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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문헌
건재문집(健齋文集) /김천일
조선 중기의 문신 김천일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 김천일(金千鎰)의 시문집. 11권 2책, 본집 4권, 부록 7권. 목활자본. 1833년(순조 33) 방손 민상(玟相)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수에 김세연(金世淵)·기정진(奇正鎭)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송근수(宋近洙)·기우만(奇宇萬)·박창수(朴昌壽)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에 부(賦) 2편, 시 2수, 권2에 소 3편, 권3에 서(書) 13편, 권4에 명 1편, 제문 3편, 격문(檄文) 1편, 부록의 권1에 교서(敎書) 3편, 사제문(賜祭文) 8편, 권2에 제문 2편, 축문 8편, 권3에 연보, 권4에 행장 1편, 기 2편, 명 3편, 상량문 1편, 권5에 계(啓) 1편, 의(議) 1편, 기사(記事) 1편, 서사(敍事) 1편, 권6에 시 16수, 권7에 척록(摭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 중 〈기축소 己丑疏〉에는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일어난 기축옥사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역적의 누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과 이 사건에 연루될까 염려하여 백성들이 공포에 떨고 있음을 지적하고, 민심을 조속히 수습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이 시급한 일임을 강조하였다.
〈계사소 癸巳疏〉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에 올린 것으로, 의병이 관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관군은 의병의 전공을 시기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고, 유능한 장수로 하여금 관군과 의병을 다 함께 통솔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건의한 내용이다.
이 밖에 의병모집을 위한 격문 등 임진왜란의 전사(戰史)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많다. 국립중앙도서관·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건재일고(健齋逸稿) /박수일
조선 중기의 학자 박수일 시문집
조선 중기의 학자 박수일(朴遂一) 시문집. 상하권 1책. 목판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연대와 간행자를 알 수 없다. 상권에 시 328수, 서(書) 8편, 제문 3편, 잡저 4편, 하권은 부록으로 선부군유사(先府君遺事)·행장·묘갈명, 제문 9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집의 서 중 1597년 인동군수(仁同郡守) 이보(李輔)에게 보낸 것은 정유재란 당시에 쓴 것으로, 적은 수로 남부지방에서 세력을 펴고 있다는 것과 명나라 병사는 군위(軍威)지방에 많이 머물고 있음을 알리며, 이보의 공산성(公山城) 수축을 찬양하고 있다.
잡저의 〈모부기 毛浮記〉는 개가죽으로 만든 깔자리를, 〈사용기 乍用記〉는 사용이라는 이름의 유기(鍮器)를, 〈낭탁기 囊槖記〉 등은 저자의 힘들었던 피난생활을 쓰고 있을 뿐, 의병으로서의 활동내용을 적은 것은 없다.
다만, 부록의 유사와 행장 등에 저자가 임진왜란 때 노경임(盧景任) 등과 의병으로서 활약했고, 정유재란 때 전사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건천고(乾川藁) /조구명(趙龜命)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조구명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조구명(趙龜命)의 시문집. 8책. 필사본. 현재 4·5·7책이 결본되었으며, 서와 발이 없어 필사자와 필사연대를 알 수 없다.
문집으로서 체제가 없고, 기년체로 1책은 임진년(1712)부터 을미년(1715)까지의 저술로 설 1편, 시 6수, 기 4편, 제문 3편, 찬(贊) 7편, 소 1편, 논 3편, 의(議) 1편, 서(書) 4편, 유사 1편, 서(序) 2편, 명 2편, 변(辯) 1편, 애사 1편, 가(歌) 1편, 전(傳) 2편, 2책은 을미년(1715)부터 기해년(1719)까지로 표(表) 1편, 제문 7편, 기 1편, 문(文) 3편, 행장 1편, 서(書) 5편, 찬 6편, 서(序) 6편, 만 1편, 묘지 3편, 제(題) 14편, 불서(佛書) 1편, 명 1편, 발 1편, 3책은 저자의 할아버지인 상우(相愚)의 행장인 〈동강연보〉로 기해년의 기록이다.
