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김신조(1942년)
김재현(金在現, 1942년 6월 2일 ~ )은 남파 무장공작원 출신의 사상전향자이자 대한민국 개신교 목사로, 개명하기 전 이름인 김신조(金新朝)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 순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만 5세 시절 평안남도 평양에 이주하여 성장한 그는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1·21 사태)하려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무장 게릴라 31명 중에 유일하게 생포되었고,
후에 대한민국에 귀순하였다. 귀순 후 서울침례회신학교(現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에서 침례교 신학을 전공하고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목사가 되었다. 김재현으로 개명하였다.
김신조 인터뷰
-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어떻게 보십니까.
“당시 난 김일성이 왜 박 대통령을 죽이려는지 몰랐어요. 살아보니 알겠더라고.
가난한 나라가 부자가 되는 게 두려웠을 게야. 경제가 살면 돈이 들어오고, 무기를 살 것 아닌가.
김일성이 볼 때 남한 공산화를 위해서는 박 대통령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 거겠지.
난 박 대통령을 죽이기 위해 남파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존경하게 됐어요.”
-한국에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두고 평가가 엇갈립니다.
“고도 경제성장의 업적은 인정해야지요. 요즘 경제는 위기고, 북한은 끊임없이 도발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이념적 대립과 빈부격차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고요.
이런 때일수록 사회를 바로잡고 미래를 보여주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정치가 바로 서야지요. 남한 사회가 분열되면 김정일을 돕는 셈입니다.”
-북한과의 긴장은 계속됩니다. 얼마 전 ‘임진강 댐 방류 사건’으로 인명 피해가 났습니다.
“일단 건드려 보고, 그 다음의 반응을 보는 전술이지.
그런데 남한에서는 피해 보고 나서도 ‘괜찮으니 그래도 협력하자’는 식으로 나오면, 그건 북한에 말려드는 거예요.
대북 정책에는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사건이 재발이 안 되지요 .”
-요즘 국민들의 안보의식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6·25 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젊은이도 많다고 하잖아요.
제 이름도 그렇고, 대한항공 폭파 사건의 김현희도 그렇고 점점 잊혀져 갑니다.
자신이 먼저고 이웃과 국가는 나중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무장공비 김신조가 목사가 된 사실에 많은 사람이 놀랐습니다.
“나 혼자 붙잡힌 뒤 중앙정보부 주선으로 건설회사에 들어갔어요. 12년 다니다 나왔습니다.
교회에 나가게 된 건 순전히 마누라 덕분이지. 81년인가, 마누라가 자기 소원이니 교회 한번 나가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마누라 생일(4월 30일)에 가봤는데, 마음이 편해져서 계속 나가게 됐지.”
-목사가 된 결정적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80년대 반공교육 많이 했잖아. 초등학생이던 애들이 집에 오더니 ‘아빠 이름이 교과서에 나온다’고 너무 싫어하더라고.
그땐 안기부(국정원의 전신)와 경찰의 감시원들이 늘 근처에 있었어요.
정부기관에서 전화가 오면 아이들의 목소리와 태도가 싸늘하게 변하곤 했지.
그 모습을 보고 ‘김재현’으로 개명을 했지. 그러곤 이사를 가서 새로 시작했어.
남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목사의 길을 택했고요.”
(※김 목사는 1남1녀를 두고 있다. 딸이 73년생, 아들이 75년생이다.)
-정부 감시원이 지금도 근처 에 있을까요.
“없는 거 같아. 김영삼 정부까지는 분명히 있었고, 김대중 정부부터는 주변에서 인기척이 사라졌어요.
감시원이 사라지면서 나도 ‘이제 남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산행을 마친 뒤 김 목사는 “이처럼 경치가 좋은 곳을 못 오게 해서 미안할 따름”이라고 했다.
이마엔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41년 전의 김신조였으면 15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1시간이나 걸었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