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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연(輦)
정의
조선시대 왕, 왕비, 대비, 세자, 세자빈 등을 위한 가마 형태의 탈것.
개설
고려시대 국왕의 거가(車駕)는 정거가(正車駕)와 부거가(副車駕)로 구성되었는데, 정거가는 오로(五輅) 중의 하나인 상로(象輅)였고 부거가는 초요련(軺轑輦)과 평련(平輦)이었다. 고려시대 국왕의 거가는 『세종실록』「오례」의 국왕 거가에 계승되었다. 하지만 이는 세조대의 변천을 거치면서 『국조오례의』에서는 상로가 사라지고 연과 여(輿)만 규정되었는데, 연은 고려시대의 초요련을 계승한 가마였고 여는 고려시대의 평연을 계승한 가마였다.
연원 및 변천
전통시대 중국에서 황제를 위한 탈것을 거가라고 하였는데, 거가에는 오로(五輅)와 치거(輜車)가 있었다. 오로는 모두 말이 끄는 수레였음에 비해, 치거는 바퀴를 제거한 수레였다. 바퀴가 없기에 말이 끌기도 했지만 사람이 운반하기도 했다. 사람이 운반할 때 치거는 연(輦)이라고도 했는데 15명의 사람이 메었다고 한다. 즉 치거 또는 연은 예비용 탈것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황제가 오로를 타기 위해 이동하거나 또는 오로에서 내려 이동할 때 연을 이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바퀴를 제거한 수레를 속거(屬車) 또는 이거(貳車)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오로는 황제의 거가를 대표하였고, 치거는 황제의 속거를 대표하였다. 오로는 거가를 대표하므로 정거가(正車駕)라 할 수 있고, 치거는 속거를 대표하므로 부거가(副車駕)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정거가와 부거가의 제도는 중국 역대 왕조에 적용되었다. 춘추전국 시대에 제후의 이거는 구승(九乘)이었다. 그런데 진시황이 아홉 나라를 평정한 후 아홉 나라의 이거를 통합하여 속거를 91승으로 늘렸다. 진시황이 타는 거가 즉 정거가는 6필의 말이 끌었고, 부거가는 4필의 말이 끌었다. 당나라 때에는 속거가 10종류 있었다. 명 황제의 거가 제도 역시 정거가와 부거가로 구성되었다. 예컨대 1405년(명 영락 3)에 재정비된 대가노부(大駕鹵簿)에 등장하는 판교(板轎), 보련(步輦), 대량보련(大凉步輦), 대마련(大馬輦), 소마련(小馬輦), 옥로(玉輅), 대로(大輅) 중에서 옥로는 정거가였고 나머지는 부거가였다.
이 같은 정거가와 부거가 제도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고려시대 국왕의 정거가는 오로 중의 하나인 상로였고 부거가는 초요련과 평련이었다. 고려시대의 상로는 붉은 칠을 하였고, 금으로 도금하고 은으로 치장하였으며 수레의 끝부분을 상아로 마무리하였다. 상로는 붉고 흰 자백마(赭白馬)가 끌었는데 6사(六祀)와 교묘(郊廟)에 이용하였다. 반면 초요련은 종려로 지붕을 하였고 붉은 칠을 하였는데 금으로 도금하고 청동으로 만든 용과 봉황으로 장식하였다. 초요련은 상원, 연등, 팔관회 등에 왕이 참여할 때 사용하였다. 평연은 초요련과 같으나 지붕이 없었다.
고려시대 국왕의 거가는 『세종실록』「오례」의 국왕 거가에 계승되었다[『세종실록』오례 가례 여연(輿輦)] 하지만 이는 세조대의 변천을 거치면서 『국조오례의』에서는 상로가 사라지고 연과 여만 규정되었는데, 연은 고려시대의 초요련을 계승한 가마였고 여는 고려시대의 평연을 계승한 가마였다.