6책은 병오년(1726)부터 경술년(1730)까지 서(書) 12편, 기 16편, 논 1편, 유사 1편, 서(序) 4편, 부(賦) 1편, 발 2편, 제문 3편, 행장 1편, 묘지 3편, 제(題) 16편, 설 1편, 전 1편, 명 3편, 가 2편, 애사 1편, 8책은 을묘년(1735)부터 시작한 것으로 끝맺음의 연대는 표시되어 있지 않고, 묘지 2편, 문 1편, 묘문 3편, 기 4편, 서(序) 3편, 제 11편, 설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크기와 글씨체가 각기 다르며, 시에는 이의숙(李宜叔)·이계화(李季和)·임중사(任中思) 등이 청·홍·흑색으로 평점을 가한 것이 군데군데 있다. 서신 중에는 스님과의 왕복이 많고, 제에는 서화에 관한 것이 많다.
〈제화육칙 題畫六則〉이나 〈서법육칙 書法六則〉 등은 서화가에게 도움이 되며, 〈제화선 題畫扇〉에서는 당시의 화가들이 배포(排布 : 화선지가 쳐지지 않도록 천으로 뒷받침하는 것)를 중히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건천정유집(巾川程遺集) /정광(程廣)의 시문집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정광의 시문집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정광(程廣)의 시문집. 불분권 1책. 목활자본. 1846년(헌종 12)에 정홍경(鄭鴻慶)이 편집, 간행한 것을 1918년 후손 인석(寅錫)과 남진(南鎭) 등이 중간하였다. 권두에 정홍경과 오준선(吳駿善)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남진의 발문이 있다.
시 21수, 일기 1편, 잡저 3편, 부록으로 제공시(諸公詩) 13수, 유사 1편, 행장 1편, 신도비명 1편, 묘갈명 1편, 후지(後識)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일기〉는 1359년(공민왕 8)부터 1392년(태조 1)까지 사이에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을 기록한 것으로 홍건적의 난, 김용(金鏞)의 난, 원나라 승상 나하추(納哈出)의 난, 공민왕의 시해사건, 왜구의 침입, 조선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사건들에 대하여 그 원인과 결과, 처리과정 등을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다.
또한 〈산록 散錄〉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창립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주관적인 입장에서 기술한 것으로 망국의 한과 조선에 대한 불의를 거론하고,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 충절을 지킨 인물들을 찬양하였다.
시에도 비분강개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 많은데, 국가의 흥망을 인간의 능력으로 좌우할 수 없다는 〈천인음 天人吟〉과 망국을 탄식한 〈탄세음 嘆世吟〉, 나라는 망했으나 잊어서는 안 되며 새나라에 벼슬하지 말라는 〈계자시 戒子詩〉가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등산하여 산천의 아름다움을 기록한 〈등산록 登山錄〉과 새나라에는 벼슬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언지록 言志錄〉이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검남유고(劍南遺稿) /이봉환(李鳳煥)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이봉환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이봉환(李鳳煥)의 시문집. 2권 1책. 목판본. 1868년(고종 5)에 간행되었으며, 편찬자는 미상이다. 서·발문이 없다. 권1에 시 40수, 서(書) 22편, 잡저 5편, 권2에 축문 4편, 제문 13편, 행장 2편, 부록에 유사·행장·묘갈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에는 차운시(次韻詩)·만시(輓詩)·유람시(遊覽詩) 등이 고루 수록되어 있다. 서(書)는 주로 그가 교유하였던 김성탁(金聖鐸)·이명화(李命和)·윤광소(尹光紹)·신성수(申聖洙) 등에게 보낸 서간으로 학문을 연마하면서 느낀 의문점에 대해서 질의, 응답한 것들이다.
잡저 가운데 〈시습설 時習說〉에서는 학문을 연마하는 방법에 있어서 지속적인 끈기의 중요성을 설명하였으며, 〈이필상후육지불간설론 李泌相後陸贄不諫說論〉에서는 간관(諫官)의 기능과 그 책임의 중요성을 논의하고, 간관은 위정자의 과오를 묵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사례를 들어가면서 천명하였다.
이 밖에 제문은 유석두(柳錫斗)·김낙행(金樂行)·김성탁 등에 대한 것이고, 부록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술정(李述靖)·이휘재(李彙載)·권연하(權璉夏) 등이 그의 행적과 조상에 대하여 기술한 것이다. 연세대학교 도서관, 성암고서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검암산인시집(儉巖山人詩集) /범경문(范慶文)의 시집
조선 후기의 시인 범경문의 시집
조선 후기의 시인 범경문(范慶文)의 시집. 2권 1책. 운각활자본. 1814년(순조 14)에 문인들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서영보(徐榮輔)의 발문이 있다. 모두 378수의 시가 실려 있으며 문(文)은 없다. 권1에 실린 것은 17∼28세 때까지 지은 것이며, 권2는 29세 때부터 63세 때까지의 것으로 작품이 지어진 연도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크게 수창시(酬唱詩)와 영물시(詠物詩)로 표현한 시가 많다. 시들은 화평온후하다는 평을 들으며, 한편으로 천기(天機)가 발(發)한 것이라는 평도 아울러 듣는다.
