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장모님
쌍둥이 할아버지네/강병선
저가 지금의 아내와 만난 것은 35년 전 겨울이었습니다. 수원에 원천 삼성전자 제1공장이 있는 동네 공단에서 호떡 장사를 하는 친구이자 친척 조카뻘이 되는 홍 의 포장마차에서입니다 그때 나는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온 지 2년도 안 돼 직장도 없고 시내버스 안에서 생활필수품을 파는 둥 마는 둥 내가 생각해봐도 한심한때였습니다.
나이 서른이 가까울 때 까지 촌에서 농사일을 하다 서울에 빈손 들고 올라 왔기 때문에 남들처럼 장사 밑천이 있는 것도 아니요 학식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독특한 기술도 없고 하니 서울생활 2년이 되었지만 월세 방 하나를 못 마련 한때이었기 때문에 수원에도 자주 내려 왔었습니다. 그 바람에 친구 포장마차에 호떡 먹으러 자주 오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어 친구와 그의 조카(아내의 친구)의 강력한 응원으로 가까워지고 설을 맞아 아내를 전라도에 까지 내려오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원역전시장에서 그야말로 꿈에도 그리던 살림을 시작 했습니다,
나는 당시의 처지를 얼마나 비관 했는지 모릅니다. 학교졸업하고 서울에 올라간 친구들은 직장에 취직한 친구 장사를 해서 벌써 기반을 잡은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요, 형님은 자기가 먼저 서울에 올라가서 돈을 벌어 서울에 부모님과 가족을 모시기로하고 나는 농사일을 하면서 부모님을 모시기로 약속은 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형님은 소를 팔아간다 사업자금을 융통해달라고 어머님을 조르고 결국은 우리 집 형편상 때늦은 상경을 했지만 나에게는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부모님 모시는 문제가 있고 내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다 결혼 문제도 큰 걱정거리 이었기에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나에게는 생애에 제1차 최대 숙명 이었던 것입니다. 시장에서 수저 젓가락 밥그릇 냄비 연탄집게 등을 같이 구입하고 살림 준비를 했을 때의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모두 설 명절이다 하면 최대 명절에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집에를 안 오고 전라도에 친구 집에 간다 하니 온가족과 처부모님들은 어떠했을까요. 특히나 우리 장모님께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에 빠졌겠지요. 아내뿐만 아니라 10남매 모두 말대꾸 한번 없고 자녀 모두 순종하며 속한번상하게 했던 자녀가 한사람도 없고 효자아들이요 효녀 딸들이었기 때문에 장모님 성미도 있는 분이셨기 때문에 배신감도 크셨을 것입니다.
아내는 곧장 임신을 했고 근황을 전할 엄두도 안나 집에 편지 한통 없으니 장모님께서 수소문 끝에 시골에서 멀리 수원에 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아내는 입덧이 심해 집에 있을 때고 나는 일 때문에 밖에 나왔다가 집에 와보니 아내는 안보이고 쪽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병예를 데리고 가네 다시는 찾지 말게” 뒤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장모님 엄청나게 울었답니다. 23년 동안에 단 한 번도 부모를 속상하게 안하고 마음씨 곱고 심성이 착한아내가 장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을 줄은 몰랐다 했습니다.
10남매 모두를 장모님께서 직접 짝을 찾아 맺어 주셨기 때문에 아내의 혼처도 장모님께서 준비를 해 놓으시고 봄이 되면 혼인을 생각하고 계셨다가 착한 딸을 나에게 도둑맞은 것이 억울하고 분하셨다고 토로 하셨습니다.
부엌도 없는 방 가재도구 하나 없는 방 돈 한 푼 없고 배움도 없고 직장도 없고 키도 작고 아무리 찾아봐도 단점뿐이지 장점이라고는 없으니 아내를 찾아오기는 해야 하겠는데 그때 또 하필이면 아폴로 눈병이 돌아 눈병이 올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때지만 서울에 미아리 산동네까지(아내의 노트에서 둘째 처남의 주소를 알게 됨)찾아가서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병예와 나는 하나님께 약속 했습니다 어떠한 시련과 고난이 와도 평생을 같이 사랑하기로 약속 했습니다, 다른 맘 안 먹고 불행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야곱이 사랑 때문에 14년씩이나 남의 집 살이 를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야곱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고 말씀 따라 살았음으로 하나님께서 큰 부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라고 설득을 해서 아내를 찾아오게 됐습니다.