형태
『국조오례의』가례 노부도설(鹵簿圖說)에는 국왕의 거가로 대연(大輦), 소연(小輦), 소여(小輿)의 세 가지가 명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대연과 소여는 왕비의 탈것이기도 했고 세자의 탈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연과 여 두 가지로 구성된 국왕 거가는 조선시대 내내 준수되었다. 대연과 소연은 명칭에서 나타나듯 기본적인 형태는 같고 규모에서 차이가 날 뿐이었다. 대연의 형태는 『세종실록』에 규정된 것이 거의 그대로 『국조오례의』에 계승되었는데, 구체적인 절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붉은색 바탕에 주홍으로 칠하고, 그림은 황금을 사용하며, 장식은 금을 새겨 넣은 쇠를 사용하였다. 좌우에 긴 들채가 있는데, 양쪽 끝에는 도금한 용두(龍頭)를 만들어 덮어씌웠다. 그 위에 긴 고리가 있고, 들채 아래에는 작은 장식 판자가 있는데, 빙 둘러 난간을 설치하였다. 들채의 한가운데 앞뒤에 가로로 댄 막대가 있는데, 네 모퉁이에는 각각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또 그 양쪽 옆에는 서로 가까이 각각 네모진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사면에 설치하였다. 모두 주홍으로 칠하고, 밖에는 황금을 써서 구름 속의 용을 그리고, 안에는 구름 속의 봉을 그렸다. 판자를 밑바닥에 깔고, 위에 지붕이 있는데, 형상은 점차로 아치로 둥그스름한 천장을 이루는 궁륭(穹窿) 모양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갔다. 지붕은 아청색(鴉靑色) 저사(紵絲)로 덮고, 속은 녹색 저사를 입혔다. 사면에는 빙 둘러 판자 처마를 설치했다. 위 처마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모양이 점차로 밖으로 향하여 기울어지는데, 황금으로 바르고 화초를 그리며, 아래 처마는 위로부터 바로 드리워져 아래로 내려오는데, 금으로 수파련(水波蓮)을 그렸다. 네 개의 들보는 주석으로 도금하여, 걸치는 추녀로 하고, 그 끝에는 금봉(金鳳)의 머리를 만드는데, 아가리에 둥근 고리가 있었다. 지붕 꼭대기는 주석으로 도금하고, 2층으로 호로병(葫蘆甁) 같은 꼭대기를 만들었다. 사면으로 빙 둘러 아청색 저사의 휘장을 드리우는데, 속은 붉은색 저사를 사용하며, 붉은색 노끈으로 처마 밑의 금 고리를 연달아 꿰어서, 때에 따라서 걷었다 폈다 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주렴을 사면에 드리우고, 녹색 실로 엮어서 거북이 문양을 만들고, 가에는 녹색 저사로 연(緣)을 둘렀다. 연의 중앙에는 주홍빛의 의자를 설치하고 발 받침대인 각답(脚踏)을 갖추어 어좌(御座)의 의자로 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수레의 이용이 활발하였고, 그것이 왕실에도 영향을 끼쳐 조선초기까지는 왕의 거가에 상로라고 하는 수레가 이용되었다. 하지만 세조대의 변화를 거쳐 『국조오례의』에 상로가 사라짐으로써 왕의 거가는 가마인 연과 여로만 구성되었다. 이처럼 왕실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가마만 이용하면서 민간에서도 수레보다는 가마의 이용이 확산되었고 그 결과 가마문화가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대명집례(大明集禮)』
『만기요람(萬機要覽)』
『주례(周禮)』
신명호, 「조선 초기 국왕의 車駕變化와 象輅, 輦」, 『동북아문화연구』30,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12.
정연식, 「조선조의 탈것에 관한 연구」, 『역사와 현실』27, 한국사연구회, 1998.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
오진(五鎭)
정의
대한제국기에 환구단에서 제천례를 하면서 제사지낸 방위신의 하나로 다섯 군데의 큰 산.
개설
대한제국기에는 제천례를 제정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국가와 황제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때 환구단에 황천상제(皇天上帝), 황지지(皇地祗), 일(日), 월(月), 풍운뇌우(風雲雷雨)와 북두칠성(北斗七星) 등 성신과 더불어 산천의 신인 오악(五岳), 오진(五鎭), 사해(四海), 사독(四瀆)의 신에도 제사를 지냈다.
내용 및 특징
신성한 산과 바다에 천지제사를 지내는 것은 황제의 고유 권한으로, 대한제국기에는 제천단인 환구단을 짓고 오악을 비롯하여, 오진, 사해, 사독에 제사를 지냈다.
환구단에서 오진은 1층에 모신 황천상제와 황지지, 2층에 모신 야명(夜明)과 대명(大明), 3층에 모신 운사(雲師), 우사(雨師), 풍백(風伯), 뇌백(雷伯), 북두칠성, 오성, 이십팔숙, 주천성진(周天星辰)과 같은 자연신과 함께, 땅과 바다, 천을 관장하는 신인 오악, 사해, 사독과 함께 배향되었다.