시 가운데 29세 때 지은 『원조잡체 元朝雜體』와 『원석잡체 元夕雜體』는 새해 첫날의 감정을 읊은 것으로서 서울의 배오개〔梨峴〕 저자 근처에서 본 당시 풍습을 제재로 삼고 있다.
그 가운데서 『원조잡체』는 총 6수로 되어 있는데 제2수에 “장인(匠人)·상인·이졸(吏卒)들 각자 바쁘고 이것저것 팔고 사려고 사방에서 몰려드네, 부자들 근심없어 기뼈 웃는 날, 가난한 이들은 쓸쓸히 길게 한숨짓는다.”라고 하여 저자가 사회를 보고 있는 시각의 일단과 그의 민중에 대한 의식세계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밖에도 이 시에서는 당시의 설날 표정을 잘 나타내고 있어 그때 사람들의 풍습을 아는 데 자료가 된다.
한편, 최윤창(崔潤昌)·마성린(馬成麟)·백경현(白景炫)·천수경(千壽慶) 등 여항시인들과 수창한 시가 많아 당시 여항시인들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저자는 조선 후기 여항시인들의 시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일원이었던 점에서 그 방면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책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東溪遺稿
<<참고문헌>>風謠三選
<<참고문헌>>李朝後期閭巷文學叢書 2(驪江出版社, 1986)
검암시집(儉巖詩集) /정언숙(丁彦璛)의 시집
조선 후기의 학자 정언숙의 시집
조선 후기의 학자 정언숙(丁彦璛)의 시집. 2권 1책. 목판본. 1911년 후손 돈섭(敦燮)·태진(泰鎭)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곽종석(郭鍾錫)의 서문이 있다. 권1·2에 근체시 155수와 고시(古詩) 57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대체적으로 사기(辭氣)가 아름답고 뜻이 유원하며, 성당(盛唐)의 시풍에 가깝다. 이 가운데 〈증별허문오 贈別許文五〉는 오언절구로 이별의 슬픔을 나타낸 시로 그 표현이 뛰어나다. 〈차완암풍악십영 次莞巖楓嶽十詠)은 금강산의 십경(十景)을 읊은 것으로 형용이 절묘하여 마치 십경을 바라보는 듯하다.
〈증별 贈別〉도 이별의 감회를 읊은 것이고, 〈우음삼수 偶吟三首〉는 아름다운 풍속은 점점 사라지고 험하고 야박한 인정이 횡행함을 한탄하며,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신선의 경지에 들어가고 싶은 심경을 읊은 작품이다.
〈등악양루유감 登岳陽樓有感〉은 악양루에 올라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한 시로 웅장하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 밖에도 서정과 운치를 드러낸 시가 많아 시재(詩才)가 뛰어남을 느끼게 한다. 경상북도 안동 이덕홍(李德弘)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다.
검암집(儉庵集) /손전(孫佺)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학자 손전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학자 손전(孫佺)의 시문집. 4권 2책. 목활자본. 1898년 저자의 6대손 병무(炳武)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도화(金道和)와 김종기(金鍾杞)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병무의 발이 있다.
권1에 사 4편, 시 86수, 권2에 서(書) 3편, 잡저 2편, 서(序) 3편, 발 2편, 비갈 2편, 애사 2편, 축문 1편, 제문 5편, 권3에 행장 4편, 유사 8편, 잡저 4편, 권4에 부록으로 가장 1편, 묘지명 1편, 행장 1편, 묘갈명 1편, 만사 2편, 상량문 1편, 봉안문 1편, 축문 1편, 사실(事實)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산수의 경치를 읊거나, 친지들과 화답한 것이 많다. 〈시자손제질 示子孫諸姪〉은 삼성훈(三省訓)·삼성해(三省解)·사물훈(四勿訓)·사물해(四勿解)·오계훈(五戒訓)·오계해(五戒解) 등으로 자손들을 훈시한 것이다. 마음가짐과 대인관계에 대한 경계로서, 이를 통하여 당시의 집안교육 사정을 알 수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검암집(黔巖集) /박치도(朴致道)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박치도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박치도(朴致道)의 시문집. 4권 2책. 목활자본. 1920년 후손 노준(魯準)·노인(魯寅)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철헌(宋哲憲)의 서와 권말에 오준선(吳駿善)의 발, 노인의 추지(追識)가 있다.
