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연회와 미감리회 배쉬포드 감독, 루이스 감독
1908년 3월 11일에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4회 조선선교연회에서 해리스 감독은 연회로 승격 문제를 논의하여 압도적인 찬성표를 받아 제1회 조선연회를 개막했다. 조선에 상주하며 조선 감리교회를 치리했던 해리스 감독은 1916년 제9회 조선연회에서 은퇴하기까지 조선연회를 주관하였다. 이때 해리스 감독은 1913년 제6회 조선연회는 배쉬포드 감독과 공동 주관하였다.
배쉬포드(James Whitford Bashford, 柏錫福) 감독은 1849년 5월 29일에 위스콘신(Wisconsin)주 패예트(Fayette)에서 출생했다. 그는 1873년 위스콘신 매디슨 대학(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1876년 보스턴대학교(Boston University) 신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1881년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878년 제인(Jane M. Field)과 결혼하였다. 배쉬포드는 미감리회 목사로 보스턴, 매사추세츠, 포틀랜드, 메인 및 뉴욕 버팔로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목회했다. 그 후 1889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 제4대 총장으로 봉직했다. 1904년 배쉬포드 목사는 감리교 감독에 선출되었다. 그는 나이 55세에 중국 선교지역의 감독으로 자원했다. 그해 10월 20일에 푸초(福州)에 도착하였고 바로 상하이(上海)로 가서 중국 감리교에 상주하는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 1908년 여름부터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중국감리교회 상주 감독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1913년 6월 6일에 제6회 조선연회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을 때 조선에 입국하여 연회에 참석하였으며 해리스 감독의 배려로 함께 연회를 주재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 후 배쉬포드 감독은 북경으로 돌아가서 1918년 여름까지 감독직을 수행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은퇴하였다. 그는 이듬해 1919년 3월 18일에 캘리포니아 패서디나(Pasadena California)에서 별세했다. 그가 총장으로 재직하던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는 1학년생을 위한 기숙사를 배쉬포드 홀(Bashford Hall)로 명명하여 그를 기념했다.
그는 평생 저술 활동을 하며 다음과 같은 저서를 남겼다. 1906년 듀크신성보관소 출간한 「중국과 감리회(China and Methodism)」, 1907년 이턴 앤 메인이 출판한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 계획(God's Missionary Plan for the World)」, 1907년 미감리회 중국 선교 100주년 관련 문서, 팜플렛과 여러 책자들을 모은 「중국 백주년 문서 1권(China Centennial Documents. Vol. 1.)」, 1916년 뉴욕 신시내티의 아빙돈 출판사에서 출간한 「중국 : 해석(China: An Interpretation)」이다.
1914년 6월 6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7회 조선연회와 1915년 4월 21일에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8회 조선연회는 해리스 감독과 루이스 감독이 공동 주관하였다.
루이스(Wilson Seeley Lewis) 감독은 1897년부터 1908년까지 모닝사이드 대학교(Morningside University)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대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특히 1903년에 대학 발전 후원자를 모집하여 ‘루이스 재단협회’(W.S. Lewis Heritage Society)를 설립하여 대학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08년에 미 감리회 감독으로 피선되어 모닝사이드 대학 총장을 사임하고 감독의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1914년, 1915년 두 해 동안 해리스 감독과 조선연회를 이끌게 된 것이다. 제15회 조선연회는 제물포, 해주, 강릉, 공주동, 공주서, 서울, 수원, 평양동, 평양서, 원주, 영변지방 등 총 11개 지방의 감리사를 임명했다. 조선 감리교회는 나날이 부흥하고 있었다.
배쉬포드 감독