이는 풍운뇌우와 산천의 신을 종향위로 삼은 갑오개혁기보다 더 많은 신들을 섬긴 것이다. 대명과 야명 외에도 성신으로 북두칠성, 오성, 이십팔수, 주천성신을 모셨으며, 오악, 오진, 사독, 사해와 함께 명산, 대천, 성황도 모셔 대상 신이 훨씬 세분화된 것이다. 이 가운데 풍운뇌우와 성황은 조선시대의 제천단이던 남단에서 제향하던 것이었다.
오진을 포함해 오악, 사해, 사독을 모신 것은 공간 개념의 변화를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악, 진, 해, 독 가운데에서 진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환구단에서 악, 진, 해, 독을 오방에 맞추어 체계화함으로써 오방 개념이 확실하게 적용되었다.
변천
환구제를 거행한 대한제국 초기에는 오악을 비롯하여 오진, 사해, 사독의 신위가 명목으로만 존재하고 있었을 뿐 각각에 해당하는 산천을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1903년(광무 7)에 이르러 각 지역의 해당 산천을 정하게 되었다. 이때 정해진 오진은 동진(東鎭)은 강릉의 오대산(五臺山), 남진(南鎭)은 보은의 속리산(俗離山), 중진(中鎭)은 서울의 백악산(白岳山), 서진(西鎭)은 문화(文化)의 구월산(九月山), 북진(北鎭)은 경성(鏡城)의 장백산(長白山)이다.
참고문헌
『환구단의궤(圜丘壇儀軌)』
『매천야록(梅泉野錄)』
김문식 외,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이욱, 「대한제국기 환구제(환구제)에 관한 연구」, 『종교연구』30, 2003.
온양행궁(溫陽行宮)
정의
조선시대 왕실 사람들의 온천욕을 위해 현종이 온양에 복구한 행궁.
개설
온천욕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온천 요법은 고대로부터 동양 의학에서 선호하는 질병 치료법이었다. 한국사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온천욕을 이용한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온천을 이용한 질병 치유는 그 특성상 국왕이 온천지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이에 따라 국왕과 관리들이 온천욕과 정무 활동, 숙식을 할 수 있는 임시 거처로서 행궁을 건축하였다.
조선 시대에 온천지역에 세워진 행궁을 ‘온궁(溫宮)’이라고 하였는데, 대표적인 온궁이 온양행궁이다. 온궁은 국왕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침전과 국왕과 관료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정전, 탕치(湯治)를 위한 목욕 공간인 탕실(湯室)이 기본 축을 형성하였다. 이 중에 탕실은 다른 행궁과 달리 온천 목욕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온궁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시설이었다.
위치 및 용도
온양행궁은 충청남도 아산에 위치하였으며 왕실 사람들의 온천욕을 위해 건설되었다.
변천 및 현황
온양 행궁의 건립은 조선 초 세종대 이루어졌다. 세종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행을 결심하고 나서 손수 직접 도면을 보면서 건축을 감독하였다. 세종은 민폐에 대한 우려로 인해 작고 소박한 행궁을 건립하였다. 행궁의 구조도 국왕뿐 아니라 병든 사대부와 일반 백성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목욕 시설을 개조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다시 일본군이 재침한 정유재란으로 일본군이 전라도를 거쳐 북상하면서 온양 지역을 급습하자 온궁은 불타고 폐허가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온궁은 방치되었고 국왕들의 온행도 중단되었다. 조선 후기 국왕의 온천행이 재기된 것은 현종대이다. 현종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온양온천을 선택하고 5차례나 온행을 하였다. 이때 온양행궁이 복구되어 처음에는 어실 6칸, 온천방 6칸을 비롯한 약 1백여 칸 규모였지만 후에 내정전 16칸, 외정전 12칸, 탕실 12칸 등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현종 이후 숙종, 영조, 장헌세자까지 4대 95년 간에 국왕과 왕세자의 온양 온천 행차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헌세자의 온행 이후 국왕과 왕실 가족의 온행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부친인 장헌세자의 추억의 장소인 온궁에 영괴대를 설치하고 영괴대비를 세우는 등 각별한 관심을 두어 관리하였다. 이후 온궁은 많이 퇴락하였지만 1834년(순조34) 온양에 온 조수삼의 「온정기」에 의하면 이 무렵까지 행궁의 건물은 완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1871년(고종 8)에는 국왕이 정무를 보던 정전이 없어졌지만 이 무렵 새로운 건물인 함락당과 혜파정이 신축되고 대원군이 별장으로 사용하는 등 여전히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1904년부터 일인들이 온궁을 불하받으면서 그들의 손에 넘어가고 그 터에 대중탕과 여관을 겸비한 신정관이 지어지면서 온궁은 자취를 감추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형태