권1은 시 50수, 소 15편, 계 1편, 권2·3은 서(書) 21편, 권4는 제문 8편, 잡저 4편, 서(序) 1편, 발 1편, 전(傳) 1편, 변 1편, 상량문 1편, 전(箋) 1편, 행록 1편, 묘표 1편, 묘지 3편, 부록으로 행장 1편, 묘지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는 주로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에게 보낸 것이고, 김창협(金昌協)·김창집(金昌集)·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의 답서를 부록으로 적어놓았다. 권3의 〈답유진사시경서 答柳進士時卿書〉의 별지에는 송시열과 윤증(尹拯), 노론과 소론이 갈리게 된 원인과 진행과정, 상황 등을 상세히 적었으며, 파산성씨(坡山成氏) 문중이 소론이 된 원인과 과정을 사실을 들어 언급했다.
〈갑을록 甲乙錄〉은 숙종 즉위초(1674, 1675)에 일어난 일들을 적은 것으로, 당시의 정치사회를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는 자료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검와유고(儉窩遺稿) /전사성(全泗性)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전사성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전사성(全泗性)의 시문집. 2권 1책. 활자본. 1934년 그의 현손 기(琪)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의섭(宋毅燮)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기의 발문이 있다.
내용은 권1에 시 88수, 서(書) 1편, 서(序) 2편, 기(記) 4편, 권2는 부록으로 전(傳) 2편과 읍지초(邑誌抄)·실기초(實記抄)·행실록(行實錄)·제문 각 1편, 만(輓) 3수, 장(狀)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시는 시어가 중후하고 내용이 심오하여 도학자다운 정취가 잘 나타나 있다.
그 중 〈회일 晦日〉·〈천기 天機〉·〈지덕 地德〉·〈인사 人事〉·〈상연 賞鷰〉 등에서 특히 그의 고매한 의경(意境)을 읽을 수 있다. 서(書)의 〈상오촌선생서 上鰲村先生書〉는 스승인 송치규에게 보낸 편지로서 대동보(大同譜)의 서문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서(序)의 〈검와자서 儉窩自序〉는 가정과 국가의 흥망성쇠가 모두 검약과 사치의 여부에 달려 있음을 말하였다. 그 밖에 기(記)의 〈검계서사중수기 儉溪書社重修記〉·〈동재실기 洞齋室記〉 등에서도 그의 학문의 심오함과 도학자다운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부록의 〈불망록 不忘錄〉 상·하편을 비롯하여 〈천안읍지 天安邑誌〉·〈금고실기 今古實記〉·〈행실록〉 등 여러 기사는 고매한 인품과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격몽요결(擊蒙要訣)
영문표기 : Gyeongmong yogyeol / Kyŏngmong yogyŏl / The Secret of Expelling Ignorance
1577년(선조 10) 이이가 일반 학도들에게 도학의 입문을 지시하기 위해서 저술한 책
1577년(선조 10) 이이(李珥)가 일반 학도들에게 도학(道學)의 입문을 지시하기 위해서 저술한 책. 2권 1책. 인본(印本). 이 책은 덕행과 지식의 함양을 위한 초등과정의 교재로 근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초학자들에게 ≪천자문 千字文≫·≪동몽선습 童蒙先習≫·≪훈몽자회 訓蒙字會≫에 이어 널리 읽혀졌다.
서문에 의하면, 저자가 해주의 은병정사(隱屛精舍)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초학(初學)의 향방을 정하지 못하여 굳은 뜻이 없는 제자들에게 뜻을 세우고 몸을 삼가하며, 부모를 봉양하고 남을 접대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책을 지었다고 하였다.
본문은 입지(立志)·혁구습(革舊習)·지신(持身)·독서(讀書)·사친(事親)·상제(喪制)·제례(祭禮)·거가(居家)·접인(接人)·처세(處世) 등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 끝에 사당도(祠堂圖)·시제도(時祭圖)·설찬도(設饌圖)와 제의(祭儀)의 출입의(出入儀)·참례의(參禮儀)·천헌의(薦獻儀)·고사의(古事儀)·시제의(時祭儀)·기제의(忌祭儀)·묘제의(墓祭儀)·상복중행제의(喪服中行祭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1장 〈입지〉에서는 처음 배우는 이가 먼저 뜻을 세워서 스스로 성인이 될 것을 기약하고, 스스로 작게 여겨 물러가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 것을 강조했다.
