2020.12.5
부석사와 축서사의 관계에 대해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조금 더 알고 선생님 시를 다시 보니 깊은 함의 더 잘 이해되고 실감이 납니다. 선산 도리사는 언제나 가 볼 기회를 얻을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아득했던 경북 사찰이 더 가깝게 여겨집니다. 선생님 시로 다시 한번 축서사를 살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