1795년(정조 19)에 발간된 『온궁사실(溫宮事實)』에 수록된 ‘온양별궁전도’에 의하면 온양행궁은 2중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내궁장(內宮墻)의 가운데에는 국왕과 왕후의 숙소인 내정전과 왕과 신하가 국사를 논하는 외정전이 있고 옆에는 목욕 시설인 탕실이 있다. 내정전은 정면 4칸, 측면 4칸의 16칸이고 외정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12칸이며 탕실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12칸이었다. 그 외 왕자방, 의대청, 내수라간, 온천 구탕, 영괴대, 신정비각, 종친부 등이 있었다. 이 내궁장과 외궁장(外宮墻) 사이에는 왕을 보필하는 궐내 각사들이 옮겨와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위치하는데 와가, 초가로 되어 있는 여러 채의 집들이 산재되어 있었다. 탕실은 목욕 공간으로 온천물이 용출하는 온정(溫井)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각각 1칸 반의 크기인 욕실 2개가 있었고 이에 딸린 부속 시설로 욕실별로 온돌 1칸 반, 협실 1칸, 양방(凉房) 1칸 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온정은 옥돌로 함 가운데를 빙 둘러 붙였다. 이곳에는 중국의 온천에서 볼 수 있는 거북이나 물고기, 게와 같은 동물이나 연꽃과 마름과 같은 식물을 형상화한 장식물과 완상할 만한 보옥이나 기교 있게 새긴 치장이 없었다. 하지만 돌의 재질이 뛰어나고 만듦새가 완벽하고 치밀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60년(영조 36) 7월에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행차하여 서쪽 담장 안에서 표적을 정해 활쏘기를 한 후 품(品)자 형태로 세 그루의 회나무를 심었다. 훗날 정조가 이것을 기념하여 영괴대(靈槐臺)를 세웠다.
참고문헌
『溫幸謄錄』
『溫宮事實』
『承政院日記』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溫幸 연구」, 『장서각』9, 2003.
김일환, 「조선시대 온양 행궁의 건립과 변천 과정」, 『인문과학논총』29, 순천향대학교, 2011.
온정신(溫井神)
정의
왕이 온천에 행행하는 온행(溫幸)을 할 때 해당 지역에 가기 전에 온천에서 지내던 제사의 주 대상.
개설
조선 건국 때부터 왕과 그 가족은 휴식을 위한 목욕과 질병 치료를 위해 자주 온천에 행행하였다. 온천 행행에서는 온천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명산대천의 자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동시에 온천의 신인 온정신(溫井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것을 온정제(溫井祭)라고 하였다. 온정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온천에서 의료 효험을 얻기 위한 샤머니즘적 신앙 때문이었다. 온정신에 대한 제사는 왕실이 온천에 가는 경우에만 거행한 특수한 사례이다.
내용 및 특징
온행에 나타나는 제사는 온정제와 산천제(山川祭), 보사제(報謝祭)이다. 이 중 온정신에게 지내는 제사가 온정제와 보사제이다. 온정신은 온천이 있는 곳에는 모두 있다고 생각해서 제사를 지냈다. 온정제는 평산과 온양의 온정(溫井) 즉 온천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며, 산천제는 온행 여정에 속한 각 읍의 명산대천에 지내는 제사이다. 보사제는 온천에서 목욕을 마치고 온정신에게 그 효험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제사였다. 온정신에게 지내는 제사는 조선 건국 때부터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세종대에는 온천의 관리를 주변에 거주하는 승려에게 맡겼다. 온천을 관리하던 승려는 시설의 수리를 비롯하여 병든 사람의 구호도 전적으로 담당하였다[『세종실록』 9년 9월 27일]. 따라서 온정신에 대한 기도와 제사 장소의 관리도 이들이 담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세종대까지 온정신은 온천 지역민들이 숭배하는 대상으로 샤머니즘적 요소가 있었다. 다만 국가에서 온정제를 소사(小祀)로 지정한 이후부터는 정식 관원을 배치하여 진행하였다.