그날 저녁 장모님도 우시고 시골에서 같이 올라오신 처 작은 어머님도 우시고 아내도 울고 모두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처 작은 어머님 장모님 모두 신앙이 좋으신 교회 권사님 이셨기에 가난벵이 못생긴 빈털터리에게 어쩔 수 없이 허락 하게 됨은 아마도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설득을 하고 또 아내가 임신 까지 했음으로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함께 있었던 둘째 처남에게도 은근히 겁났지만 아무 말도 않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지금 까지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 못 한 것 같아서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10남매나 되는 처 형제들에게도 무언의 항의를 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별일 없이 지나갔으나 셋째 오빠에게서는 어느 날 장문의 편지로 자기 동생을 불행 하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다짐을 물어 왔었습니다.
우리 장모님은 참 여 장부셨습니다.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은 징병모집을 해서 그들의 싸움터에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게 했으며 결혼하지 않은 미성년 여자들 까지 정신대라 이름으로 끌고 가서 싸움하는 군인들에게 노리개 감으로 제공하기 위해 끌고들 가니 가난하게 사는 장인어른 하고 부랴부랴 혼인을 시켰으니 그때 우리장모님 열아홉 살 때 이었답니다. 당시에는 2십 대 전에 시집을 갔지만 잘사는 집 규수들은 20을 넘겨서 결혼을 하는 것이 일반화 이었는데 정신대를 피하기 위함이었으니 처갓집이던 우리 집 누구네 집 가릴 것이 없이 일본에게 당한 고통은 다 똑같이 당했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우리장모님 어린 시절에는 고생도 별로 하지 않고 지내다 시동생들 줄줄이 시누이들 줄줄이 있는 가난한 집에 장남에게 시집와서 장인어른 가게에 특별히 도움 되는 일을 하시지 않음으로 장모님께서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서 남이 하지 않은 고생고생 하시면서 6남 4녀 10남매나 되는 자녀들 거두 셨습니다. 농촌 벽지에 살면서 농사도 없이 함지박 장사가 시작 된 것입니다. 생선 과일 찐빵 등 돈이 될 만한 장사는 무겁고 힘 드는 일 가리지 않고 100리길이 넘는 길을 함지박 머리에 이고 집집이 방문해서 파셨다 했습니다. 함지박에 물건을 팔면 팔수록 함지박은 더 무거워 지는 것입니다. 무거워지는 이유를 말씀드릴까요. 옛날 농촌에 지금처럼 현금 있는 집이 많지 않기 때문에 보리나 쌀 곡식을 받기 때문에 하루 종일 무거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다니시면서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나이가 드시니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시었습니다.
고생하신 장모님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고 처남들이 서울에 일류 대학에 다니면서 어렵다던 공인회계사 그리고 교육계에 고급공무원 혹은 일류 기업에 근무하며 10남매가 모두 지금까지 화기애애하게 살고 있음은 우리 장모님의 헌신과 장인어른 덕분이며 하나님의 은총 인줄 압니다. 장인어른 15년 전에 장모님 10년 전에77세에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처 형제들 중 어느 집에 계신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옛날 모 방송 에서 장수 만세란 프로가 있었습니다. 부모가 나이가 많고 자녀도 많으면서 화목한 가정을 초청해서 방송한 프로그램에 우리처갓집은 출연할 수 있는 자격이 되고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10남매 모두 큰 병치레 하지 않고 시집장가 다 들어서 모두가 두 자녀 이상 다가졌으니 생산과 유지에 성공한집안이요 재산문제나 형제간에 갈등을 겪는 형제 없고 화목한 가정임을 장인어른 장모님 모두 확인 하고 천국에 가 계십니다. 대체로 10남매가 별로 어렵지 않게 살기 때문에 장모님께서 딸네 집에 아들 집에 잘 다니셨고 진주에도 2달 넘게 계시기도 했습니다. 장모님께서 착한 딸 도둑질 했다는 응어리가 안 풀리셨다면 우리 집에 오시지 안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모님 우리 장모님 고맙습니다. 딸 도둑이라는 멍에를 벗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에 모든 사람들이 고부간갈등 사위와 장모 간 갈등 형제간에 화목치 못한 가정은 이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우리장모님은 시골에 막내처남 집에 계시면서 10남매가 모두 매월 아들은 10만원 딸은 5만원씩 장모님 통장에 자동이체 해드리고 명절 때 생일 때 자녀들이 용돈을 드리니 의료기 회사나 건강식품업체에서 우리장모님은 언제나 VIP로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무슨 행사 있을 때면 그들이 차를 가져와 모시고 갔다 모시고 왔습니다. 생활에 부족함이 없으셨지만 그래도 세상보다는 하늘나라 천국이 더 좋으셨는지 10년 전 77세 러키세븐 때에 하늘나라에 올라가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