제2장 〈혁구습〉에서는 사람이 학문에 뜻을 두어 열심히 노력하여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구습이 있기 때문임을 밝히고, 구습의 종류로서 ‘뜻을 게으른 데 둔 것’ 등 여덟 가지를 들고 있다.
제3장 〈지신〉에서는 9용(九容)으로 몸과 마음을 지키고, 9사(九思)로써 학문을 진취시키는 뜻을 세울 것을 강조하였다.
제4장 〈독서〉에서는 이치를 연구하기 위해 먼저 독서를 해야 하며, 독서를 하되 반드시 책 한 권을 선택한 후 충분히 뜻을 헤아리며 읽어 통달한 뒤 다른 책으로 바꿔 읽을 것과, 다독에 빠져서 쓸데없이 힘을 소모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책을 읽는 순서에 있어서는 먼저 ≪소학 小學≫을 읽어 부모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웃어른에게 순종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과 친해지는 도리를 음미하여, 힘써 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 다음에는 ≪대학≫ 및 ≪혹문 或問≫을 읽어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이치와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를 배우며, ≪논어≫를 읽어서 인(仁)을 구하고 자신을 위한 학문의 본원(本原)을 함양하는 공부를 익히라고 하였다.
다음에는 ≪맹자≫를 읽어서 의리를 밝게 분별하여 인욕을 막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설(說)을 밝게 살피며, ≪중용≫을 읽어서 성정의 덕과 위육(位育)의 묘를 음미할 것을 권하였다.
다음에는 ≪시경 詩經≫을 읽어서 성정의 그릇됨과 올바름, 선악을 가려 표창할 것과 경계할 것을 분명히 하며, ≪예경 禮經≫을 읽어서 하늘의 이치 가운데 사람이 갖추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연구하여 분명히 뜻을 간직할 것, 다음에는 ≪서경 書經≫을 읽어 요·순과 우왕·탕왕·문왕이 천하를 다스린 경륜과 대법의 요령을 얻고 그 근본을 소급해서 구할 것을 가르쳤다.
다음에는 ≪주역 周易≫을 읽어서 길흉·존망·진퇴·성쇠의 기미를 관찰, 음미할 것과 ≪춘추 春秋≫를 읽어서 착한 것은 상을 주고 악한 것은 벌하며, 어떤 이는 억누르고 어떤 이는 높여주는 화법과 심오한 뜻의 깨달음을 가르쳤다.
이 밖에도 선현들이 지은 ≪근사록≫·≪가례≫·≪이정전서 二程全書≫·≪주자대전≫·≪주자어류 朱子語類≫와 성리학설을 정독할 것을 강조하였다.
제5장 〈사친〉에서는 효도의 당위성을 강조하여 잠시도 효를 잊지 말 것을 밝혔고, 제6장 〈상제〉에서는 상례를 주희(朱熹)의 ≪가례≫에 따를 것 등을 밝히고 있다. 제7장 〈제례〉에서는 ≪가례≫에 의해서 사당을 세우고 조상의 신주를 모시며, 제전(祭田)을 두고 제기를 갖출 것과 사당에 대한 예의 등을 밝혔다.
제8장 〈거가〉에서는 부부간의 예의를 중심으로 집안 다스리는 방법을 설명하였고, 제9장 〈접인〉에서는 부드럽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접대할 것과 학문을 믿고 스스로 교만해지는 것을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제10장 〈처세〉에서는 벼슬을 위해 학문하지 말 것과 도를 행할 수 없으면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깨우치고 있다.
이 책은 저술 직후부터 조선시대 초학자는 물론, 사림(士林)에서 읽혀야 할 책으로 널리 유포되었으며, 인조 때는 전국 향교에 이 책을 내려서 교재로 삼게 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栗谷의 敎育思想(孫仁銖, 博英社, 1976)
<<참고문헌>>栗谷全書 上·下(栗谷思想硏究院, 大提閣, 1978)
<<참고문헌>>擊蒙要訣(孫仁銖, 敎育名著解題, 한국능력개발사,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