변천
1442년(세종 24)에는 내의(內醫)노중례(盧重禮)가 의방(醫方)을 조사한 뒤 온정신에 대한 제문(祭文)을 작성하였다. 이때 국가에서는 온정제를 국가적으로 거행하려 했으며, 그 제사를 소사로 정하면서 생축(牲祝)을 중앙정부에서 온천에 보내 주었다[『세종실록』 24년 3월 17일].
1910년(융희 4)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온양 행궁을 해체하고, 일본인이 온천을 관리하면서 온정신에 대한 제사도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온궁사실(溫宮事實)』
『온행등록(溫幸謄錄)』
한국학문헌연구소 편,『읍지(충청도―온양군읍지)』, 아세아문화사, 1984.
이숭녕, 「世宗의 轉地療養에 대하여―特히 溫泉과 冷泉의 療養을 中心으로 하여―」, 『어문연구』3권 제1·2호―一石 李熙昇先生 八旬紀念特大號, 1975.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온행 연구―溫幸謄錄을 중심으로」, 『장서각』9 , 2003.
온정제(溫井祭)
정의
왕과 왕대비, 왕비, 세자 등이 온천에서 목욕하기 이전에 해당 온천의 신에게 지내던 제사.
개설
조선 건국 때부터 왕과 그 가족은 휴식을 위한 목욕과 질병 치료를 위해 자주 온천에 행행하였다. 온천 행행에서는 온천으로 가는 중에 있는 명산대천의 자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동시에 온천의 신인 온정신(溫井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것을 온정제(溫井祭)라고 하였다. 온정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온천에서 의료 효험을 얻기 위한 샤머니즘적 신앙 때문이었다. 온정제는 왕과 왕실 가족이 온천에 가는 경우에만 거행한 특수한 사례이다.
내용 및 특징
온정제는 온정신에게 지내는 제사로 왕이 온행(溫幸)을 할 때 치르던 의식이었다. 왕의 온행 시 매번 시행했는지의 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온행을 자주 거행한 태종, 세종, 세조, 현종 때의 사례를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해 보면 대부분 온정제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온정제는 온행을 거행하면 당연히 나타나던 제사 의식이었다. 또한 온정제를 거행할 때는 온행 행렬이 지나가는 인근의 유명한 산이나 강에 대한 제사도 동시에 행해졌다. 예컨대 1413년(태종 13)에 태종이 충청도 유성(儒城) 온정에 행행할 때는 구릉(丘陵)의 갱감(坑坎)에는 모두 신(神)이 있으니 행차 중에는 매일 제사를 지내라고 하면서 동행한 시녀(侍女) 8인에게 새벽마다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태종실록』 13년 9월 11일]. 1419년(세종 1)에도 태종이 평산(平山) 온천에 행행하면서 경유하는 명산대천에 간략한 제사를 거행하도록 했다[『세종실록』 1년 4월 17일]. 예컨대 온양 온천으로 행행할 때 거치는 곳에서 사전(祀典)에 실려 있던 명산대천에는 한강과 과천, 관악산, 직산의 성거산(聖居山)이 있었다. 명산대천에는 어가가 머무는 날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희생(犧牲)은 해당 지역에서 마련하였고, 향과 축(祝), 폐백, 제관(祭官), 제사 음식 등은 기일에 앞서 미리 중앙에서 보냈다[『현종개수실록』 6년 4월 15일][『영조실록』 26년 9월 1일].
온정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온천 지역의 전통적인 속례(俗禮) 때문이기도 했지만 국가의 제사로서 거행하려고도 했다. 1442년(세종 24) 세종이 온행을 하려 할 때 내의(內醫)노중례(盧重禮)가 의방(醫方)을 조사한 뒤 온정신에 대한 제문(祭文)을 작성했으며, 이 제사를 소사(小祀)로 정하고자 했다. 또한 이때부터 온양 온천에서 속례로 제사지내던 것을 정부에서 생축(牲祝)을 사용하는 정식 제사로 만들었다[『세종실록』 24년 3월 17일]. 온정제는 목욕하는 날 새벽이나 아침에 거행하였다[『현종실록』 6년 4월 15일]. 온정제의 헌관(獻官)은 온행을 배종(陪從)하는 관원 가운데서 차출해 정했으며, 나머지 집사는 해당 지역의 수령으로 차출하였다[『영조실록』 26년 9월 1일]. 온천욕을 마치고 목욕의 효과를 얻게 되면 온정신에게 감사하는 제사인 보사제(報謝祭)를 지내기도 했다[『현종개수실록』 7년 4월 23일].
변천
영조대에는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온천에 행차하였다. 왕세자가 독자적으로 온천에 간 경우는 이때가 유일하다. 당시 사도세자가 온천에 갈 때에도 온정제를 거행하였다[『영조실록』 36년 7월 12일].
1910년(융희 4)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온양 행궁을 해체하고, 일본인이 온천을 관리하면서 온정신에 대한 제사도 폐지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온궁사실(溫宮事實)』
『온행등록(溫幸謄錄)』
한국학문헌연구소 편,『읍지(충청도―온양군읍지)』, 아세아문화사, 1984.
나신균, 「인조~숙종대 행궁의 배치와 공간이용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이숭녕, 「世宗의 轉地療養에 대하여―特히 溫泉과 冷泉의 療養을 中心으로 하여―」, 『어문연구』3권 제1·2호―一石 李熙昇先生 八旬紀念特大號, 1975.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울창주(鬱鬯酒)
정의
종묘 제향에서 체백(體魄)을 부르기 위해 사용하는 향이 짙은 술.
개설
울창주는 기장으로 빚은 술에 삶은 울금초(鬱金草)를 섞어서 만든 술이다. 울금초의 향내가 독특하여 울창주는 국가의 최고 제례인 종묘 제향에서 선왕의 체백을 부를 때 사용하였다. 제향 때 울창주는 이(彛)라 부르는 술항아리에 담아서 용찬(龍瓚)이란 술잔에 채워 땅에 부었다. 울창주를 땅에 부어 신을 부르는 것을 관지(祼地, 灌地)라고 하였다. 종묘 제사를 주관하는 것을 주창(主鬯)이라고 부를 정도로 울창주는 종묘 제향을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연원 및 변천
『주례(周禮)』 「춘관(春官)」에는 울인(鬱人)과 창인(鬯人)의 직책이 있다. 창인은 기장[秬]으로 만든 창주(鬯酒)를 제공하면 제사 때에 울인이 울금초를 삶아 창주에 섞어서 울창주를 만들었다. 이러한 울창주는 천신(天神)이나 산천, 사직(社稷) 등의 제향에 사용하지 않고 오직 종묘 제향에서만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울창주는 종묘 제향을 상징하는 술이었다. 이러한 울창주는 땅에 스며들어 연천(淵泉)에 이르러 체백을 부른다고 여겼다. 반면 쑥[蕭]을 서직과 함께 태워 양의 기운인 혼을 불렀다. 후대에 혼을 부르는 도구는 향(香)으로 바뀌었지만 울창주는 그대로 유지되어 종묘 제향의 특징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종묘 제향에서만 울창주를 사용하였다. 선왕에 대한 제사라도 문소전(文昭殿)이나 진전(眞殿)에서 치른 제사에서는 울창주가 보이지 않는다. 문선왕(文宣王) 등의 인귀(人鬼)에도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울창주를 사용하는 국가 제향이 늘어났다. 먼저 숙종대 신설된 대보단(大報壇) 제향에서 울창주를 사용하였다. 특히 대보단 제향에서는 명나라의 예식을 본받아 울창주를 관지통(祼地筒)이 아닌 사지(沙池)에 부었다. 또 한편 영조대부터 국가 제례로 정식화된 궁묘(宮廟)의 제향에서도 울창주를 사용하였다. 육상궁(毓祥宮)과 같이 생모나 생부를 모신 경우 제물의 진설이 속제(俗祭)인데도 울창주를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술로써 강신하는 절차가 조상 제사에서 일반화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형태
『국조오례의』에서는 기장의 하나인 흑서(黑黍)를 빚어서 술을 만들고 울금(鬱金)을 쌓아서 끓여 섞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멥쌀인 도미(稻米)로 술을 빚은 후 울금을 섞어 만들다가 1717년(숙종 43)에 규정대로 하였다[『숙종실록』 43년 6월 21일]. 울창주를 땅에 붓는 것을 관지라고 하며 그 의식을 관례(祼禮) 또는 신관례(晨祼禮)라고 하였다. 울창주를 부어 땅에 스며들도록 제상(祭床) 앞에는 관지통(祼地筒)이란 구멍을 만들어 두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민간에서는 울창주를 별도로 만들지 않지만 관지의 절차는 남아있다. 즉 향을 태운 다음 술을 모사기(茅沙器)에 부어 체백을 불렀다. 모사기란 시냇가의 정결한 모래를 잘 씻어서 그릇에 담고, 그 복판에 띠의 잎을 말린 것으로 만든 작은 다발을 꽂은 것이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